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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지난달 29일에 열렸던 제77회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축사를 했다. 선배로서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인데 근래 보기 드문 명연설이었다. 최 교수는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모교 생명과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부터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근무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화생물학자다. 이번 축사의 요지는 자기만 잘 살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선생은 "주변은 온통 허덕이는데 혼자 다 거머쥐면 과연 행복할까"라고 반문한다. 가진 자들은 별생각 없이 키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고 공정하다고 하지만 그건 일률적인 공평에 지나지 않는다. 키가 작은 이들에게는 더 ..

참살이의꿈 2023.09.17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선생이 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신문 칼럼이 다루는 다양한 소재의 글감을 일상, 학교, 사회, 영화, 대화의 5부로 나누어 실었다. 선생의 세상을 보는 시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한 글맛을 느낄 수 있다. 5년 전 이맘때 경향신문에 실렸던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은 세간의 화제를 끌었던 모양이다. 선생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추석에 만나는 친척들에게도 원용해보라고 충고한다.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

읽고본느낌 2023.09.16

닷새만에 회복하다

지난주에 무리를 했던 것 같다. 세 번의 모임이 있었고, 연이어 고향에 내려가 산소 일을 했다. 그 뒤부터 목이 따끔거리며 몸살기가 나타났다. 두통이 동반되고 콧물도 나왔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에어컨이 문제였다. 특히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냉기가 심했다. 늘 갖고 다니던 팔 토시가 그때는 없어서 에어컨의 찬 바람에 오래 노출되었다. 여기에 피로가 겹치니 몸살감기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는 자가 진단이다. 한 달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분이 이웃에 있다. 나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빨리 가라앉고 있다. 몸살이 시작되면 증세가 심해지다가 사나흘 뒤 정점을 찍고 서서히 사라진다. 내 경우는 통상 두 주 정도는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 단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길위의단상 2023.09.15

이웃집 능소화

능소화(凌霄花)는 특이한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없신여길 능(凌)'에 '하늘 소(霄)'를 쓴다. '하늘을 능가하다' '하늘을 업신여기다'라는 뜻이다. 이름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능소화는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다. 6월에 피기 시작해 9월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고향 마을의 이웃집 마당에 핀 능소화가 담을 넘어와 주황색 꽃을 드리웠다. 활짝 핀 꽃, 봉오리를 맺은 꽃이 보이고, 바닥에는 떨어진 꽃들도 있다. 능소화는 동백처럼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진다. 낙화한 꽃이 주는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꽃 중 하나다.

꽃들의향기 2023.09.12

산소를 보수하다

고향에 내려가서 지난여름에 폭우로 무너진 산소를 보수했다. 포클레인과 인부 한 명이 추가로 따라와서 일을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경사면 여러 곳에 쇠 파이프를 박아넣고 걸침목을 했으니 이제 무너져 내릴 일은 없을 것 같다. 겸해서 깔끔하게 벌초도 했다. 이번에 산소를 정리하고 납골묘를 만들려고 했으나 아무 때나 손대는 게 아니라고 해서 생각을 접었다. 기존 묘는 나중에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두어서 자연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도 있다. 들판에는 벼가 익어가고,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기대를 접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다고 혈연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지나친 신경 낭비를 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

사진속일상 2023.09.11

다읽(19) - 싯다르타

대학생 때 한 친구는 좋아하는 여학생과 가까이하고 싶어 불교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여학생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친구는 여학생한테서 수시로 불교 관련 서적을 빌려왔다. 나도 따라서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친구보다 내가 더 열심이게 되었다. 이 도 그때 읽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당시 상황과 관계없는 나중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헤세는 인간의 문제, 그중에서도 인간 성장과 완성의 길을 다루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동양 사상도 짙게 배어 있다. 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헤세의 특징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바라문 계급의 싯다르타는 요사이 말로 하면 금수저로 태어났다. 더구나 잘 생기고 총명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제도 종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는 없었다. 고뇌하던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

읽고본느낌 2023.09.09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오두막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오두막집. 그런 오두막을 장만하면 나는 호롱불의 불편함도 편안함으로 여기며 살리라. 낮이면 하얀 산꽃들로 나의 내부를 살피고, 밤이면 벽에 돋은 긴 그림자의 높이로 나의 밖을 위로하며. 겨울이 되면 위로할 게 더 많아지겠지? 눈이 오면 토끼, 노루들이 밖을 서성이겠지? 이들과는 가을 달빛에 익은 고구마를 같이 나누고, 눈길의 얼음장 깨고 옹달샘도 함께 하리라. 그러면 이들은 나와 한 마음을 정답게 이루는 훈훈한 저녁 연기요, 반가운 아침 인사가 되겠지?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나는 깊은 산중의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떠나고 싶다. 내 영혼과 단둘이 밥상 마주할 수 있는 오두막집으로. -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시읽는기쁨 2023.09.08

사기[7-1]

공자가 안회에 대해 말했다. "어질구나, 회여! 한 통의 대나무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거리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 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홀로 지내는 것을 살펴보면 또한 내가 해 준 말들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 "등용되면 나아가고 버려지면 숨는 사람은 오직 나와 너뿐이구나!" 안회는 스물아홉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말했다. "네게 안회가 있은 뒤부터 제자들이 나와 더욱 친숙해졌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

삶의나침반 2023.09.07

연미정 느티나무

강화도 연미정(燕尾亭)에 있는 느티나무다. 안내문에는 수령이 500년으로 되어 있으나 그렇게 오래 돼 보이지는 않는다. 원래는 두 그루가 있었으나 하나는 4년 전 태풍 때 허리가 부러져서 죽고 말았다. 그래선지 짝을 잃은 이 느티나무가 더 외로워 보인다. 나무는 부러졌지만 둥치에서는 새 잎이 돋아나고 있다. 아직 뿌리는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목이 죽더라도 다시 생긴 줄기가 성장하여 2세대 큰 나무가 되기도 한다. 자연의 생명력은 경이롭기만 하다.

천년의나무 2023.09.06

아내와 강화도에 다녀오다

가을을 맞아 아내와 바람 쐴 겸 강화도에 다녀왔다. 먼저 들린 곳은 연미정(燕尾亭)이었다. 연미정은 조선 시대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무공을 치하하여 중종이 하사한 정자다. 황형은 여기서 살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제비 꼬리 모양으로 돌출한 지형이어서 '연미'라고 부른다. 그 뒤에는 월곶진이 설치되어 관아로 사용하였다. 연미정에서 내려다보면 황형의 집터를 표시하는 비와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가 보인다. 두 번째는 교동도의 연산군 유배지로 갔다. 이곳은 최근에 화개정원을 만들고 뒷산 꼭대기에는 화개산전망대를 세웠다. 정원에서 전망대까지는 모노레일이 운행한다.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지라 정원만 둘러보고 전망대까지는 올라가지 않았다. 대룡..

사진속일상 2023.09.05

하늘이 달라졌어요

9월이 되니 하늘이 달라졌다. 어쩜 이렇게 일변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아침저녁 기온도 뚝 떨어져서 이젠 침대의 전기 온열기를 켜고 자야 할 정도가 되었다. 가을이 되면 하늘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가을에 자주 나타나는 권형운은 상층운에 속한다. 반면에 여름의 적형운은 지면에 가깝게 떠 있다. 얼마 전 8월의 구름은 이랬는데.... 동네를 산책했다. 주변 여러 곳이 개발중이라 전처럼 호젓한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일부에는 옛 농촌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정자를 지날 때는 노인네들이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본다. 때로는 막걸리병이 놓여 있기도 하다. 비위가 좋다면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지만 늘 못 본 척 지나치기만 한다. 뒤통수에 여러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우리 텃밭 작..

사진속일상 2023.09.03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의 허무에 대한 김영민 선생의 산문집이다.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많은 문학, 철학, 예술 작품을 소개된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줄기찬 노력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닿는다. 지은이의 진단을 보자. "현실은 복잡성과 딜레마와 역설로 가득하다. 외로워서 결혼을 했더니 더 외로워지는 역설. 배가 나와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역설. 포기했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되더라는 역설. 미래를 예측한다며 약을 파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삶이 정녕 법칙과 예측대로 흘려가던가. 모르겠다. 대체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빔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지 않던가. 그러다가..

읽고본느낌 2023.09.02

40년

40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 후배 셋을 만났다. 우연히 한 사람과 통화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다른 둘과도 연결이 되었다. 마침 셋 모두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내가 먼저 만나보자고 했다. 우리는 1981년에 M중학교에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개설 학교인지라 신입생밖에 없어 교직원이 30명 정도 된 단촐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나는 두 번째 학교였지만 셋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첫 발령이었다. 싱그러웠던 20대의, 순수했던 꿈과 열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얼굴에서 중첩된 40년 세월의 아득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을 공유하면서 신기하게도 이내 그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40년의 긴 시간도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듯했다. 내가 가졌던 ..

길위의단상 2023.09.01

악마의나팔꽃

이 꽃에 처음 '악마'라고 명명한 이는 누구일까. 무척 짓궂은 사람일 것 같다. 물론 '천사의나팔꽃'에 대응하여 지은 이름이긴 하겠으나, 그래도 꽃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 꽃도 인간이 붙여준 자기 이름을 들으면 억울해할 게 분명하다. 천사의나팔꽃(Angel's trumpet)이나 악마의나팔꽃(Devil's trumpet)이나 같은 독말풀속이다. 둘 다 독이 들어 있는 식물이긴 마찬가지다. 차이점은 천사의나팔꽃은 꽃이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악마의나팔꽃은 꼿꼿하게 하늘을 향한다. 세가 훨씬 기운차 보여 좋다. 열대아시아 원산으로 꽃은 8, 9월에 핀다.

꽃들의향기 2023.08.30

인간 / 유자효

같은 종을 죽이는 종 닮으면 닮을수록 더욱 잔인하게 죽이는 종 마침내 제 터전마저 허무는 종 제 새끼들이 살아야 할 터전까지도 제멋대로 없애버리는 종 마침내 자살로 멸종의 길로 가는 이 세상에 전례가 없는 희한한 종 똑똑한 체하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종 - 인간 / 유자효 대학생 때 생물학 시간을 좋아했다. 담당 교수님이 다양한 생물의 생태를 '동물의 왕국' 이상으로 흥미롭게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얘기 중 하나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산다는 레밍이라는 쥐다. 번식력이 좋은 레밍은 어느 시기가 되면 집단으로 이동하다가 해안가 절벽에 이르러 모두 바다로 떨어진다고 한다. 일종의 집단 자살이다. 이유는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신기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시를 읽다가 레밍이 ..

시읽는기쁨 2023.08.29

사기[6]

오나라 왕은 사신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라는 칼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 칼로 자결하라."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아! 참소를 일삼는 신하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 제후의 우두머리로 만들었고, 그가 임금이 되기 전 공자들끼리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선왕에게 간해 그를 후계자로 정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내게 오나라를 나누어주려고 하였을 때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러고는 가신들에게 말했다.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

삶의나침반 2023.08.28

여름 지나가는 뒷산

맨발 걷기 바이러스가 아내마저 감염시켰다. 저녁이면 학교 운동장으로 나가 맨발 걷기를 하더니 오늘은 뒷산으로 진출하겠단다. 뭔가가 몸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 유행처럼 번져 너나없이 따라 한다.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바라볼 뿐이다. 사람들이 쏠리는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삐딱이과니까. 맨발 걷기에 적당한 길을 안내해 줄 겸 아내와 함께 뒷산에 들었다. 석 달만이다. 여름이면 산모기 때문에 뒷산에 가질 못한다. 산길도 좋지만 산모기의 성가심을 나는 도저히 감내하지 못한다. 오늘도 어지간하면 되돌아오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은 정상까지 갔다. 대신 산모기를 쫓던 손수건은 어딘가에 흘려버렸다. 아내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뒷산에 올라 오랜만에 산기운을 쐬었다. 몸이 나른하면서 가뿐해졌다..

사진속일상 2023.08.27

더 웨일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어버린 찰리라는 남자가 있다. 강박적인 폭식으로 27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이 되어 보조 기구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 웨일[The Whale]'은 자학 끝에 죽음을 맞는 - 동시에 세상과 화해하려고 하는 - 찰리의 마지막 며칠을 담고 있는 영화다. 찰리의 인생은 기구하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두었지만 동성 제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렸다. 파트너마저 세상을 떠나자 찰리의 삶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폭식증에 걸려 지금의 몸이 된 채 망가졌다. 다행히 글쓰기 시간강사로 인터넷 강의를 하며 생계는 유지한다. 찰리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마지막으로 딸과 화해하려 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단출하다. 찰리 외에 딸 엘리, 간호사 리즈, 전도사 토마스 정도다. 그러나..

읽고본느낌 2023.08.26

밍밍한 걷기

하루의 감정 상태는 일기(日氣)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다. 요 며칠 동안 잔뜩 흐린 채 간간이 비가 뿌리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왕 내리는 비라면 시원하게 뿌렸으면 좋으련만 전립선 걸린 중년 남자의 오줌발처럼 찔끔거린다. 경안천으로 걷기에 나서보지만 우중충한 하늘 아래서 마음만 개이길 바랄 수 있겠는가. 밍밍하면서 기계적인 걷기다. 이런 마음이라면 발 옆에 핀 꽃에도 눈길을 주지 못한다. 맹물에 식은 밥을 말아먹는 맛이다. 된장에 매콤한 고추라도 마련되어 있다면 좋으련만. 안팎이 다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우울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공원의 약 올리듯 선명한 초록 잔디를 보며 중얼거린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밍밍한 맛도 때론 별미가 될 수 있..

사진속일상 2023.08.25

인생의 의의와 가치

아주 오래전, 20대 때 본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권이 있다. 대부분 내용은 잊었는데 책의 모양과 제목만은 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책을 샀던 서점과 서가의 풍경까지 떠오른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다. 이 책을 가방 속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맛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어두운 색의 하드 커버 표지에 두께는 얇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1966년에 신조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지은이는 오이켄이라는 독일 철학자였고, 제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제목과 외형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논지를 펼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

참살이의꿈 2023.08.23

인류의 여정

인류의 여정이라고 하면 대략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해서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간 뒤 현재의 문명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이 거대한 여정은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책 은 오데드 갤로어(Oded Galor)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류의 여정을 풀이한다. 다루는 주요 주제는 부와 불평등의 기원이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급격한 전기를 맞았다. 지은이는 산업혁명을 인류의 여정의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본다. 지은이가 그래프로 보여주는 건강이나 부, 교육 면에서의 변화는 이 시기에 와서 너무나 폭발적이다. 마치 빅뱅이 일어난 것 같다. 그전까지 인류의 삶은 질적인 면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대동소이했다. 기술 혁신이 있었더라도 생활수준이 향상되..

읽고본느낌 2023.08.22

공짜 / 박호현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 공짜 / 박호현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더니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글이 큰 깨우침을 준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은 전부 공짜가 아닌가. 나도 공짜 목록을 적어보며 불평하는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어느 노래 가사에도 이런 게 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온 놈이 이만큼 가졌으면 부자가 아닌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에 결핍을 느낄 ..

시읽는기쁨 2023.08.21

사기[5-3]

"오기는 사람됨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다. 그가 젊을 때 집안에는 천금이나 쌓여 있었음에도 벼슬을 구하여 유세하다가 이루지도 못하고 파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비웃자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30여 명을 죽이고는 동쪽으로 위나라 성문을 빠져나왔다. 오기는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자기 팔을 깨물며 맹세하기를 '저는 공경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오기는 증자를 섬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그 어머니가 죽었지만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증자는 오기를 야박하다고 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었다. 이에 오기는 노나라로 가서 병법을 배워 노나라 군주를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노나라 군주가 의심하자, 오기는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군이 되려 하였다. 대체로 노나라는..

삶의나침반 2023.08.20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

여름 하늘

염제(炎帝)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한낮 땡볕 가운데를 걸어도 긴 시간이 아니라면 즐길 만하다. 집 에어컨도 이제 한철 소명이 끝났다. 대신 선풍기 도움은 당분간 받아야겠지. 여름 하늘이 아름답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뭉게구름이 떠 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풍경만 바라봐도 지리할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면서 연신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그때마다 하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무쌍한 청(靑)과 백(白)의 그림판이다. 가을이면 운동회가 열렸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아이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함치며 뛰놀았다. 청과 백으로 나눈 것이 하늘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하늘은 누가 누굴 이기는 마당이 아니다. 청과 백이 어울리는 조화의 세계다. 지..

사진속일상 2023.08.18

공산토월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문구 작가의 대표 중단편을 모은 책이다. 연작소설인 '관촌수필'에서 네 편, '우리동네'에서 두 편, '유자소전' 등 기타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관촌수필(冠村隨筆)'은 두 번째 읽어보는데 마음 밑바닥을 흔드는 감동은 처음과 같았다. 작가의 자전소설인만큼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그 시절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했다. 이 책에는 네 편이 담겨있는데 '일락서산(日落西山)'에는 작가의 할아버지, '행운유수(行雲流水)'에는 옹점이, '녹수청산(綠水靑山)'에는 대복이, '공산토월(空山吐月)'에는 신석공이 나온다. 다시 읽어봐도 제일 끌리는 인물은 역시 '행운유수'의 옹점이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옹점이를 만났다. 작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열 살 위의 소녀 옹점이는 ..

읽고본느낌 2023.08.17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사기[5-2]

손빈은 길 옆에 있던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 흰 부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골라 쇠뇌 1만 개를 준비시켜 길 양쪽에 매복시키고 기약하여 말했다. "저물 무렵에 불이 들려지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방연은 정말 밤이 되어서 껍질을 벗겨 놓은 나무 밑에 이르러 흰 부분에 씌어 있는 글씨를 발견하고는 불을 밝혀 비추어 보았다. 방연이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은 한꺼번에 1만 개의 쇠뇌를 한꺼번에 쏘았다. 위나라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방연의 자신의 지혜가 다라고 싸움에서 진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며 말했다. "결국 어린애 같은 놈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구나!"..

삶의나침반 2023.08.15

꽃범의꼬리

이웃 텃밭이 환한 이유는 밭 둘레에 이 꽃이 피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 텃밭에는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으면 무엇이라도 심으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밭 둘레에 옥수수 하나라도 더 심으려고 최대한 넓혀 놓았다. 그런데 이 밭 임자는 경계에 꽃을 심었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어도 마음의 여유가 전해져 미소가 인다. 나도 가을에는 코스모스 씨라도 받아야겠다. 이 꽃은 꽃범의꼬리다. 피소스테기아(physostegia)라고도 한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흰색, 분홍색, 붉은색 등 다양하다. 꽃의 어딘가에 범의 꼬리와 닮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범의 꼬리를 닮은 것은 범꼬리라 불리는 다른 식물이 있다. 꽃범의꼬리는 외래종이지만 흔히 보는 여름꽃이 되어가고 있다.

꽃들의향기 2023.08.14

태풍 지난 뒤 경안천

태풍 카눈이 얌전하게 지나갔다. 한반도에 들어온 뒤에는 세력이 약해져서 우리 고장을 관통했건만 태풍이라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신나게 달리다가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린 자동차 같은 모양새였다. 대신 태풍이 남긴 구름이 이틀째까지 사라지지 않으면서 가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산을 들고 오랜만에 경안천에 나갔다. 그래도 천변의 낮은 길은 물에 잠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안천의 지류인 직리천에서는 궂은 날씨지만 아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부부가 보였다. 어머니 손에는 곤충 채집망이 들려 있다. 우리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여름방학이면 곤충/식물 채집 숙제가 있었다. 방학책 표지에는 으레껏 채집망을 어깨에 걸친 아이들 그림이 나왔다. 지금 돌아보면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진속일상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