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69

생명이 자본이다

'생명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의 시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생명'과 '자본주의'라는 두 단어가 어떻게 연결될까? 지난 정권에서 만든 '녹색성장'이라는 이상한 용어와 닮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는 이어령 선생의 최근작이다. 선생은 자본주의의 황혼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제하에 생명 중심의 새로운 자본주의를 제창한다. 생명자본주의 사상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생명애(biophilia), 장소애(topophilia), 창조애(neophilia)의 세 가지 사랑을 중심 테마로 삼고 생명자본주의를 인문학적 입장에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선생은 일본의 사례를 든다. 일본에서 태풍이 불었을 때 과수원의 사과가 90퍼센트 가량 떨어졌다. 일 년 농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떨..

읽고본느낌 2014.04.29

병아리 던지기 / 김순일

누우떼가 아프리카 대륙이 꺼지게 달려간다 건기를 맞은 수천 마리 누우떼가 싱싱한 풀밭을 찾아 먼지 자욱한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간다 도룡농 도마뱀 물고기 따위나 잡아먹으며 늘 배가 안차서 걸근거리던 악어들이 때를 만나 강목을 지키고 있다가 모처럼 포식을 하고 비단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인데 뒤따라 강을 건너던 누우란 놈 겁도 없이 악어의 등때기며 머리통을 밟고 건너가는구나 요녀석 봐라 선잠을 깬 악어가 누우의 허벅지를 물고 짓이겨 댔는데 이거 어쩐 일인가 요단강 건너는 줄 알았던 누우의 허벅지엔 이빨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구나 오금아 날 살려라 혼 나간 누우란 놈 허둥지둥 강을 건너갈 때 악어녀석 벙긋벙긋 꽃잠 속으로 드는구나 아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 갓깬 병아리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다 사층 아파트 창..

시읽는기쁨 2013.10.17

자벌레 /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

시읽는기쁨 2013.07.26

달팽이의 귀환

작년 가을에 고향에서 올라올 때 어머니가 여러 종류의 채소를 싸주셨다. 그 더미 속에 묻혀 달팽이 한 마리가 따라온 걸 집에 와서야 발견했다. 줄을 잘못 섰다가 졸지에 정든 땅과 생이별한 신세가 된 것이다. 다시 돌려보낼 길은 없고 집에서 한 번 길러보자 하고 화분에 배춧잎을 깔아 새 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웬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달팽이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온 베란다를 뒤졌지만 도저히 찾지 못했다. 새 환경이 낯설었는지 어디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수색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달팽이는 잊혀졌다. 사라졌던 달팽이가 오늘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화분에 붙어 있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여섯 달 만이었다.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돌아온 탕..

사진속일상 2013.04.21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 이화은 밤새 친구들과 통음하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절망한 뒤 밖에 나선 새벽, 깜깜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13.04.16

외손녀

첫째가 출산을 한 뒤 친정에 와서 몸조리하고 있다. 아기는 하루의 8/10은 자고, 1/10은 먹고, 1/10은 놀거나 운다. 깊은 잠에 빠진 이 녀석이 나를 한순간에 할아버지로 만들었다. 아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자그마하고 연약한 생명이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를 찾아왔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또한,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야 할 걸 생각하니 안스럽기도 하다. 네가 행복하게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구나. 이 할아버지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다. 너와 내가 만난 귀한 인연에 감사한다. 이 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 예쁜 꿈 많이 꾸고 많이 웃자. 옆에서 천사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할아버지는 무척 행복하단다. 아가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거라....

사진속일상 2012.12.24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틈이 난 벽에 핀 꽃 그 갈라진 틈에서 널 뽑았다 여기,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 하지만 너는 무엇인지 뿌리째,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신(神)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 - 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 Flower in the Crannied Wall / Alfred Tenn..

시읽는기쁨 2012.11.24

공부도둑

은 물리학자면서 녹색사상가인 장회익 선생의 70년 공부 인생 이야기다. 선생에게 공부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앎'을 추구하며 즐기는 데 있었다. 그래서 본인의 생애를 앎과 숨바꼭질하며 살아온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또 공부꾼이라고도 했다. 우주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학문의 정수를 골라 훔쳐내는 '공부도둑'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선생의 공부 방법은 남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원리를 스스로 깨달았다. 당신 스스로 아인슈타인과 비교하는 데서 볼 수 있든 특별한 두뇌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 가든 공부에서는 1등이고 수석이었다. 그런데 엘리트 의식이 전혀 없고 겸손하다. 도리어 남과..

읽고본느낌 2012.11.20

님 / 김지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 님 / 김지하 얼마 전에 김지하 시인이 이번 12월 대선에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누구는 변절이라고 욕을 했고, 누구는 이제 바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유신 시대 독재의 저항 아이콘으로서 시인이 가지는 상징성이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시읽는기쁨 2012.11.19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

시읽는기쁨 2012.09.22

생명

아파트 베란다에서 몇 가지 채소를 길러보고 있다. 상추, 방울토마토, 돌나물, 더덕 등이다. 이름하여 '베란다 텃밭'이다. 상추와 돌나물은 몇 번 뜯어먹기는 했지만, 이건 채소 기르는 게 아니라 거의 화초 가꾸기 수준이다. 천장까지 실로 이어주었더니 더덕 줄기가 줄기차게 뻗어 올라간다. '줄기차게'라는 의미를 이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천정에 달린 빨래 건조대를 감더니 이젠 허공을 손짓한다. 생명의 상승 욕구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속일상 2012.06.15

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는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로 생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다. 는 농업과 먹을거리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대한 경고와 함께 인류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실험적 삶을 살고 있다. 웬델 베리가 보는 위기의 시작은 인간이 땅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보았을 때부터였다. 농민이 사라지고 농기업가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뒤틀린 것이다. 그는 1950년대에 트랙터를 몰며 앞에서 일하는 노새의 느린 걸음을 보고 속을 태웠던 때를 안타깝게 기억한다. 기계와 생명의 경쟁에서 승자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일손을 줄이는 기계와 무한..

읽고본느낌 2012.06.01

모두 어디 있지?

밤하늘의 별을 보면가슴이 뛴다. UFO, 우주인, 외계 문명 등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지적 생명체를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우주의 나이가 120억 년이나 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수의 별들이 있는데, 우주의 어딘가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지극히 타당하다. 생명 발생이 지구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그러니 우주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문명으로 발전시킨 존재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성간 여행을 했을 것이고, 은하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우주 공간에서는 그들이 통신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어디 있지?" 논리적으로는 그들과 접촉해야 마땅한데 ..

읽고본느낌 2012.04.16

장자[194]

태왕 단보가 빈에서 살 때 북적이 침입했다. 가죽과 비단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고 개와 말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고 주옥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았다. 북적이 요구하는 것은 땅이었다. 태왕이 말했다. "남의 형과 같이 살고자 그 동생을 죽이고 남의 부모와 함께 살고자 그 아들을 죽이는 짓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그냥 머물러 살도록 노력해 보라. 내 백성이 되는 것과 북적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들은 바로는 기르는 수단 때문에 길러야 할 주체를 해치지 말라고 했다." 태왕이 지팡이를 짚고 빈을 떠나자 백성들이 줄지어 그를 따랐다. 그래서 기산 아래에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태왕이야말로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太王亶父居빈 ..

삶의나침반 2012.01.28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한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시읽는기쁨 2011.06.07

1000만의 비명

지금까지 소, 돼지만 350만 마리, 오리와 닭까지 합하면 1000만에 이르는 생명이 살처분되었다. 구제역과 조류 인프루엔자에 의한 사상 최악의 재앙이 계속되고 있다. 살처분하는 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한다. 돼지는 생매장을 하는데 죽고 죽이는 처참한 모습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다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은 이렇게 적었다. "밑의 돼지들에게 갇혀 있는 큰 돼지들은 가라앉지 않으려고 더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방수비닐의 한쪽 면이 통째로 찢겨 나갔다. 마침내 포클레인의 바가지가 웅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닐이 찢긴 쪽 모퉁이에서부터 돼지들을 찍어내 가운데로 몇 번이고 퍼냈다.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돼지들의 비명소리가 웅덩이에서 공명이 되어 산속으로 퍼져 나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길위의단상 2011.02.12

아픈 금붕어

K샘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과학을 보여준다고 액체질소 실험을 했다. 부드러운 물체를 액체질소(영화 197도) 속에 넣으면 급속 냉동되어 금속 같은 성질로 변한다. 예를 들어 꽃을 액체질소에 넣었다 뺀 후 땅에 떨어뜨리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진다. 또 새우깡을 넣었다가 먹으면 기화되는 질소 기체가 하얀 연기로 변해 아이들이 무척 재미있어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실험 대상 중에 금붕어도 있었다. 살아있는 금붕어를 액체질소 속에 넣으면 한 순간에 꽁꽁 얼어버린다. 이 금붕어를 따스한 물에 녹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살아나 헤엄을 친다. 냉동인간의 원리를 연상할 수 있는 볼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험이 미숙했는지 다섯 마리 금붕어 중에서 네 마리가 그 다음 날에 죽어 버렸다. 살아난 한 마리도 심한 ..

사진속일상 2009.12.03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시읽는기쁨 2009.09.02

안토니아스 라인

좋은 영화를 한 편 보았다. 10여년 만에 재개봉한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이다. 안토니아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연대기로 네델란드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이 영화는 여러 시각에서 볼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여성성에 의한 자유와 해방의선언으로 읽혀졌다. 종교나 지성이나 가정의 틀보다 우선되는 것은 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이다. 그런 점에서는 자연주의를 찬양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성성과 자연주의는 상통하는 바가 많다.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여러 장면들이 있다. 신부가 위선적인 강론을 할 때 당당히 퇴장하는 안토니아, 강의중인 교수를 향해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뛰쳐나가는 테레사의 행동 등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항거라고..

읽고본느낌 2009.05.11

하늘밥도둑 / 심호택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 하늘밥도둑 / 심호택 하늘밥도둑은 땅강아지의 다른 이름이다. 토로래라고도 한다. 동작이 날쌔서 잡으려고 하면 삽처럼 생긴 앞발로 순식간..

시읽는기쁨 2009.04.26

꼬리 잘린 소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청계천에 미국소 조형물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 미국소의 꼬리가 잘려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되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미국의 소 사육장에서는 꼬리를 자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소가 꼬리를 흔들면 에너지가 소비되어 살 찌는데 방해가 된다나 어쩐다나, 참 웃기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다. 그 사람들은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 같다.가축도 오직 생산원료일 뿐이다. 마치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처럼 이윤만 극대화 시키면 그만이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지만 닭 사육장에서는 닭의 부리를 펜치로 잘라버린다는 말도 들었다. 너무 과밀하게 키우다 보니 부딪치는 일이 자주 생기고, 서로 부리로 쪼아 몸에 상처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길위의단상 2008.10.15

나는 행복하구나

슬픈 시를 한 편 보았다. 조류독감으로 살처분되어 생매장 된 닭의 분노하고 절망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행복하구나'라는 정인화 님이 쓴 시다. 살처분이면 어떻고 생매장이면 또 어떠랴 그처럼 보고팠던 푸른 하늘 이불 삼고 그처럼 딛고 싶었던 흙 베개 삼아 그 속에 산 채로 파묻혀 죽는다한들 무엇이 무서우랴 오히려 나는 좋구나 똥구녁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도 애비 없는 알 낳아야 했던 그 끔찍했던 날들 밤도 낮도 없던 그 지옥의 날들 이제야 깡그리 잊혀지고 말지니... 차라리 나는 행복하구나 내 새끼 한 번 품어안아보지 못한 이 한 많은 몸 누가누가 알 많이 낳나 경쟁없는 그곳으로 갈 수 있다니 나 정말 천만다행이구나 내 살붙이들과 으스러지도록 부등켜안고 그리운 그 흙 속에서 눈 감을 수 있다니 나, 조류독..

길위의단상 2008.07.26

살처분 7000000

지난 4 월초에 김제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끔찍한 장면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살처분이란 전염병의 확산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푸대에 담아 그대로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병이 확인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3 km 이내의 가금류는 무조건 살처분해 버린다고 한다. 싹쓸이 대량 학살이다. 한 달 정도 되는 동안에 살처분된 닭과 오리만 이미 700만 마리에 이르고 있다. 방역의 목적은 생명을 지키자는 것인데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생명을 도륙하는 잔인성이 이율배반적이고 무섭기만 하다. 나는 우선 ‘살처분’이라는 용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살처분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붙일 명칭이 아니라고 본다. ‘생명’을 처분한다거나 처..

길위의단상 2008.05.13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 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

시읽는기쁨 2007.12.03

패밀리 /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딸리야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 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리..

시읽는기쁨 200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