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 33

석유장수 / 심호택

6학년 때 추운 밤 과외공부 하는데 교실 뒤켠에서 무슨 소리 들립니다. 석유장수 기름 따르는 소리 비슷합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시며 누구여? 변소 가기 겁난 친구 일 보자고 대둣병에 집어넣은 것이 그만 통통해져 빠지지를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다가오신 선생님께 엉거주춤 알밤 두어 대 얻어터지니 그제서야 비로소 빠졌습니다. - 석유장수 / 심호택 빙그레 미소 짓다가 이내 옛날 추억 속에 잠긴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입시 경쟁이 지금보다 더했다. 중학교가 둘밖에 없던 작은 읍에도 학교가 성적으로 나누어졌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가는 A 중학교, 그리고 미달이 되기도 하는 B 중학교가 있었다. 똥통이라 불린 B 중학교는 장학금이 있어서 공부는 ..

시읽는기쁨 2017.08.31

하늘 높은 날

대기는 맑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긴 비가 지나고 청명한 날이 찾아왔다. 선뜻 가을이 다가왔다. 갑작스런 계절의 변화에 움찔한다. 낮에 친척 형님과 만났다. 점심을 먹고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음식점 옆에 큰 미루나무가 있었다. 미루나무를 보면 유년 속으로 풍덩 빠진다. 신작로 양 편으로 늘어서 있던 날씬한 키다리 미루나무들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개울을 따라서, 저수지 둑에도 미루나무는 있었다. 눈 감으면 차르르~, 그 웃음소리 들린다. 여기 미루나무는 혼자라 외롭고 뚱뚱하다. 미루나무만큼 멋진 가로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미루나무 가로수길을 조성한다면 꽤 인기를 끌 듯한데 말이다.

사진속일상 2017.08.30

논어[252]

미생묘가 선생님께 말하기를 "구는 왜 그처럼 시시덕거리는가! 지나치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말씀하시다.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고집통이가 싫기 때문이지." 微生묘 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 者與 無乃爲녕乎 孔子曰 非敢爲녕也 疾固也 - 憲問 21 당시에는 공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었다. 여기 나오는 미생묘도 공자를 너무 설쳐대는 인물로 보고 있다. 예를 따지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꼽게 보였을 수 있다. 공자는 반대로 미생묘를 고집불통으로 묘사한다. 서로간의 기질 차이가 아닌가 싶다. 뒤에 유가와 도가로 갈라져서 반목하게 된 시초가 여기에 보인다.

삶의나침반 2017.08.29

우주에서 본 개기일식

지난 21일에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다. 99년 만의 개기일식에 전 미국이 떠들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기일식을 보기 위한 여행단이 꾸려지기도 했다. 지갑만 두툼하다면 나도 욕심을 내봤을 것이다. 부분일식은 몇 차례 보았지만, 개기일식은 일생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진귀한 현상이다. NASA 홈페이지에 우주정거장에서 본 달그림자 사진이 나와 있어 흥미롭다. 저 그림자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개기일식을 보고 있을 것이다. 지상에서 해가 사라지는 광경도 신기하지만, 우주에서 보는 달그림자도 그에 못지않을 것 같다. 아래 지도는 2021년부터 2040년까지 지구에서 생길 일식 지역을 보여준다. 파란색이 개기일식, 붉은색이 금환일식이 일어날 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년 뒤인 2035년이 되어야 개기일식을 볼..

길위의단상 2017.08.28

변신 이야기

고전은 읽었다고 믿고 싶은 책이다. 이런 책을 읽지 않았을 리 없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꺼내보는 책이다. 내용이나 줄거리는 어느 정도 꿰고 있으니 자기 확신이 생길 만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십중팔구 읽은 적이 없는 책이다. 최근에 읽은 가 그랬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1, 2권이니 고전 중에서도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다. 이윤기 선생이 번역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볼펀치가 정리를 제일 잘 해 놓았지만, 당 시대에 쓴 글을 변형 없이 그대로 보고 싶었다. 디지털 카메라식으로 말하자면 볼펀치가 JPEG라면 는 RAW다. 는 원제가 'Metamorphoses'다. 변형, 변신, 변모라는 뜻으로 사물이 비롯되는 정황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무수한 변신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는 ..

읽고본느낌 2017.08.27

아내와 남한산성 일주

휴일에는 바깥나들이를 거의 안 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축복의 날씨라고 해야 할까, 일 년에 몇 번 나타나지 않을 맑고 투명한 날이 열렸다. 대기는 상큼하고, 하늘은 티 없이 푸르렀다. 배낭을 꾸려 아내와 남한산성으로 나갔다. 오늘 같은 날은 남한산성 일주를 욕심내도 될 법했다. 늘 평일 산길만 걷다가 휴일에 나오니 남한산성 마을은 장날 같은 분위기였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혜택을 누리며 사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주변이 소란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자고 다짐했다. 산성의 동문과 북문 사이는 성벽 보수 공사로 통제되고 있었다. 일주 거리인 9km를 걷는 데 약 4시간 30분이 걸렸다. 세 번이나 넉넉하게 쉬었다. 그래도 둘이서 같이 이만큼 걸을 수 있음이 다행이다. 아내는 무릎 이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사진속일상 2017.08.26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시읽는기쁨 2017.08.25

대안리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279호로 지정된 느티나무다.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에 있는데,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는 걸 보니 전에는 이곳이 원성군이었던 것 같다. 거목이면서 단정한 모양새가 우리나라 느티나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에서 약간 비켜난 산자락에 있다. 느티나무 주변은 축대를 쌓아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나무 밑에 쉴 수 있는 평상이나 의자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편안한 느낌의 이런 나무를 보면 나무 아래서 잠시나마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 마을 사람들은 여기까지 찾아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나무 높이는 24m, 줄기 둘레는 8.1m, 수관은 동서로 26m, 남북으로 21m다. 나이는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가지는 약 2m 높이에서 둘로 갈라져, 전체적으..

천년의나무 2017.08.24

대안리 소나무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소나무다. 곧게 자라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진 모양이 자랑거리였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가지 반쪽은 잘려 나갔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옛날 온전했던 모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안내문에 수령이 700년이라 되어 있는데, 이곳의 생육 환경으로 봤을 때 그렇게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키는 13m, 줄기 둘레는 3.1m인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7.08.24

성지(1) - 용소막성당, 후리사공소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 성지를 모두 순례해 보자고 아내와 다짐한지 어느덧 7년이 지났다. 퇴직할 무렵이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아내는 열심인 신자이지만, 나는 그동안 냉담으로 변했다. 이번 순례에는 종교적 의미 외에 부부가 국내를 함께 여행한다는 데에도 방점이 있다. 전국을 돌면서 큰 나무를 보고, 지역 명소를 찾아보고, 맛있는 음식도 맛보려 한다.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는 400여 곳이 된다. 가까운 곳은 당일로 다녀오지만, 먼 곳은 1박이나 2박의 여정이 될 것이다. 3년 정도면 일주를 하지 않을까 싶다. 무겁지 않게 경쾌한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딘다. 1. 용소막 성당 1904년에 세워진 교회로 강원도에서는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피..

사진속일상 2017.08.23

서곡리 소나무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 있다. 용수골이라 불리는데 백운산과 연결되는 계곡이 있어 물이 좋다. 주변은 여름 물놀이 장소로 유원지 분위기가 난다. 이곳에는 150년 정도 된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개울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에는 훨씬 많은 나무가 있었음 직하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제각각 특이한 모습으로 서 있는 소나무가 시야를 당기는 곳이다.

천년의나무 2017.08.23

논어[251]

선생님 말씀하시다. "남이 나를 몰라주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 憲問 20 비슷한 의미의 말이 에는 여러 군데 나온다. 공부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간적 성숙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배운 바대로 실천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그것이 군자의 바른 태도다.

삶의나침반 2017.08.22

소음 노이로제

선생을 하면서 교실에서 제일 많이 한 소리가 "조용히 해!"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업을 시작하고 질서를 잡는데 10분 넘게 걸리기도 했다. 교사에게 수업을 방해하는 소곤대는 소리나 잡담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아예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을 달래고 꾸짖는 데 에너지의 과반이 들어간다. 그래선지 사람의 소음은 나한테 엄청난 노이로제를 유발한다. 직업병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선생을 했다고 다 그런 건 아니니 일차적으로는 내 성격 탓인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성이 되어 시끄러운 환경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반대다. 소음 노이로제는 퇴직을 하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이 많으니 절간 같은 분위기에 길이 들었다. 어쩌다 시끄러운 환경에 노출되면 짜증부터 난다. 손..

길위의단상 2017.08.21

인생을 향유하는 능력

분당을 지나는 탄천 산책로를 저녁나절에 걸을 때가 있다. 도시를 관통하는 위치 탓인지 늘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다. 넓은 공터에서는 함께 모여 에어로빅을 하는 팀도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힘찬 기합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그 소리만 들어도 절로 기운이 솟는다. 가까이 가서 보면 대부분이 아줌마들이다. 백 명은 넘어 보이는데 남자는 가뭄에 콩나물 나듯 서넛 정도 끼어 있을 뿐이다. 마음은 있어도 쑥스러워서 들어서지 못할 것 같다. 반면에 여자들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리듬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흘린다. 무척 적극적이다. 누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남녀 성의 구분이 뚜렷이 나타난다. 노년이 되면 여자들이 훨씬 더 활동적이면서 다양한 관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대신에 남자들은 퇴직하고 나서 움츠러든다..

참살이의꿈 2017.08.20

세계의 나무

표지를 펼치면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사진이 시선을 확 끈다. 이 책은 나무를 사랑하는 영국의 토머스 파켄엄이 세계에서 크고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 60그루를 골라 소개한 사진집이다. 나무를 설명하는 글이 현장 분위기와 나무에 대한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어 좋다. 틀에 박힌 식물 해석이 아니다. 나무를 나눌 때 종류가 아니라 '자이언트(Giants)' '난쟁이(Dwarfs)' '므두셀라(Methuselahs)' '꿈(Dreams)' '위기에 처한 나무(Trees in Peril)'로 단원 제목을 정한 것도 특이하다. 지은이는 출판사의 지원으로 4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나무 사진을 찍었다. 자태가 우아하고 개성이 강한 나무들이었다. 지은이의 열정도 그렇지만 마음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지원해..

읽고본느낌 2017.08.19

뒷산 버섯

강성한 북쪽 기단 세력이 남쪽의 북태평양고기압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어 더위가 물러났다. 두 기단 사이에 저기압이 자리잡은 탓에 연일 비가 내린다. 날씨가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 북쪽에서 핵을 빌미로 큰소리를 치니까 덩치 큰 남쪽 대양세력이 잠시 주춤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믿지만 걸핏하면 찾아오는 이런 긴장 상태가 저희들끼리의 꼭두각시 놀이 같다. 어제는 잠시 비가 그친 틈에 뒷산에 올랐다. 뒷산은 버섯 세상이 되어 있었다. 산길 주변에 돋아난 버섯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어떤 버섯은 꽃에 못지 않게 예뻤다. 그러나 버섯에는 일자무식이라 이름을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버섯 도감이라도 사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버섯은 색깔이나 생김새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우..

사진속일상 2017.08.18

선풍기 / 이정록

우리 집 선풍기는 열한 살 나랑 동갑내기, 땀 뻘뻘 일을 해도 "어이구 고물! 아이구 저 늙다리!" 구박받네 섧 고 서 러 워 도리질하던 선풍기 갑자기 고개를 끄덕끄덕 - 선풍기 / 이정록 선풍기 하나가 고장 나서 남은 선풍기가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여름 시작하면서 청소한다고 선풍기를 뜯었다가 부주의로 날개를 조이는 플라스틱 캡이 부러졌다. 간단한 부품 하나가 없어 멀쩡한 선풍기가 방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혹시 길거리에 버려진 선풍기가 없나 열심히 살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골목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무엇이든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요사이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고쳐서 쓴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 글자가 이루는..

시읽는기쁨 2017.08.17

논어[250]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의 길에 셋이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 사람 구실하는 이는 근심하지 않고, 슬기로운 이는 어리둥절하지 않고, 용기있는 이는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이 자기 말씀을 하시는 거야." 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子貢曰 夫子自道也 - 憲問 19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인(仁), 지(知), 용(勇)이다. 학교 교훈으로도 많이 등장하는 단어일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못 미친다고 고백하면서 이를 설명한다. 여기에 대한 자공의 반응이 재미있다. 대개는 자신을 돌아보는 반응을 보이는 게 보통이지만 자공은 스승의 몫으로 돌린다. 자신만만한 어감에서 자공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공자도 자공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자공의 당당함도 ..

삶의나침반 2017.08.16

한 장의 사진(23)

최근에 어느 육군 대장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있을 때 나도 1년 가까이 공관병 생활을 했다. 공관병이나 당번병은 점잖은 공식 용어이고, 군대에서는 '따까리'라고 불렀다. 자신을 하찮게 정의해 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자조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장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군 관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부인은 도시에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관급이 되면 사병이 나가서 뒷바라지를 한다. 우리 사무실은 장교 둘, 하사관 둘, 사병 세 명으로 구성되어 단출했다. 사병 중 한 명이 따까리로 나가면 남은 두 사람에게 업무가 과중..

길위의단상 2017.08.15

더 살아봐야 돼

10여 년 전쯤 주변 상황이 무척 힘들 때였다. 벌여놓은 일이 걸림돌이 되어 모든 것이 꼬이기만 했다. 한 친구가 여주로 찾아왔다. 친구가 내 사정을 자세히 알 리는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구는 자기 집의 행복을 자랑했다. 부모님이 이웃에 덕을 베풀며 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복을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친구네 집은 우리보다 훨씬 더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걱정거리가 적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교되는 처지에서는 심사가 편안치 않았다. 덕에 반드시 어떤 보상이 따라온다는 논리는 단순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선행하는 행위와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우리가 덕으로 생각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17.08.14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선생은 EBS의 '노자 강의'를 통해 화면으로 뵌 적이 있다. 전 편을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명료하고 핵심을 찌르는 강의 내용이 노자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열정적인 강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은 그때의 강의를 기반으로 엮은 책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노자 철학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나라 이전까지는 천명의 시대였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가 인간이 주도하는 역사를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면서 덕(德)과 도(道)의 개념이 나타나고, 하늘 대신 인간 중심의 철학이 공자와 노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소명을 받았지만 서로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노자의 눈에 들어온 이 세계는 존재하는 형식이나 운행하는 원칙이 상호의존관계로 ..

읽고본느낌 2017.08.13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 강경주

하나. 45세의 노산老産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또 딸을 낳았다. 분만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산모는 퇴원을 서둘렀다. 아기는 병원에서 맡아서 처리하란다. 키울 마음도 없고 형편도 어렵단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나타났다. 50세는 되어 보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한수 더 뜬다. 열이든 스물이든 아들 하나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겠단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이 아주머니 또 배가 불룩하니 병원을 찾았다. 아들인지 딸인지 좀 봐달라며 턱을 세우고는 다가앉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을 벗어버리고 진료실을 도망쳐 나와 버렸다. 더럽고 아득한 절망감이 종일 가시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둘. 30대 후반의 꼽추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진료실을 들어섰다. 초음파를 보니 임신 9주..

시읽는기쁨 2017.08.12

남한산성 반 바퀴

아내와 남한산성을 반 바퀴 돌았다. 중앙주차장에서 보건소 옆을 지나 성곽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걸어 개원사로 내려왔다. 함께 한 오랜만의 걸음이었다.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도 한낮의 햇볕은 따갑다. 어제 비가 내리고 오늘은 전형적인 여름 날씨다. 대기는 미세먼지 걱정 없이 깨끗하고, 시야도 확 트였다. 서문 전망대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 눈에 잡힌다. 아마 혼자 왔더라면 더 난이도가 있는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이서는 이 정도의 걸음이 적당하다. 좀 더 훈련이 되면 이번 가을에는 도봉산에 도전해 볼 예정이다. 아내의 무릎이 염려되어 강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걸은 시간: 2시간 50분(휴식 40분) * 걸은 거리: 6.5km * 평균 속도: 2..

사진속일상 2017.08.11

논어[249]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은 제 말이 제 행동에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子曰 君子 恥其言而過其行 - 憲問 18 말이 행동보다 앞서면 신뢰가 생기기 어렵다. 건강한 공동체는 서로간의 믿음으로 유지된다. 구성원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공동체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신(信)'은 공동체의 필요 조건이다. 옛날에 서울 올라갈 때 고향 사람들이 자주 말했다. 서울은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니 조심하라고. 그때는 순박한 시골이라도 있었다. 이제는 영악해진 면에서 서울이나 시골의 구별이 없다. 모르는 번화의 전화가 오면 아예 받지를 않는다. 날 이용하려는 의도거나, 심하면 보이스 피싱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일 경계할 것이 사람인 세상이 되었다. 인류의 여명기에는 남을 사기치거나 해꼬지..

삶의나침반 2017.08.10

태풍 노루

5호 태풍 '노루'가 어제 오후 3시에 일본 내륙에서 열대저기압으로 약화하며 태풍으로서의 일생을 마쳤다. 지난 7월 21일 9시에 발생했으니 18일 6시간 동안 살아있었다. 보통 태풍의 수명이 일주일 내외인데 비하면 상당히 길게 생존한 셈이다. 최고 기록은 1986년의 태풍 '웨인'의 19일이고, 최소 기록은 2013년의 태풍 '우나라'의 6시간이라고 한다. 태풍 '노루'는 경로도 특이했다. 발생한 초기에는 태평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돌더니 남서진하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일본 열도를 따라 지나갔다. 지나간 길도 특이한 태풍이었다. 이름이 노루여서인가, 태평양 푸른 초원을 실컷 뛰어다니다가 일본 텃밭을 짓밟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우리나라로 올까 봐 긴장했는데 가고시마 부근에서 방향을 급격히 틀었..

길위의단상 2017.08.09

여름은 싫어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낮 기온이 35도를 넘어서고, 밤에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친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시멘트 열기로 더 고생이 심하다. 다행히 이곳은 서울보다 3~4도가 낮다. 낮에는 에어컨을 틀지만, 밤이 되면 창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도 덥고 짜증 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여름은 싫다.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는 몸이 여름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부터 과민성대장증상으로 고생했다. 지금도 배와 냉기는 상극이다. 배에 찬 기운이 닿으면 바로 속이 싸늘해지면서 설사가 난다. 그래서 에어컨 바람을 싫어한다. 여름 차 안에서는 배에다 방석을 대고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선풍기 바람에도 신호가 온다. 여름이라도 시원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팥빙수를 좋아하지만 항상 ..

길위의단상 2017.08.08

기억의 그늘

'디카시'라는 영역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사진에 짧은 글을 붙인 작품은 가끔 봤지만, 디카시로 명명되고 창작의 한 분야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디카시가 새로운 문학 장르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다.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5행 이내의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예술이다. 여기서 '5행 이내'라는 제한이 특이하다. 일본의 하이쿠처럼 간결한 형식에 방점을 두는 것 같다. 디카시를 알고 싶어 강미옥 시인의 를 구입했다. 시인은 블로그를 통해 작품을 접하고 있던 터였다. 아름다운 사진과 그 순간의 느낌을 풀어낸 솜씨가 좋았다. 디카시가 무엇이고, 독..

읽고본느낌 2017.08.07

이런 노년도 가능하다

며칠 전 신문에 '일본의 100세 할머니 베스트셀러 저자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요사이 일본에서는 100세를 전후한 할머니들이 낸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보도였다. 일본 출판계에서는 이런 책을 가리켜 '100세 전후'라는 뜻의 영어 'Around Hundred'를 줄여 '아라한' 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난해 8월 출간된 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치고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93세의 할머니 작가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내 인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100만 부 가까이 팔렸다. 그 외에도 많다. 지난해 9월 출판된 100세의 다카하시 사치에가 쓴 는 26만 부가 팔렸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대단한 말이 쓰여있지는 않지만 연륜의 무게로 공감을 얻는다고 한다..

참살이의꿈 2017.08.06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 신경림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시읽는기쁨 2017.08.05

논어[248]

거백옥이 어느 사람을 선생님께 심부름 보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힌 후 물었다. "주인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가?" "주인께서는 허물이 적었으면 하고 노력하면서 계시지만 잘 안 되시나 봅니다." 심부름꾼이 나간 후에 선생님 말씀하시다. "심부름꾼이로군! 그야말로 참한 심부름꾼이로군!" 거伯玉 使人於孔子 孔子與之坐而問焉曰 夫子何爲 對曰 夫子欲寡其過 而未能也 使者出 子曰 使乎 使乎 - 憲問 17 거백옥은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존경한 사람 중 하나다. 거백옥이 보낸 심부름꾼을 봐도 주인의 품성을 알 수 있다. 공자가 거백옥의 안부를 물으니 심부름꾼은 주인의 인간됨을 향한 노력을 말한다. 공자나 거백옥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심부름꾼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로 찍은 스냅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삶의나침반 2017.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