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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폭설

첫눈이면서 대단한 폭설이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27일 새벽 3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28시간 동안 누적적설량 45cm가 쌓였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1월에 내린 눈의 최고 기록이었다. 28일 아침의 집 앞 도로는 옴짝달싹 못 하는 자동차가 긴 줄을 만들었다. 학교는 휴교했다. 나도 바깥 약속이 있었지만 나가지 못했다.  기상청에서는 이번 폭설의 원인을 "예년보다 높은 해수면 온도로 인해 서해상의 해기차(대기와 바닷물간 온도차)가 크게 났고 그로 인해 찬 공기가 따뜻한 바다 위를 통과하면서 지속해서 수증기로 인한 눈구름대가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했다. 이 역시 지구온난화의 한 결과라는 얘기다. 아름다운 설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이런 식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지구온난화가 진행한..

사진속일상 2024.11.29

첫눈 내리는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밤에 첫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뇌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설레는 손길로 커튼을 젖히니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점점 기온이 내려갈 테니까. 오디오북으로 소설 한 편을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커튼을 여니 반가운 손님처럼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돋보이게 드러난 눈송이가 춤추듯 흩어져 내렸다.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열린 창문 틈으로 "꼬끼요", 멀리서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눈치우개로 바닥을 미는 소리가 났다. 작업을 하는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자동차 바퀴자국을 눈은 선명하게 드러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사진속일상 2024.11.27

눈 내린 탄천

밤 사이에 많은 눈이 내렸다. 당구 모임이 있는 날이라 오전에 분당으로 나가면서 탄천에 잠깐 들러보았다. 나무들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옷을 무겁게 걸치고 있었다. 하늘은 다시 눈이 쏟아질 듯 찌뿌둥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도시의 드문 설경을 찍느라 분주했다. 셋이 모인 당구 모임은 단출했다. 모임 내에서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터라 분위기가 무거웠다. 당분간 내가 연락책을 맡기로 했다. 오후가 되니 눈은 많이 녹고 오전의 설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여정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짧은 여행객들이다. 따스한 날에 내린 눈처럼 우리 또한 소리소문 없이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원망할 일도, 안달할 일도 없어라. 그때가 되면 다 부질없었다고 할 게 아닌가. 세파의 잔물결에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

사진속일상 2024.02.23

화이트 크리스마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이 오전까지 이어지며 지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일주일 넘게 움츠리게 만든 한파도 물러가고 포근한 성탄절이다.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가 성탄 축하 인사를 전하며 이사야서의 성탄 예언을 적어 보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친구에게 더욱 애틋하며 간절한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세상의 연약하고 버림 받고 힘없는 존재들이 따스하게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상처 입은 선한 마음도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흰 눈이 세상을 순일하게 감싸주듯, 안팎의 소란이 잠들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속일상 2023.12.25

첫눈(2023/11/29)

지지난주에 눈이랍시고 살짝 보이긴 했다. 그러나 워낙 찔끔 내리고 땅에 흔적도 남기지 않아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낮에는 가랑비가 내리더니 저녁이 되면서 눈으로 변했다. 이 역시 영상의 기온 탓에 바닥에 쌓이지는 못하고 금방 녹았다. 밖에 나가 첫눈을 맞아보려고 옷을 갈아입었더니 눈은 사그라들며 이내 그치고 말았다. 집에서 창문으로 바라본 올해 첫눈이었다.

사진속일상 2023.11.29

강원도에서 꽃과 눈을 보다

지난 주말에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는데 특히 강원도에 많이 쏟아졌다. 이번 눈은 물기를 머금은 습설(濕雪)이어서 가뭄 해소와 산불 예방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복설(福雪)이라고 부르는 고마운 눈이다. 눈을 보러 아내와 함께 강원도로 갔다. 마침 강릉 대도호부관아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서 일차 목적지는 그곳으로 잡았다. 놀랍게도 담장을 따라 있는 대여섯 그루의 매화나무에 매화꽃이 활짝 펴 있었다. 설악산의 설경을 멀리서 보기 위해 경포호에 갔다. 눈 내린 다음날 사진은 산 전체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많이 녹은 것 같다. 산 정상부만 백설의 모자를 쓰고 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눈에 띄는 건 새들이다. 사진을 찍으며 새 이름을 맞추어 보다. ▽ 청둥오리 ▽ 물닭..

사진속일상 2023.01.19

눈 내린 아침

올겨울 들어 첫눈은 지난 3일에 내렸다. 새벽에 살짝 내린 터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눈 온 흔적만 보였다. 오늘 아침에는 나붓나붓 흔들리며 내리는 제대로 된 모양의 눈이 왔다. 이 역시 양이 많지는 않고 땅을 간신히 가리는 정도였다. 베란다 창 밖에는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 모습이 앙증맞게 귀엽다. 엄마나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를 기다린다. 오늘 아침에는 다들 중무장을 했다. 아내가 전주에 가야 할 일이 생겨서 같이 나가는데 이것도 눈이라고 도로가 막혀서 예매한 버스를 놓쳐버렸다. 두 시간 뒤의 버스를 다시 예매하고 시간 여유가 생겨 물빛공원을 걷고 드라이브까지 하게 되었다.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 아닌가.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낸들 어쩌겠는가. 혹 더 좋은 일이 생길 수..

사진속일상 2022.12.06

첫눈이 내리다(2021/11/10)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예고도 없이 닥친 첫눈이었다. 약 30분 정도 '백설(白雪)이 난분분(亂紛紛)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제법 흩날렸다. 그러나 영상의 기온 탓에 땅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았다. 작년 첫눈이 12월 13일이었으니 한 달 이상 빠른 셈이다. 예년의 통계보다도 열흘 정도 이르다고 한다. 아내는 연신 텃밭의 무 걱정을 한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햇살이 쨍, 하고 다시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사진속일상 2021.11.10

첫눈(2020/12/13)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은세계로 변해 있다. 창 밖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오래 구경하다. 어딘가 쓸쓸해져서 우산을 받쳐 들고 동네 산책에 나서다. 눈 위에 내 발자국이 처음 찍히는 길이 많다. 산길에 드니 앞서 고라니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고라니 걸음은 붓으로 찍은 듯 부드럽다. 같이 보조를 맞추어 걷다. 얼마간은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스해지다. 2020년 12월 13일, 첫눈 내린 날....

사진속일상 2020.12.13

눈 귀한 겨울

눈이 귀한 겨울이다. 강수량 자체가 적지만 그마저도 기온이 높아 대부분 비로 내렸다. 그저께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부터 어렵사리 눈으로 변했다. 어제는 하루 내내 눈이 흩날렸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눈 구경을 했다. 그마저도 내리는 눈이 거의 쌓이지 않았다. 지상에 닿는 족족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짧게 뿌려주더니 지금은 햇살이 환하다. 눈 내린 흔적은 곧 지워질 것 같다. 남녘에서는 이미 봄꽃 소식이 들린다. 복수초나 변산바람꽃이 개화했다는 전언이다. 예년보다 20일 정도는 빠르다고 한다. 하긴 서울 홍릉수목원의 복수초도 핀지 한참 되었다. 이런 상태라면 올해 꽃구경 계획은 훨씬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눈 그치고 반짝 추위가 가시면 봄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

사진속일상 2020.02.17

첫눈 오신 날(12/3)

올해 첫눈이 오셨다. 맛보기로 하라는 듯 눈가루가 살짝 뿌리더니 금방 그쳤다. 조금 지나니 가는 비로 변하고 첫눈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생뚱맞게도 거실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내 죽는 날에도 이렇게 눈이 오면 좋을 것 같다. 침대는 창가에 있어야겠지. 주위에 모인 사람들과 와인으로 건배하고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지. 소주를 좋아하지만 마지막 술잔에는 달콤한 와인이 담겨야 할 것 같다. 그런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며칠 전 뉴스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었다. 손에는 모두 와인잔을 들었고, 다들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나 보다. 눈 내리는 날에 내 죽음을 연상한 ..

사진속일상 2019.12.03

눈 내리는 아침

"Is it snowing there now?" 바다 건너에 가 있는 사람한테서 카톡이 왔다. 눈 소식은 외국에서도 들리나 보다. "Here is white winter. Beautiful!" 어쩌면 이 눈이 올 겨울 마지막 선물이 될 듯하다. 기온이 올라 낮에는 비로 변한다는 예보다. 유치원 종업식을 하러 간 손주는 눈을 만져볼 수 있을지. 저 하늘 먼 곳에서부터 봄이 진군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겨울이 흔드는 백기(白旗)가 산야에 가득하다.

사진속일상 2019.02.19

첫눈, 낮술과 낮잠

올 첫눈이 화끈하게 내렸다. 첫눈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한 작년과는 달랐다. 올해 껑충 키가 자란 소나무 위에 석 달 전 문 닫은 빵집 간판 위에 집 앞 도로에는 헛바퀴 도는 승용차가 한참을 씨름하고서야 빠져 나간다. 겨울이 도래했음을 실감한다. 아내는 부침개를 굽고, 나는 연태고량주를 꺼낸다. 금방 바닥이 난다. 불 올리고 달콤한 낮잠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사진속일상 2018.11.24

눈 내리는 날

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본다. 이렇게 활활 쏟아지는 모습은 올 들어 처음이다.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습기를 많이 머금은 눈이다.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바싹 건조할 날씨라야 눈도 바삭바삭하고 포근하다. 오늘 눈은 땅에 떨어지면서 이내 질척거린다. 전에는 눈이 내리면 막걸리 생각이라도 났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도리어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감성이 말라가는 것 같아 슬프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썰매를 들고 바삐 어딘가로 달려간다. 내 어린 시절의 겨울이 겹쳐진다. 베란다의 제라늄은 여전히 붉다. 여름 겨울 없이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운다. 제라늄을 보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틀렸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도 잘못이다. 꽃은 꽃으로 아름다울 뿐이다. 한낮이 되면서 눈이 그치고 햇볕이 ..

사진속일상 2017.12.10

소백산 1박 산행

밀포드 트레킹 연습 산행을 팀원 7명과 했다. 대피소에서 일박하며 밀포드의 헛(Hut)과 비슷한 체험을 했고, 배낭 무게도 10kg 이상으로 맞추어 걸었다. 이번 산행을 위해 침낭도 새로 장만했다. 마침 소백산에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우리도 올해의 첫눈을 소백산에서 맞았다. 눈은 26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했고, 다음날 아침에 소백산은 백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의외의 선물이었다. 소백산 제2연화봉에 있는 대피소는 작년에 문을 열었다. 그래선지 대피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설이 좋다.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서로 칸막이가 되어 있고, 온풍기가 가동되어 겨울 날씨지만 침낭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물도 아주 잘 나오고 수세식 화장실도 깨끗하다. 반면에 일부 단체 산객의 무분별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

사진속일상 2016.11.30

부음 / 함기석

첫눈이다 생선장수 트럭이 지나간 복대놀이터 골목 유모차에 내리는 흰 사과 꽃이다 아기가 살짝 맨발로 디디면 사과 향, 차고 흰 웃음이 간질간질 발가락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소리 오늘밤 그 소리 뒤뜰에 차곡차곡 쌓인다 - 부음 / 함기석 첫눈을 죽음의 소식과 연관시킨 시인의 발상이 기발하다. 첫눈과 아기와 나비로 연상되던 이미지가 홀연히 죽음으로 치환된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의아해하다가 첫눈에 대한 환호나 부음에 놀라는 마음이 서로 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과연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첫눈처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가까운 분의 부음이..

시읽는기쁨 2015.12.13

입설단비 / 김선우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은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

시읽는기쁨 2014.12.03

첫눈이 내리다

뒷산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올겨울의 첫눈을 맞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온몸으로 받았다. 10여 분간 내리더니 이내 그쳐 땅에 쌓일 정도는 아니었다. 맛보기로 보여준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 나오던 꼬마가 손을 내밀며 "눈이네요!" 한다. 다른 꼬마는 생긋 웃으며 내 옷에 붙은 눈을 털어준다. 한 할머니는 자동차 유리문을 내리고 환한 얼굴로 손주에게 눈 구경을 시켜준다. 한 살 정도 된 아기도 해맑게 웃는다. 남녀노소 모든 이의 얼굴에 미소와 탄성을 자아내는 첫눈이다. 아파트 뜰에 산길에 생을 마감한 낙엽이 뒹굴고 있다. 각각 색깔은 달라도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모두 가볍고 아름답다. 이 시기면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 '고엽(枯葉)'으로 알려진 'Autumn Leaves'다. 에릭 클랩튼..

사진속일상 2013.11.18

동안거 /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 동안거(冬安居) / 고재종 겨울이면 깊숙한 숲 속에서 갇히고 싶다. 산골 외딴집에 목화송이 같은 눈이 지붕까지 쌓이면 저절로 안거(安居)에 들 수밖에 없으리라. 지상의 끊어진 길을 반기며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으리. 그렇게 무장무장 하늘로 오르는 길을 꿈꾸리. 한두 달 그렇게 지내면 나에게도 뽀얀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봄과 함께 연초록 새싹도 피어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2.01.08

적설 / 신현정

흰 눈이 쌓이다 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 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老松이 팔뚝 하나를 주어버린다 - 적설 / 신현정 어제 눈이 많이 내렸다. 서울에 내린 눈으로는 기상 관측 이래 최대라고 한다. 고지대에 있는 우리 집은 밖과 연결되는 도로가 하루 내내 통행 불능이 되었다. 덕분에 낮이 조용해졌다. 오늘에야 느릿느릿 차들이 겨우 움직인다. 눈이 질주하던 자동차를 세우고 거북이가 되게 만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신선하다. 한나절의 눈만으로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대도시가 항복을 했다.

시읽는기쁨 2010.01.05

첫눈의 흔적

"선생님, 눈이 와요!" 유리창 밖으로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첫눈이었다. 그러나 심술궂은 바람은 지상에 내려앉으려는 눈송이들을 사정없이 휘몰아대고 있었다. 기상청 발표로는 올해 서울 지방 첫눈은 11월 초에 내렸다. 그러나 새벽에 잠시 뿌린 눈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각으로 느껴지는 첫눈은 12월 들어서야 늦게 찾아온 셈이다. 그것도 땅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아침에 일어나니 멀리 북한산에 첫눈의 소식이 남아있다. 마치 누군가가 흰색 물감으로 부드럽게 색칠한것 같다. 지난 겨울에 걸었던 히말라야의 설산이 아련히 떠오른다. 창을 여니 쨍 하니 밀려오는 한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산은 멀고, 오늘은 그냥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

사진속일상 2009.12.06

눈 /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 김수영 예전부터 이 시에 나타난 눈의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지 망설여졌다. 하얀 눈은 순수와 순결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좀 삐딱한 독해을 하고 싶다. 눈은 세상의 사물을 한 가지 색으로 덮어 버린다.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눈을 '순수로 위장된 거짓'..

시읽는기쁨 2009.06.30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물고기의 눈에는 물이 안 보이고 새의 눈에는 공기가 안 보이고 용의 눈에는 돌이 안 보인다지 꽃이 피면 꽃나무는 안 보이고 열매가 열리면 가지는 안 보이고 아기를 안으면 엄마 아빠는 안 보이지 젊은 가장을 대신하여 독가스실로 들어가 준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도 나치의 눈에는 유태인으로만 보였지 마음은 공기는 우주는 神은 안 보이니까 눈은 너무 작으니까 눈이라고 다 눈은 아니니까 -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을 전부인 줄 착각한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의 눈이 보는 것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지 우리는 잊고 산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는 것..

시읽는기쁨 2008.12.09

눈 내리는 날의 막걸리와 부침개

어제부터 계속 눈이 내린다. 낮에는 김치 부침개에 막걸리를 앞에 두고 둘이서 마주 앉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마시는 차가운 막걸리 한 잔과 부침개는 오늘 같은 날씨에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특히 이 막걸리는 친척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을 얻어온 것인데, 그 맛이 시중의 막걸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 날씨와 음식의 궁합이랄까,또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어울리는 술과 음식이 있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막걸리와 부침개가 구미를 당긴다. 막걸리와 빈대떡도 마찬가지다. 이런 날은 맥주는 전혀 아니다. 그리고 소주 또한 너무 빨리 취해서어울리지 않는다. 궂은 날의 막걸리와 부침개는 적당한 포만감과 함께 서서히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무엇보다도음식 자체의 생김새와 맛이 ..

사진속일상 2008.01.22

백설이 난분분한 아침

백설(白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눈이 아침에 내리다. 이곳은 고지대라 바람이 세어 눈도 곱게 내리지 않는다. 비는 아래로 떨어지지만 눈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수평으로 날아가고, 어떤 때는 거꾸로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위로 솟구치는 광경은 마법의 나라에 와있는 듯 신기하기만 하다. 베란다에 서서 바람이 만드는 눈송이들의 군무를 감상한다. 내리는 눈은 잠시 조용해지다가는 어느새격렬한 춤으로 변한다. 아다지오에서 안단테로, 그리고 알레그로, 비바체로 이어지다가 다시 아다지오로 돌아온다. 방향도 순식간에 360도로 변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있는 것 같다. 눈송이들은 바람의 흐름, 자연의 리듬에 따라 춤춘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지..

사진속일상 2008.01.21

첫눈이 내리다

밤 사이에 첫눈이 내렸다. 아주 살짝.... 어제 저녁에는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는데, 밤이 되면서 눈으로 변했다. 첫눈 치고는 소란스럽게 찾아온 셈이다. 새벽에 눈을 떠서는 하얀 설세계를 상상하고 창문을 열었는데 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햇살에 드러난 인왕산이 하얀 눈으로 단장되어 있다. 마치 연하게 화장을 한 얼굴이다. 기상대 발표로는 서울 지방의 올해 첫눈은 11월 19일 저녁 8시 50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내의 눈은 비와 섞여서 이내 사라졌다. 가을 단풍의 여운이 아직 따스한데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사진속일상 2007.11.20

너 /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 너 / 피천득 권정생 선생님에 이어 며칠 사이로 피천득 선생님마저 타계하셨다. 아흔여섯 긴 세월 동안 천진난만한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신 선생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단아한 수필로 보인다.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수필'이라는 글이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 이미 40년 전이지만 교과서에 실렸던 청자 연적의 사진 한 장까지 기억이 난다. 연적을 장식한꽃잎 하나가 어긋나 있었는데 바로 그 파격의 맛이 수필이라고 설명해 ..

시읽는기쁨 2007.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