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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절벽에서도 웃으며 핀다

사무실 밖에 수직으로 서 있는 시멘트 축대의 갈라진 틈에서 제비꽃 한 송이가 꽃을 피웠다. 틈이래야 폭이 실처럼 가는데 그 안으로 씨가 들어간 것도 신기하거니와 속에 무슨 흙이 있는지 싹이 트고 꽃을 피운 것이 희한하기만 하다. 빗물조차도 그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꽃은 여느 기름진 땅에서 핀 제비꽃에 못지않게 크고 튼실하다. 나는 생명의 신비가 놀라워 매일 한 번씩 그 제비꽃을 찾아가 본다. 어떤 때는 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지만 괜히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 같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제비꽃을 바라볼 때면 아무 이유 없이 서글프고 고맙기만 하다. 작은 들꽃은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비관하지 않는다. 씨앗이 자갈밭에 떨어지든 옥토에 떨어지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

길위의단상 2008.04.14

산책길에 만난 봄꽃

원래 허약한 체질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나마 건강이 유지되는 것은 평소 생활에서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음을 하게 되면 반드시 며칠 동안은 푹 쉰다. '골골 팔십'이라는 옛말이 있듯 몸이 약한 사람은 무리를 할래야 할 수가 없으므로 도리어 건강한 사람보다 장수하게 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강을 생각한다기보다는 몸이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들면 주량도 줄어드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겠다. 전날 고량주 두 병과 맥주 한 병을 마신 것에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만취가 되었다. 덕분에 연휴 이틀을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밝은 봄햇살의 유혹 또한 ..

꽃들의향기 2008.03.22

초가을의 물향기수목원

기상청에서 보도자료로 내놓은 지난 9월의 기후 특성을 보면 또 다시 각종 기록을 갱신했다. 9월 강수량은 412mm로 평년(150mm)보다 2.8배나 비가 많이 내려 1973년 이후 가장 많은 강수량을 기록했고, 강수일수도 17일로 최고를, 월평균 일교차는 7.1도로 최소를, 월 평균일조시간은 98시간으로 평년(184시간)에 비해 무려 86시간이나 줄어들어 최소를 기록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 변화를 우리가 지금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우리나라도 사계절의 구분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야할 지도 모른다. 7, 8, 9월은 우기가 되는 셈이다. K 형과 같이 오산에 있는 물향기수목원을 찾은 날도 이슬비가 내리더니 하루 내내 하늘이 잔뜩 흐렸다. 감각적으로는 한 달여 이상 이런 날씨가 계속되고 ..

꽃들의향기 2007.10.04

꽃은 왜 아름다운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보면 공장에서 인공수정으로 만들어지는 노동자 계급의 유아들에게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없애버리기 위해 조건반사 학습을 시키는 게 나온다. 삭막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기르다가 화분에 꽂힌 꽃을 보여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방긋 웃으며 엉금거리며꽃을 향해 기어간다. 이때 바닥의 철판에 전기를 흘려보내 아이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면 아이들은 놀라서 자지러지게 운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 학습시키면 아이들은 꽃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거부감을 갖게 된다. 자연을 동경하는 감수성이 매말라버리는 것이다. 평생을 공장에서 육체노동에 만족하며 살아갈 충직한 노동자는 이렇게 양성된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얼마 전 TV에서 꽃에 관한 특집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꽃에 대하는 사람들 반응..

길위의단상 2007.09.20

꽃 / 백무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주마 사랑하는 이여 - 꽃 / 백무산 저절로 꽃대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향기를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하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우면 시인은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했을까. 인간은 정말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유전자 조작이니, 줄기세포니 하며 생명을 건드리는 ..

시읽는기쁨 2007.07.11

수리산에서 봄꽃과 만나다

올 봄은 유난히 바쁘게 지나가고 있다. 집 안팎으로 몇 가지 변화가 겹쳤기 때문이다. 4월 둘째주가 되어서야 겨우 바깥 나들이를 할 짬이 생긴다. 원래는 Y 형과 천마산에 갈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형의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혼자 수리산을 찾았다. 수리산은 이른 봄에 변산바람꽃을 보러 찾아갔던 산이다. 계곡을 중심으로 왠지 많은 봄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산이다. 역시 기대되로 꽃이 많이피어 있다. 주종은 현호색과 개별꽃이다. 그중에서도 현호색은 지천으로자라고 있다. 수리산을 현호색의 산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아침 일찍 도착했으므로 아직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계곡의 꽃들은 이슬을 달고 있다. 제비꽃 두 종류를 보다. 특이하게 바위 틈에서 자라는 미치광이풀도 보다. 큰괭이밥이다. 현호..

꽃들의향기 2007.04.14

화야산의 봄꽃

봄꽃을 보러 화야산 큰골을 찾아갔다. 화야산은 처음 가보는 산이다. 부근을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산에 들어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첫길이어선지 큰골입구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꽃을 보러 갈 때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요사이는 꽃이 피는 장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어서 나같이 개인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애로가 많다. 화야산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올라오면 산 지도를 보고 그냥 계곡을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다. 희귀한 꽃이라면 보호 차원에서 비공개하는 것에 이의를 달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대체적인 장소를 밝혀줬으면 어떨까 싶다. 이번에는 큰골을 선택했는데 다행히도 많은 봄꽃을 볼 수 있었다. 제비꽃, 현호색, 얼레지, 처녀치마, ..

꽃들의향기 2006.04.06

올해 첫 봄꽃을 보다

고창에 내려간 길에 내변산으로 변산바람꽃을 보러 갔다. 내소사 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그녀를 찾았지만 장소를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때를 잘못 맞추었는지 그녀의 흔적도 만나지 못했다. 대신에 복수초와 노루귀만 풍성하게 만나고 왔다. 세봉 아래 산 중턱에는 복수초와 노루귀의 군락지라고 할 만큼 많은 수의 꽃이 피어 있었다. 노루귀는 평소에 서울 근교에서 보던 것과는 크기도 작고 아기자기했다. 아직 이른 철이었는지 꽃잎이 만개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반쯤 열려 있었다. 산을 내려와서 곰소항에 들렀다. 전에 '포구기행'이라는 책에서 곰소항에 대해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한 쓸쓸한 포구를 연상하고 찾아갔지만 바닷가를 따라 밀집한 상가들과 횟집들에서 그런 분위기를 ..

꽃들의향기 2006.02.25

남한산성의 가을꽃

명성산으로 억새 산행을 가는 동료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남한산성 길을 걷다. 가을산은 한 달쯤 계절이 빨리 오는 것 같다. 산길에는 벌써 낙엽이 땅을 덮고 있다. 지나가는 바람에 마른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금속이 닿은 것처럼 서늘하다. 산 위에서 고추를 안주로 막걸리 한 잔을 사 마신다. 가을 산길은 역시 혼자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전에 남한산성 밑에서 살 때는 거의 매주 한 번씩 이 산을 찾았다. 크지 않은 산이지만 산의 구석 구석 모든 길이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랜 만에 찾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더욱 쓸쓸해진다. 여기는 현호색 군락이었고, 저기는 양지꽃이 예쁘게 피어있었었지. 또 산에 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강제로 데리고오면 처음에는 투덜대다가 나중에는 얼굴이 밝아지곤 했었다. ..

꽃들의향기 2005.10.14

작은 풀꽃

교정에 있는 나무 중에서는 가장 먼저 산수유와 목련이 꽃을 피웠다. 매화나무도 한 그루 있지만 이곳 기후에 적응을 못해선지 꽃을 제대로 피워내지 못한다. 목련도 자라는 위치에 따라 피는 순서가 다르다. 양지 쪽에 있는 것은 벌써 꽃이 떨어졌는데 음지 쪽에서 자라는 것은 이제야 꽃잎을 열었다. 지금은 진달래, 개나리가 한창이다. 그 사이에서 하얀 앵두나무 꽃도 화사하고 명자나무도 바알간 색깔로 물들고 있다. 살구나무는 이미 꽃이 졌다. 한창일 때는 살구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피어난 살구꽃은 모든 사람들의 눈을 홀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풀꽃들이다. 늘 손질을 하는 탓에 꽃이 자라날 여건이 되지 못하지만 ..

꽃들의향기 2005.04.19

반가운 손님

빈 터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작년에 흙을 들여와깔아놓은 터에 봄이 되니 하나 둘씩 풀들이 나기 시작한다. 흙 속에 들어있던 씨들이었는가,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왔는가, 맨 땅이 초록 옷을 입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사실 이름을 모르는 풀들도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낯 익은 꽃을 피우고 미소짓는 것들도 있다. 대부분은 꽃이 아주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저것들이 귀엽고 반갑다.

참살이의꿈 200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