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50

내가 봐도 우습다 / 안정복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翁年垂八十 日與小兒嬉捕蜨爭相逐 점蟬亦共隨磵邊抽石해 林下拾山梨白髮終難掩 時爲人所嗤 - 내가 봐도 우습다(自戱效放翁) / 안정복(安鼎福)  순암 안정복 선생은 18세기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이웃 동네에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가 있다. 앞에는 영장산이 있고 뒤에는 국수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동네다. 선생은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영향을 받았다.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보수적이어서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며 새로운 학문을 추구..

시읽는기쁨 2024.04.27

사친(思親) / 사임당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雙輪月 鏡浦臺前一陳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每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 사친(思親) / 사임당(師任堂)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각별했을 것 같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품인지라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리라. 사임당은 열아홉에 혼인을 한 뒤 7남매를 키우며 파주와 한양에서 살았다. 쪼들리는 살림을 꾸리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동안 ..

시읽는기쁨 2023.12.24

천지가 다함이 있어도 시름은 다하지 않으니

"세계 평화를 위하여!" 젊었을 때 술자리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자주 외쳤던 말이다. 젊은 날의 치기였을 망정 그 시절에는 세계와 평화를 언급할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요즈음 젊은이들과는 달랐다는 말이다. 물론 이 시대의 젊은이를 비난하고 싶은 심정은 조금도 없다. 도리어 각박한 생존 경쟁의 장에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고담준론이 먹여 살려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마저 공개적으로 '교육부가 경제부처이며 대학은 산업 인재 양성을 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누구를 나무라겠는가. 7, 80년대에는 지금과는 성질이 다른 울분과 저항이 있었다. 그때는 대의(大義)를 논하고 이상을 좇던 시절이었다. 그럴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심해지고 지식인의 우울과 시름은 짙어졌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

참살이의꿈 2022.06.28

밤이 얼마나 되었나 / 김시습

밤이 얼마나 되었나,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숱한 별 찬란하여 빛발을 쏟누나 깊은 산 깊고 깊어 가물가물 어두운데 아아 그대는 어찌 이런 산골에 머무는가 앞에는 범과 표범 뒤에는 승냥이와 이리 게다가 올빼미 날아와 곁에 앉는 곳 인생살이란 뜻 맞음이 귀한 법 그대는 어이해서 홀로 허둥대는가 나 그대 위하여 오래된 거문고를 타려 하나 거문고 소리 산만하여 슬픔이 밀려오고 나 그대 위하여 긴 칼로 검무를 추려 하나 칼 노래 강개하여 애간장을 끊으리 아아 슬프다 선생이여, 무엇으로 위로하랴 삼동 이 긴긴 밤을 어이 한단 말인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燦爛生光芒 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鄕 前有虎豹後豺狼 況乃鵬鳥飛止傍 人生百歲貴適意 君胡爲乎獨遑遑 我欲爲君彈古琴 古琴疏越多悲傷 我欲爲君舞長劍 劍歌慷慨令斷腸 嗟嗟先生何以慰 ..

시읽는기쁨 2021.11.23

무이산에서 / 사방득

집으로 돌아갈 꿈 10년 동안 안 꾼 채로 푸른 산에 홀로 서서 물가를 바라보네 산 비 뚝, 그치고 나니 온 천지가 적막한데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 十年無夢得還家 獨立靑峰野水涯 天地寂寥山雨歇 幾生修得到梅花 - 무이산에서(武夷山中) / 사방득(謝枋得)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은 남송 시대의 문인으로 원나라가 침략하여 나라가 망하자 무이산으로 들어가 협력을 거부하고 저항한 인물이다. 내용으로 볼 때 10년 동안 무이산에 숨어 사는 기간 중에 쓴 시로 보인다. 지조를 지키며 살려고 한 사방득의 결기와 고독이 동시에 느껴진다. 결국 사방득은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幾生修得到梅花]." 이런 시를 읽으면 사는 게 무엇인지 아..

시읽는기쁨 2021.01.19

중용가 / 이밀

이 세상 모든 일은 중용이 제일이거니, 믿고 살아왔다네 - 한데 이상도 하지. 이 '중용' -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그려. 자아, 이렇게 되면 무엇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없는 것.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읍내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개울 사이에 농토를 갖네. 반은 선비요, 반은 농사꾼일세.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사람들도 적당히 구슬리네. 집은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으니 가꾼 것이 절반이요, 안 가꾼 것 또한 절반일세. 입은 옷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 장만한 것도 아닐세. 너무 좋은 음식도 먹지 않고 하인배는 바보와 꾀보의 중간내기라. 아내는 너무 똑똑하지도 않고 너무 단순치도 않으니, 그러고 보면 이내 몸은 반..

시읽는기쁨 2020.08.16

변덕스런 날씨 / 김시습

개었다가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고 하늘도 그런데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다가는 다시 나를 헐뜯고 이름 피한다면서 도리어 이름 구하네 피고 지는 저 꽃을 봄이 어찌 주관하며 가고 오는 저 구름과 산이 어찌 다투리 바라건대 사람들아 이 말을 기억하라 평생 동안 즐거운 곳 어디에도 없느니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應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 변덕스런 날씨(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雲去雲來山不爭(구름 가고 구름 오되 산은 다투지 않는다)", 시를 읽어 내려가다가 여기에서 오래 멎는다. 하늘조차 변화무쌍한데 세상사야 오죽하겠는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심은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돈, 건강, 명성, 그 어느 것이든 일일이 쫓아..

시읽는기쁨 2020.08.08

중은(中隱) / 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

시읽는기쁨 2020.07.14

자야오가(子夜吳歌) / 이백

장안도 한밤에 달은 밝은데 집집이 들리는 다듬이 소리 처량도 하구나 가을바람은 불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玉關)의 정을 일깨우노나 언제쯤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 끝낸 그이가 돌아오실까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 子夜吳歌 中 秋歌 / 李白 1936년, 함흥에서 만난 백석(白石)과 진향(眞香)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진향은 서점에서 라는 제목의 당시 선집을 사서 백석에게 보여주었다. 책을 훑어보던 백석은 미소를 머금고 진향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이렇게 해서 '자야'라는 애칭이 생겼고, 어쩌면 동진의 자야라는 여인처럼 평생을 기다리는 숙명으로 살아가도록 예정이 되었..

시읽는기쁨 2020.02.04

버들가지는 꺾여도 / 신흠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이 변하지 않고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 신흠(申欽, 1566~1628) 도산서원에 있는 왕버들을 올린 블로그 글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서원에 왜 버드나무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신흠 선생의 이 시에 답이 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 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지내셨다는데, 두 분은 시대가 다르니 퇴계 선생이 알았을 리가 없다. 시가 품고 있는 의미는 짐작하셨을 수 있다. 어쨌든 도산서원의 버드나무는 선비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상촌(象村) 신흠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

시읽는기쁨 2019.12.15

연꽃이 피어나네 / 한산

너른 바위에 홀로 앉았노라니 계곡물 소리에 가슴 시리네 고요한 풍광 눈부시게 아름답고 안개 속에 희미하게 바위 드러나네 편안한 마음으로 쉬노라니 지는 해에 나무 그림자 낮아졌네 내 스스로 마음자리 들여다보니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 盤陀石上坐 谿澗冷凄凄 靜玩偏嘉麗 虛巖蒙霧迷 恰然憩歇處 日斜樹影低 我自觀心地 蓮花出於泥 - 寒山 가을이 짙어가는 시절에 한산의 시를 읽는다. 한산이 듣던 천태산(天台山)의 맑은 계곡물 소리에 귀 기울인다. 물욕에 찌든 이 검은 속내를 조금이나마 씻어가 주길 기대하면서. 나는 언제쯤 구차한 자리 훌훌 털고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으리. 제 마음자리 들여다보며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네'라고 노래할 수 있으리. 한산은 다른 시에서 자신을 이렇게 드러냈다. 吾心似秋月 碧..

시읽는기쁨 2019.11.09

나 홀로 웃노라 / 정약용

有栗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倡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 獨笑 / 丁若鏞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허구한 날 끼니 걱정 벼슬 높은 사람은 으례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펼 길이 없다오 복 많아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라도 무너지기 마련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꼭 바보라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심술 부려 세상만사 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모르리라 나 홀로 웃는 까닭 이만큼이라도 살아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도모하는 일은 자주 어긋나게 마련이고, 열에 아홉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읽는기쁨 2019.08.02

종남별업 / 왕유

중년 이후에는 도를 더욱 좋아하여 만년에 종남산 기슭에 별장을 마련했네 흥이나면 홀로 그곳으로 찾아가나니 얼마나 좋은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 뿐이라 걷고 또 걸어 물길 시작되는 곳에 이르러 가만히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본다 우연히 산속에서 산골 노인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가는 길 잊었다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수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치林수 談笑無還期 - 終南別業 / 王維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701~761)의 전원 예찬이다. 왕유는 종남산 기슭에 터를 마련하고 관료 노릇을 하는 틈틈이 은둔 생활의 정취를 즐겼다. 말년에는 별장을 짓고 속세에서 떠나 불교에 심취하며 초연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시는 그 시절에 지은 것 같다. 세상사를 잊은 유유자적이 부럽다. 오두막일..

시읽는기쁨 2019.06.22

분매(盆梅) / 임영

백옥당 안에서 어느 날 문득 피어난 매화여! 벗님과의 술자리에서 고결한 미소를 짓누나 온 천지에 눈 내리고 찬 바람 휘몰아치는데 그대, 짙은 향기를 풍기며 어디메서 왔는가? 白玉堂中樹 開花近客杯 滿天風雪裏 何處得夫來 - 분매(盆梅) / 임영(林泳) 올해는 남도 지방에서 몇 그루의 고매(故梅)를 만났다. 매화는 선비가 지켜야 할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었음을 이번 길에서 확인했다.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말이 나타내듯, 어떤 가난과 고난에도 선비는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꽃을 피워내는 매화를 보며, 옛 선비들은 위안을 받고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임영(林泳, 1649~1696)은 조선조의 문신이다. 경전과 역사서에 정통하였고, 제자백가..

시읽는기쁨 2019.03.27

억만금을 준대도

옛사람이 현대인보다 지조 면에서는 몇 급 위인 것 같다. 그때는 선비 정신이란 게 살아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지켰다. 현실에 야합하는 간신 무리도 있었겠지만, 명분과 가치를 중시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그들은 현재의 고초를 기꺼이 감내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반면에 현대인은 즉물적이고 찰나적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실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고,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 누구나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가끔 생각한다. 억만금에도 팔 수 없는 내 안의 무엇이 과연 있는가? 백 억을 줄 테니 그걸 포기하라고 하면 "No!"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 억을 주겠다면 어찌하겠는가? 마지막까지 남는 게 있어야 그게 바..

참살이의꿈 2018.12.13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네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廬山煙雨浙江潮 未到千般恨不消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 廬山煙雨 / 蘇東坡 이번 겨울 첫 추위가 닥쳤다. 속물이어선지 소동파 하면 동파육이 먼저 떠오른다. 동파육에 연태고량주 한잔하면 딱 좋겠다. 추울 때는 독한 술이 제일이지. 그런데 지금은 장염약을 먹으며 속을 달래는 중이다. 소동파는 긴 유배 생활 중에도 자신만의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었다. '산은 산, 물은 물'의 어원도 이 시가 아닐까. 선풍(禪風)이 감지되는 시다. 힘든 걸음 해서 가보지만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일까. 그러나 '별다른 게 없다'는 말에는 깊은..

시읽는기쁨 2018.12.10

저물 무렵 / 김시습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 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거나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 있으리 - 저물 무렵 / 김시습 萬壑千峰外 孤雲獨鳥還 此年居是寺 來歲向何山 風息松窓靜 香銷禪室閑 此生吾已斷 棲迹水雲間 - 晩意 / 金時習 새벽 안개가 낮이 되도록 자욱하다. 그저께 내린 첫눈의 자취가 남아 있는 뒷산도 안개 속에 잠겨 있다. 계절도 나이도 쓸쓸히 저물어간다. 저잣거리를 기웃거리지 말고 더 고독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책을 불사르고 방랑의 길에 오른 매월당을 생각한다.

시읽는기쁨 2018.11.26

늙은이가 읊다 / 김삿갓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래 사는 것도 욕(辱)이라 한 요임금 말이 귀신 같네 옛 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는데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筋力衰耗聲似痛 胃腸虛乏味思珍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 老吟 / 金笠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그중 으뜸이 수(壽)다. 그러나 오래 살아서 복이 되기보다 욕이 되는 경우를 더 자주 본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잔뜩 올려놓았지만, 심신의 ..

시읽는기쁨 2018.07.27

전원락(田園樂) / 왕유

桃紅復含宿雨 柳綠更帶朝煙 花落家童未掃 鶯啼山客猶眠 붉은 복사꽃은 간밤 비 머금어 더 곱고 버들은 새벽 안개 속에 더욱 푸르나니 꽃잎 떨어지는데 아이는 쓸 생각을 않고 꾀꼬리 우는데도 손님은 그저 잠만 자네 - 전원에 사는 즐거움 / 왕유(王維) 김홍도의 '낮잠' 그림 중 하나를 본다. 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는 노인의 모습이 유유자적이다. 이 그림에 적힌 시가 왕유(王維, 701~761)의 '전원락(田園樂)' 연작시 7수 중 여섯 번째 작품이다. 시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라면 앞의 나무는 버드나무, 뒤는 복사꽃이리라. 그림 속 노인이 부럽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시동 하나 데리고 자연에 묻혀 속세를 잊고 살아가는 모습이 선경이 따로 없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현대인의 로망이 이 그림에 담겨 있다. 나는 ..

시읽는기쁨 2018.06.16

담박 / 정약용

담박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의 살림살이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 아래로 시권을 가져오고 중 떠난 침상 곁엔 염주가 남아 있지 한낮이면 채마밭에 벌이 한창 붕붕대고 따순 바람 보리 이삭 꿩이 서로 부르누나 우연히 다리 위서 이웃 영감 만나 조각배 함께 타고 진탕 마실 약속했네 - 담박 / 정약용 淡泊爲歡一事無 異鄕生理未全孤 客來花下携詩券 僧去牀間落念珠 菜莢日高蜂正沸 麥芒風煖雉相呼 偶然橋上逢隣수 約共扁舟倒百壺 - 淡泊 / 丁若鏞 '담박(淡泊)'이란 말이 좋다. '물 맑을 담(淡)'에 '머무를 박(泊)'이다. '담백함에 머무르다'는 뜻이겠다. 욕심 없고 순박한 마음, 무위(無爲)의 마음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함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꽃 아래서..

시읽는기쁨 2017.07.28

채련곡 / 허난설헌

秋淨長湖碧玉流 蓮花深處繫蘭舟 逢郎隔水投蓮子 或被人知半日羞 - 採蓮曲 / 許蘭雪軒 해맑은 가을 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우거진 곳에 목란배를 매었네 물 건너 님을 만나 연밥 따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봤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 - 채련곡 / 허난설헌 허난설헌이 지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요염하다. 중국풍의 느낌도 난다. 여인의 연정과 수줍음이 연꽃을 소재로 잘 그려져 있다. 때는 가을, 연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연밥이 여무는 호수다. 호수에 배를 띄운 여인은 물 건너 사랑하는 낭군을 보고는 연꽃 열매를 따서 던진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조선 시대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나절이나 부끄러웠을까? 아마 몰래 배 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더 어울릴..

시읽는기쁨 2017.07.01

관작루에 오르다 / 왕지환

붉은 해는 산을 의지해 다하고 누런 강은 바다로 들어가 흐르는데 천리 더 멀리 바라보고자 다시 더 한 층을 올라가네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 登관雀樓 / 王之渙 대칭의 조형미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주의 기본 속성이 대칭성이다. 과학자들도 자연의 대칭성을 주목한다. 거시나 미시 세계 모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한시가 아름다운 건 대칭의 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시의 생명은 대구(對句)라고 한다. 이 시가 좋은 예다. 왕지환은 당나라 때 시인이다. 이 시는 간결하고 쉽다. 은유도 무슨 의미인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인간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인의 의지가 읽힌다. 세월은 흐르고 몸은 늙어가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신만은 쇠하지 않는다. 인생은 쉼없이 배우고 ..

시읽는기쁨 2016.07.03

대주(對酒) /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痴人 - 對酒 / 白居易 첫 구는 에 나오는 예화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혜왕에게 대진인이 이 비유로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가 있는데 촉씨라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라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땅을 다투며 수시로 전쟁을 하는데 전사자가 수만이라 합니다. 패배자를 쫓을 때는 십오 일 이후에나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우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달팽이 뿔 위의 다툼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하물며 재물의 많고 적음이야 티끌만도 못한 것이니 이 세상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시인은 술잔을 마주하고 권한다...

시읽는기쁨 2016.03.17

중국, 당시의 나라

이 책은 고대 중문과 교수인 김준연 선생이 당시(唐詩)의 흔적을 답사한 중국 기행기다. 선생은 옛날 당나라 지도를 들고 13개 성에 산재한 유적을 찾아다니며 당시 200여 수의 내력을 훑었다. 책에는 다섯 차례에 걸쳐 서쪽 돈황에서 동쪽 태산, 남쪽 계림에서 북쪽 승덕까지 발로 누빈 기록이 마치 내가 현지에 있는 듯 생생하다. 중국의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는 당시를 만나면 더욱 반갑다. 그중의 하나가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에서 밤에 정박하다(楓橋夜泊)'이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달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가 하늘에 가득 강가 단풍 고깃배 등불과 마주하여 근심 속에 잠들 때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에 들려온다 이 시가 유명..

읽고본느낌 2015.08.30

박조요(撲棗謠) / 이달

이웃집 꼬마가 와서 대추를 따네 늙은이가 문을 나와 꼬마를 내쫓네 꼬마가 홱 돌아서며 늙은이에게 하는 말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 대추 따기를 노래함 / 이달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 撲棗謠 / 李達(1539~1609) 버릇없는 꼬마한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시 내용이 역시 이달(李達)답다. 허균이나 허난설헌이 나올 때마다 꼭 등장하는 시인 이달이다. 늙은이의 입장이 되어 이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꼬마의 한 마디가 번쩍하는 번갯불이 되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의 행태도 저 노인과 다르지 않음이다. 내 것, 네 것을 가르는 게 본래 부질없는 짓이렷다.

시읽는기쁨 2015.07.29

망악(望嶽) / 두보

태산의 모습 어떠한가 제나라에서 노나라까지 푸르름 끝이 없어라 하늘은 이곳에 온갖 신비함을 모았고 산빛과 그림자는 밤과 새벽처럼 갈린다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 크게 뜨고 돌아가는 새를 바라본다 언젠가 반드시 저 꼭대기에 올라 소소한 뭇 산을 한번 굽어보리라 垈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鐘紳秀 陰陽割昏曉 탕胸生曾雲 決자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 望嶽 / 杜甫 3년 전에 중국 태산(泰山)에 올랐다. 7천 개가 넘는 계단을 걸어 남천문에 닿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정상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을 여니 호텔 복도는 새우잠을 자는 중국인들로 걸어가기조차 힘들었다. 호텔 밖에는 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사람들 ..

시읽는기쁨 2015.03.30

한중(閑中) / 서거정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가로이 읊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한가로이 거닐고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즐기네 白髮紅塵閱世間 世間何樂得如閑 閑吟閑酌仍閑步 閑坐閑眠閑愛山 - 閑中 / 徐居正 내 구미에 맞는 시지만 딴지를 걸어보련다. 유한계급의 한가한 삶이란 여러 하인과 노예의 희생이 있어 가능한 게 사실이다. 그들의 노동과 시중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불한당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한가롭게 살고 싶건만 한가롭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의 시간과 돈을 뺏은 특정 계층의 여가가 음풍농월을 낳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과거의 거대한 유적이나 건물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편이 불편한 이유다.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15.02.11

절화행(折花行) / 이규보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며 살짝 웃음띠고 낭군에게 물었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낭군이 짐짓 장난을 섞어서 말했다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미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서 꽃을 밟아 뭉개며 말했다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 - 꽃을 꺾어들고 / 이규보 牧丹含露眞珠顆 美人折得窓前過 含笑問檀郞 花强妾貌强 檀郞故相戱 强道花枝好 美人妬花勝 踏破花枝道 花若勝於妾 今宵花同宿 - 折花行 / 李奎報 즐겨보는 프로인 '개콘'에 '두근두근'이라는 코너가 있다. 좋아한다는 걸 대놓고 고백하지 못하는 두 청춘남녀의 수줍고도 풋풋한 사랑을 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인다. 은은한 60년대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시 '절화행(折花行)'에서 받는..

시읽는기쁨 2013.11.06

여인의 노래 / 이옥

一結靑絲髮 相期到蔥根 無羞猶自羞 三月不共言 검은 머리 한데 맞대고 하나로 맺어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자고 했지요 부끄럽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부끄러워져 낭군에게 석 달 동안 말도 못했지요 四更起梳頭 五更候公모 誓將歸家後 不食眠日午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5경에 어른들께 문안드렸다 맹세하노니, 친정에 돌아간 뒤 먹지도 않고 대낮까지 늦잠 자리라 桃花猶是賤 梨花太如霜 停勻脂與粉 농作杏花粧 복사꽃은 너무 천박하고 배꽃은 너무 쌀쌀맞네 연지분 화장을 잠시 멈추고 살구씨 화장을 하네 歡言自酒家 농言自倡家 如何汗衫上 연脂染作花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고 말하지만 기생집에서 온 줄 전 알아요 어째서 속적삼 위에 연지가 꽃처럼 물들었나요 亂提羹與飯 照我面門擲 自是郎變味 妾手豈異昔 국그릇 밥그릇 마구 집어 내 얼굴을 겨냥..

시읽는기쁨 2013.04.23

조대(釣臺) / 대복고(戴復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淑 惹起虛名滿世間 - 釣臺 / 戴復古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싯대라 삼공 벼슬 준다 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쳤구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BC 4 ~ AD 57)가 어지러워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천하가 제 손아귀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복종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동문수학한 엄자릉(嚴子陵)이었다. 자신은 선비의 길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엄자릉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하를 부춘산(富春山)에 보내 냇가에서 낚시질하는 엄자릉을 데려오게 하였다. 대신들이 늘어선 사이를 엄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제 자리..

시읽는기쁨 2012.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