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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만월 /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느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흘리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추석 만월 / 송진권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다. 심..

시읽는기쁨 2022.09.12

두 가지를 경계한다

늙어지면서 두 가지를 경계한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가는 것이다. 노화는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이다. 하늘로부터 받고 누린 것을 하나하나 돌려줘야 한다. 상실이 순리라고 할지라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가슴이 뛰는가. 어린 손주의 해맑은 웃음, 왕성한 호기심,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케 한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를 보며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무지개'는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경이감일 것이다. 어린..

참살이의꿈 2022.09.11

9월의 장미

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인 5월에 꽃의 여왕인 장미가 핀다. 그런데 요사이 장미는 사시사철 언제나 볼 수 있다. 원예종으로 개발된 장미 품종이 25,00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추위에도 견디는 장미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9월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만난 장미다. 활짝 핀 꽃과 함께 많은 꽃망울이 맺혀 있다. 가을에 보는 장미는 여전히 색다르고 이질적이다. '장미=봄'이라는 등식이 뇌리에 박힌 까닭이다. 언젠가는 동네의 한 집 울타리에 겨울에 핀 장미가 있어서 한참 들여다 보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꽃이 계절의 전령사가 아닌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22.09.10

공원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다

뒷산 동쪽 구역에 공원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넓이가 35만㎡나 되는 큰 공원이다. 그동안 시민의 휴식처가 없었는데 이제 제대로 된 공원이 생기는 셈이다. 공사 현장에 가 보니 산허리를 지나는 통행로가 나 있고, 시설이 들어설 부지 조성도 하고 있다. 자연 보존과 개발은 늘 딜레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시설을 만들자면 일정 부분 자연 훼손은 피할 길이 없다. 이 공원을 만드는 데도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갈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가 70%가 넘어서 새로 개발하는 곳은 대부분 산림 파괴를 수반한다. 나 역시 공원이 들어서는 것은 반기지만, 맨흙이 드러난 공사 현장을 보는 마음은 심란하다. 산 능선의 등산로도 사라졌다. 자주 쉬던 벤치가 전에 길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산 가운데로 진입하는 터..

사진속일상 2022.09.09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이 올해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이발소'를 개업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웬 이발소? "라고 의아해했는데 '이야기발명연구소'의 줄임말이란다. 그리고 명..

시읽는기쁨 2022.09.08

마르코복음[55]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아를 떠나올 때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달린 것을 멀리서 보시고, 혹시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다가가셨는데,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무를 향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영영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는 일이 없으리라."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 마르코 11,12-14 성경을 읽을 때면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주로 구약에 많지만 신약에도 몇 군데 있는데 이 장면이 그렇다. 처음 성경을 접했을 때나 지금이나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우선 아무 죄 없는 나무를 저주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시장하시다지만 무화과 열매가 없다..

삶의나침반 2022.09.07

부러진 사다리

불평등이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를 보여주는 책이다. 불평등의 거시적 원인이나 경제적 영향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간 심리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드러낸다. 부제가 '불평등은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이다. 인간은 절대적 가난보다 상대적 빈곤감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소유량보다는 남들과 비교했을 때의 내 위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을 비롯한 일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사다리는 길어지고 중간에 부러지기까지 한 상태다.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은이의 희망인 것 같다. 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키스 페인(Keith Payne)이 썼다. 책은 많은 심리 실험 사례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불평등이 ..

읽고본느낌 2022.09.06

좌파와 우파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

길위의단상 2022.09.05

강변의 나무수국

수국, 산수국, 나무수국은 언제나 헷갈린다. 여름에 수국이 필 때 확인하고 나서 일 년이 지나면 입력한 많은 내용이 딜리트(delete) 된다. 셋의 차이를 다시 검색해봐야 한다. 수국만이 아니다. 구별이 애매한 꽃이라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짓이다. 꽃만 아니라 새도 그렇다. 일전에 강변에 나갔을 때 만난 나무수국이다. 이번에 검색해 보니 정확히는 큰나무수국인 것 같다. 수국 중에서도 꽃이 큼지막하고 탐스럽다. 이맘 때면 제일 자주 만나는 꽃이다.

꽃들의향기 2022.09.04

뒷산으로 쫓겨나다

이웃집 공사 소음이 심해서 뒷산으로 피난을 가다. 덕분에 오붓하게 초가을의 산길을 걷다. 계절이 변하니 산길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다. 숲에는 늦은 매미들의 세레나데와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나지막이 울려퍼진다. 한여름의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은 부드러워지면서 전체적으로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누군가가 산길을 따라 연이어 배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다가올 태풍에 대비한 조치로 보인다. 강력한 태풍으로 예고된 태풍 '힘남노'가 6일 오전에 남해안에 상륙한다고 한다. 3일 오후 1시 현재 힘남노의 위성사진이다. 대만 동쪽 해상에 있다. 중심기압 940hPa, 최대풍속 48m/s인 매우 강한 태풍이다. 내일은 더 발달하여 중심기압이 920hPa까지 내려간다. 초강력 태풍으로 커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상륙하는 6일에..

사진속일상 2022.09.03

탄천에 나가다

당구 모임에 가는 길에 탄천에 나갔다. 오후 모임이었지만 아파트 이웃이 공사를 하는 탓에 소음이 커서 일찍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분당 매화마을에서 버스를 내려 여수천을 따라 내려가 탄천과 합류했다. 여수천 곳곳에는 지난 수해의 상흔이 남아 있다. 걷는 도중에 조깅을 하는 레펜스 선수를 봤다. 분당에 집을 얻어 아내와 함께 생활하며 당구선수 활동을 하는 벨기에 선수다. 매너와 인상이 좋아서 시합에 나오면 응원을 한다. 다시 한번 우승하길 바란다. 청명한 초가을 날씨로 한낮 햇볕은 따가웠다. 한 시간 반 정도 천변을 걷다가 이매역에서 전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갔다. 알코올은 입에 대지 않으면서 술자리에 오래 동석했다. 술 취한 친구들 넋두리를 듣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허나 과거 내 모습이 그러하지 않..

사진속일상 2022.09.02

한강변 따라 드라이브

고향 마을 이웃분이 코로나로 돌아가셨다. 지병으로 쇠약한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의 제일 가까운 친구였는데 어머니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전화기로 전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식사나 제대로 하시는지 모르겠다. 바람을 쐬면서 우울한 심사를 달랠 겸 아내와 드라이브를 나갔다. 집 부근에는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도로가 여럿 있다. 오늘은 한강변을 택했다. 달리다가 적당한 곳이 나오면 잠깐씩 쉬기로 했다. 퇴촌을 지나 342번 지방도를 탄다. 분원리에서 운심리까지 팔당호를 끼고 있는 이 길은 수도권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잠시 물안개공원에 들렀다. 전 같으면 공원을 한 바퀴 돌았겠지만 아내가 족저근막염 치료를 받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수청리 나루터도 빼놓을 수..

사진속일상 2022.09.01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고독의 매뉴얼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카페에서 읽었다. 카페에서 책 읽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카페에서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생활 소음이 일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조용하지 않으면 몰두할 수 없다. 늘 조용한 데서 책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며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 소리까지 들리는 마당에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은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 선생이 쓴 책이다.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모두가 삶의 허망함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가족을, 연인을, 동지를, 술과 텔레비전을, 때로는 애꿎은 신을 욕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읽고본느낌 2022.08.30

70줄에 들어서면

공식적으로는 65세부터 노인이 된다. 내 경우에는 경노카드를 발급받을 때 벌써 노인이 되었나, 라는 씁쓰레한 심정이 앞섰다. 65세는 몸이나 마음이나 노인이라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러나 70줄에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 앞에 '6'자가 붙는 것과 '7'자가 붙는 것은 천양지차다. 우선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아무리 고령사회라지만 일흔이라는 나이의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신체나 정신도 전과 확연히 다르다. 나이 70은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되는 인생의 분기점이다. 능동적인 생활 주체가 수동적인 약자로 변하는 시기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를 보면 70줄에 들어서면 질병을 앓을 확률이 높아지면서 대부분이 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사망할 때까지 고령자의 약 10% 정도만 심신이..

참살이의꿈 2022.08.29

가을이 성큼 다가오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기온이 떨어져서 아침저녁에는 쌀쌀하기까지 하다. 밤에 잘 때는 창문을 모두 닫아야 한다. 여름 이불은 거두어 세탁기에 넣었다. 계절의 변화가 거인의 발걸음처럼 한순간에 닥치니 깜짝 놀란다. 가을 하늘이 좋아서 집을 나섰다. 경안천을 걸으면서 온통 하늘에 마음을 뺏겼다. 뒤돌아 본 남쪽 하늘에는 비취색 구름이 떴다. 파란 하늘에 비단 조각처럼 걸린 비취운(翡翠雲)이었다. 경안천 건너편으로 건너갈 돌다리가 지난 폭우로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왜가리, 백로, 오리가 사이좋게 이웃하며 쉬고 있다. 이런 날의 햇살은 보약과 같다. 얼굴을 간지리는 햇살을 담뿍 받아들였다. 무거운 몸이지만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면서 가을을 맞으러 나간 길이었다.

사진속일상 2022.08.28

마르코복음[54]

일행이 예루살렘 부근 올리브 산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 가까이 다다르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이르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시오. 마을에 들어서자 곧 아무도 아직 타지 않은 새끼나귀가 매여 있는 것이 보일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시오. 혹시 누가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하거든, '주님이 쓰시겠답니다. 곧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시오."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새끼나귀가 한길 쪽 바깥문 곁에 매여 있어서 그것을 푸는데 거기 있던 이 가운데 몇이 "새끼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을 가는 거요?"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하니 그들은 내버려 두었다. 제자들이 새끼나귀를 예수께 끌고와서 그 등에 겉옷을 벗어 얹었다. 예수께서 올라타시자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고, 더러는 들에서 잎 많..

삶의나침반 2022.08.27

설봉공원에서 놀다

이천에 볼 일이 있는 아내와 동행했다가 - 운전기사 역할로 - 남는 시간에 설봉공원에서 혼자 놀았다. 다른 때 같으면 공원의 호수 둘레를 걷든지 설봉산에 오르든지 했을 텐데 이번에는 동선이 적은 쪽을 택했다. 어제 서울에 나갔다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몸이 피곤해서였다. 설봉공원 안쪽에 들어갔더니 '이천 시립 월전미술관'이 있었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화백의 작품을 상시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그림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미술관 뒤에는 월전의 작업실을 재현해 놓았다. 1996년의 작품 '야매(夜梅)'다. 달 밝은 밤에 핀 백매(白梅)를 그렸다. 淸影淸影 月明人靜夜深 맑은 그림자여 맑은 그림자여, 달 밝고 인적 없는 야심한 밤 1994년 작 '매..

사진속일상 2022.08.26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은행원 리카가 연하남 애인과 불장난을 하면서 고객 돈을 횡령하는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줄거리인데, 돈에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리카 외에도 여러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돈에 휘둘리는 군상들이다. 지리하고 우울한 삶을 소비로 만족하려 하지만 돈은 잠깐의 단맛을 줄 뿐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기승전'돈'일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 슬프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행복하지 않다. 예외적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살아가는 유코도 마찬가지다. 돈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돈에서 멀어지려 하지만 그럴수록 돈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돈을 마구 써대도 아껴도 돈에서 벗어나지..

읽고본느낌 2022.08.25

한 장의 사진(34)

'洛山寺記念 / 67. 7. 23' 올해가 2022년이니 55년 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낙산해수욕장의 의상대 앞이다. 앞줄 맨 왼쪽의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나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면사무소 직원들과 이장분들이 피서 여행을 동해안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나를 동행시켰다. 나는 그때 중3이었고 막 여름방학에 들어간 참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지만 머리를 식힐 겸 바닷바람을 쐬고 오자고 아버지가 권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실소가 일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어떻게 어른들 가는 여행에 낄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 여행에 자식을 데리고 간 아버지도 그렇지만 졸래졸래 따라간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중3이면 가족끼리 여행을 하..

길위의단상 2022.08.24

습지생태공원에서 서하보를 왕복하다

경안천에 나갈 생각이 든 건 가마우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서하보 부근에 수백 마리의 가마우지 떼가 몰려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많은 가마우지들이 날고 있었다. 이왕 경안천에 나간 길에 걷기를 겸해서 습지생태공원에 주차를 하고 서하보까지 걸어서 갔다. 약 3km 정도 되는 거리다. 서하보는 이름 그대로 광주시 서하리에 있는 경안천을 가로지르는 보다. 보 옆에 사람이 건너는 다리는 높지 않아서 물에 쉽게 잠긴다. 서하보에는 지난 홍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서하리(西霞里)는 '서쪽 노을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익희 선생 생가가 있다. 가마우지 떼를 보려던 꿈은 꽝이 되었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린 모양이다. 대신 천 가운데서 쉬고 있는 왜가리와 백로를..

사진속일상 2022.08.23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지은이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다가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직장을 잃었다. 수입이 끊어진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돈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삶의 우아함을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 이다. 이제 풍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지은이의 말은 불안한 국제 정세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면 동감이 된다. 전과 같은 고성장의 호황기는 다시 올 것 같지 않고 절약이 불가피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과거와 같은 성장과 자원 낭비가 계속되면 지구가 여러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환경 파괴도 심각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읽고본느낌 2022.08.21

코로나 격리의 지루함을 달래준 두 영상

어떤 사람은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을 때 그간 시간 여유가 없어 못 본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봤다고 한다. 증상이 경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러질 못했다. 머리가 띵 하고 의욕이 없으니 정신 집중이 필요한 독서나 영화 감상 따위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에 유튜브로 가볍게 볼 수 있는 영상을 봤다. 'Just for Laughs Gags'라는 캐나다 TV 프로그램인데 길거리에서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서 놀라는 시민들의 반응을 보고 즐기는 내용이다. 캐나다식 몰래카메라인 셈이다. 길이가 3분 정도로 짧고 스피디하게 전개되어 보는 데 지루할 틈이 없다. 마지막에 몰래카메라를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이 특히 재미있다.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캐나다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점도 ..

길위의단상 2022.08.20

쌓이면 터진다

지구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고 상당히 역동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오는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상세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한다. 지구 내부가 인간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사는 터전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다. 지구가 지각, 맨틀, 핵으로 되어 있듯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추측 수준이지 거의 무지하다. 인간이 지각의 표면만 겨우 건드렸을 뿐 마음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의 세계가 어떠한지는 지구의 내부처럼 신비에 싸여 있다. 지각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요인에 따라 온도가 올라가고 암석이 녹는다. 아마 천 도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런 마그마가..

참살이의꿈 2022.08.19

마르코복음[53]

일행은 예리고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예리고에서 다시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걸인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말을 듣고 외치기 시작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크게 외쳤다. "다윗의 아드님,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시오" 하셨다. 사람들이 맹인을 부르며 "힘내시오. 일어나시오. 그분이 부르십니다" 하자 맹인이 겉옷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맞으며 "무엇을 바랍니까?" 하시니 맹인이 "랍부니,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그러자 곧 그는 다시 보게 ..

삶의나침반 2022.08.18

물빛버즘(220816)

물빛버즘에게 가장 생명력이 왕성할 때가 여름이다. 초록 잎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은 생명의 환희를 온몸으로 노래하는 몸짓이며 춤이다. 해마다 수족이 잘려 나가는 도시의 가로수와는 다르다. 옆에만 서 있어도 나무의 싱싱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물빛버즘은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쯤 될 것이다. 한창 연부역강(年富力强)한 나이다. 이제 황혼녘에 접어든 나는 부러운 눈길로 너를 바라본다. 인생의 각 시절마다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어찌 청춘의 찬란함에 비길 수 있으랴. 약동하는 생명이라는 사실만으로 너는 충분히 아름답다. 물빛공원에 나온 날, 폭우로 산 아래 산책로는 폐쇄되었지만 잠시 너를 만난 것으로 충분하였다.

천년의나무 2022.08.17

그냥 둔다 /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한다고 비워지고 내려놓게 되지야 않지만 일상이 비틀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늘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근심덩이다. 잔뜩 움켜쥐고는 힘들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의미 있음이나 없음으로 가치를 나눌 수 없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할 뿐 내 분별심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주관과 아집에 의해서 '있는 그..

시읽는기쁨 2022.08.16

단풍잎부용

어제 동네를 산책하다가 만난 꽃이다. 구글렌즈로 검색해 보니 단풍잎부용이다. 이름을 알고 보니 부용의 느낌이 난다. 다만 꽃잎이 안까지 파져 있는 점이 부용과 다르다. 잎도 마찬가지로 깊게 갈라져 있다. 그래서 단풍잎부용이라 부르는가 보다. 부용(芙蓉)은 원래 연(蓮)의 꽃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였다. 이 꽃에도 같은 이름을 쓰다 보니 좀 헷갈린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부용은 미국 원산으로 들어온 지 4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개 부용은 분홍색과 흰색 꽃이 많이 보이는데, 이 단풍잎부용은 진한 홍색이다. 뜨거운 여름의 정열을 담뿍 담고 있는 꽃이다.

꽃들의향기 2022.08.15

열흘만에 외출하다

코로나로 감방살이를 하다가 열흘만에 탈출하다. 동네 산책을 하며 콧구멍에 바람을 쐬다. 그동안 너무 누워 지내서 허리가 아프고 머리도 띵 하다. 이 무기력증은 코로나 뒤끝이기보다 너무 몸을 안 움직인 결과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 책을 읽지도 못하고 블로그에 글을 적지도 못했다. 일상이 무너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 과정을 관찰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은 개체적이지만 또한 보편적이다. 위대한 사람의 일기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리라. 죽을 때까지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몇 사람을 알고 있다. 그중 한 분은 암 투병의 고통 중에서도 글을 올리며 정신 승리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는 코로나 따위에 일상이 망가졌다. 훗날에 대한 자신..

사진속일상 2022.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