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32

뜻밖의 친절

중앙 현관문을 지나 십여 걸음 앞에 작은 초등학생 아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나올 거고 아이는 먼저 올라갈 터였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따라갔다. 코너를 돌아가니 웬걸,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라며 미소까지 짓는 것이었다. 뜻밖의 친절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일상에서 이런 친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절은 전염성이 있어서 나도 따라하게 된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주면 내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어떤 친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공지영 작가의 글에서 가슴 뭉클해지는 대목을 봤다. 작가가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수녀가 된 계기를 들은 내용이다.  "전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참살이의꿈 2024.07.05

이웃을 잘 만나는 복

예부터 바람직한 인생을 위해서는 오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오복(五福)이란 건강한 치아, 부부의 백년해로, 많은 자손, 풍족한 재산, 명당에 묻히는 것 등이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빼도 괜찮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치아는 치과에 가면 새것처럼 만들어 준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당에 묻혀야 한다고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현대인은 없다(대통령병에 걸린 몇몇을 제외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이웃을 잘 만나는 복'을 오복에 포함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거주 비율이 80%가 넘는다. 많은 사람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과 살아간다. 너무 밀집하여 살면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이다. 막무가내인 이웃을 만나면 해결책이 없다. 현대에서 ..

길위의단상 2023.12.28

마르코복음[52]

다른 열 제자가 듣고서 야고보와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 마르코 10,41-45 앞의 장면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다른 제자들 몰래 예수를 찾아가서 얄미운 짓을 했다.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가 아니라 한 바탕 싸움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성질이 괄괄한 베드로가 가만있었을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수준 미달..

삶의나침반 2022.08.02

사람 사는 곳인데

위층은 내 전화번호부에 '올빼미'로 명명되어 있다. 밤늦게서야 바빠지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가장이 늦게 퇴근하는 것인지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분주하다. 문제는 이 시간대가 내 잠자는 시간과 겹친다는 데 있다. 주로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에 깨어나면 조용해질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층간 소음 스트레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 아파트에 입주한 1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불편함을 전달하고 직접 만나서 호소도 했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쉽게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완벽한 해결책은 이사를 가야 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에 상태가 심해졌다. 어젯밤에는 참고 참다가 밤 12시가 넘어 문자를 넣었다. 작년인가 직접 만났을 때 전화번호를 알으켜주면..

길위의단상 2022.06.04

그 샘 /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그 샘 / 함민복 우리는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불문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혜의 정신 대신 탐욕과 시기만 남았다. '영끌'은..

시읽는기쁨 2021.08.08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최필조 선생의 사진 에세이로 부제가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이다. 124편의 작품이 우리 이웃의 애틋한 사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사진과 글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감동의 화음을 만들어 낸다. '뒷모습', '손', '밤골', '길 위에서' 등 4개의 파트로 되어 있다. 작가는 교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볍게 책장을 넘기지만 사진 한 장에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담겨 있을지를 생각한다. 다른 동네의 낯선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친해지면서 카메라에 담기까지 발품은 또 얼마나 될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사진은 테크닉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

읽고본느낌 2021.02.11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후두두둑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마을버스가 서둘러 정류장에 들어왔어. 사람들은 우산을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스에 오를 준비를 했지. 그때 교복을 입은 오빠가 가만히 버스 줄 밖으로 비켜서는 거야. 다른 차를 타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버스에 다 오를 때까지 한참동안 우산을 높이 펴 들고 서 있더니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거야. 그것을 본 만원 버스 속 사람들은 한 발짝씩 자리를 옮겨 오빠가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어. 마을버스는 걷는 사람들에게 빗물이 튀지 않게 더 천천히 움직였지.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거야. -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따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누가 공익 광고로 찍어줬으면 좋겠다. 배려..

시읽는기쁨 2020.08.23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위층에 코끼리가 이사를 왔다 걸을 때마다 쿵쿵 천정이 울린다 아래층에는 토끼 아줌마가 산다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깡충깡충 뛰어 올라온다 우리 집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발소리가 날까 봐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끔 아래층에서 항의를 받았다. "네,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라며 마땅찮아 했다. 이제 늙어서 둘만 남게 된 지금은 가끔 위층에 연락한다. "잠을 못 자요.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공손한 대답과 달리 위층의 속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한다.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에게는 역지사지를 요구하지만, 내가 역지사지하는 데는 인색..

시읽는기쁨 2020.04.17

타인에 대한 섬세함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여자 둘이 들어온다. 바로 자전거로 직행하더니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러닝머신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다. 헬스장을 자기네 집 거실로 착각하는 것 같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주변 사람이 얼마나 불쾌하게 여길지는 안중에도 없다. 헬스장 벽에는 타인을 위해 잡담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다. 옆에 누가 있건 말건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은 너무 자주 본다. 층간소음 문제도 이웃에 대한 배려심의 부족에서 생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너무 무례하고 투박하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남긴 상처의 무게를 잴 ..

참살이의꿈 2020.02.03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싶어 찾은 책이다. 선생이 문단에 나온 초기에 쓴 짧은 소설 모음집으로, 시기로는 1970년대에 해당한다. 일상을 섬세하고 따스하게 그려내는 선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40대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그래선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젊은 작가와는 다르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정겨운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속 작품을 읽으면 70년대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경제 성장과 부동산으로 부자가 생기기 시작하고, 아파트 문화가 시작될 때였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의식이 어떠했는지 잘 그려져 있다. 선생의 실제 경험이 작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 나는 20대였으니 마치 앨범의 옛 사진을 보는 듯, 이런 시절이었구나 하고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콩트가 어쩌면 작가의 진면목을 제..

읽고본느낌 2019.07.29

기생충

지난달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기념이 될 성과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 '기생충'이 최초다. 최근에 우리나라가 문화 예술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우리의 잠재력이 깨어나 빛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잔뜩 기대를 갖고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관객수가 9백만을 돌파하면서 힘이 꺾였는지 넓은 극장에는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처음에는 난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이 흘러서야 나름의 감이 잡힌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선'과 '냄새'다. 둘 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는 경계..

읽고본느낌 2019.06.20

친절, 공손, 배려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무엇일까.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전체 경제 수준은 상당한 레벨에 올라섰다. 밖에서는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인정해 준다. 그런데 국민이 체감하는 살림살이는 일인당 소득 3만 달러라는 통계가 무색하다. 국민의 행복도는 OECD에서 항상 하위권이다.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빈곤감이 큰 원인이다. 한국은 지나친 경쟁 사회여서 가정이나 직장 모두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경쟁 시스템에 길들여진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욕망끼리 충돌하며 불꽃이 인다. 농촌 공동체의 두레 정신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도시 생활은 사막과 같다. 사람을 만나면 우선 경..

참살이의꿈 2019.06.19

어려운 인간관계

얼마 전에 남한산성에서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서 눈이 마주쳤다. 10m 앞쯤 되었을까, 놀란 건 나보다 멧돼지였다. 멧돼지는 후다닥 달아났고, 그 뒤로 새끼 세 마리가 뒤따랐다. 멧돼지 가족은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약 멧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멧돼지보다 훨씬 더 무서웠을 것이다. 무슨 해코지를 하지나 않을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여자 입장에서는 공포감이 더 클 것이다. 산속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멧돼지는 사람을 해치기보다 십중팔구 제가 먼저 도망간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떤 흑심을 품을지 ..

참살이의꿈 2019.01.18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한겨레신문 강윤중 기자가 사진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재조명한 책이다. 신문 연재물을 책으로 엮어낸 것 같다. 책에는 광부, 난민, 이슬람교인, 말기 암 환자, 철거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쪽방촌 노인 등과 함께 생활하며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에서는 소외된 이웃을 대하는 지은이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사진보다는 글이 더 와 닿는다. 아마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조심스럽고 망설인 탓이 아닌가 싶다. 공감과 이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사진과 글이 나오는 게 순서다. 우리는 세상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 색안경은 대체로 이 사회가 만들어준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임의로 만든 색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현상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한다. 타인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오해와 편견투성이다...

읽고본느낌 2018.07.24

층간 내리사랑

KBS TV에 나오는 공익광고 중에서 요사이 공감을 하며 본 게 '층간 내리사랑'이라는 광고다. 아파트 위층에 사는 사람이 아래층에 사는 사람을 배려하는 내리사랑을 보이자는 내용이다. "집에서는 왜 까치발로 걸어요?" "아랫집에 아기 재우는 초보 아빠가 있으니까요." "사진 거는 걸 왜 내일까지 미루세요?" "시험 앞둔 수험생이 있으니까요." "오디션이 코앞인데 왜 기타는 안 치세요?" "내일 면접인 아랫집 청년이 자고 있으니까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라는 멘트로 광고는 마무리 된다.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는 따뜻한 광고다. 아파트공화국에서 층간 소음 문제는 심각하다. 내 집인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다른 편에서는 타인의 소음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길위의단상 2017.11.27

얀테의 법칙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하는 내용의 대화가 있었다. 여러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하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양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개인의 일상 생활부터 정치판까지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난폭한 사회라는 것이었다. 모임 중의 한 사람이 북유럽 정신의 토대가 된다는 '얀테의 법칙(The Law of Jante)'을 소개해 주었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You're not to think you are anything special. 2.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You're not to think you are as good as we are. 3.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

참살이의꿈 2016.09.30

사람 꼴

늙어가니 마음이 더 옹졸해진다. 나이를 먹으면 원숙해지고 관대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나를 돌아보면 증명이 된다. 마음 꼬라지 하고는, 라며 혀를 찰 일이 잦다. 그중의 하나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일도 눈을 찌푸리게 된다. 사람 꼴을 못 보는 것이다. 저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데, 라는 그물망이 더 촘촘해졌다.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휴대폰으로 통화하거나 소음을 내는 사람이 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꼭 이런 사람이 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런 소음이 들리면 무척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한마디 한다. 최근에 그런 경우가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지적을 하고는 바로 후회를 한다. 떨떠..

참살이의꿈 2015.03.29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친구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함께 울게 하소서 친구의 가슴이 고통으로 멍들 때 연민을 느끼며 그를 껴안을 수 있게 하소서 가난한 이웃의 어려움을 들을 때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의 궁핍함을 함께 걱정하고 그의 불안한 삶의 고뇌를 나누며 주머니를 털어 그와 나눌 수 있는 진실함을 주소서 무언가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거나 남들이 해결하리라 미루지 않고 저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올바른 길로 나가기 위해 기꺼이 끼어들게 하소서 주님의 자녀인 제가 말만 앞선다는 소리를 들어 당신께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수녀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지막 통화하고 나서 벌써 4년이나 흘렀네요. 지금도 수녀님이라 불러야 ..

시읽는기쁨 2014.02.15

어떤 나쁜 습관 / 복효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거시기 슈퍼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는 자기 집 층수보다 한층 위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간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함께 탔던 모기들도 우르르 같이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기가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복선생도 그렇게 해보라는 충고를 해준다 그 뒤로 나는 모기가 많은 여름날이면 부러 그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두 층이나 걸어 올라간다 참 나쁜 습관이다 - 어떤 나쁜 습관 / 복효근 집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니 어떤 분이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다. 감사한 눈인사를 하니, "뒤에 따라오시는 것 같아서..." 라며 수줍게 웃는다. 젊은 여성분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뒤에 사람이 따라오는 것 같으면 얼른 문을 닫아 버린다. 같..

시읽는기쁨 2013.12.04

고마운 천적

윗집 때문에 생활 패턴이 변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던 것이 자정 이후로 늦춰졌고, TV를 보는 시간도 늘었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이다. 어린아이 둘이 있는 윗집은 밤 10시가 넘으면 소란이 시작된다. 그 시간이 되어야 가족이 다 모이는 것 같다. 짧으면 한 시간 정도지만, 길면 1시까지도 이어진다. 잠이 들었다가도 쿵쾅대는 소리 때문에 깬다. 다시 잠들기 위해서는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신경이 쓰이면 책을 읽어도 집중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못 한다. 소음에는 마인드 컨트롤도 안 통한다. 그래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너무 심할 때는 인터폰으로 연락하지만 자주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서로에게 스트레스다. 말을 해봤자 감정만 상하지 별 효과도 없다. 어린아이 발목에 족쇄를..

참살이의꿈 2013.11.18

어떤 사마리아 사람

어느 날 예수를 떠보려고 한 율법학자가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다.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 반문했다. 율법학자가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시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라고 적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올바로 말했다고 칭찬하며, 그대로 한다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 물었다. 아마 다시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그..

참살이의꿈 2013.07.22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심야에 세탁기 돌리는 소음으로 이웃 간에 칼부림이 나고 한 사람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어제 들었다. 얼마 전에는 현직 부장판사가 아파트 위층에 사는 주민과 층간소음 문제로 다툰 후 지하 주차장에 있는 이 주민의 차량 열쇠 구멍에 접착제를 넣고 타이어를 펑크냈다가 입건되기도 했다. 합의를 했지만 결국은 옷을 벗었다는 후문이다. 부장판사까지 이럴 정도니 공동주택의 층간소음 문제가 보통이 아니다. 왜 그렇게..

시읽는기쁨 2013.07.14

능금 / 김환식

골목시장 앞 날마다 횡단보도를 지키는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 한 봉지를 샀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한 입을 베어 문 것뿐인데 갈라진 씨방 속에는 벌레 한 쌍이 신방을 차려놓았다 엄동설한에 어렵게 얻은 셋방일 터인데 먹고 사는 일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는 불청객처럼 단란한 신방 하나를 훼손해 버렸다 - 능금 / 김환식 시인의 마음씨가 따스하다. 사과 대신 능금이라고 한 것도 정겹다. 지금은 능금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쓰지만 어릴 때는 사과가 아니라 능금이라고 불렀다. 시인은 굳이 시장 앞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을 산다. 흠집이 있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일 게다. 한 입을 베어 무는데 속에서 벌레가 나온다. 뭐, 이런 사과를 팔았나,원망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

시읽는기쁨 2011.12.11

싸가지

아내는 드라마를 보다가 종종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저 싸가지 좀 봐!” 드라마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꼭 싸가지가 등장한다. 그래야 이야기에 긴장이 조성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싸가지에 열 받으면서도 드라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싸가지를 욕함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대리 해소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직접 못하는 욕을 드라마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아내와 나도 손가락은 다른 델 가리키면서 킥킥거리고 웃은 적이 있다. 싸가지는 ‘싹’과 ‘아지’가 합쳐진 말이다. ‘아지’는 명사와 결합하여 작은 것을 나타내는데 주로 속된 표현으로 쓰인다. ‘속’과 합쳐져 소가지가 되고, ‘목’과 합쳐져 모가지가 되는 게 그런 예다. 싸가지라는 말에도 그런 부정적 의미가 들어..

길위의단상 2010.10.19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그 율사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꾸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그를 벗기고 때리고 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마침 한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피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레위 사람도 와서 보고는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와서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맨 다음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객사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객사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드리겠소.’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

참살이의꿈 2010.07.31

옹달샘 / 엄재국

경북 문경시 산길 깊은 내화리 사과를 주렁주렁 매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명찰을 달고 있는데요 "지나다 목마르면 하나 따 드세요" 까치밥에 사람 밥 얹어 매달아 놓은 주먹만한 물통들 목젖 가득 찰랑대는 물소리 - 옹달샘 / 엄재국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리고 부끄러워진다. 이 시에는 내 군더더기 말이 필요 없다. 나도 오늘은 저 산골 과수원 주인의 마음씨에 젖어보고 싶다. 한 순간이나마 차가운 내 가슴을 따스하게 데워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08.04.07

이웃 /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 이웃 / 이정록 교육문제에 대해 누구나 일가견..

시읽는기쁨 2007.02.20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시는 없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시인 또한 부엌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통해 성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 식탁에 오른 것은 햇살과 바람이다. 반면에 시인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며 인간 식탁의 탐욕과 살육을 새삼스레 느꼈을지 모른다. 어제 저녁 전체 회..

시읽는기쁨 2007.02.15

담장 고치기 / 로버트 프로스트

무엇인가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보다. 그것이 담장 밑의 땅을 얼어 부풀게 하여 위에 있는 둥근 돌들을 햇빛 속에서 떨어뜨린다. 그리하여 거기에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만한 틈이 생긴다. 사냥꾼들도 담장을 부순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서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부숴놓은 담장을 수선했었다. 그래도 그들은 숨어있는 토끼를 몰아내어 짖어대는 개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내가 말하는 틈이란 그것이 생기는 것을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는데 봄철 수선기가 되면 나타나는 틈을 말한다. 나는 언덕 너머 이웃 사람에게 알린다. 그리고 하루 만나서 경계를 걸으며 그 경계에 무너진 담을 다시 쌓는다. 우리는 담장을 중간에 두고 걸어간다. 자기편에 굴러 떨어진 돌들을 주워 올린다. 어떤 것들은 빵떡 같고 어떤 ..

시읽는기쁨 2006.10.31

입장의 동일함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 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잘 알려진 신영복 님의 글이다. 님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한 '입장의 동일함'이란 과연 어떤 것이며, 그것을 과연 내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 가끔씩 이리저리생각해 보게 된다. 관찰에서 애정, 애정에서 실천적 연대, 실천적 연대에서 입장의 동일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의 단계를 지나 궁극적으로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말을 잘 쓰..

길위의단상 200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