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23

섀도우랜드

C. S. 루이스(1898~1963)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여서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았다. 루이스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론자로 옥스퍼드대학 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독신으로 지내다가 50대가 지나서 미국 시인 조이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 영화 '섀도우랜드(Shadowlands))는 둘의 만남과 사랑, 결혼과 조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전에 루이스의 를 읽었지만 솔직히 책의 명성만큼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서양인들의 논리적 사고가 우리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책이었다. 아무튼 루이스는 변증법적 방법으로 결론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루이스의 논리에 매료되어 그의 전 작품을 읽고 심취한 후배가 있는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책으로 만나는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루이스..

읽고본느낌 2023.01.15

남들처럼

"은주야, 이제 너 좋아하는 배구장 가서 공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로 산으로 가서 맑은 공기 시원하게 마셔. 다음 생애엔 언니랑 남들처럼 4500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산책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랑 튀김도 사 먹자. 남들처럼 손 잡고 여행도 떠나고, 너 좋아하는 노래방도 가자. 남들처럼, 남들처럼." 지난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였던 안은주씨가 사망했을 때 언니가 오열하며 한 말이다. 안은주씨는 2011년에 발병하여 12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배구 선수 출신이었던 안은주씨는 누구보다 건강했다고 한다. 안은주씨는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1774번째 사망자였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기업의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가해자들은 1심에서 무죄를..

길위의단상 2022.05.30

더 홈즈맨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세 편 모두 인상 깊고 여운이 남았다.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중 한 편이 '더 홈즈맨(The Homesman)'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배경인데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서부영화 장르에 들어갈 테지만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싸움이 소재인 전통적인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 한다. 고통받는 약자를 향하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다. 무대는 서부 개척의 최전선인 네브라스카로 거친 환경과 힘든 노동,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삶은 피폐하다. 그중 세 여자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미혼이었던 커디에 의해 그녀들의 고향인 아이오와로 옮겨지게 된다. 커디는 짐마차에 세 여자를 태우고 400마일의..

읽고본느낌 2022.03.13

인생은 고(孤), 고(苦), 고(Go)

아침에 잠에서 깨어 커튼을 열면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의 낮은 기온 탓으로 생기는 복사안개다. 창밖을 보고 있으면 나도 짙은 안갯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안갯속에서는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던 동무도 자취를 감췄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 꼭 인생길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습관처럼 "곧 죽는다"를 나직히 읊조린다. 안갯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를 본다. 안 그래도 울적하던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안개가 사라지자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일어난다. 시계는 8시를 너머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하루가 시작된다.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친구가 옆에 있어서 위안이 된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오래 살게 되면 어차피 친구도 다 떠나간..

참살이의꿈 2021.10.27

겨울 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겨울 산 / 황지우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우리가 월세로 내야 하는 게 고통이란다. 고통의 해석이 신선하다. 살면서 응당 지불해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고통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을 수도 있다. 시인은 겨울 산에 올라서 사람만 아니라 산 역시 견디며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물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연유로 집에서 나왔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걸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라는 단..

시읽는기쁨 2021.10.04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녁밥을 기다리던 수백 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가던 작은 개미와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 것들은 내 구둣발 밑에서 죽어갔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처럼 나도 ..

시읽는기쁨 2021.09.25

산다는 건 힘들어

가끔 아내와 막걸릿잔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눈다. 신변에서 일어난 일부터 이웃과 자식 등 사람에 관한 얘기가 주된 화제다. 그러다가 공통으로 맺어지는 결론이 있다. "산다는 건 힘들어!" 모르는 사람은 날 보고 팔자 편하게 산다고 할지 모른다. 자식은 모두 출가시켰고, 연금을 받으니 돈 벌 걱정 없고, 무슨 염려 있겠느냐는 것이다. 블로그만 보면 신선 같이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양태는 비슷하다.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 등 근심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층간소음은 요사이 내 일상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 이웃을 미워하는 내 모습이 두렵다. 어제 아내는 위층을 다시 방문했다. 그쪽에서는..

참살이의꿈 2020.02.12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보면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찾아오는 횟수가 하루에 500~900번 정도다. 가끔 1천 회가 넘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2천 회를 넘은 날이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다.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는가 봤더니 박노해의 '동그란 길로 가다'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동그란 길로 가다'는 2012년 5월에 블로그에 올렸는데, 하루에만 이 시를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확인차 내 블로그에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시를 다시 읽어본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

길위의단상 2019.10.23

고통의 의미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인간을 뺀 다른 동물은 생존과 번식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반면에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더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 동물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었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다. 일상사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생존과 번식 본능과 관련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의미만 발견하면 생존과 번식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독신으로 수도 생활에 몰두하는 종교인이 그 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도 내놓는다.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는 그만큼 소중하다. 동물의 생존 전선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더 나은 생존을 위해 고통..

참살이의꿈 2018.09.08

남 일 아니야

작년부터 병원 출입이 잦다. 올해는 방문 목록에 신경과가 추가되었다. 병원에 가 보면 아픈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안다. 하나같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건강할 때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여겼다. 늙고 병든다는 건 먼 얘기였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를 보면 손주 같고, 노인을 보면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휠체어에 탄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를 환갑은 족히 지났을 아들이 밀고 간다. 어머니 건강이 여의치 못하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으리라. 내 모습이 투영되니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몸뚱이 사정도 당장 내일 일을 모른다. 검사 결과에 따라 환자복을 입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사가 깃털만큼 가볍다. 그래선지 TV를 보다가도 슬..

길위의단상 2016.04.03

버버리 곡꾼 / 김해자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관도 없는 주검 곁 아주 살았네 으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 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

시읽는기쁨 2015.12.23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린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시인의 대표작인 '직소포에 들다'를 시인이 직접 하는 말소리로 듣는다. 산문집 에 실린 글로, 제목은..

시읽는기쁨 2015.11.24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

타인의 고통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 남의 심장에 대못 박힌 것보다 내 손톱 밑에 든 가시가 더 아프다. 만약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낀다면 비탄과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참상이 반복될 리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함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겉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척할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건 신(神)의 영역이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한 것에서 예수의 신성이 빛난다. 인간은 결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당신 심정을 안다고 하는 건 오만이다.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건 값싼 눈물이 아..

참살이의꿈 2014.04.23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한밤중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머리가 복잡해졌다. 요사이는 '산다는 게 뭔지'를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들어 깜깜한 시간을 때웠다. 에 나오는 글로 위안되는 바가 컸다. "역경에 부딪쳤을 때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는가?' 하고 의기소침할 일은 아니다. 그런 때일수록 '이제야 성숙할 기회를 맞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가 곧 자기의 미래를 좌우한다. 결정권은 바로 지금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기에 자기를 돌아보라 하는 것이니 현실의 고(苦)나 인과(因果) 등은 그대로 수련 과정인 셈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치면 오히려 나쁜 공기와 먼지 그리고 불결한 것들을 다 청소시켜주니, 현실의 고..

참살이의꿈 2014.04.18

경안천 걷기

겨울이 되니 활동량이 확 줄어들었다. 대신에 늘어난 건 잠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도 겨울잠을 잔다면 세상이 훨씬 조용해졌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겨울이라 산에는 가지 않고 가끔 경안천에 나가 걷는다. 오늘은 집에서부터 목현천을 따라 경안천에 들어서 양벌대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6km 정도를 걷는데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추위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공기는 싸늘했다. 새들 역시 천 가운데에 모여서 미동도 하지 않고 이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속에 가시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가시는 숨어있다가 불현듯 나타나 가슴을 콕콕 찔러댄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모가,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이 가시로 박혀 있다. 건강이, 돈이 가시인 사람도 있다. 지금 당신의 '..

사진속일상 2013.12.29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2월의 덕소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은 걸. 입 닥치고 강 가운에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피정에 다녀온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옆에 있던 한 분이 2박3일 내내 울기만 하더란다. 나중에 들은 사연은 이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고사였다. 지난 10월의 일이었다. 아들은 고3 수험생으로 수능을 앞두고 있어 누나의 죽음을 알리지도 못했다. 대학..

시읽는기쁨 2012.03.14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전미정 님의 ‘상처’에 대한 아래 글을 읽는 것으로 시 감상에 대신한다. 상처는 마술이다. 그렇게 흉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처럼 피어 살랑거리고 있으니까. 젊은 날에는 들킬 새라 그렇게 숨겨두던 상처가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니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다 이야기보따리를 풀게 되면 서로들 상처 하나씩을 꺼내어 보여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처가 피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다는 이..

시읽는기쁨 2011.06.29

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등잔 / 신달자 시인이 쓴 수필집 를 읽고 가슴이 아렸다. 남편의 뇌졸중, 24년 동안의 병수발, 낙상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간병 9년, 본인의 유방암 투병 등, 운명이 어찌 이렇게 가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인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바보처럼 그 모든 시련을 감내하고 극복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시읽는기쁨 2010.09.14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암 투병중인 친구와 통화를 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암 선고를 받고 지금은 직장도 그만 두고 통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수술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려운 나는 전화 통화하기도 미안합니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예상외로 밝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명절 다음 날 친구들 몇이서 근교에 놀러갔다 왔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나 같으면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낙관적이고 밝은 성격의 친구다워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친구는 내 처지를 걱정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해 보지 못한 경험을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야.” 한계 상황에 처한 친구가 아무 것도 아닌 일의 나를 위로해 주었습..

참살이의꿈 2006.10.10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

오늘 아침에 만난 사진 한 장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강 다리 난간 위에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사진이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이 지상에 마지막 짧은 글 하나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과연 무엇이 한 사람을 저토록 절망하도록 만들었을까? 절박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저 사진을 보면안타깝기만 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신을 방지하기 위해 이젠 경찰이 한강 다리를 순찰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자살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도 있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뭘 하든 못 살까하며 그들을 질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각양각색이듯 충격에 대한 반응의 정도도 사람마다 ..

길위의단상 2004.06.11

일희일비 않기

`살아보니까 내 인생에 즐거운 날은 몇 날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날들은 그 즐거운 하루를 즐긴데 대한 빚을 갚는 날이었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본 구절인데 무척 공감이 되었다. 다만 즐거운 날이 몇 날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궂은 일도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이지만 우리는 많은 굴곡을 경험한다. 행복과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결코 삶은 뜻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나타나고 평탄한 길이 지나면 가시덤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떨 때는 늪을 통과해야 한다. 거기에는 맹수가 살고 있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

참살이의꿈 200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