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27

어머니와 고추를 심다

고향에 내려갔더니 마침 고추 모종이 도착해 있었다. 맞춘 건 아닌데 묘하게 때가 맞아 어머니 일손을 덜어줄 수 있었다. 특히 고추 지주대를 세우는 작업은 노모가 하기에는 힘에 겨워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터였다. 어머니 농사는 올해 변곡점을 맞았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 멀리 있는 밭의 들깨 농사를 그만둔 것이다. 어머니는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걱정 하나를 덜어낸 셈이다. 아흔 넘은 노인이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짓는 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제 집 가까이 있는 밭만 남았다. 여기에 고추 300포기를 심었다.   모판에서는 파릇파릇한 벼 새싹들이 자라고 있고,  고향집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제비가 찾아왔다. 마을에서 우리집에만 유일하게 제비가 찾아온다. 작년, 재작년에 쓰던 옛 집이 고스란..

사진속일상 2024.05.02

텃밭 허수아비

이웃 텃밭에서 허수아비가 망을 보고 있다. 하늘을 보면서 싱긋 웃는 모습에서 노래하는 송창식이 떠오른다. '참새의 하루'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바람이 부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허수아비 뽐을 내며 깡통 소리 울려대겠지" 요사이 새들이 허수아비를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친구로 여기지 않을까. 하도 별스런 일들이 자주 생기는 세상이니 허수아비와 새가 동무가 된다 한들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소년 시절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곡식이 익어가는 철이 되면 아이들은 논으로 양철통을 들고 나갔다. 여무는 벼 낟알을 먹기 위해 몰려다니는 참새떼를 쫓기 위해서였다. 허수아비로는 참새를 막는데 역부족이었다. 양철통을 북처럼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면 논에 내려앉았다가도 부리나케 도망갔다. 동네..

사진속일상 2023.08.04

텃밭 농사를 준비하다

농사라고 부르기에 민망하지만 어쨌든 올해도 텃밭을 하기로 했다. 아내의 손가락 통증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이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아내는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재미에 이미 길들여져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일 하러 나갈 때는 귀찮지만 마치고 나면 뿌듯하고, 흙을 만지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있다. 세 이랑을 삽으로 일구고 퇴비 여섯 포대를 뿌려서 섞어주었다. 모레와 글피에 비가 온다니까 그 뒤에 비닐을 덮어줄 예정이다. 무엇을 심고 가꿀지는 아내가 결정한다. 작은 텃밭이지만 내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티격태격하기 십상이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힘을 써야 하는 노동이 필요할 때 등 나는 마나님 명령을 받드는 돌쇠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다.

사진속일상 2023.04.03

고추 따고 벌초하고

고향으로 노모를 뵈러 가는 마음이 편치 않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자꾸 일이 뒤엉키니 어찌할 길이 없이 착잡하다. 휴게소마다 들러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마침 내려가는 때가 고추 따는 시기와 맞물렸다. 어머니의 고추 농사라야 200포기밖에 안 된다. 전에 비하면 1/5로 줄었다. 아들보다는 거드는 일손이 생긴 것에 어머니는 기뻐하신다. 올해 고추는 풍년이다. 튼실한 고추가 가지 사이에 너무 빽빽하게 달려 있어 빼내는 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것도 노동이라고 두 시간여 두 물째의 고추를 땄더니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오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선산의 벌초를 했다. 개망초로 덮여 있었는데 뽑아내니 깔끔해졌다. 이렇게 일 할 줄은 모르고 내려왔는데 고되지만 끝나고 나니 ..

사진속일상 2021.08.15

어머니와 들깨를 심다

어머니의 경작 본능을 무슨 수로 말릴까. 올해도 어김없이 들깨 농사를 시작했다. "가만 두어라.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한다." 10년 전부터 돌아오는 똑같은 대답이다. 밭은 집에서 1km나 떨어져 있고 산자락도 넘어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나한테도 숨이 차다. 밭도 500평이나 된다. 그런데도 매일 왕복하며 가꾸어놓은 밭이 정원처럼 말끔하다. 관리하기 쉬워 들깨를 심는다지만 아흔 넘은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도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 좋아서 하는 일, 끄떡없다!" 하신다. 밭일보다도 오가는 과정이 걱정이다. 경사진 산길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찌될까. "넘어지려고 하면 평지에서도 넘어진다. 산길은 조심해서 오히려 괜찮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농사 욕심은 ..

사진속일상 2021.07.09

들깨를 수확하다

어머니의 농사 사랑은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 지팡이를 짚고 가서라도 빈 밭을 놀리지 않으신다. 밭으로 가는 산길이 험해서 자식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올해는 뒷밭에 들깨 한 종류로만 놓으셨다. 300평 정도 되는데 수확은 엄두가 나지 않으셨는가 보다. 일주일 전에 여동생이 내려가서 들깨 베는 걸 도왔고, 털 때는 내가 내려갔다. 이틀 정도 예상했는데, 다행히 하루 만에 끝냈다. 다른 밭작물처럼 들깨도 올해는 수확이 시원찮았다. 경제적으로만 따진다면야 사서 먹는 게 더 이득이다. 그러나 어머니 입장은 다르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농사를 손에서 떼기도 힘들거니와, 길러서 자식 주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생존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다. 만약 집안에만 계..

사진속일상 2020.10.27

논어[211]

번지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려고 한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채소 가꾸는 법을 배우려고 한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늙은 밭갈이꾼만 못하다." 번지가 나간 후에 선생님 말씀하시다. "하찮은 애야. 번지는! 윗사람이 예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리에 살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믿음직하면 백성들이 진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사방 백성들이 아기를 업고서도 모여 올 것인데, 농사짓는 법은 어디다 쓰려는지!" 樊遲 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上好信 則民莫敢不用精 夫如是 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 子路 4 선비 대접을..

삶의나침반 2016.09.06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 고재종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씨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간지럼도 태우고 보슬비도 와서 촉촉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세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은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시읽는기쁨 2014.04.12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 명장이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쓸 나무를 고를 때, 나무의 나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달의 위치까지도 고려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이 수평선에 낮게 떠 있고..

시읽는기쁨 2013.12.24

봄 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봄 논 / 이시영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듣기 좋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보기 좋다고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논에 들어간 물이 벼를 키우고, 그 곡식이 생명을 기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땅의 차가운 물과 하늘의 뜨거운 불이 만나 나락을 만드는 것이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곧 물과 불의 결합이다. 어렸을 때는 논두렁을 따라 잘 다녔다. 개울로 놀러 나갈 때는 논두렁을 지나야 했고, 학교에 오갈 때도 지름길이 논두렁이었다. 논두렁을 따라 걸을 때면 그 폭신폭신한 감촉이 좋았다. 좁아서 조심해야 했지만 장난꾸러기들은 일부러 뛰어가는 스릴을 즐겼다. 논두렁에는 한두 개 쯤 물이 ..

시읽는기쁨 2013.05.07

마늘 놓고 양파 심고

농사 9단인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거들었다. 마늘 놓고, 양파 심고, 배추 뽑아 절이고, 시래기 만들고, 땔감 나르고...., 그러나 일보다는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많았다. 고향에 갈 때는 친구도 만나고, 소백산 자락길도 걸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아랫목에 누우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며칠 동안 잘 빈둥거렸다. 어머니의 부지런에 비하면 나는 한없는 게으름뱅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야야, 날 보고 일 그만하라고 하지 마라. 하고 싶어도 못 할 때가 곧 온다." 평생을 논밭에서 사신 분이시다. 농사일은 어머니의 업보면서 낙이다. 지금은 밭 몇 뙈기만 부치시지만 이젠 그것도 힘에 겨워하시는 게 역력하다. 어머니의 힘겨운 노동에서 나오는 작물은 전부 자식들 입으로 들..

사진속일상 2012.11.10

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는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로 생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다. 는 농업과 먹을거리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대한 경고와 함께 인류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실험적 삶을 살고 있다. 웬델 베리가 보는 위기의 시작은 인간이 땅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보았을 때부터였다. 농민이 사라지고 농기업가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뒤틀린 것이다. 그는 1950년대에 트랙터를 몰며 앞에서 일하는 노새의 느린 걸음을 보고 속을 태웠던 때를 안타깝게 기억한다. 기계와 생명의 경쟁에서 승자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일손을 줄이는 기계와 무한..

읽고본느낌 2012.06.01

고추 심기

고향에 내려가 고추 심는 어머니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가 미리 골을 내어 비닐을 씌어놓았기에 고추를 심고 지주를 세우는 일만 하면 되었다. 올해는 고추모 800포기를 심었는데 해마다 양이 조금씩 줄어든다. 어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점점 약해지는 탓이다. 한창 많았을 때는 2,000포기 가까이 키웠다. 어머니가 농작물을 가꾸는 정성은 자식을 기르는 이상이다. 마을의 이웃들도 감탄할 정도다. 홀로 되셔서 삶의 낙을 농사일에 붙이셨다. 작물 가꾸는 게 자식 키우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신다. 힘이 들어도 얘들이 자라는 걸 보면 보람이 있고 재미있다신다. 또 정성이 그만큼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놀아도 밭에 나와 놀아야 한다며 하루도 밭 출입을 거르는 일이 없다. 어머니가 고추모를 만지는 모습을 ..

사진속일상 2012.05.08

장자[179]

옛날 내가 농사를 지을 때 밭을 얕게 갈았더니 그 결실도 역시 나에게 얕은 만큼 보답했다. 김매기를 풀 베듯 소홀히 했더니 결실도 나에게 소홀한 만큼 보답했다. 나는 이듬해에 농사법을 바꾸어 밭갈이를 깊이 하고 호미질을 자주 하였더니 벼가 번성하고 결실이 좋아 한 해 양식이 넉넉했다. 昔予爲禾 耕而로망之 則其實亦로망而報予 芸而滅裂之 則其實亦滅裂而報予 予來年變齊 深其耕 而熟우之 其禾繁而滋 予終年厭殖 - 則陽 3 마음을 밭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성경에도 씨 뿌리는 사람을 비롯해 마음을 밭에 비유하는 예수의 말이 여러 군데 나온다. 선조들은 아예 ‘마음밭[心田]’이라고 불렀다. 게을러 밭을 얕게 갈면 결실도 그만큼 작다. 소홀히 하면 소홀히 보답하는 게 농사다. 마음 농사도 이와 다..

삶의나침반 2011.09.14

태양초

고추를 말리는 어머니의 정성은 극진하시다. 요사이는 고추 농사가 힘들다고안 하는 집도 많고, 하더라도 고추 말리기가 고생이라며 건조기 신세를 지는 게 보통인데 어머니는 억척스레 전통적인 방법으로 태양초를 만드신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오면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 물기를 제거하고 비닐하우스에서 부직포를 덮고 며칠간 말린다. 어느 정도 색깔이 익으면 다시 마당에서 완전히 말린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고추 수확이 시작되는 8월 초부터 한 달 반 동안 고향집 마당은 늘 붉은 고추로 덮여 있다. 지금 농촌에서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고추를 말리는 집은 보기 어렵다. 도시 사람들이 태양초라고 사 먹는 고추도 대부분 기계에서 말린것이다. 심지어는 태양초로 보이기 위해 고추 꼭지를 물에 불..

사진속일상 2009.09.07

마지막 뉴스 / 서정홍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막 들어온 긴급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짓고 살아가던 몇 안 남은 늙은 농민들이, 농사일 힘에 버거워 자기 먹을 농사만 짓기로 결의하고 파업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칠레, 세계 모든 농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마구 들어오던 수입 농산물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도시는 거의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도시 큰 상점뿐만..

시읽는기쁨 2009.04.23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고향집의 어머니는 며칠 전에 모내기를 하셨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모판에 있는 여린 벗잎의 색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라고 했다. 물이 찰랑..

시읽는기쁨 2008.05.23

자비 / 이경

잘 썩어 부드러운 흙에 골을 내어 눈이 빨간 무씨를 넣고 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흙을 덮는다 까치가 쏘물다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가 가고 나면 내려와 솎아먹을 것이다 씨를 묻고 내려온 뒷날 밤 마침맞게 천둥번개 치고 봄비 내린다 이건 썩 잘 된 일이다 봄비가 씨앗 든 밭을 측은측은 적시는 일만큼 크고 넉넉한 자비를 본 적이 없다 모종을 얻은 밭의 기쁨이나 밭을 얻은 모종의 기뿜이 막상막하다 심어놓고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서야 한다 - 자비 / 이경 이 시를 읽으면 농사는 성스러운 제의(祭儀)와 같다. 지금은 헛간에나 쳐박혀 있을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새삼 눈물겹게 다가온다. 근원적 의미에서 이런 농사를 짓는 농부는 이젠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들다. 올해는 흙을 밟을 일도 없게 생겼다. 뿌리..

시읽는기쁨 2007.03.29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 김용택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아, 농사는 우리가 쎄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놓응게 문뎅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아, 저 지랄들 헝게 될 일도 안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아,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이사 바로 혀서 풍년만 들면 뭣헐 거여 안되면 안되어 걱정 잘되면 잘되어 걱정 풍년 괴민이 더 큰 괴민이여 뭣 벼불고 뭣 벼불면 뭣만 남는당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을 뙤놈이 따먹는 격이여 야, 그렇잖혀도 환장헐 일은 수두룩허고 헐일은 태산 겉고 말여 생각허면 생각헐수록 이갈리고 치떨리능게..

시읽는기쁨 2006.11.24

똥과 땅

모양이 닮은 글자는 필시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사랑’, ‘님’과 ‘남’, ‘배우다’와 ‘비우다’ 같은 글자가 그렇습니다. 그런 글자 중에 ‘똥’과 ‘땅’이 있습니다. 우연히 닮았을 수도 있지만 똥이란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가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연 듭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밥 먹고 똥 싸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왕후장상도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고, 똥 싸고 뒤를 닦아야 하는 것은 시골 무지렁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집어삼키기만 하고 내보내지를 못한다면 며칠을 못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종내는 죽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탐욕스런 현대 문명을 닮았습니다. 끊임없이 먹어치우기만 하고 나눌 줄은 모르는 문명은 ..

참살이의꿈 2005.11.03

배추와 호박

열흘 전에 감자를 캐낸 자리에 읍에서 사온 배추 모종 100 포기를 심었습니다. 그것이 이만큼 예쁘게 자랐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배추가 잘 자랐다고 한 마디씩 칭찬을 해 줍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던 도시 사람이 하는 노릇 치고는 그래도 봐줄 만 하다고 하는 뜻임을 압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어설프게 심었던 작년에도 그런대로 배추는 잘 되었습니다. 이웃에서는 약을 쳐도 벌레가 먹는다는데, 우리는 약 한 번 치지 않았으면서 별로 흠집 없는 배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서 와서 보고 이 집은 물도 안 주고, 약도 안 치는데 어떻게 배추가 이렇게 잘 자랐느냐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아마도 새로 들여온산흙에서 키워서 병충해의 침입..

참살이의꿈 2005.08.28

항복

풀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터를 장만하고 작물을 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농약은 사용하지 말자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제초제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통제를 최소로 하면서 작물을 가꿔보고도 싶었지만 시골 마을 한가운데서 그렇게 했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일 테니 그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깔끔한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시골에서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합니다. 화단만 하더라도 적당히 풀과 어우러져서 꽃들이 피어있는 쪽이 저에게는 훨씬 더 보기에 편합니다. 이것도 풀이 적당히 나 있을 때 얘기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방심하면 풀은 온 터를 점령해 버립니다. ..

참살이의꿈 2005.06.22

작물 심기를 마치다

어제로 텃밭에 작물 심기를 대락 끝냈습니다. 그동안 한 달여에 걸쳐 심은 작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옥수수 300포기 - 수확 시기를 다르게 하기 위하여 두 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심음(4/17, 5/1, 5/.15). 빨간 씨앗 옥수수와 강원도 옥수수 두 종류. 감자 100포기 - 강원도에서구해온 감자씨를 심음(4/17).현재 잘 자라고 있음. 콩 160포기 - 강낭콩, 노란콩, 검정콩, 완두콩, 서리태 등 구할 수 있는 콩은 다 심어 봄4/24-5/15). 덩굴을 타고 올라가는 완두콩에 기대가 큼. 고구마 60포기 - 집에서 낸 고구마 싹을 심었으나(5/1) 절반이 말라 죽음. 이번 주말에 모종을 사서 다시 심을 예정임. 호박 12포기 - 작년에 비해서 수량이 줄어듬. 4/17에 심었는데 이제 떡잎..

참살이의꿈 2005.05.16

새싹

콩, 고구마, 토마토, 그리고 다시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이곳 분들은 고구마를 꽂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감자도 놓는다고 하구요. 보통 우리는 나무고 작물이고 전부 심는다고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종류에 따라 표현이 다른 게 재미있습니다. 사실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 본 사람이라면 '감자를 놓는다' 그리고 '고구마를 꽂는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고맙고도 재미있습니다. 산은 벌써 신록의 색깔을 입기 시작했지만, 밭에는 이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심었던 옥수수는 5 cm 정도 키가 자랐고, 감자싹도 덮여있던 흙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옥수수는 얼마나 잘 자라는지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릅니다. 지금의..

참살이의꿈 2005.05.02

감자를 심다

밭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옥수수는 몇 해째 심어 왔지만 감자는 처음입니다. 동생이 강원도 씨감자를 구해 주었고, 전주에서도 붉은 감자를 줘서 두 종류를네골에 심었습니다. 옥수수도 네 골 심었습니다. 경운기로 골을 만드는 것을 로타리를 친다고 하지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괭이로 골을 만들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보시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경운기를 몰고 와서 이렇게 훤하게 일을 해 주셨습니다. 기계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하루 종일 할 일을 30분 만에 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하얀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감자 눈을 따내서 그걸 흙에다 심는 작업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흙을 만지는 자체가 즐거운 일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생명을 기르는 의미가 곁..

참살이의꿈 2005.04.18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절망하는 농심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그저께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급기야 도심에서의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작년의 농민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그 때 접한 농민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한이 가득차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젊은 농민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TV로 보는 전경과의 충돌은 농민들의 속마음이나 울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가는 길이 어디인지 심각하게 자문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 그리고 이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쪽의 공통된 정서는 박탈감이다. 빛 좋은 개살구식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길위의단상 200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