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97

머위 / 문인수

어머니 아흔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 전에 망한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 있어서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죄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 머위 / 문인수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평생을 억척스레 농사 지으며 5남매를 키우셨는데, 여든 가까이 된 나이에 자식도 손주도 곁에 없다. 어머니 역시 '자식 낳은 죄'의 업보를 쓴 외로움으로 갚아 나가신다. 늙으신 부모를 안타까워하는 자식 또한 밑의 자식을 낳은 천형을 짊어져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머위 잎처럼 쓰디쓴 맛이다..

시읽는기쁨 2007.02.08

2006 추석

올 추석은 8일 동안의 휴일이 주어졌다. 2일과 4일의 징검다리 근무일이 모두 재량휴업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주와 영주의 처가와 고향집을 모두 다녀올 수 있었다. 어머님을 찾아뵙고 형제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힘들어지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다. 긴 거리를 오랜 시간 움직여야하는 몸의 피곤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또 병약한 모습의 어른들을 뵙게 되는 정신적 피로함이 훨씬 더하다. 이번 길에도 처가 쪽에서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 큰어머님과, 본가 쪽에서는 암투병중이신 이모부님을 병원으로 찾아뵈었다. 종이처럼 얇고 창백한 모습에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특히 치매 요양원에 계신 노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나고 병들고 죽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운명이..

사진속일상 2006.10.07

사람 노릇 하기

우리는세상에 태어나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관계의 폭은 점점 넓어진다. 부모, 부부, 자식, 형제자매, 친구, 이웃,동료, 친척, 동창, 고객 등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노릇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정에서 일차적 관계인 부모 노릇, 자식 노릇 제대로 하기 조차 힘에 겨울 때가 많다. 신경을쓴다고 하지만늘 부족하고 미안하기만 한 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노심초사하지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때는 가족 행사가 의무방어전처럼 부담이 되기도 한다. 어머님과 장모님의 생신이 묘하게도 같은 날이다. 그래서 우리들 때문에 두 분의 생신은 매년 조정을 해야 한다. 대부분 한 주일 ..

사진속일상 2006.06.05

물방울 삼형제

차례상에 올릴 나물을 끓이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다른 집도 사는게 다 똑 같더라." 그리고는 옆집의 누구는 형수와 틀어졌고, 또 누구네 집은 형제간의 불화가 아직껏 계속돼 서로 남보듯 한다면서 지나가는 소리처럼 하셨다. 그러나 '다른 집도'에서 '도'를 강조하시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에 내 마음도 슬퍼졌다. 이번 추석에는 찾아온다던 막내를 잊지 못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고, 어려운 자식에 눈길이 더 가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리라. 추석날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반짝 나온 햇빛에 고향집 토란 잎 위 물방울 세 개가 보석처럼 빛났다.

사진속일상 2005.09.19

고향집

고향집에 자주 들러야 하건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늘 무언가에 빚 진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자식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다른 데에 아무리 신경 쓴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이번에 내려가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사는 게 지옥 같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내가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악화된 상황이 몇 년째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미 지나간 일,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지만 어떨 때는 야속하기도 하다.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밖과 일에만 매달리는 어머니가 충분히 이해된다. 한식을 맞아 허물어진 산소를 손보다. 밭에다 만든 산소라서 땅이 단단하지 못해 비만 오면 비탈이 무너진다. 석축을 쌓아야 ..

사진속일상 2005.04.06

새벽 전화벨 소리

새벽에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방안은 온통 깜깜한데 가슴이 철렁한다. 수화기를 드니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시다. 이젠 심장이 방망이질친다. ".....무슨 일이세요?" "응, 별 일 없나... 다음 주말에 전부 모여서 김장 하기로 했으니까 그 때 내려 온나..." 아이구..... 그렇다고 이 꼭두새벽에 전화를 하시다니..... 새벽 전화벨 소리는 너무 무섭다. 고향에는 96세 되신 외할머니가 계신다. 몇 년 전부터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함께 계시는 어머니가 무척 고생하신다. 금방 한 말도 잊어버려서 외할머니 옆에 있으면 똑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우습기도 하지만 짜증이 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임종 소식이 올까 봐 늘 불안하다. 외할머..

길위의단상 2003.11.20

어머니의 송편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고, 어머니는 가마솥에서 떡을 찝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은 저의 몫이죠. 이내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구수한 떡 내음이 집안을 가득 채웁니다. 언제 느껴도 풍성하고 따스한 추석 풍경..... 그러나 세월은 많은 것을 떠나 보내고, 낡게 만들고, 지금은 어머니의 등마저 휘게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어머니가 쪄 주시는 송편 맛을 볼 수 있을런지... 정다운 것과 만나는 기쁨 속에는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진속일상 2003.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