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17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

시읽는기쁨 2023.08.09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와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시읽는기쁨 2022.07.10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시읽는기쁨 2022.01.12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요즈음 정치에 입문한 어떤 분이 '십 원 한 장' 남에게 피해를 끼..

시읽는기쁨 2021.07.10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20.10.07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

시읽는기쁨 2020.02.19

맑은 웃음 /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맑은 웃음 / 공광규 인간만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치명적인 자뻑이다.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들 우리는 그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면 ..

시읽는기쁨 2017.12.23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

시읽는기쁨 2017.11.24

[펌] 공광규 시인의 시 창작 이야기

시는 인류가 남긴 최고의 문화예술입니다. 공자는 역대의 시를 모은 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중국의 옛 사람 원매는 시를 읽으면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 꼭 맞는 대답은 없습니다. 시는 뭐다! 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시를 쓰는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시인이 시를 써오며 공감하고 동의해온 몇 가지 공통점과 시인 개인이 오랫동안 시를 써오면서 굳어진 습관이 있을 뿐입니다. 작업방식: 괴테는 64년간 ‘파우스트’에 매달림/ 발자크는 매일 밤 수도사 옷을 입고 촛불을 켜놓고 여섯 시간 이상 작업을 시작해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60잔의 커피를 마시며 글..

길위의단상 2014.08.11

2년만에 간 단임골

2년만에 정선 단임골에 갔다. 리 선생님 내외분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모든 풍경이 그 자리 그대로 있었고, 사람의 향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착한 날 오후에는인도에서 온 귀한 차를 나누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따가운 햇살이 사그라진 저녁 때에 리 선생님 안내로 집 주변을 산책하며 꽃과 나무 설명을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재미난 얘기는 끝이 없었다. 두 분이 결혼하게 된 사연은 다시 들어도 감동이었다. 두 분과 함께 있으면늘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된다. 땅 한 평, 돈 한 푼 없지만,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소유한 두 분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 할 수 있다. 두 분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

사진속일상 2012.05.01

병산습지 / 공광규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에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 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 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제비꼬리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실망했는지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갯버들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깔아놓겠지요 그러면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매화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발자국 매화꽃잎에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 병산습지 / 공광규 검암습지, 마애습지, 풍산습지, 구담습지, 지보습지, ..

시읽는기쁨 2011.08.18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시냇가 미루나무 여럿 들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바람 부는 날은 더 열심히 그려댑니다 곧은길만 가기 어려운 사람 발걸음을 생각해 논둑과 밭둑과 길은 휘어지게 그리고 높이 떴다 지는 둥근 해가 다치지 않게 산 능선을 곡선으로 그립니다 미루나무도 개구쟁이 아이를 키우는지 물감통을 들판에 확! 엎지를 때가 있습니다 미루나무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되면 붓을 빨러 냇물로 내려가다 뒹구는지 노란 물감을 하늘에 뿌리거나 언덕에 물감을 흘려놓기도 합니다 미루나무의 실수는 천진해서 별이나 풀꽃이 됩니다 이런 미루나무도 심심한 날이 있어서 뭐라 뭐라 허공에 붓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나는 어려서 꼭 한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광규야, 가출하거라." - 미루나무 붓글씨 / 공광규 미루나무나 포플러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

시읽는기쁨 2010.08.14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시읽는기쁨 2010.07.11

놀란 강 /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 놀란 강 / 공광규 그들은 독한 사람들이다. 22조라는 거금을 쏟아부어 강을 파헤치겠단다. '4대강 살리기'라고? 웃기는 소리다. 그들은 지방 토호들과 일부 건설업자들 배를 불리기 위해 강을 죽이려 한다. 자연을 개발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보는 저들의 시선이 무섭다.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이는 ..

시읽는기쁨 2009.07.09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 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 걸림..

시읽는기쁨 2009.04.15

거짓말 / 공광규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 거짓말 / 공광규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둔 생각들을 모두 다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남 몰래 짝사랑한 마음, 부끄러운 비밀들, 웃음 뒤에 감추어진 비수들..

시읽는기쁨 2009.03.10

시래기 한 웅큼 /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웅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시읽는기쁨 200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