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영주 25

단촌리 느티나무(5)

동네를 지나며 느티나무 주위를 어슬렁대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요사이 시골 풍경이다. 특히 겨울에는 전부 집에서 테레비만 벗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아무리 추워도 동네 골목과 얼음이 언 논에는 뛰노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다. 이 마을에서나 저 마을에서나 몰락의 징후를 읽지만 이 또한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진통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단촌리 느티나무는 고향에 있는 천연기념물 나무다. 700년의 세월 동안 인간의 흥망성쇄를 지켜보고 있다. 이 거목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어진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인간의 얄팍한 헤아림부터 벗어놓아야 할 일이 아닌가.

천년의나무 2023.01.28

봉암리 느티나무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이모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방학 때면 며칠씩 묵곤 했다. 이모 동네에는 사촌 형제만 아니라 학교 친구들도 있어서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며 놀았다. 동네 뒤에는 큰 산이 있어서 들어가면 정글 탐험하는 것처럼 모험심을 자극했다. 한 번은 뒷산에서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이모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오가는 길 역시 놀이터였다. 길 중간쯤에 넓은 사과 과수원이 있었는데 조롱조롱 매달린 사과나무의 풍경이 지금도 선명하다. 60년대였던 그 시절에는 사과는 대구 지역에서 많이 났고, 우리 지역에는 귀할 때였다. 지금은 사과가 고향의 주작물이 되었다. 이모네 동네는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경사가 진 데다가 바위가 많았다. 이모 집 마..

천년의나무 2022.10.18

토성 느티나무(2022)

고향에 내려가서 마을 둘레를 산책하다 보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이 나무로 향했다. 멀리서만 봐도 어린 시절이 왈칵 밀려오는 나무였다. 60년이 흘러도 여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나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서 풍기장에 갈 때면 꼭 이 나무 밑에서 쉬어가곤 했다. 장에 가는 어머니나 할머니는 머리에 늘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곡식을 가지고 가서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 왔다. 장으로 가는 길에서 이 나무에 오면 발품을 쉬어야 했다. 집에서 장터까지는 4km 정도 되었는데, 풍기에 가까운 이 나무는 목적지에 다 왔다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토성'이 공식 행정명칭은 아니지만 어릴 때 우리는 이 나무를 토성 느티나무라 불렀다. 이번에 어머니와 이..

천년의나무 2022.10.15

소천리 느티나무

부석사 가는 길(영주시 부석면 소천6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가을이 되어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부석사까지 죽 이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한 나무로 보이지만 실제는 두 그루가 부부처럼 꼭 붙어 있다. 피부도 하나는 울퉁불퉁하고 다른 하나는 매끈한 것이 어느 쪽이 남편이고 아내인지 금방 확인 된다.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천년의나무 2020.10.27

단촌리 느티나무(4)

고향집에 가까이 있는 천연기념물 나무라 고향에 내려갈 때면 들러보곤 한다. 언제 어느 때 찾아보아도 외경심을 갖게 하는 큰 어른이시다. 유감인 건 아직껏 노란 단풍이 들 때는 맞추지를 못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사계절의 모습을 모두 담아보고픈 나무 중 하나다. 이번 여름 태풍에 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 같다. 끊어진 가지는 버리지 않고 나무 밑에 고이 모셔 놓았다. 휑하니 빈 줄기 속이 세월의 깊이를 말해 준다. 나무를 보면 늙는다기보다 잘 익어가는 것 같다. 줄기가 꺾어지는 것도 완성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아닌가 싶다.

천년의나무 2020.10.12

소수서원 은행나무

우리나라 서원에서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흔히 본다. 원래 공자는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왜 서원의 상징이 은행나무로 대체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한자로는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같은 글자다. 그렇다고 설마 학자들이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착각하지는 않았을 테고, 은행나무를 대용으로 삼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도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수령이 5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아마 소수서원이 세워질 무렵에 심어졌을 것이다. 마치 선비의 기상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간 모습이 기운찬 은행나무다.

천년의나무 2020.10.11

단촌리 느티나무(3)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단촌리 느티나무에 먼저 들리다. 고향 집에서 차로 10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다. 겨울이 되니 느티나무의 우람찬 풍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줄기의 굵기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무다. 볼 때마다 "대단하시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줄기에 비해 키가 작으니 오히려 안정감이 있다. 이렇게 살아남기까지 감내해야 했을 무수한 인고의 때를 생각한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 여기 거인 할아버지 앞에서 나는 너무 왜소해진다. 쓸쓸한 겨울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천년의나무 2019.02.06

단촌리 느티나무(2)

집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지만 8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보는 나무다. 천연기념물 273호로 고향의 자랑거리인 큰 느티나무다. 수령이 약 700년이고, 줄기 둘레는 10m에 이르는 거목이다. 중심에 서면 지름이 20m가 넘게 가지가 뻗어 있어 하늘을 다 가린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외형에 생육 상태도 무척 양호하다. 단촌리의 정자나무로 매년 음력 8월 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 밭에서 몇 사람이 일할 뿐 동네는 조용했다. 700년 전이면 조선이 건국된 시기다. 인생 백 년에도 수많은 풍파를 겪는데 이 나무는 얼마만 한 시련을 견뎌내고 이런 거인이 되었을까. 그러면서 수십 세대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뛰어놀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

천년의나무 2016.07.13

토성 느티나무(2)

집 부근에 두고도 이제야 알아보다니, 등잔 밑이 어두운 게 맞다. 성년기에 접어든 듯한 이 느티나무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균형 잡힌 외형이 아름답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단아한 모양새다. 이것이 곱게 자란 느티나무의 전형적인 외모일 것이다. 지나는 사람마다 "참 곱다!" 하고 감탄한다. 겨울에 볼 때보다 신록의 잎으로 단장한 모습이 더 예쁘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 목록에 추가해야겠다.

천년의나무 2016.04.27

토성 느티나무

할머니와 엄마 뒤를 따라갔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하얀 행렬이 마을을 나섰다. 기찻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고, 사과 과수원 사잇길을 한참 걸으면 장터가 나왔다. 사람 북적이고, 온갖 물건과 구경거리가 있는 장날이 아이들은 좋았다. 지나는 길에 토성 마을이 있었다. 느티나무도 한 그루 있었을 것이다. 오고 갈 때 잠시 발쉼을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50여 년 전 풍경을 잠시 회상해 본다. 공작이 나래를 편 듯한 느티나무가 그 자리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6.02.15

성내리 은행나무

우리나라에 '성내리'라는 지명은 많다. 성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면, 성을 경계로 성 안 마을과 성 밖 마을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풍기도 조선 시대에는 풍기군이었으니 성내리라는 지명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 성터의 흔적도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풍기군 옛 관아터에 수령이 7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는 무척 노쇠한 모습이다. 전체 조선 시대와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옛 건물은 전혀 찾을 길 없고, 오직 이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상을 증언하고 있다. 나무 옆에는 풍기초등학교가 있다. 국민학교 3학년쯤에 여기로 전학 와서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 학교다. 아마 1961년 경이었을 것이다. 촌놈에게는 전기가 들어왔던 풍기는 휘황한 도회지였다.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면서 풍기 생활..

천년의나무 2014.01.02

휴천동 느티나무

영주에 있는 옛 중학교 모교를 찾아갔다. 졸업한 지 40년도 더 지났는데 다시 찾은 지도 30년은 되는 것 같다. 학교나 주변이나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그때는 낮은 집들이 듬성듬성 있어 멀리서도 학교 건물이 보였는데 지금은 온통 아파트와 주택으로 둘러싸여 코앞까지 갔어도 학교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다. 학교도 완전히 변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은 어디에고 없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곱씹으며 멀거니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때 반가운 이 나무를 보았다. 어렴풋이 옛 생각이 떠올랐다. 이 느티나무는 학교 밖에 있었는데, 학교에서 이 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입구에있었다. 등하교할 때몇몇 친구는이 느티나무 옆을 지나 집과 학교를 오갔다. 그중에 가까웠던 친구 N도 있었다. 종례를 마치면 티격태격 장난치면서 운..

천년의나무 2012.05.08

순흥면사무소 느티나무

영주시에 있는 순흥면사무소는 옛 순흥도호부가 있던 자리다. 사무소 주변의 왕버들, 느티나무 고목들이 옛날의 자취를 말해준다. 봉도각(逢島閣)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정원은 도호부 청사의 뒤뜰이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갈 때 순흥을 지나면서 한 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이 느티나무는 도호부 옛터에 있는 여러 고목 중 하나다. 수령이 400년인데 줄기에 공동이 생겨 밑바닥까지 깊이 패 있다. 아이들이 들어가 놀 수 있을 만한 넓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새는 무척 단아하다. 마치 옛 선비의 정갈한 마음 자세를 보는 듯하다.

천년의나무 2011.12.08

적서동 느티나무

줄기에 난 구멍들이 사람의 두 눈과 입을 닮았다. 800살이 된 느티나무 얼굴이다. 엄청난 괴목이어서 느티나무 할아버지의 포-스가 대단하게 다가온다. 경북 영주시 적서동에 있다. 키는 16 m, 줄기 둘레는 6 m다. 유감스럽게도 나무의 관리 상태는 엉망이다. 옆에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당산나무가 있던마을은 사라진 것 같다. '동 보호수'였는데 마을이 없어지니 관리할 사람이 없다. 낡은 시멘트 자국과 쓰레기들만 주위에 산재하고 있다. 무슨 병인지 나뭇잎도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영주시 당국에서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천년의나무 2011.08.16

병산리 갈참나무

갈참, 굴참, 졸참, 신갈, 떡갈, 상수리, 이 참나무 육형제는 구별하기 힘들다. 지금까지도 두루뭉술 그냥 참나무라 부른다. 참나무는 정식 이름이 아니라지만 워낙 익숙한 말이라 차라리 인정을 해주는 게 어떨까 싶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에 있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갈참나무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었다. 산에서 흔히 만나는 잡목도 연륜이 쌓이니 이렇게 품위 있는 거목이 되었다. 나무는 마을 옆 높은 터에서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키는 15 m, 줄기 둘레는 4 m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세종 8년(1426)에 봉례공 황전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왜 하필 갈참나무일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우리가 모르는 깊은 뜻이 있을지 모른다. 황전은 순흥에 위리안치되었던 금성대군이 만나..

천년의나무 2011.05.17

신전리 느티나무

고향에 있는 신전리(新田里) 마을 앞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함께 했던 나무다. 그러나 우리가 다니던 길에서는 좀 멀리 떨어져 있어 이 나무에 얽힌 추억은 거의 없다. 어쩌다 나무 옆을 지나게 될 때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이 느티나무는 신전리 당산나무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기전 날에 동네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에 모여 동제(洞祭)을 지냈다고 한다. 먼저 연초가 되면 제사를 주관할 유사(有司)를 네 사람 뽑았다. 유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무 흉사가 없었던 집에서 골라야 했다. 그리고 영주 우시장에서 가서 제물로 바칠 소를 사 가지고 오는데 소에게는 존칭을 썼다. 보통 "이랴!"라고 하지만 이 소에게는 마치 사람에게 하듯 "가시더"라고..

천년의나무 2011.01.22

옥대리 은행나무

영주에서 소백산 고치령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단산면 옥대리를 지나야 한다. 길가를 따라 오래된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옥대 3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있다. 수령은 약 700 년이 되었다. 나무는 노쇄하여 줄기는 많은 부분이 보형물로 채워져서 지탱되고 있다. 위쪽의 원줄기도 죽었는데 새로난 가지에서잎이돋아나고 있다. 그래서 나무도 나이에 비해서는 아담하고 단촐해 보인다. 아마 인공적인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면 나무는 진즉 쓰러졌을지 모른다. 은행나무는 약 1억 5천만 년 전인 쥬라기 때에 가장 번성했다. 그리고 중생대가 끝나면서 쇠퇴했는데 공룡과 거의 운명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에는 중국에만 겨우 몇 그루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지금은 전세계로 퍼져나..

천년의나무 2008.11.14

금성단 은행나무

충절의 고장인 순흥 금성단 옆에신목(神木)이라 불리는은행나무가 있다. 1457 년, 순흥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고 순흥 고을은 역모지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피바다가 된다. 이 사건으로 순흥부는 폐지되고 풍기군에 병합되어 버렸는데, 그때도 고목이었을 이 은행나무 또한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그뒤200여 년이 지나 순흥도호부가 회복되고 사육신이 신원되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신기한 나무다. 키가 30 m에 이르는 이 나무는 두 개의 줄기가 힘차게 위로 솟아있다. 나이는 1100 살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삼척의 늑구리 은행나무와 서로 부부관계라는 것이다. 두 나무가 떨어진 거리는 직선으로도 60 km가 되어 생물학적으로 수분이 될 가능성은 적어..

천년의나무 2008.11.10

단촌리 느티나무

고향인 영주시 안정면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가 있다. 그래도 집에서는 걸어서 한 시간 쯤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 나무는 나이는 약 700 년이고, 가슴 둘레가 10 m에 이르는 거목이다. 아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느티나무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찾아간 날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마침 나무 밑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오수를 즐기고 계셔서 조심조심 나무 둘레를 돌아보았다. 정말 줄기의 굵기가 대단했다. 고향에 이런 나무가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단촌리는 안정면에서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속한다. 전에는 여기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당산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나무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수호신이면서 주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음력 정월 보름이..

천년의나무 2008.08.08

안심리 느티나무

나무를 좋아하다보니 시골 마을에 들어서면 우선 정자나무가 있는지부터 돌아보게 된다. 마을에 큰 나무가 있으면친근감이 들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젖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나무가 없는 마을은 왠지 쓸쓸하고 허전하다. 정자나무는 단지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그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표현해주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란 고향 마을에는 그런 나무가 없다. 어릴 때야 나무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자주 놀러가던 이웃 마을에 이 느티나무가 있었다.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이 나무를 중심으로 숨바꼭질을 하면서 놀았다. 그리고 여름이면 넓은 그늘 밑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설날, 고모에게 세배를 하러 이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보니 감회가 깊다. 안정면 안심리 한가운데에 있는..

천년의나무 2008.02.11

남대리 소나무

부석면 남대리는 큰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 마을이다. 지난 번에 마구령을 넘으려고 잠시 지나쳤는데, 옛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시간 여유가 없어서 찬찬히 둘러보질 못했다. 지금은 40 가구 정도밖에 안 되지만 예전의 남대리는 200 가구 이상이 모여 사는 큰 동네였다고 한다. 소백산맥 넘어 부석장을 보러 오가는 장꾼들이 하룻밤을 묵거나 쉬어 갔을 터으므로 주막집들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주막거리의 흔적은 남아 있다. 옆으로는 남대천이 흐르고, 새로 포장된 현대식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가는 길에 깔끔하게 정리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굉장히 신경을 쓴 정성이 느껴지지만 남대리라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조금은 곤혹스러웠다. 정비를 하는 것은 좋지만 옛 산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되었으면 더 ..

천년의나무 2007.11.06

소수서원 솔숲

소수서원이 고향집에서 가까이 있어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들렀지만 주변 솔숲은 최근에 들어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기사 서원 자체에 대해서도 그동안은 별로관심이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 사는 땅에 대해서는 의외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친구들이 부석사를 찬탄할 때 거기의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했었다. 한국인에게 소나무의 의미는 각별하다.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로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소나무를 흔히 심었다. 소나무는 선비들이 곁에 두고 아꼈던 나무였다. 소수서원 둘레에 소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수서원 둘레의 솔숲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곧게 뻗은 소나무 줄기에서 ..

천년의나무 2007.08.15

안심리 포플러나무

어릴 적 고향 마을 앞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은 비포장의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었는데 가끔씩 자동차가 나타나 뽀얀 먼지를 날리며 지나갈 뿐 늘 한적한 길이었다. 차 보다는 걷는 사람이 훨씬 많았고, ‘구루마’라고 불렀던 소달구지가 도리어 눈에 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도로였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도시로 통하는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신작로에는 키다리 포플러나무가 길 양쪽으로 끝없이 길게 서 있었다. 어린 우리들 둘이서 팔을 벌려도 잡히지 않을 만큼 큰 나무들이 남에서부터 북으로 약 10km에 걸쳐서 초록의 띠를 만들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우리들의 통학로였으며, 포플러나무들은 우리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여름에 포플러나무는 매미들의 집이었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들이 찰랑찰랑 흔..

천년의나무 2005.09.08

태장리 느티나무

오래 된 동네 어귀에는 정자나무라고 불리는 고목이 있다. 대개 느티나무, 팽나무, 은행나무로 되어 있는 이런 나무들은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도 한다. 어느 날 순흥을 지나다가 이 정자나무를 만났다. 국도 바로 옆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안내문에 보면 이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3m에 달하는데 주민들의 휴식처이면서 마을의 안녕과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음력 정월 보름이면 이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한다. 그 말대로 나무 아래에는 돌로 만든 제단이 놓여 있다. 그런데 지금 한여름의 오후 시간, 동네며 나무는 온통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고목에 매미 소리 들리고,..

천년의나무 2005.08.22

순흥면 연리목송

영주시 순흥면사무소 구내에는 재미있게 생긴 소나무가 있다. 두 줄기가 꽈배기처럼 몸을 서로 꼬면서 자라고 있는데 중간에서는 둘이 완전히 붙어서 한 몸이 되어 있다. 연리지(連理枝)나 연리목(連理木)으로 불리는 나무가 있다.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나 줄기가 합쳐져서 한 나무로 된 것을 가리키는데떨어지기 어려운 부부간의 금슬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얘기만 들었지 아직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여기 순흥의 소나무는 아름다운 연리목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밑을 보면 한 나무의 줄기에서 갈라진 것이어서 완전한 연리목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올려다보는 나무의 모양은 무척 신기하다. 연리지로 되는 어떤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둘이서 얼마나 그리웠으면 저렇게 한 몸을..

천년의나무 200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