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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나흘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나흘간 함께 있었다. 어머니의 가을걷이를 도와줄 목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들깨를 베는 일이 첫째였다. 들깨 모종 심고, 베고, 털고 하는 작업은 형제들이 나누어 내려와서 맡고 있다. 올해 내 일은 그나마 제일 쉬운 들깨를 베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들깨 작업을 마치고 산에 올라가 밤을 주웠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심은 나무들이라는데 밤나무 고목이 산의 능선을 덮고 있었다. 이젠 마을 사람들한테도 잊혀서 오로지 어머니의 전용 밤밭이었다. 나는 10분여 줍다가 포기했는데 어머니는 30분 넘게 산을 타고 다니셨다. 아흔이 넘은 연세인데 모두가 놀라는 체력이다. 비슷한 또래의 동네 할머니들은 대부분 바깥출입하기도 벅차다. 자식 입장에서는 그러다가 다치실까 봐..

사진속일상 2022.10.15

지적 행복론

"소득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돈이 많으면 정말 더 행복해지는지 알아보고자 데이터를 연구했고, 이 데이터는 행복과 소득의 역설을 보여줬다. 이스털린은 행복통계학을 연구한 최초의 경제학자다. 이 책 은 97세의 이스털린이 쓴 행복에 관한 보고서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 내용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이다. 다만 그의 이론은 과학적 조사에 의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하기 때문에 바탕이 탄탄하다.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우리가 행복에 접근하는데 유리한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인간 행복의 조건은 소득, 건강, 가정생활의 세..

읽고본느낌 2022.10.11

사물들

프랑스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장편소설이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가 배경으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잘 들어 있다. 대신에 파리의 생소한 골목과 가게 등 다양한 지명이 나와서 파리 사람이 아니라면 어딘지 몰라 좀 혼란스럽다. 은 제롬과 실비라는 두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오직 물질적으로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이 작품의 의도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부평초 같은 삶을 그리려는 것 같다. 제롬과 실비, 그리고 친구들은 상품들의 유혹과 현란한 광고의 공세에 덧없이 휩쓸려가는 군상들이다. 이 소설은 건조한 문체와 특이한 시제가 흥미롭다. 마치 사회과학자가 사회 현상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글 같다. 60년 전의 소설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해당하는 경고로 읽힌다. 그저 주어진 일상에 매몰될 때, 아무런 철학과..

읽고본느낌 2022.10.10

청량리역 / 서경온

중1 담임교사였을 때 가출한 학생을 청량리역에서 찾았다 자그마한 어깨에 아버지의 긴 낚싯대를 메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바다 가서 고기를 잡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버스 안내양의 다급한 외침이 "차라리 죽는 게 나요"라고 들린다던 60년대 어느 날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희미한 제천역 대합실 불빛을 떠나 비 내리는 밤 청량리역에 내렸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스카극장의 휘황한 네온사인이 처음 보는 바닷속 찬란한 물고기들 같았다 - 청량리역 / 서경온 나 역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시절 서울로 오는 유일한 방법은 중앙선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완행과 급행이 있었는데 감히 급행을 탈 엄두는 못 내고 역마다 모두 서는 완행만 탈 줄 알았다. 자리가 안 나면 ..

시읽는기쁨 2022.10.09

남한산성에서 만나다

처제네와 남한산성에서 만나 함께 가을 낮을 즐겼다. 비 지나가고 쌀쌀해져서 "가을이구나!"라며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된 날이었다. 산성마을에서 점심으로 보리비빔밥을 먹고 행궁을 둘러봤다. 행궁 맨 위에 이위정(以威亭)이 있다. 순조 17년(1817)에 광주부 유수였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행궁이라 해도 궁궐 안 제일 높은 곳에 유수의 활 쏘는 정자를 만들어도 되는지 의아했다. 유수(留守)란 직책은 조선 시대에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의 외관 벼슬이다. 개성, 강화, 광주, 수원, 춘천 등지에 두었다. '이위(以威)'란 '천하를 위압한다'는 뜻이겠다. 산성리가 조선 시대 30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광주의 중심지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남한..

사진속일상 2022.10.08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

길위의단상 2022.10.07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임사 체험 후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인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는 인도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결혼한 후에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4년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에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고 임사 체험 상태에 들어갔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고 병도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감각에 눈을 떠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각한다는 임사 체험은 많이 알려져 있으며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다. 아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안과 행복에 잠..

읽고본느낌 2022.10.06

시청까지 걸어서 왕복하다

시청에 볼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한 번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 집에서 시청까지는 직선거리로 3km지만 시끄러운 차도를 따라 걸을 수는 없고 우회를 해야 하므로 실제 걷는 거리는 4km가량 되었다. 오가는 길에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이미 한참 전에 공식적인 노인이 되었지만 '노인 복지관' 시설을 이용해 보지는 않았다. 취미 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은 지원해도 자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들어가 보았더니 내부는 깔끔했고 방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둑 대국실도 환경이 괜찮았다. 심심할 때 여기 와서 바둑 한 판 두어볼까? 송정동은 도시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10만 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한쪽에서는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고, 이곳 빈 터에는 단..

사진속일상 2022.10.05

마르코복음[58]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께서 성전 안을 거니실 때 대제관과 율사와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시오.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 주지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비롯했습니까, 사람들에게서 비롯했습니까? 대답해 보시오." 그들은 서로 궁리하며 말했다. "'하늘에서'라고 하면 '그럼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터인데, 그렇다고 '사람들에게서'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소?" 그들은 군중이 무서웠으니 , 모두가 요한을 참으로 예언자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삶의나침반 2022.10.04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다

손주를 만나러 잠실에 간 길에 짬이 나서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마침 호수에서는 'Rubber Duck Project Seoul 2022'가 열리고 있었다. 대형 오리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러버덕은 네덜란드의 공공미술가인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동심을 일깨워준다. 그는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대상을 - 주로 동물 - 거대한 크기로 재현하는 작업을 한다. 러버덕도 높이가 18m나 된다. 작가는 거대하게 변한 오리를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자 하는 것 같다. 자연 앞에서 왜소한 인간을 느껴보라는 것일까. 어쨌든 어른, 아이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여러 각도에서 찍어 보았다. 실제 호수 위의 오리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저희들끼리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호..

사진속일상 2022.10.03

가을을 기다리는 뒷산

여름이 떠나가기 싫은가 보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가 싶더니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높다. 일교차가 커서 감기를 조심해야 할 날씨다. 한 달만에 뒷산에 올랐다. 8월 이후로 코로나에 걸리고, 허리를 삐끗해서 몸이 많이 부실해졌다. 일흔이 넘으니 노화 현상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느낌이다. 이젠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도 쓰지 못하겠다. 산 입구의 햇빛을 잘 받는 나무에는 단풍물이 들기 시작했다. 산속은 여전히 여름이다. 가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산길의 사색을 끊는다.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숲에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는 천둥만큼 크다. 한 친구가 단톡방에 새무엘 얼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올렸다. 이 시를 애송했다는 맥아더는 일흔 살에 한국전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고 ..

사진속일상 2022.10.02

날마다 구름 한 점

자신을 '구름추적자'라고 부르는 개빈 프러터피니(Gavin Pretor-Pinney)의 구름 책이다. 책 제목처럼 365장의 구름 사진이 실려 있다. 지은이는 2005년에 '구름감상협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 책의 구름 사진의 다수는 구름감상협회의 회원들이 찍은 것이다. 은 구름에 관한 종합세트와 같다. 구름 종류에 따른 생성 원리와 여러 광학 현상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사진마다 붙어 있다. 또한 문학 작품에서 인용한 구름에 관한 글, 명화 속에 그려진 구름 등 다양한 구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도 한 때 구름 사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구름을 찍은 필름이 몇 박스가 되었다. 구름 책을 내고 싶은 꿈이 있어서 모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생의 전환기에 살림을 단촐하게 정리하면서 전부 ..

읽고본느낌 2022.10.01

다정소감

책 제목인 '다정소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다정소감(多情小感)이라고 짐작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책 내용도 내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이런 단어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다정소감(多情所感)이다. 내 엉뚱한 추측에 실소를 했다. 은 김혼비 작가의 산문집이다. 글에서는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지은이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도 해 본다. 김혼비 작가는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 다이내믹한 분 같다. 정과 동을 겸비한, 그래서 만나면 무척 재미있을 분으로 느껴졌다. 풋풋한 햇사과를 먹는 것..

읽고본느낌 2022.09.30

혼자라서 / 이운진

썩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구름의 지도를 그리고 꽃이 피는 속도를 알았으니까 정확히 몇 시에 대추나무가 가장 곧게 서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없는지, 내 꿈은 왜 자꾸 무너지는지 생각하다가 뒤늦은 질투에 부끄러워지는 일 봄볕 같은 감정들을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어 - 혼자라서 / 이운진 인생이란 '혼자'와 '함께'의 균형/조화를 맞추는 일이 아닐까. 오청원 9단이 '바둑은 조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인생에도 마찬가지이지 싶다(마침 어제 우리나라의 오유진 9단이 오청원배 세계 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왕청신을 꺾고 우승을 했다). 조화가 양적인 중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와 '함께'의 비율을 5:5로 지킨다고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각자 타고난 성향..

시읽는기쁨 2022.09.29

신구대식물원 꽃무릇

꽃무릇을 보러 신구대학교 식물원을 찾았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었다. 사진처럼 대부분의 꽃무릇이 탈색되어 볼 품이 없었다. 이곳 꽃무릇을 보자면 15일 이전에 와야 할 것 같다. 위로 올라가니 그나마 거실 넓이만 한 비탈에 일부가 남아 있었다. 끝물이었지만 일부는 꽃봉오리가 맺힌 것도 있었다. 보물찾기를 하듯 싱싱한 놈을 고르면서 중얼거렸다. 너희들만이라도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 성남에 있는 신구대학교 식물원은 처음 가 봤는데 아기자기하면서 아담했다. 현장 학습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 꽃무릇은 나무와 오솔길을 따라 피어 있어 규모는 작아도 정감 있는 분위기에 젖을 수 있을 것 같다. 내년에는 때를 잘 맞추어 찾아와 봐야겠다.

꽃들의향기 2022.09.28

하늘정원 코스모스

코스모스를 보러 영종도 하늘정원에 갔다. 하늘정원 코스모스 꽃밭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하는 라인 아래에 있다. 코스모스와 비행기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고 싶었다. 하늘정원은 올 초에 한 번 찾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는 꽃이 없어 황량했는데 이번에는 넓은 벌판이 온통 코스모스로 뒤덮였다. 출렁이는 코스모스의 바다 같다. 시골길에서 하늘거리는 소담한 코스모스와는 다른 느낌이다. 이런 맛 또한 괜찮다. 코스모스 꽃밭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풍경을 찍고 싶었으나 제대로 되지 못했다. 우선 비행기가 예상보다 뜸했다. 전에는 꼬리를 물고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이쪽보다는 제 2터미널 활주로로 착륙하는 비행기가 많았다. 또, 포인트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비행기를 보면 가슴이..

꽃들의향기 2022.09.27

마르코복음[57]

일행이 새벽에 지나가다 보니 저주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있었다.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느님을 믿으시오. 진실히 말하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면서도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대로 되리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거니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모두 받는다고 믿으시오. 그러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 누구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거든 그를 용서하시오. 그래야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 마르코 11,20-26 예루살렘 성전과 병치되어 나오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무..

삶의나침반 2022.09.26

200일 & 50일

200일은 TV를 멀리 하고 있는 날짜다. 올 3월 9일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바라지 않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표차는 0.7%였다. 앞으로 5년 동안 TV 화면으로 그를 봐야 하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일이 지났다. 단, 스포츠 중계는 예외다. PBA 당구대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TV를 켠다. 다음달부터 배구 시즌이 시작된다. 여자배구를 좋아하니 자주 TV 앞에 앉게 될 것이다. 그 정도는 허용하기로 한다. 왜 그 사람이 싫을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적은 없었다. TV를 안 보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다. 요사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처신을 보면 내 판단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부인한테서 받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TV를 보지 않으니..

참살이의꿈 2022.09.25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가을 코스모스를 보면 아련한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미루나무가 도열한 신작로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집에서 학교로 오가는 길이 둘 있었지만, 가을이면 아이들 발걸음은 저절로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신작로로 들어섰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가 먼지를 날려도 상관없었다. 코스모스 꽃을 따서 책보를 장식하기도 하고, 동무 옷에 압착시켜 무늬를 새기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 꽃을 날리면 코스모스는 헬리콥터 날개 마냥 돌면서 강물에 떨어졌다. 강물 따라 흘러 내려간 코스모스는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동네 산자락에 코스모스 길이 있다. 좁은 오솔길 양편으로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질서 있게 가꾼 도시 공원의 코스모스와는 다른 분위기로 자연..

꽃들의향기 2022.09.24

모든 요일의 여행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 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을 만난 것만으로도 책을 든 본전은 뽑은 셈이다. 나에겐 '여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면서, 사람마다 여행의 색깔이 다르다는 점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지은이가 모든 여행의 끝에 내린 결론이란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지만 우리는 매번 다른 곳에 도착한다. 은 카피라이터인 김민철 작가가 쓴 여행기다. 유명 관광지나 풍물을 소개하는 대신 여행지와 나와의 내면적인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기록이다. 낯선 뒷골목, 우연히 만난 사람, 의외의 풍경이 주는 기쁨 등이 정감 있는 사진과 ..

읽고본느낌 2022.09.23

성지(34) - 남한산성 순교성지

성지 49.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은 신해박해(1791년) 이후 약 300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장소다. 성지 부근에 처형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시신은 동문 옆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버려졌다. 워낙 시신이 많이 쌓여 수구문을 사람들은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렀다고 한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한덕운 토마스(1752~1802)를 비롯하여 36명이다. 새 성당은 2015년에 신축했다. 지금은 '토마스 홀'로 사용하는 곳이 예전 성당이었다. 오래전에 이곳에서 마루에 앉아 미사를 드리던 기억이 새로웠다. 성당 옆 성모 마리아. 숲 속 산책로. 십자가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야외 미사터에 있는 예수 고난상. 성지 안은 초가을의 정취가 가득했다. 십자가와 구름. 순교자 명단이 ..

사진속일상 2022.09.22

기대 없음의 행복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대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다중(多衆)보다는 고독이라고 되새김질하는 자체가 이미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DNA에는 무리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야생 상태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홀로 있으면 스트레스가 작동하도록 하는 명령어에 불이 켜지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때 기본적으로 기쁨을 느낀다. 야생의 위험이 사라진 지금도 인간은 소속감을 통해 안전과 위안을 ..

참살이의꿈 2022.09.21

목현천에 나가다

몸 상태가 80% 정도 올라왔다. 아직 허리를 굽히거나 돌릴 때 통증이 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세월은 빨리 흐르지만, 늙은 몸의 회복은 더디다. 목현천에 나갔다. 목현천은 지난달 큰물이 났을 때 범람하면서 많은 피해가 났던 곳이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사망한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지금은 쌓인 토사를 제거하는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다. 이배재를 지나 성남으로 가는 새 도로가 건설중이다. 넓은 무궁화 꽃밭도 새로 만들어져 있다. 어쩌면 묘목을 기르는 곳인지 모른다. 오랜만에 이쪽으로 나오니 여러가지가 달라졌다. 집에서 목현천을 오가자면 산자락에 난 길을 지나야 한다. 가을이 짙어지면 단풍이 아름다운, 짧지만 운치 있는 길이다..

사진속일상 2022.09.20

아기 업기 / 이후분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아기 업기 / 이후분 우리가 어렸을 적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상례였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꼴을 베거나, 뒷산에서 땔감을 하거나, 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하는 일은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송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제일 인기 있었다. 송아지는 제가 알아서 풀을 뜯고, 그동안에 우리는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한참 뒤에야 송아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저녁 느지막..

시읽는기쁨 2022.09.19

조선의 뒷골목 풍경

우리는 왕조나 위인 중심으로 역사를 배운다.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라면, 정사(正史)란 역사 스토리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긴 시간 우리 역사를 만들어 간 수많은 평민, 상놈들의 땀내 나는 사연은 통째로 잊혀 있다. 왕이나 양반, 위인들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삶을 드러내는 작업도 역사가의 책무라고 본다. 은 일반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재현한 사람 냄새 나는 생활의 역사서다. 지은이인 강명관 선생은 한문을 전공한 교수로 옛 서적에 나오는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백성을 살린 이름 없는 민중의, 군도와 땡추, 유흥가를 지배한 무뢰배들, 조선의 오렌지족, 투전 노름에 골몰한 도박꾼,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탕자,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 금주령과 술집, 가부장 체제에 반기를 든 여인 등..

읽고본느낌 2022.09.18

마르코복음[56]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성전에서 팔고 사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여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 나르는 일도 금하셨다. 그리고 가르치셨다. "성서에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씌어 있지 않소? 그런데 당신네는 '강도 소굴'로 만들어 버렸소."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듣고는 그분을 없애 버릴 방도를 찾았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했으니, 군중이 모두 그분 가르침에 매우 경탄했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자 일행은 성 밖으로 떠나갔다. - 마르코 11,15-19 예수살렘 성전의 예수는 갈릴래아의 예수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전투 모드로 바뀐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아예 '강도 소굴'이라고 비난한다. ..

삶의나침반 2022.09.17

러빙 어덜츠

넷플릭스에 혹시나 볼 만한 게 있는지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영화다. 많은 경우 실망을 하지만 이 영화는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 제목이 '러빙 어덜츠(Loving Adults)'인데 번역하면 '사랑스런/사랑하는 어른들' 쯤 될까, 그러나 내용은 제목과 반대로 끔찍한 살인을 소재로 한 치정물이다. 영화는 미제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랑과 결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진행과 두 부녀의 대화가 교차하며 스토리는 전개된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쓴 애착과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영화는 잘 보여준다. 두세 차례 반전도 나온다. 청순해 보이는 아내 레오노라가 뒤로 갈수록 섬뜩한 여자로 변한다. 불륜을 저지른 어리바..

읽고본느낌 2022.09.16

조심스레 산책하다

허리가 결린 지 일주일째다. 차도가 아주 느리다. 어제는 밖으로 나가 마을 주변을 조심스레 산책했다. 올해 후반부는 너무 어렵게 시작된다. 8월에는 코로나로 두 주일, 9월 지금에는 허리 통증으로 한 주일 넘게 힘들어하고 있다. 연례행사로 잊지 않고 날 찾아오는 병이 셋 있다. 감기, 허리 결림, 어지럼증이다. 셋의 공통점은 예고도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는 점이다. 이번 허리 결림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전 아침에 일어났더니 허리가 뻐근하며 몸을 제대로 굴신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꿈을 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심하게 뒤척이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었다. 얼마 전의 꿈에서는 상대와 싸우다가 실제로 발차기를 하는 바람에 침대에 부딪힌 소리에 놀라 아내가 달려오는 소동이 있었다. 감기..

사진속일상 2022.09.15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

우주의 풍경 앞에서는 가슴이 뛴다. 요사이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조차 잊은 처지지만, 우주망원경이 보내오는 사진이 있어 허전함을 달래준다. 작년에 하늘로 올려진 제임스 웹은 허블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를 선물하고 있다. 얼마 전에 제임스 웹이 찍은 수레바퀴은하가 공개되었다. 아름다운 은하나 성운이 많지만 수레바퀴은하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원 이름은 'ESO 350-40'인데 생긴 모양에서 통상 '수레바퀴은하(Cartwheel Galaxy)'라 불린다. 수레바퀴은하는 우리은하에서 5억 광년 떨어져 있고, 지름은 15만 광년이다. 원래는 나선은하였는데 다른 은하와 충돌하면서 생긴 충격파가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호수에 돌이 떨어질 때 생기는 파문과 비슷하다. 충..

길위의단상 2022.09.14

부탄, 행복의 비밀

"첫눈이 오면 학교나 일터로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낭만을 즐긴다. 모든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아이를 낳으면 6개월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고, 아이가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근로시간을 하루 2시간 줄여준다. 전 국토의 70%를 숲으로 보전한다. 고을마다 며칠씩 전통 축제가 열린다." 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부탄은 면적이 39,000㎢(한반도의 1/3), 인구가 80만,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인 아시아의 가난한 소국이다. 부탄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유명하다. 부탄은 국가 운영의 첫째 지표가 경제 성장이 아닌 행복이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

읽고본느낌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