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23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무시할 수 없다. 내용을 알지 못해도 저자를 믿고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외국 작가야 정보가 없으니 오로지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있으나, 국내 작가는 단편적이나마 삶이 드러나 있으니 작품만 구분하여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지영 작가에 대해서는 양가감정이 있다.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투사와 같은 면이 보이지만, 어떤 때는 속된 말로 싼티가 나기도 한다. 문제를 파고 드는 치열함이 있지만 동시에 경솔하고 가벼운 면이 있는 것이다. 내 느낌이 그렇다. 는 작년에 나온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이다. 하동으로 내려가서 은거하며 살다가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나 다시 예수를 만난 신앙고백서라 할 수 있다. 여행사의 성지 순례 패키지 여행을 마친 뒤 예루살렘에 남아 며칠 더 ..

읽고본느낌 2024.07.03

사람들은 왜 사이비에 빠질까?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인 '나는 신이다'가 연일 화제다. 종교를 내세운 집단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동시에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사악한 교주나 교리에 끌려 신도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도 자연스레 들게 된다. 먼저 이단과 사이비는 구별해야 한다. 이단은 경전을 정통 교단의 가르침과 다르게 해석하는 집단이다. 지금의 기독도교 초창기에는 이단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초기 기독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스데반은 유대인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최초의 순교자였다. 개신교가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가톨릭계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러므로 이단이라는 표현보다는 비주류라고 불러야 ..

길위의단상 2023.03.19

선한 능력으로 / 본회퍼

선한 힘들에 신실하고 조용히 둘러싸여 놀랍게 보호받고 위로받으며 나는 이날을 그대들과 더불어 살기를 위하고 그대들과 더불어 새로운 해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한다. 지나간 해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 악한 날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른다. 아,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구원을 주소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가득찬 쓰디쓴 고난의 무거운 잔을 주신다면 당신의 선하고 사랑스런 손으로부터 그것을 두려움 없이 감사히 받겠나이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기쁨과 그 태양의 찬란한 빛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과거의 것을 기념하고자 하며 그때 우리의 삶은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 속으로 가져다준 양초들이 오늘 따뜻하게 밝게 타도록 하소서. 가능하면..

시읽는기쁨 2023.01.08

도올의 로마서 강해

내가 한때 회심을 하게 된 계기가 '로마서'였다. 수녀원의 조용한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이 나를 찔렀다. -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서 1,17). -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로마서 3,21)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로마서 3,22).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로..

읽고본느낌 2022.02.22

다읽(15) - 예수는 없다

세 번째 다시 읽는 책이다. 20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한 글에 가슴 한 편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번민만 있을 뿐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신앙의 정체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가 나오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선생의 인기를 반영하듯 넓은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청중 중에는 선생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 중에 그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또, 선생의 친구라면서 조영남 씨가 나와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 자..

읽고본느낌 2022.02.16

금란교회의 추억

금란교회 하면 개신교 신자든 비신자든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등록된 교인 수가 14만 명이 되는 감리교회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교회다. 또, 워낙 유명세를 탄 김홍도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 보수 반공 이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난 2일에 김홍도 목사가 별세했는데, 전광훈을 길러낸 스승이었다는 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나도 금란교회와 김홍도 목사와의 짧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분의 부고에 잠시 숙연해지며 거의 50년 전 옛일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나는 1970년대 초중반에 금란교회 신자였다. 1972년, 대학교 2학년생일 때 금란교회에 처음 나갔다. 같은 과 친구가 소개해 주면서 담임목사의 영적 능력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김홍도 목사가 금란교회에 막 부임했을 때였다. 처음 교회를 나가..

길위의단상 2020.09.06

파티마의 은총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가톨릭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세 군데 모두 성모 발현지다. 1917년 5월 13일, 작은 마을 파티마에 살던 세 아이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그 뒤로 10월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차례나 발현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파티마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기념 건물이 들어서 있는 천주교의 대표 성지다. 지난 6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아내가 제일 가보고 싶어 한 곳이 파티마였다. 가톨릭 신자로서는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성지 인근에 있는 숙소에서 묵었고, 파티마에 머문 시간도 다른 팀에 비해 길었다. 그래서 아내는 세 번이나 성지를 찾을 수 있었다. 가던 날 오후에는 가이드의 안내로 성지 전반에 대한 설..

길위의단상 2019.09.16

정원사의 방울

위고의 2권에는 파리에 있는 봉쇄 수녀원 얘기가 나온다. 장발장이 자베르 형사를 피해 은신한 곳이다. 봉쇄 수녀원은 '봉쇄'라는 이름 그대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더구나 남자는 절대 접근 금지 구역이다. 그래도 수녀원을 운영하자면 남자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이 봉쇄 수녀원에는 정원사와 잡일을 겸하는 유일한 남자가 산다.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으로 절름발이다. 장발장은 전에 포슐르방의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정원사 노인은 발목에 방울을 달고 있다. 그가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난다. 수녀들은 방울 소리가 나면 얼른 숨는다. 정원사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다. 남자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정원사의 방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 피하시오' ..

참살이의꿈 2019.01.31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온 지 14년이 되어선지 최근에 나온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냉소적이면서도 싱싱한 야성의 냄새가 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이하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교양 없이 막돼먹은 사람들이 주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태를 고발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더러운 욕망의 카니발에 그들은 민낯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척 할 뿐이다. 책 제목으로 삼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장과 절을 흉내 낸 형식이 재미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나니'가 1장 1절이다. 최순덕은 열심 신자인 부모 밑에서 오..

읽고본느낌 2018.09.09

커피 기도 / 이상국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속으로 그러다가 기도를 마친 모녀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서야 나도 커피를 마셨다 - 커피 기도 / 이상국 천주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성호경을 긋고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온전히 실천하던 때였다. 청계산에 등산을 갔는데 여름이라 목이 탔다. 마침 산정 가까이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보통 하던 대로 돈을 내다가 흠칫했다. 막걸릿잔을 들고 성호경을 긋는 게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결국은 ..

시읽는기쁨 2016.06.22

마십시오

"당신이 다만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기주의 속에서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매일 아들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과 물질적인 성취를 혼동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고통스러울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약도 없이, 집도 없이, 직장도 미래도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형제에 대한 한을 품고 있다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계속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참살이의꿈 2013.08.10

어떤 사마리아 사람

어느 날 예수를 떠보려고 한 율법학자가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다.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 반문했다. 율법학자가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시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시오." 라고 적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올바로 말했다고 칭찬하며, 그대로 한다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 물었다. 아마 다시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그..

참살이의꿈 2013.07.22

당신들의 기독교

이 책에는 10명의 개신교 신자(信者)가 등장한다. 통념적으로 믿음이 좋다고 부르는 사람들로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만나는 유형들이다. 는 교인들을 대표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는 책이다. 그중에 교회 재정 담당 장로인 G가 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G는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의 알짬으로 삼는 부르주아로, 세계관이나 식견은 사뭇 보수적이다. 그의 부는 교회 내에서도 인정과 존경의 잣대이자 신의 축복에 대한 증거로 숭상된다. 그에게 벌이와 벌이의 체계를 성찰하는 의식은 전혀 없다. 그저 세속 속에서 열심히 돈을 축적하고,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 살아간다. 부유한 크리스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은이 김영민 선생은 G 같은 신자들이 존경받는 모습을 통해 이미 우리 시대의 ..

읽고본느낌 2013.06.04

논어[25]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이 실없으면 그래도 좋을까 몰라! 소 수레나 말 수레나 멍에 없이 그래도 끌고 갈 수 있을까?"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예 小車無월 其何以行之哉 - 爲政 15 문명이 발달하고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고독하고 우울하다. 가혹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된 살벌한 세상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존경이나 유대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를 믿지 못한다. 가정이 무너지는 것도 가족 사이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간에도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 지금의 남과 북 관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정과 신뢰가 있다면, 내 존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면, 가난이나 다른 어려움은 별로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삶의나침반 2013.04.07

타력

일본 불교 중 하나인 정토진종(淨土眞宗)을 처음 접한 건 10여 년 전 키요자와 만시가 쓴 라는 소책자를 통해서였다. 불교지만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닮은 데가 많아서 놀랐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같은 것이다. "사람은 무한자(無限者, The Infinite) 또는 절대자(絶對者, The Absolute)와 만남을 통해서만 든든한 토대 위에 설 수가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힘[他力]을 의존함으로써 얻게 되는 내적 평안이 신심(信心)이다." "종교는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너머로 가서 닿는 길이다." "나는 내 지력(知力)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래(如來)를 믿고 의지한다." 정토진종을 창시한 사람은 신란(親鸞..

읽고본느낌 2013.04.02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고백하는 내용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 서울 용산에 있는 청파교회 이야기가 실렸다. ‘부동산 굴리는 건 이웃 꿈 빼앗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희년실천주일 참여교회 중 하나인 청파교회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희년(禧年)이란 이스라엘 민족에게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로서, 희년이 되면 가난한 이들의 빚을 탕감하고 땅을 돌려주고 노예는 자유를 얻는 해방의 해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 땅에서 실천되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은 기독교에서 이 희년의 정신이 실종된 것 같다. 일부 교회에서 희년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희년실천주일을 지키는데 청파교회도 그중 하나다. 신자들은 부동산 과다 보유나 부동산을 통한 투기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토지 보유세 강화 정책을 지지하고, 토지임대료 수입은 가난한 이웃과 나누..

길위의단상 2009.10.22

빈자일등(貧者一燈)

석가(釋迦)께서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물고계실 때 그곳 국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각각 신분에 걸맞는 화려한 공양을 하였다.가난한 난타(難陀)도 부처님이 지나실 길목에다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고자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는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돈 한 푼을 가지고 기름집으로 갔다. 한 푼어치 기름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았으나 그 여인의 말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갸륵하게 생각하여 등을 밝힐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그 기름으로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에게 바쳤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 둘 꺼져 버렸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불도 모두 꺼졌다. 그러나 난타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阿難)은 이 등불에 다가..

길위의단상 2009.05.02

두 여인

1 옛날에 가난한 홀어미가 있었습니다. 그 홀어미는 부처님께 연등공양을 올려야겠는데 너무 가난해서 기름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못해 간신히 동전 한 닢을 빌어 밥그릇에 동전 한 닢어치 기름을 사가지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저잣거리 뒷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름에 불을 붙인 다음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홀어미는 아무런 비라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고 싶은 바람이야 마땅히 누구보다도 많았지만 공양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운 홀어미는 그저 부처님께 몸 둘 바를 모르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거세어졌습니다. 높다랗게 매달려 눈부시게 타오르던 수천수만 점 등불들이 모두 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뒷골목 어디선가 가느다란 한 점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제자 한분이 달..

길위의단상 2008.07.21

믿음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해 대단히 심한 가뭄이 들어서 각 성당마다 비를 기원하는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뭄은 심해져갔다. 그런 어느 날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성당에 와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성당 안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신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정말 기도를 하면 비가 오리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신자들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중에 우산을 가져오신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

참살이의꿈 2007.12.07

예수 믿읍시다

출근하면서 골목길을 지날 때 가끔 한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늘 같은 시간에 왼손에 쓰레기 봉투, 오른손에는 집게를 들고 아래서부터 올라오며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잘 다녀 오세요. 예수 믿읍시다"라는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잘 다녀 오세요" 때문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대문간에서 주로 가족으로부터 듣는 인사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여러 차례 들으니 그것도 지금은 익숙해졌고, 이젠 목례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못 만나는 날이면 벌써 지나가셨나 하고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인사말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항상 똑 같다. "잘 다녀 오세요. 예수 믿읍시다." 할아버지로부터 "예수 믿읍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믿는다..

길위의단상 2007.06.04

나의 종교관

나는 가톨릭 신자다. 10년 전에 영세를 받았고 지금도 매주일 미사에 참례하니 겉모습은 신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판공성사 같은 기본적인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니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사이비 가톨릭 신자다. 가톨릭의 기본 교리에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개신교를 포함해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습에도 부정적이며 비판적이다. 그런데도 신자의 흉내를 내는 것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것은 현재의 기독교 모습과 일부 종교 지도자들, 또는 믿는 자들의 이중성 때문이지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는 아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점점 보수화해 가고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데 일조하고 있는 가톨릭 지도자들의 언행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

길위의단상 2006.08.10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마라, 아들딸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길위의단상 2005.02.06

삼보일배 하면 기독교인 아니다

오늘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목; 삼보일배 하면 기독교인 아니다 전북 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최희섭 목사)는 6일 "기독교 이름으로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해서는 결코 안되며 기독교 단체는 삼보일배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북지역 14개 시.군 기독교회로 구성된 협의회 대표 8명은 이날 오전 전북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불교 의식인 삼보일배는 기독교 교리와 성서에 위배되는 행위"라면서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기독교인이 아니며 기독교인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언론은 앞으로 기독교가 삼보일배에 참가했다는 보도를 삼가 주기를 바라며 기독교인은 반대의사를 표현할 때 신앙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길위의단상 200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