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38

인생은 독고다이

"여러분, 인생은 혼자입니다. 마음 가는대로 사십시오. 여러분을 누구보다 아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여러분 자신이고, 누구의 말보다 귀담아 들어야 하는 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마세요. 누군가 멋진 말로 나를 이끌어주길, 나에게 깨달음을 주길, 내 삶이 더 수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세요. 그런 사람들 무리의 먹잇감이 되지 마세요. '인생 독고다이다' 생각하고 쭉 가세요." 지난달에 이효리 씨가 국민대 졸업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전한 인생 조언이다. '독고다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대로 직설적이면서 소탈한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한다.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 후배들을 위한 연설이었지만 7학년인 나는 내 식..

참살이의꿈 2024.03.20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

사기[2-1]

내가 가난하게 살 때 일찍이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했지만, 포숙이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이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은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졌을 때, ..

삶의나침반 2023.07.05

당구와 바둑

노년에 들어서 취미는 당구와 바둑으로 좁혀졌다. 그중에서도 요사이는 당구에 열중이다. 전에는 술 한 잔 걸치고 심심풀이로 하는 당구였다면 이제는 맨정신으로 제대로 쳐보려 한다. 금주가 준 효과다. 쓰리 쿠션 시스템은 어느 정도 머리에 입력시켰는데 문제는 스트로크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당구 역시 기본 자세가 중요함을 절감한다. 고수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려 해도 손놀림은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교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G는 당구와 바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다. 둘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 기원과 당구장을 왕래하며 논다. 실력이 서로 비등하니 재미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G가 한 뼘 정도 앞서 있다. 승률은 대체로 G가 나은 편이다. 이제 당구에서는 G를 추월하기..

사진속일상 2023.07.03

동네 공원 벚꽃과 옛 친구

양재에 나갔다 오는 길에 동네 공원에 들러보았다. 어느새 벚꽃이 활짝 폈다. 올해는 봄꽃 개화 시기가 예년보다 빠르다더니 벚꽃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다. 남도에 상륙한 봄기운이 고속열차를 타고 북상했다. 지구의 호흡이 가빠진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저녁에는 56년 만에 연락이 된 옛 친구 J와 통화를 했다. J와는 국민학교, 중학교 동기였다. 중학생 때는 같은 반이 아니어서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지만 하굣길이 같아서 가끔 동행했다. 걷는 길이 한 시간 넘게 걸렸으니 그 사이에 장난도 치고 많은 얘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J는 그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고, 그가 하는 얘기를 신기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시에 J가 무척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 뒤에 J는 목사가 되었고 국내에서 목회를 하다가 그리..

사진속일상 2023.03.31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존경하는 벗인 Y형은 글을 잘 쓴다. 잘 쓴다는 것은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진솔하면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담백한 그런 점이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도 많다. 가까워진 것도 꽃이 매개가 되어서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어,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이 나온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형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이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보내줬다. 감사하고 고마워..

참살이의꿈 2022.10.30

한 장의 사진(33)

대학생 때 사진이 별로 없다. 앨범에서 스캔해 둔 파일이 열 장이 채 안 된다. 그마저 앨범은 없어지고 해상도 낮은 파일로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대학생 때 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다. 저 때는 1972년, 대학 2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서 있는 친구와는 대학 4년 동안 거의 붙어 있다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둘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 왔다갔다 했지만 친구가 우리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더 높았다. 입은 옷을 봤을 때 늦겨울쯤 될까, 장소는 면목동 우리집이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는 면목동에 단독주택을 하나 마련했다. 주택 사업을 하던 아버지 친구분이 지은 집이었다. 우리 다섯 형제는 저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내 20대와 함께 한..

길위의단상 2022.04.24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있다. 편의상 G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시골에서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네 명이 올라왔는데, 둘은 일찍 세상을 뜨고 G와 나만 남았다. 그러니 각별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G는 나를 대부로 삼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종교적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소원한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G는 경상도 출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이고, 나는 반대편이다.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상대를 잘 아니까 조심하기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정치가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G는 문재인 대통령을 너무 싫어한다. 몇 년 전에 G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

길위의단상 2022.03.11

인연

현재 전 세계 인구는 80억 명이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로 지구상에 생존했던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약 1천억 명이라고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다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까. 바늘 끝 같은 한 점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 끌리게 되었을까. 호텔 커피숍을 들어서는 당신을 멀리서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내 사람이구나. 밤색 투피스를 입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채 당신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무슨 신호를 접수한 것일까, 내 몸 안에서는 호르몬이 홍수처럼 분출했고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일까. 짧은 일별일 뿐인데도 치명적인 끌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반면에 수십 년을 알고 지내..

참살이의꿈 2022.02.27

친구와 지인

"나에게 친구가 있는가?" 가끔 해 보는 자문이다. 여러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친구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관계로서의 친구라면 다들 고개가 저어진다. 인생에서 한 명의 진실된 친구를 가지는 일이 쉽지 않다. 당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거나, 산길을 같이 걷거나, 또는 학교 인연으로 만나서 옛날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임이 있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저 같은 즐길거리를 공유하는 아는 사이라고 해야 맞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관계는 아니다. 나를 성찰하게 해 주며 우정 속에서 서로 성장해 나갈 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잘 나갈 때는 ..

참살이의꿈 2021.12.15

이순(耳順)

얼마 전에 초등 단톡방을 나왔다. 문재인 정부를 향한 저주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다. 경상도 농촌 출신에 나이가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들이니 정치 성향이야 뻔하다. 어디서 따오는지 황당한 글을 퍼서 나르는데 작년 여름부터 정도가 심해졌다. 태극기 부대의 집회가 기세를 올리기 시작할 때다. 단톡방에 있는 20여 명 중 나 혼자만 외톨이다. 나는 입도 뻥긋 못한다. 정기 모임에 나가서 정치 얘기가 나오면 너무 불편하다. 듣고만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데 그렇다고 논쟁을 할 수도 없다.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 나가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단톡방에 올라오는 글을 매일 쳐다보는 것도 스트레스여서 이번에 단톡방도 탈퇴했다. 7, 80년대에는 지역색이 국민을 둘로 가르더니, 2..

참살이의꿈 2020.03.05

양평과 소나기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좃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양평에 '황순원 문학관'이 있는 것은 '소나기' 속의 이 구절 때문이란다. 그래서 서종면 수능리에는 문학관과 함께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져 있다. '소나기'에 나오는 장면을 형상화해서 문학공원으로 만들었다.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는 소나기를 재현한 것이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됐다. 앞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

사진속일상 2018.09.18

논어[298]

선생님 말씀하시다. "유익한 벗이 셋이요, 손해 보는 벗이 셋이다. 곧은 이와 벗하고, 믿음직한 이와 벗하고, 박학한 이와 벗하면 유익하다. 편벽스런 이와 벗하고, 능글능글한 이와 벗하고, 재잘거리는 이와 벗하면 손해 본다."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益矣 友便벽 友善柔 友便녕 損矣 - 季氏 2 공자가 사람 나누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있다고 했으니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만물이 다 나의 스승이 된다. 그러나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공부의 성과가 달라진다. 자극을 받는 벗이 있고, 방해되는 벗도 있다. 곧은[直], 믿음직한[諒], 박학한[多聞] 벗과 가까이하라고 한다. 아주 실용적인 지침이다.

삶의나침반 2018.07.23

어떤 대화

A : 형, UN 기준으로 형은 만 나이로는 아직 청년이십니다^^. 축하해요~ * UN이 발표한 새로운 연령 구분 UN에서 전 세계 인류의 체질과 평균수명에 대한 측정 결과, 연령 분류의 표준에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며 사람의 평생 연령을 5단계로 나누어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 0세 ~ 17세까지는 미성년자 * 18세 ~ 65세까지는 청년 * 66세 ~ 79세까지는 중년 * 80세 ~ 99세까지는 노년 *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 B : 내 육체와 정신 상태를 냉정히 판단하면 누가 뭐래도 지금은 노년의 초입이 맞아요. 굳이 다운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나요? A : ㅎㅎ, UN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형은 아직 왕성하게 트레킹 하시고 기억력 판단력 똑 부러지시니 청년이 맞아요. ㅋㅋ B : 트레킹은..

참살이의꿈 2018.04.15

소음 노이로제

선생을 하면서 교실에서 제일 많이 한 소리가 "조용히 해!"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업을 시작하고 질서를 잡는데 10분 넘게 걸리기도 했다. 교사에게 수업을 방해하는 소곤대는 소리나 잡담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아예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을 달래고 꾸짖는 데 에너지의 과반이 들어간다. 그래선지 사람의 소음은 나한테 엄청난 노이로제를 유발한다. 직업병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선생을 했다고 다 그런 건 아니니 일차적으로는 내 성격 탓인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성이 되어 시끄러운 환경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반대다. 소음 노이로제는 퇴직을 하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이 많으니 절간 같은 분위기에 길이 들었다. 어쩌다 시끄러운 환경에 노출되면 짜증부터 난다. 손..

길위의단상 2017.08.21

부채

친구한테서 부채를 선물 받았다. 서예가 취미인 친구라 손수 붓글씨를 적었다. 좋아하는 글귀가 있느냐고 물어왔을 때 아무 거나 괜찮다 했더니 공자님 말씀을 넣어 주었다. 良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하는 데는 이롭다. 요즘은 이런 부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지만 나한테는 딱 맞는 용도가 있다. 바둑 둘 때다. 한 손으로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멋스레 바둑을 두고 싶다. 바둑 한 판이 주는 교훈이 이 구절의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진속일상 2016.07.26

친구, 동지, 동무

친구 전일하게 다양해진 자본주의와 매고르게 신체화한 상업주의 속에서 부패하고 속물화한 인정투쟁의 일상을 살아 내고 있는 친구들은 그 가차 없고 삭막한 부가가치의 계단을 좇아 스스로를 파편화, 분열화, 원자화시키면서 신분상승의 꿈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친구들은, 오늘도 정실과 연고, 인맥과 학맥, 그리고 지역과 출신의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친구로서의 연대와 실천을 공고히 함을 통해 그 오래된 의리를 충량(忠良)하게 지켜 낸다. 스스로의 존재를 자본의 스케일 위에 환원/환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은 물화(物化)의 과정 속에 투신하여 '기계-남자'나 '도구-여자'로 변신, 또 변신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속에 모여드는 친구에게는 동지들이 추구하는 대의나 이데올로기마저..

참살이의꿈 2013.09.07

걱정하지 마

"어떻게 지내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지 뭐." "일산 킨텍스의 건축 박람회 보러 가자." "나가는 것도 귀찮다. 그냥 집에 있는 게 편타." "야, 너무 그러면 폐인 된다.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뭣 하고 있어?" "똑같지 뭐. 집에 있어." "답답하지 않냐?" "답답하긴, 이게 편하고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하여튼 희한타." "......." 최근에 두 친구와 통화한 내용이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논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다. 한 친구는 끔찍하게도 '생지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사업하는 친구인데 그는 지금까지 일 없이 집에서 놀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닥치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남자가 집에서 빈둥거리면 왜 안 되는 ..

길위의단상 2013.09.03

1,000km를 달린 여행

지난 토요일에 울산에서 친척 결혼식이 있었다. 먼 거리를 가면서 고작 결혼식만 달랑 참석하고 돌아오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친구도 만나보고, 황매산 철쭉도 구경하고, 주변의 나무도 찾아보기로 했다. 2박3일 일정의 동선이 마련되었다.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섰는데 5시간이 걸려 울산에 도착했다. 사월 초파일이 들어간 사흘 황금연휴의 딱 중간 날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웃에서 함께 자란 고종사촌들인데 이젠 각자 일가를 이루고 먼 곳에 흩어져 산다. 오랜만에 만나서 듣는 사연에는 세월의 신산함이 묻어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범어사에 들러 연등을 구경했다. 마침 저녁때라 연등에 환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범어사 앞 모텔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오전에 부산에 있는 한 교회에서 사목을 ..

사진속일상 2013.05.21

자꾸 늘어나는 모임

퇴직하면서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인생의 한 매듭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마침 서울을 벗어나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잘 됐다 싶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과 만나는 모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핑계인지 모르지만 인간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겉과 달리 내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마저 만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부부 모임이 생겼다. 성당에 다니는 여인네들끼리 반모임을 하다 보니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남자들도 포함시키자고 해서 부부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나로서는 꺼려지는 조건만 갖추고 있어 나가지 ..

길위의단상 2013.04.25

논어[5]

선생님 말씀하시다. "지도적 인물은 묵직하지 않으면 위엄도 없고, 학문도 부실하다. 충실과 신의를 으뜸 삼고, 나만 못한 이와는 벗하지 말라. 허물은 선뜻 고쳐야 하느니라." 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 學而 5 유교적 덕목이 나열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나만 못한 이와는 벗하지 말라[無友不如己者].'다. 우선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A가 B보다 낫다면, B는 A와 벗하려 할 테고 반면에 A는 B와 벗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친구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호학(好學)을 강조하는 마음은 헤아려지지만 너무 계산적인 인간관계다. 사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사귄다면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도리어 퇴보할 수도 있다. 바둑을 둬보면 안다. 상수와 계속 두다 보면 상수 ..

삶의나침반 2012.12.06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 백창우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 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 소주 한 잔 했다고 하..

시읽는기쁨 2011.01.24

동기들

나를 아는 것은 나인데 나는 나를 잘 모른다. 혼자서는 나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동기들을 만난 날, 내가 잘 보였다.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린 친구를 보며 나 또한 그러함을 자각한다. 이팔청춘의 신기루가 인정사정없이 걷힌다. 세월은 참 빠르다. 젊음은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시간 점프'가 공상과학 얘기만은 아니다. 그러나 먼 훗날, 이 사진을 본다면 사라진 지금을 또 아쉽게 추억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늘 늙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순간 뿐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순간, 자리가 아닐까.

사진속일상 2010.10.22

친구가 떠나가다

친구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났다. 인간 세상에서 만나면 이별이 있고, 이별은 다시 만남을 전제로 하건만 이렇게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이별도 있다.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 사이였다. 같은 마을에서 산 것은 아니지만 여러 명의 동기 중에서도 닮은 점이 많아둘이는 가까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헤어져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초등 동기모임이 만들어지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통하는 공통점을 많이 발견했다. 아주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심중으로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투병 중에서도 나와 통화를 할 때면 자신의 처지보다는 도리어 나를 더 위로해 주었다. 친구가 떠나고 나니 생전에 좀더 자주 찾아가서 얼굴을..

사진속일상 2007.06.21

도심길을 쓸쓸히 걷다

날씨는 더없이 맑은데 마음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그러면 표정에 금방 드러나는가 보다. 가까이 있는 동료는 무심한데, 멀리 있는 동료는 걱정을 해준다. 어제 저녁에 친구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퇴근하며 청운동에서 서울역까지 도심길을 따라 걷다. 인간의 도시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는데,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 오늘은 무척 낯설게 보인다. 병상에서 의식이 오락가락한다는 친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서는 이승에서의 이별을 준비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낮의 도시는 뜨겁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걷고 싶지만 도시 보도를 걷기가 쉽지 않다. 부근의 성공회 성당에 들어가서 잠시 쉬다. 결혼식이 있었는지 성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미소가 햇살만큼 환하다. ..

사진속일상 2007.06.16

우정의 편지(2)

2001년이네. 우리 적지 않은 나이지만, 금년부터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노력하면서 살아보세.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 # 36 신정을 전주서 보내고 올라왔네. 연하 카드는 잘 받았네. 작년의 호들갑스러움과는 달리 세기가 변하는 이번 연말은 의외로 조용히 지나간 것 같네. 지금 사회 분위기가 그만큼 가라앉아 있다는 얘기도 될 걸세. 자네가 서울에 온다니 무척 반갑네. 나는 내일 다시 고향에 내려가 한 열흘쯤 쉬다가 15일경 올라올 예정이네. 꼭 만나보도록 하세. 마침 독일팀 모임을 이달 중순경으로 예정해두고 있었네. 자네가 오면 같이 모임을 가지도록 하겠네. 서울에 와서 우리 집으로 연락하면 시골 전화번호를 알으켜 ..

길위의단상 2007.02.13

작아 10년 전시회

‘작아’(작은 것이 아름답다) 창간 10년을 기념해서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작아’는 녹색평론과 함께 내가 정기 구독하는 잡지다. 이 잡지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어제 친구와 같이 갤러리 ‘다’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다녀왔다. 남산 아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갤러리도 소박해서 좋았고, 조촐하지만 정성들여 준비한 전시회도 가족적인 자축 분위기로 가득해 아주 좋았다. 실내 전시장에는 작아에 글을 올리시는 분들의 사진이나 그림, 글씨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바깥 뜰에는 환경 도서들과 오래된 느티나무를 이용한 환경사랑 마당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기서 야마오 산세이의 책을 한 권 샀다. 특히 반갑게 맞이하고 안내해 준 작아 일꾼들이 고마웠고, 그분들이 전부터 아는 사이인 양 아주 친근하..

사진속일상 2006.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