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24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절간의 소 이야기 / 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人間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산首陽山의 어뉘 오래된 절에서 칠십七十이 넘은 로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 - 절간의 소 이야기 / 백석 어릴 적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아플 때 개집에서 꼼짝 않고 엎드려 금식을 하며 버티는 걸 보았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뛰어왔는데 내가 다가가도 눈만 끔뻑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죽은 듯이 지내다가 어느 날 거동을 시작하고 보란 듯이 회복되었다. 사람은 아프면 온갖 요란을 떠는 데 개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었다. 어린 눈에도 무척 신기했다. 절간의 소 이야기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짐승은 인간보다 영(靈)한 면이 있다. 어..

시읽는기쁨 2022.02.04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만난 여학생(박경련, 蘭)에게 백석은 한눈에 반한다...

시읽는기쁨 2021.06.02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작가가 북한에서의 시인 백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해방 뒤 북한에 남은 백석은 전쟁을 거치고 숙청의 파도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일곱 해'란 백석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추방되어 완전히 절필하게 된 1962년까지를 말한다. 백석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므로 은 많은 부분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 뒤 북쪽은 김일성의 유일사상만 통하던 통제된 사회였다. 문학도 혁명의 도구일 뿐이어서 백석 같이 감성이 풍부한 순수시를 썼다가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백석은 옛 시를 잊고 혁명과 증오를 부추기는 동시를 써야 했다. 백석이 그때 쓴 동시를 보면 ..

읽고본느낌 2021.06.01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

시읽는기쁨 2020.08.31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여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첫 연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에 대해 자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석과 자야가 오순도순 살던 청진동 시절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자야는 백석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샀다.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시읽는기쁨 2020.02.09

내 사랑 백석

1938년, 청진동 시절이었다. 백석과 자야는 아침부터 독서에 골몰하느라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이때 자야의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약초(若草)극장에 영화 '클레오파트라'가 왔는데, 함께 가자고 졸랐다. 자야는 가고 싶었으나 백석이 안 갈 것 같아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백선생! '클레오파트라' 보러 같이 가자구요!" 라고 보챘다. 백석은 대답 없이 잠자코 있더니, 곧바로 자야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에 나오는 일화다. 자야가 백석과의 사랑을 회상하며 쓴 이 책을 읽어보니 둘은 상상한 것보다 더 간절하고 열렬하게 사랑한 것 같다. 요사이 말로 하면 닭살 돋는 연인이었다.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건 1936년 함흥에서였다. 백석은 함흥에 있는..

읽고본느낌 2020.02.07

자야오가(子夜吳歌) / 이백

장안도 한밤에 달은 밝은데 집집이 들리는 다듬이 소리 처량도 하구나 가을바람은 불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玉關)의 정을 일깨우노나 언제쯤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 끝낸 그이가 돌아오실까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 子夜吳歌 中 秋歌 / 李白 1936년, 함흥에서 만난 백석(白石)과 진향(眞香)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진향은 서점에서 라는 제목의 당시 선집을 사서 백석에게 보여주었다. 책을 훑어보던 백석은 미소를 머금고 진향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이렇게 해서 '자야'라는 애칭이 생겼고, 어쩌면 동진의 자야라는 여인처럼 평생을 기다리는 숙명으로 살아가도록 예정이 되었..

시읽는기쁨 2020.02.04

길상사 연등

김영한과 백석과 법정 - 길상사(吉祥寺)가 세워진 인연이 연등의 색깔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한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무소유의 꽃으로 피어난 곳이다. 환락의 장소에서 청정 도량으로 변한 기적이 우리 마음밭에서도 일어나지 않을까. 씨앗은 사라지지 않고 기다릴 뿐이다. 여건이 되면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수천, 수만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흰 연등은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 길상사의 흰 연등은 세속의 집착을 버린 텅 빈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백석 시의 '흰 당나귀'와 연결되는 건 아닐까.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사진속일상 2019.05.04

오징어와 검복 / 백석

오징어는 오래동안 뼈가 없이 살았네. 오징어는 뼈가 없어 힘 못 쓰고 힘 못 써서 일 못 하고, 일 못 하여 헐벗고 굶주리였네. 헐벗고 굶주린 오징어는 생각했네- "남들에게 다 있는 뼈 내게는 왜 없을까?" 오징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로서는 그 까닭 알 수가 없어 이곳 저곳 찾아가 물어 보았네. 오징어는 맨 처음 농어 보고 물었네 "내게는 왜 뼈가 없나? 어찌하면 뼈를 얻나?" 농어가 그 말에 대답했네- "너는 세상 날 때부터 뼈가 없단다, 뼈 없이 그대로 살아가야지." 오징어는 농어의 말 믿기잖고 분하여, 그래서 이번에는 도미 보고 물었네 "내게는 왜 뼈가 없나? 어찌하면 뼈를 얻나?" 도미가 그 말에 대답했네- "너는 네가 못난 탓에 제 뼈까지 잃은 거지. 못난 것은 뼈 없이 살아가야지." 오징어..

시읽는기쁨 2018.01.13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와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으로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 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시읽는기쁨 2017.09.17

선우사 /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선우사(膳..

시읽는기쁨 2017.05.22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옛날 여름 저녁 풍경이 담박하게 펼쳐진다. 평안도 토속어가 감칠 맛 나는 백석 시다. 이때 도시라면 창문 닫아걸고 에어컨을 켤 것이다. 어찌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당 멍석자리에 누워 모깃불 연기 맡으며 하늘의 별을 쳐다보던 그때가 아련하다. 할머니의 부채 바람이 낯을 간지렸고. 어른들의 알 듯 모를 듯한 세상..

시읽는기쁨 2016.07.18

석양 / 백석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쭉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 - 석양 / 백석 1938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을 때 쓴 시다. 일제 말기에 접어든 그때는 한글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혼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영생고보에서도 응원가를 일본말로 개사하도록 해서 학생들이 응원가 불창 운동을 전개하는 등 저항 정신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이 시는 한민족의 강건한 정신을 나타낸 것..

시읽는기쁨 2015.01.25

백석 평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안 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백석의 생애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인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백석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백석이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되살린 건 의미 있다. 책이 쉽게 재미있게 읽혀 좋다.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던 백석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되었다. 결벽증이 있는 모던 보이 백석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화기는 남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싸서 잡고, 악수한 뒤에는 비누로 씻을 정도로 깔끔했다. 남이 만진 물건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멋을 부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양..

읽고본느낌 2015.01.18

팔원(八院)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 / 백석 동장군 기승이 대단하다. 지난 12월은 45년 만의 강추위였다. 새해가..

시읽는기쁨 2013.01.03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내게도 이런 동화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할배 등에 올라타서 할배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시읽는기쁨 2008.06.27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 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가끔은 외면하고 살아볼 일이다. 그러면 새로운 행복이 다정한 손님처럼 찾아올지도 모른다. 적은 월급도 고마워지고, 오늘 같은 봄날만으로도 그저 마냥 좋아질지 모른다. 살면서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고 날 꽁꽁 묶어두던 것들에 대해서..

시읽는기쁨 2008.04.16

여우난골族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마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시읽는기쁨 2008.01.29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어지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

시읽는기쁨 2006.01.31

귀농 / 백석

백구둔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글거리고 고방에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에 힘이 들고 하루종일 백령조 소리나 들으려고 밭은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 않은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 한쪽 마을에는 마돗에 닭 개 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 어른 행길에 뜨락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

시읽는기쁨 2005.02.0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다락방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

시읽는기쁨 2004.03.0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오랫동안 `마가리`를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막살이를 뜻하는 북쪽 방언이..

시읽는기쁨 200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