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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 / 이기철

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나뭇덩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

시읽는기쁨 2024.10.23

여름 탄천

당구 모임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반주로 소주 한 병을 겸한다. 뭐니뭐니 해도 술은 낮술이 최고다. 낮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낮술에는 은퇴자라는 우리만의 특권이 있다. 주량이 많이 줄어 지금은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적당하다. 반 병은 아쉽고 한 병이 넘으면 과해진다. 음주 실수가 잦은 편이라 절대 한 병은 넘지 않으려 한다. 낮술은 과음할 여지가 적어서 좋다. 식당에서는 마냥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밖에 나서면 환한 대낮인데다 술집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다. 동료와 헤어지고 탄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알딸딸한 걸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부드러웠다. 장마 그친 뒤 내리쬐는 염천의 땡볕도 상관 없었다. 여름 한낮의 산책..

사진속일상 2024.08.02

어나더 라운드

술을 소재로 했다고 하여 찾아본 영화다. 이 영화에는 흥미로운 가설이 나온다.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 부족한 0.05%를 채워 유지할 수 있다면 인생은 즐겁고 창의적이 된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마르틴은 무미건조한 일상이 재미가 없고 우울하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따르지 않고, 가정에서는 아내와 서먹한 관계며 아이들도 아빠를 본 척 만 척이다. 40대면 겪는 중년의 위기다. 이때 위에 나온 가설을 접하고 맞는지 실험해 본다. 혈중 알코올 0.05%는 대략 소주 한 병을 먹으면 나오는 수치가 될 거다. 마르틴은 몰래 술을 마시며 적당히 취한 상태를 유지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수업은 재미있어지고 가족과도 관계가 좋아진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서일 것이다. 이..

읽고본느낌 2024.07.04

절주의 기준

지난 달에 과음을 하고 실수를 한 뒤에 금주를 결심했는데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내 의지를 믿고 절주를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1년 반 동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금주를 실행했었다. 술을 안 마시면 심신의 모든 면에서 이득이 많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 노년이면 안 그래도 정든 것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데 술까지 억지로 빼낸다는 것은 - 너무 야박한 일이라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절주의 기준은 집에 들어왔을 때 술 마신 걸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름 정해두고 있다. 주량으로는 대략 소주 한 병 정도다. 그 이상이 되면 사람이 좀 이상해진다. 어제 모임에서도 그 정도에서 끝냈고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

참살이의꿈 2024.06.28

경복궁 - 청와대 - 광화문 광장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벌인 이벤트 중 하나가 청와대의 용산 이전이었다. 돌격작전 하듯이 급작스럽게 시행되어 어리둥절했고 논란도 많았다. 어쨌든 슬로건대로 '청와대가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청와대가 일반에 개방되었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굳이 찾아가 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청와대에 다녀온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보다가 경내에 있는 나무들에는 호기심이 일면서 직접 만나고 싶었다. 전 직장 동료와 북악산 트레킹을 계획하다가 청와대에서 시작하는 새로 난 코스로 오르기로 했다. 청와대 구경도 겸할 수 있게 되었다. 셋은 경복궁역에서 만났다. 비 그친 뒤 더욱 맑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전에 왔을 때보다 경복궁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외국인들이 엄청 많아지고 대부분이 한복을 입고 있었..

사진속일상 2024.05.10

낮의 목욕탕과 술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떠 있을 때의 목욕과 술에 대한 예찬이다. 이런 소재로 재미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에서 즐길거리는 사방에 널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은이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본의 만화가로 도쿄와 근교의 오래된 목욕탕을 순례하는 복고풍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목욕 후 마시는 낮술의 달콤함도 빠질 수 없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 최고×최고, 그게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암, 그렇고말고. 이히히히...

읽고본느낌 2023.11.07

강원도 가을 여행(1) - 발왕산, 낙산해변

아내와 2박3일의 강원도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먼저 용평리조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발왕산(發王山, 1458m)에 올랐다. 천년주목숲길을 걸어보기 위해서였다. 케이블카 캐빈은 8인승인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대기 없이 바로 탈 수 있어서 둘이서만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블카는 3.7km 길이에 20분 정도 걸렸다. 꼭대기에는 스카이워크가 있어 약간의 스릴을 즐기면서 사방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발왕산 높은 곳은 단풍의 끝물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발왕산 정상부에는 약 3km 길이의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길은 경사가 완만한 나무데크로 되어 있어 노약자도 힘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오래된 주목들을 지나게 되어 있어 갖가지 형상의 주목을 만나는 길이다. 여기서 만난..

사진속일상 2023.10.27

금주 1년

술을 끊은 지 꼭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 50년이 넘는 주사(酒史)를 칼로 무 베듯 단절한 결행이었다. 가끔 폭주(暴酒)하는 게 문제였다. 젊었다면 영웅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늙어서 부리는 주취(酒醉)는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녹음된 술 취한 내 목소리를 듣고 크게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 광마(狂馬)를 본 것이다. 금주한 뒤 나타난 육체적 변화는 속/위장이 편해진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수시로 속이 부글거리고 소화가 안 되는 증상에 시달려 왔다. 주원인이 스트레스와 알코올이었다. 두 가지가 제거되니 제일 반기는 부위가 위장인 것 같다.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증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게 침묵하는 위장은 나로서는 생..

길위의단상 2023.08.03

금주 200일

술을 끊거나 줄이는 뜻을 가진 낱말에 단주, 금주, 절주가 있다. 사전에는 단주나 금주 모두 술을 끊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내가 볼 때 둘 사이에는 느낌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단주(斷酒)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술을 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몸에 병이 생겨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경우다. 본인의 생각과 관계없이 무조건 술을 끊어야 한다. 금주(禁酒)는 외부적인 압력보다 본인의 의지로 술을 끊는 경우다. 어감상 단주보다 부드럽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시 마시게 될 수도 있다. 절주(節酒)는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다. 절주만 된다면 굳이 술을 원수 보듯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술을 끊은지 200일이 되었다. 나에게는 단주와 금주 중 금주라는 명칭이 적당할 것..

길위의단상 2023.02.18

술이 고픈 날

답답하고 짜증이 이는 날이 있다. 이런 때는 밖에 나가 걸음을 하는 것이 특효약이다. 걷는다는 단조로운 몸의 움직임이 얽힌 마음을 풀어준다. 어제도 그랬다. 방에 가만있다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미세먼지가 빨간색으로 경고를 했지만 밖으로 나섰다. 걸으면서 서로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말한다. 뭐 그런 칠칠치 못한 놈들이 있냐구. 넌 참 운도 없구나. 네가 화낼만하다니까. 다른 하나는 말한다. 잘 봐, 그런 게 아니잖아. 화가 어디에서 온 거니. 원인을 밖에서 찾으면 답이 없다고. 둘이서 실컷 싸우게 놔둔다. 얼마 지나면 자연스레 한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또한 내 안의 어린아이도 보인다. 내 의식의 심층부에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있어 내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길위의단상 2023.01.09

금주 100일

금주 100일이 되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그 참담했던 감정이 100일을 버틴 힘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술을 끊은 뒤 생활에 큰 변화는 없다. 금단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알코올에 의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리라. 다만 정신적으로 짜증과 우울이 늘었다. 전에는 술 몇 잔으로 기분을 업 시킬 수 있었으나 이젠 견뎌내야 한다. 금주는 확실히 정신 건강 측면에서는 마이너스다. 밖에 나가서 지인을 만나 술을 하고 돌아오는 밤은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맨정신일 때는 투덜대고 원망하던 것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도 넓어졌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술에 취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여기 있지만 아주 잠시 동안은 세상이 당신의 멱..

길위의단상 2022.11.14

200일 & 50일

200일은 TV를 멀리 하고 있는 날짜다. 올 3월 9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바라지 않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표차는 0.7%였다. 앞으로 5년 동안 TV 화면으로 그를 봐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일이 지났다. 단, 스포츠 중계는 예외다. PBA 당구대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TV를 켠다. 다음달부터 배구 시즌이 시작된다. 여자배구를 좋아하니 자주 TV 앞에 앉게 될 것이다. 그 정도는 허용하기로 한다. 왜 그 사람이 싫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적은 없었다. TV를 안 보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다. 요사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처신을 보면 내 판단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부인한테서 받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TV를 보지 않으니..

참살이의꿈 2022.09.25

고주망태가 되다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나갔다가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다. 점심에 중국집에서 배갈을 들이킨 게 화근이었다. 이과두주가 여러 병 놓여 있던 것만 기억날 뿐 그 뒤로는 필름이 끊어졌다. 저녁에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정신이 잠깐 돌아왔다. 기사분한테 비닐봉지를 얻어 토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라면서 친구들이 택시를 잡아 태우던 장면이 어렴풋하다. 술자리 처음 30분 정도만 기억날 뿐 나머지 여덟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안갯속이다. 택시에서 내려서는 바닥에 쓰러졌고 아내가 데리러 나와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옛날 가락이 또 나온다고, 다음날 아내로부터 지청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이젠 체력적으로 술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절제할 의지력도 부족하다. 적당한 한두 ..

사진속일상 2022.08.06

정치와 술

당구 모임은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만난다. 매주 한 번이지만 나는 거리도 있고 해서 출석률이 좋지 않은 편이다. 나가면 네댓 시간 당구치고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는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대체로 각 소주 1병씩 마신다. 어제는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생각지도 않게 과음을 했다. 정치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열을 받은 게 첫째 이유였다.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나는 왼쪽이다. 당연히 정치적 견해에서는 우리 또래에서 외톨이다. 반대하는 진영의 대통령이나 후보를 욕하는 게 얼마나 맛있는 술안주인가. 노털들이 서로 박자를 맞추며 비난하는 소리에 종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고 애꿎은 소주병만 늘어갔다. 술자리는 2차로 이어졌다. 다행히 대통령 선거와 후보에 대한 얘기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

길위의단상 2022.01.28

비 오는 날 부침개

새벽 빗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가을비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내린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고 밖은 어두침침하다. 열린 양쪽 창문으로 낙숫물 소리가 구슬픈 음악처럼 울린다. 지금 같은 초가을의 때, 가을비는 기분을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누가 어깨를 툭 치면 찔끔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다. 아침에는 가까운 공원을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낮이 되니 만사가 귀찮다. 이럴 때는 부침개와 막걸리 한 잔이 내 따스한 위로가 되어 준다. 아내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손주 얘기, 이웃 얘기, 텃밭과 터 얘기 등이 또 다른 반찬이다. 과거 회상으로 접어들려는 아내를 나는 한사코 말린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고단한 일일 거라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도..

사진속일상 2021.09.29

나는 행복합니다

이 사나운 세상에서 그나마 주변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술에 적당히 취할 때다. 너무 과해도 안 되고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알맞다. 그 정도면 세상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단, 주변이 시끌벅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수다 가운데서는 그런 기분을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주신(酒神)을 영접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아내가 처가에 갔다. 같이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아내만 내려갔다. 며칠간 혼자서 지내게 되었다. 몇 가지 계획이 궂은 날씨로 틀어지고 외출도 못한 채 집 안에서만 보내고 있다. 하필 이런 때 미세먼지가 몰려오고 하늘까지 잔뜩 찌푸릴 게 뭐람. 그러나 외로움을 즐길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평상시에..

참살이의꿈 2021.03.13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막걸리 한 병

코로나19로 집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빈도가 늘었다. 바깥 모임을 삼가다 보니 다른 사람과 대작할 기회가 줄어들고 부득이 독주(獨酒)를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내가 즐기는 바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피곤할 뿐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미가 훨씬 좋다. 제일은, 남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 전에 동기 모임을 오랜만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시국 얘기가 나오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대개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지만 얼근해지면 나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서로가 어색해진다. 술맛이 싹 달아났음은 물론이다. 파한 자리 뒤에 남는 건 자책밖에 없다. 혼자 마실지라도 내 앞에는 가상의 파트너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파트너지..

참살이의꿈 2020.06.15

낮술

낮술 맛을 알게 된 건 퇴직하고 난 뒤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낮술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술은 퇴근한 뒤 저녁에 마시는 거였다. 여러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직장 얘기를 안주 삼아 스트레스를 푸는 게 대부분이었다. 술맛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니 낮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심심하다 보니 반주로 몇 잔 홀짝이게 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이 직장 다닐 때와 다른 점은 시간상의 차이와 함께 대작하는 사람의 유무다. 대개 혼자이고 가끔 아내가 앞에 앉기도 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은 조용한 가운데 술맛을 느끼면서 취해가는 과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내 낮술을 방해하는 것은 바깥에 있지 않다. 기분 좋다고 연달아 낮술을 즐기다가는 이내 위..

길위의단상 2020.04.21

경의선숲길 산책

1906년 개통된 경의선은 용산역과 신의주역을 잇는 518km 길이의 철도다. 일제가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했다. 당시에는 경부선 다음으로 운수교통량이 많았다고 한다. 경의선은 남북 분단으로 끊어졌다가 2003년에 연결식이 군사분계선에서 있었다. 2009년에 광역전철이 개통되면서 경의선 중 용산선 구간 6.3km가 지하화됨에 따라 지상 구역은 공원으로 만들었다. 2016년에 경의선숲길 공원으로 완공되었다. 경떠회원 다섯 명과 경의선숲길을 걷다. 서울로 진입하는데 너무 시간이 지체한 통에 나는 중간에서 합류하다. 철로를 따라 만든 공원이라 띠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다. 꽃과 나무로 잘 가꾸었고 도심이지만 숲에 들어 있는 느낌이다. 주변의 가게들도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옛 철로 풍경을 재현한 ..

사진속일상 2019.09.07

막걸리 한 병에 취하다

막바지 장마다. 비 내리는 날에는 뭐니뭐니 해도 김치부침개에 막걸리가 최고다. 아내는 부침개를 만들고, 나는 동네 슈퍼에 나가 막걸리를 사 온다. 둘은 입맛이 달라서 아내는 지평 막걸리고 나는 장수 막걸리다. 늘 그러하니 이젠 슈퍼 주인도 알아챌 수 있을 게다. 바깥나들이가 뜸하다 보니 술 할 기회가 줄어들고 막걸리 한 병에도 뿅~ 가 버린다. 750mL 한 병이면 두 잔 반 정도 나오는데 그걸로 혼수상태가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아내도 마찬가지지만 원래 주량 차이가 났는데, 이제는 술도 평준화가 되었다. 지난번에는 막걸리 한 병에 취해서 둘이서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술만 들어가면 큰소리치는 내 버릇이 재발한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 아주 나쁜 술버릇이다. 아내..

사진속일상 2019.07.28

술 노래 / 예이츠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우리가 죽기 전에 알 것은 다만 이것뿐 나, 잔 들어 입 맞추고 나, 그대를 바로보며 한숨짓노라 - 술 노래 / 예이츠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s;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 A drinking song / W. B. Yeats 최근의 진화생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단순한 데서 온다고 한다. 행복은 생물의 본성을 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 한 잔 나누는 ..

시읽는기쁨 2018.02.04

술값 / 신현수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하고 술값도 안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술값 / 신현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염치다.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갑남을녀 대부분은 술값 몇 푼으로 조바심친다. 조무래기라 그런 걸까?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시읽는기쁨 2016.12.14

낮술에 환해지다

점심 모임에서 와인으로 반주를 했다. 기분이 들떠서 뒤에 가서는 소주도 추가했다. 햇살 속 낮술에 세상이 환해졌다. 낮술에는 금기를 깨는 짜릿함이 있다는 시인의 권주가를 따라 읊으며....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뜨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사진속일상 2016.09.23

왕대폿집 / 구중서

수원화성 화홍문 연못가 왕대폿집 벽에 걸린 주전자가 모과처럼 우그러져 막걸리 젖통을 만진 손들을 알만하다 안주도 안 시키고 막걸리만 들이켜는 넝마주의 단골손님 오늘은 안 보이네 그나마 막걸리 값도 마련이 못 되었나 대폿집 주인장이 문밖을 내다본다 리어카 세워놓고 딴 데 보는 단골손님 주인이 불러들이네 공으로 마시라고 - 왕대폿집 / 구중서 10여 년 전 화성에 갔을 때 찍어둔 왕대폿집 사진이 있다. 거꾸로 달린 간판이 특이해서 한참 들여다봤는데 바로 이 시조에 등장하는 왕대폿집이다. 여기 들리는 사람들은 거꾸로 된 간판이 바로 보일 때까지 마셨다나 어쨌다나, 유명한 집인 줄 그때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 들어가 봤을 텐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주인장 인심도 그대론지, 언제 화성에 다시 가봐야겠다.

시읽는기쁨 2015.10.12

단주

올해 일어난 변화 중 제일 으뜸이 술을 끊은 것이다. 지난 6월에 단주를 결심하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으니 술잔을 입에 대지 않은지가 여섯 달이 되었다. 되돌아보아도 참 잘한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다시 술을 가까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술은 마실 때는 흥겹지만 뒷날은 고약했다.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마셨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감당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필름이 끊기는 건 물론이고 집에 찾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늙은이의 추태를 보였다. 또 술에 취하면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어 옆에 있는 사람을 괴롭게 했다. 확실한 해결책은 술을 끊는 것밖에 없었다. 적당히 절주하면 되지 않느냐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었다. 전에 있었던 일 중에 제일 아찔했던 건 골목에 주차해 놓은 트럭 밑에 들어가 잠이 들어버린 ..

길위의단상 2013.12.26

불주 한 달째

한 달째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모임에 참석해도 건배주 한 잔은 받지만 입술에 축이는 정도다. 전 같으면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집에서도 자주 홀짝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굳건히 참고 있다. 술이 생각나다가도 한 달 전 버스 승객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눈초리를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젖게 된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장면은 또렷이 남아 있다. 너무 부끄러워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선배가 수돗가에 데려가 씻어주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이젠 술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체력이 안 받쳐준다. 한순간에 뿅 가버리고 그 뒤부터는 집에도 찾아가지 못한다. 몽유병 환자가 된다. 그러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잔다. 어느 때는 주차된 차 밑에 들어가 자다가 차 주인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기도 했..

길위의단상 2013.07.09

광주 노고봉

노고봉(老姑峰, 578m)은 경기도 광주와 용인을 나누는 태화산 산줄기에서 가운데쯤에 있는 산이다. 이 산줄기를 10시간 정도 걸려 하루에 종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오르고 있는데 이번이 세 번째다. 함 선배님과 함께 걸었다. 서울서 내려오신 선배님과 광주터미널에서 만나 버스를 갈아타면서 외대 용인캠퍼스 앞까지 갔다. 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산을 오르는 게 허리 아프고 난 뒤 처음이니 거의 3개월 만이었다. 30도가 넘는 날씨까지 더해져 처음부터 무척 힘들었다. 나중에는 물까지 떨어져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름 산행은 물만은 넉넉히 준비해야 하는데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선배님은 나보다 15살이나 연상인데 내가 따라가기가 벅찼다. 몸이 불편..

사진속일상 2013.06.09

한 달 동안의 금주

이빨 4개를 빼고, 때우고, 신경치료 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특히 신경치료가 복잡했다. 치아에 있는 신경을 죽이고 보철물을 씌우는 작업인데 갈 때마다 2시간 가까이 입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의사 선생님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치료 기간에는 술을 딱 끊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금주를 한 건 처음이었다. 비 오는 날, 부침개를 앞에 두고 소주병을 꺼냈다가는 도로 원위치시킨 게 여러 번이었다. 밖에서는 "웬일이야?" 하는 소리도 들었다. 알코올 중독이 아니어서인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은퇴를 하고 나니 술 마시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 아무래도 모임이나 회식이 잦고 술이 빠질 수가 없다.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저절로 술을 찾게 된다. 또, 퇴직과 동시에 서울을 떴으니 친구..

길위의단상 2012.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