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28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오두막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오두막집. 그런 오두막을 장만하면 나는 호롱불의 불편함도 편안함으로 여기며 살리라. 낮이면 하얀 산꽃들로 나의 내부를 살피고, 밤이면 벽에 돋은 긴 그림자의 높이로 나의 밖을 위로하며. 겨울이 되면 위로할 게 더 많아지겠지? 눈이 오면 토끼, 노루들이 밖을 서성이겠지? 이들과는 가을 달빛에 익은 고구마를 같이 나누고, 눈길의 얼음장 깨고 옹달샘도 함께 하리라. 그러면 이들은 나와 한 마음을 정답게 이루는 훈훈한 저녁 연기요, 반가운 아침 인사가 되겠지?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나는 깊은 산중의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떠나고 싶다. 내 영혼과 단둘이 밥상 마주할 수 있는 오두막집으로. -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시읽는기쁨 2023.09.08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 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사실 꽃 피어도 그다지 보는 사람은 없는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구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 상점에서 쌀 한 봉지 비름나물 한 묶음 ..

시읽는기쁨 2022.06.26

인투 더 와일드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문명을 박차고 나간 한 젊은이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신이 모은 돈 2만여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크리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 버린다. 영화는 'My Own Birth' 부터 'Getting Of Wisdom'까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리스는 노숙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본다. 길 위에서 만나 집시 부부나 농장의 일꾼과 우정을 나누고, 독거노인과 한동안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에 대한 충고도 듣지만 그 무엇도 크리스의 마음을 되..

읽고본느낌 2020.11.18

중은(中隱) / 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

시읽는기쁨 2020.07.14

개구리와 소년

연못가에서 놀던 소년들이 물속에 많은 개구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많은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은 뒤, 용감한 개구리 한 마리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며 소년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그 잔인한 장난은 그만둬라! 너희는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우린 돌에 맞아 죽는단 말이야!" 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지불식간에 하는 행동이 타자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요사이 이 이야기가 실감나게 들린다. 내가 개구리의 심정이 된 것 같아서다. 층간소음 스트레스는 내 생활과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무려 10년 가까이 된다. 심할 때는 뭔가 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좀 덜해지면 참고 지내보자고 하며 살아왔다.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제삼자나 관리사무소를 통해 당부해도 별 소..

참살이의꿈 2020.07.09

가을바람의 유혹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해보고 후회하라는 말이 있다. 결혼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잘 쓰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해서 후회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안 했다면 혼자만 후회하면 된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세상을 위해서는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안 하는 게 차라리 공익이 될 수 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할 꺼야?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바보 같은 사람도 있다. 거짓이라도 좋으니 달콤한 말 듣기를 바라는 걸까. 만약 아내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결혼하지 않을 거야!" 현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서가 아니다. 내가 결혼 생활에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와 맞추고 어울려 살아갈 마음 바탕이 부족하..

참살이의꿈 2019.11.01

숲속의 은둔자

기이한 은둔자가 있다. 1986년 스무 살이었던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 메인 주로 가다가 돌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27년 동안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27년간 완벽히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노스 폰드의 은둔자'라 불렀다. 나이트가 숨은 곳은 미국 북동부의 메인 주에 있는 '노스 폰드' 호수에 있는 숲이었다. 호수 둘레로 별장만 산재할 뿐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완전히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 그는 바위 사이에 야영지를 만들고 텐트 생활을 27년 동안 했다. 음식을 비롯한 생활 용품은 전부 별장에서 훔쳤다. 별장은 주말에만 사람이 찾아왔고 평일에는 비었다. 나이트는 별장에 사람이 없는 때를 ..

읽고본느낌 2019.04.26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송찬호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합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은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 이곳에 숨어..

시읽는기쁨 2018.11.10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요즈음 나도 그런 꿈을 꾼다. 요란스레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달포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다. 서해 바닷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시읽는기쁨 2018.08.24

논어[256]

선생님 말씀하시다. "현명한 사람은 세상을 피하고, 그 다음은 지방을 피하고, 그 다음은 눈치를 피하고, 그 다음은 말을 듣고 피한다." 子曰 賢者避世 其次避地 其次避色 其次避言 - 憲問 25 공자의 말이 아니라 도가의 글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몸을 보신하기 위해서 은둔하는 것을 공자는 비판했다. 그러나 태백편에서 "찌우둥거리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말고, 정치 질서가 섰을 때는 나서야 하고, 질서가 깨지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고 했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도 아니다. 세상이 완전히 망가지고 무도하다면 차라리 숨는 게 낫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공자가 실제 그렇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현자피세(賢者避世)는 나도 여주로 내려가면서 써먹은 ..

삶의나침반 2017.10.01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

종편 MBN의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를 가끔 본다. 이번 주의 제목이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었다. 여느 분과 마찬가지로 삶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산속에 들어가 혼자의 행복을 찾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이 성대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과연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도시의 빈털터리라면 먼저 노숙자가 떠오른다. 빈털터리란 재산도 수입도 없는 사람이다. 도시에서 돈 없이,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빈털털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산속에서 홀로 살아간다. 욕심을 버리니 행복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남과 비교하며 경쟁을 시키는 시스템 속에서는 평상심을 지키기 어렵다. 빈..

참살이의꿈 2015.12.11

신동문 평전

신동문(辛東門, 1927~1993) 시인의 생애와 삶이 궁금해서 찾아 읽은 책이다. 10여 년 전 밤골로 들어갈 때 시인의 '내 노동으로'를 좋아해서 자주 읊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시는 당시의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도시에서의 껍데기 삶을 미련없이 버린 뒤 농촌에서의 육체노동을 나도 꿈꾸고 있었다. 시인과 다른 건 나는 어설프게 제대로 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책에 소개된 시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본명은 건호(建浩)이고 동문은 필명이다. 충북 청원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 청주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결핵을 앓아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

읽고본느낌 2014.07.01

휴대폰을 끄다

휴대폰을 끈 지 20일이 되었다. 휴대폰이 먹통이 되니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족 말고는 집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단절되는 게 너무 쉽다. 현대의 은둔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휴대폰 버튼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원래부터 휴대폰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아닌 구식 폴더폰을 쓰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자주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더구나 사람들과의 교류 폭도 좁으니 하루에 고작 전화 한두 통화나 가끔 문자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휴대폰이 없어졌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다. 오히려 조용해서 좋다. 울리는 벨 소리의 과반은 쓸데없는 데서 오는 거라 짜증만 일으켰다.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건 열에 한둘이었다. 모임이나 지인들에게서 오는 연..

참살이의꿈 2014.02.02

걱정하지 마

"어떻게 지내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지 뭐." "일산 킨텍스의 건축 박람회 보러 가자." "나가는 것도 귀찮다. 그냥 집에 있는 게 편타." "야, 너무 그러면 폐인 된다.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뭣 하고 있어?" "똑같지 뭐. 집에 있어." "답답하지 않냐?" "답답하긴, 이게 편하고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하여튼 희한타." "......." 최근에 두 친구와 통화한 내용이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논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다. 한 친구는 끔찍하게도 '생지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사업하는 친구인데 그는 지금까지 일 없이 집에서 놀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닥치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남자가 집에서 빈둥거리면 왜 안 되는 ..

길위의단상 2013.09.03

조대(釣臺) / 대복고(戴復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平生誤識劉文淑 惹起虛名滿世間 - 釣臺 / 戴復古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싯대라 삼공 벼슬 준다 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쳤구나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BC 4 ~ AD 57)가 어지러워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천하가 제 손아귀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복종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동문수학한 엄자릉(嚴子陵)이었다. 자신은 선비의 길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엄자릉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하를 부춘산(富春山)에 보내 냇가에서 낚시질하는 엄자릉을 데려오게 하였다. 대신들이 늘어선 사이를 엄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제 자리..

시읽는기쁨 2012.12.29

나무늘보

지금도 사람들은 말한다. 하는 일 없이 심심해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러면 허허, 웃을 수밖에 없다. 빈둥거리는 게 일이라고 변명한들 별로 믿지 않는 눈치다. 세상에서 말하는 일이 없이도 나는 충분히 재미나다. 사람들은 각자 닮은 동물의 속성이 있다. 나는 동물 중에서도 나무늘보에 가깝다. 나무늘보는 게으름의 대명사다. 하루에 18시간을 잔다고 한다. 나도 하루 10시간을 자니 사람 나무늘보과가 맞다. 나무늘보가 나뭇가지 하나면 만족하듯 나도 작은 방과 책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나무늘보 선생의 유유자적을 닮자면 아직 멀었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나무늘보에 더 가까워진다. 얼마나 답답한지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앞 동네에 00 있재? 대구에 살고 있는데 가끔 고향에 오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더라. ..

참살이의꿈 2012.11.13

일기 /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일기 / 안도현 고맙게도 지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이 직접 서명한 시인의 근작 시집 을 선물 받았다. 시인이 서문에서 쓴 대로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인의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읽기 편하면서 가슴에 쉽게 감동이 닿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를 이리..

시읽는기쁨 2012.11.11

한정록

빗소리를 들으며 을 읽는다. 은 허균(許筠)이 42세 때, 중국의 고서들에서 선비들의 한적한 삶을 그린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당시는 어렵게 진출했던 공직에서 쫓겨나는 등 허균으로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아마 그 자신 은둔의 삶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서(序)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찬찬하지 못하였고, 또 부형父兄이나 스승 또는 훈장이 없어서 예법 있는 행동이 없었다. 또 조그마한 기예技藝는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하지도 못하면서도 스물한 살에 상투를 싸매고 과거를 보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경박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에 당세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나는 마침내 노장老莊이나 불교 같은 데로 도피하여, 형해形骸를 벗어나고 득실得失을 ..

읽고본느낌 2012.09.13

가벼운 농담 / 김동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이면 좋겠어 뻐꾸기 울어대는 산골이면 좋겠어 마루가 있는 외딴집이면 좋겠어 명지바람 부는 마당에는 앵두화 속절없이 벙글고 따스한 햇살 홑청처럼 깔린 마루에는 돌쩌귀처럼 맞댄 아랫도리 열불 나고 뻐꾸기 소리인지 곰팡이 슨 목울대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모를 신음소리에 놀라 장독대 옆 누렁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그대로 마루에 벌렁 누워 아지랑이 몽롱한 한나절 늘어지게 낮잠 자면 좋겠어 그렇게 가벼운 농담처럼 사흘만 - 가벼운 농담 / 김동준 지지난 주 KBS TV '인간극장'에서는 곰배령 아래 강선마을에 사는부부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눈에 묻힌 산골 오지마을에서 때 묻지 않고 동화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부러웠다. 사람은 자신이 걸어보지 못한 길을 선망하게 되는 것 같다.내가 저들 ..

시읽는기쁨 2012.03.02

장자[195]

월나라 사람들은 삼대에 걸쳐 그들의 군주를 죽였다. 왕자 수는 그것을 근심하다가 도피하여 단혈에 숨어버리니 월나라는 군주가 없게 되었다. 왕자를 찾았지만 알지 못하다가 단혈까지 가게 되었으나 왕자는 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풀을 베고 연기를 피워 그를 왕의 수레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다. 왕자 수는 군주가 되기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환난을 싫어한 것이다. 왕자 수는 나라를 위해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을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월나라 사람들은 그를 군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越人三世弑其君 王子搜患之 逃乎丹穴 而越國無君 求王子搜不得 從之丹穴 王子搜不肯出 越人薰之以艾 乘以王輿 王子搜非惡爲君也 惡爲君之患也 若王子搜者 可謂不以國傷生矣 此固越人之所欲得爲君也 - 讓王 3 춘추시대 때 개자추(..

삶의나침반 2012.02.03

장자[193]

순임금은 천하를 선권에게 선양하려 했다. 선권은 말했다. "나는 우주의 중앙에 서 있다. 겨울에는 모피를 입고 여름에는 갈포를 입으며 봄에는 밭 갈고 씨 뿌리며 몸은 만족스럽게 노동을 하고 가을에는 추수하며 몸은 만족스럽게 휴식한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며 천지에 소요하니, 마음과 뜻이 만족하거늘 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슬프다! 그대는 나의 이 행복을 알지 못하다니!" 선권은 천하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속세를 떠나 버렸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舜以天下讓善卷 善券 曰 余立於宇宙之中 冬日衣毛皮 夏日衣葛치 春耕種 形足以勞動 秋收斂 身足以休息 日出而作 日入而息 逍遙於天地之間 而心意自得 吾何以天下爲哉 悲夫 子之不知余也 遂不受 於是去 而入深山 莫知..

삶의나침반 2012.01.18

山居 / 徐敬德

花潭一草廬 瀟세類僊居 山簇開軒近 泉聲到枕虛 洞幽風淡蕩 境僻樹扶疎 中有逍遙子 淸朝好讀書 - 山居 / 徐敬德 화담의 한 칸 초가집은 신선이 사는 곳처럼 깨끗하네 창을 열면 늘어선 산들이 가깝고 베갯머리엔 시냇물 소리가 조용하네 골짜기 깊으니 바람이 시원하고 땅이 외지니 나무가 무성하네 그 속을 거니는 한 사람이 있어 맑은 아침 즐거이 독서를 하네 황진이(黃眞伊)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러 찾아간 곳이 이 시에 나오는 한 칸 초가집이었을지 모른다.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자신만만해진 황진이는 역시 명성높은 학자인 화담도 공략하려 한다. 요사이 말로 하면 황진이는 '펨므 파탈' 쯤 되는 여자인 것 같다. 그러나 화담을 유혹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도리어 그의 인품에 반해 버린다. 화담과..

시읽는기쁨 2008.12.06

은둔형 외톨이의 변명

컴퓨터나 인터넷의 발달이 도리어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불안을 야기한다는 주장이 있다. 익명의 사람들과 전지구적 규모로 연결이 되지만 온라인으로서의 한계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과다한 숫자 탓이라고 한다. 인간은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공적 자아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의 최대 인원은 약 150 명 정도라는 것이다. 정보화 및 세계화로의 이행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집단의 크기를 팽창시켰고 이전에 있었던 작은 공동체들이 해체되면서 개개인은 소외, 불안, 자존감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사무실에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인간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컴퓨터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컴퓨터는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참살이의꿈 2008.08.16

은둔을 꿈꾸다

정직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나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다. 정직하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뜻한다. 복잡한 도시 생활은 내면의 목소리와 실제 삶이 늘 엇박자로 논다. 나로서는 위선과 거짓 없는 도시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 바삐 움직이고 많은 일을 하지만 늘 허전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 즉 삶의 질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도시를 떠나 산골에 들고 싶은 것은 도시에서는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탓이다. 정직한 삶을 사는데 가장 적당한 직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농사짓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농부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어느 작가의 말에 공감..

참살이의꿈 2007.11.29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밥벌이로서의 일, 처성자옥(妻城子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내 속마음도 훌훌 벗어놓고 아무도 없는 산골에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세상과 등진 채 살아보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그곳이라면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애증도 잠잠해질 것 같다. 졸졸 속삭이며 흐르는 물가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사람이 그리워질까? 인간의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할까?

시읽는기쁨 2007.05.11

산머루 / 고형렬

강원도 부론면 어디쯤 멀리 가서 서울의 미운 사람들이 그리워졌으면 옛날 서울을 처음 올 때처럼 보고 싶었던 사람들, 그 이름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다시 진부 어디쯤 멀리 떨어져 살아 미워진 사람들 다시 보고 싶게 시기와 욕심조차 아름다워졌으면 가뭄 끝에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서울 어느 밤의 특설령처럼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랑이 되었으면 그러나 우린 모두 사라질 것이다 - 산머루 / 고형렬 멀리 떨어져야 사람이 그리워질까? 사람이 그립기 보다는 싫고 밉고, 그래서 만나지 않았으면 싶을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장소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서울에 가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젠 이놈의 장소도 싫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그러나 이런 애증이라는물건은 다 무엇인가?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은 무엇이고..

시읽는기쁨 2006.02.16

自歎 / 田萬種

聞古仁無敵 看今義亦嗤 富榮貪益顯 貧賤是爲非 天意豈能度 人精未易知 山深水綠處 早晩不如歸 - 自歎 / 田萬種 예부터 인자무적(仁者無敵) 들어왔건만 요즘 보니 의로워도 비웃음 당해 부유하고 영화로우면 탐욕 더욱 드러나고 가난하고 천하면 옳은 것도 그르게 되네 하늘의 뜻 어찌 헤아리랴마는 사람의 마음 쉽게 알기 어려워라 산 깊고 물 푸른 곳으로 조만간 돌아가는 게 낫겠네 예로부터 사람 마음을 일촌심(一寸心)이라고 불렀다. 한 치 작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한 치밖에 안되는 마음 알기가 천의(天意)를 터득하기만큼이나 어렵다. 마음 속 휘몰아치는 폭풍에 비틀대기도 하고, 음침한 기운에 질식 당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마음 속에서 돋아난 바늘이 나를 찌르고, 상대방을 향해 무수히 날아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시읽는기쁨 2005.11.08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베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플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

시읽는기쁨 2003.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