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77

두 번은 없다 /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더라?꽃인가, 아님 돌인가?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

시읽는기쁨 2024.09.29

식당 / 프란시스 잠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그저 죽은 사람이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그 속에는 밀랍, 잼,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

시읽는기쁨 2024.09.10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시읽는기쁨 2024.02.25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 That Love is all there is / Emily Dickinson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에서 첫 번째 수록된 시다. 평생을 은둔하며 고독 속에서 살아간 에밀리에게 단 한 번 이성을 사랑한 때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쯤 되었을 때 기혼남인 목사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영화 '조용한 열정'에는 목사 부부와..

시읽는기쁨 2023.02.12

나무에 있는 노인 / 에드워드 리어

나무에 나이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벌 때문에 엄청 귀찮아했죠. 사람들이 묻기를 "벌이 붕붕거려요?" 그는 대답하기를 "물론 그렇죠! 그게 바로 벌의 진짜 성질인걸요." - 나무에 있는 노인 / 에드워드 리어 There was an Old Man in a tree Who was horribly bored by a bee: When they said "Does it buzz?" He replied, "Yes, it does! It's a regular brute of a bee." - There was an Old Man in a tree / Edward Lear 우리는 수많은 타자와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우주에 존재하는 대상은 서로 관계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생살이의 괴로움도 대부분..

시읽는기쁨 2022.12.09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임사선(臨死船) / 다니카와 슌타로

모르는 사이에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었다 제법 붐비고 있다 늙은이가 많지만 젊은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아기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혼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남녀도 있다 저승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이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면 너무 편하다 하고 생각했으나 왠지 허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른다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는지 문득 위를 올려다봤더니 여기에도 하늘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늦은 오후의 빛이다 바랜 청색을 아련한 주황색이 베일처럼 덮어 있다 깰 것 같으면서도 깨지 않는 꿈 같다 배는 낮고 고풍스러운 기관음을 내고 달린다 저승이 아직 멀었나 옆에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시읽는기쁨 2022.03.24

사진첩 / 쉼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프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

시읽는기쁨 2021.12.01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가끔 나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을 세느라 종일을 보내지. 그러기 위해선 가지마다 기어올라 공책에 숫자를 적어야 해. 그러니 내 친구들 관점에서는 이런 말을 할 만도 해. 어리석기도 하지! 또 구름에 머리를 처박고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물론 언젠가는 포기를 하게 되지만 그때쯤이면 경이감에 반쯤은 미쳐버리지 - 무수한 잎들, 고요한 나뭇가지들, 나의 가망 없는 노력. 그 달콤하고 중요한 곳에서 나, 세상-찬양 충만한 큰 웃음 터뜨리지. -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Sometimes I spent all day trying to count the leaves on a single tree. To do this I have to climb branch by branch and wr..

시읽는기쁨 2021.08.22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가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는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한..

시읽는기쁨 2021.07.24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습니다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

시읽는기쁨 2021.06.20

쥐 / 요사노 아키코

나의 집 천장에 쥐가 사느니라. 빠작빠작 소리남은 끌 잡고 상을 새기는 사람 밤에도 자지 않음과 같으니라. 또 그의 아내와 춤을 추면서 빙 돌아가는 울림은 경마가 달리는 모습. 내 글 쓰는 종이 위에 천장 위 모래며 먼지들 펄펄 날려옴도 그들이 어찌 알 것인가? 그러나 나는 생각하느니 나는 쥐들과 함께 살고 있노라.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으랴.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어서 때때로 나를 엿보라. - 쥐 / 요사노 아키코 이웃간에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이 가끔 뉴스에 나온다. 며칠 전에는 윗집 현관문에 인분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댓글에는 누리꾼의 설왕설래가 무성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층간 소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행히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한 중재로 윗집 사람을 만나고 나서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층간..

시읽는기쁨 2020.12.03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벌은 꽃 속에, 꽃은 정원 속에, 정원은 토담 속에, 토담은 마을 속에, 마을은 나라 속에, 나라는 세계 속에, 세계는 하느님 속에, 그래서, 그래서, 하느님은, 작은 벌 속에. -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일본 센자키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온순했다.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어른들이 정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그녀가 글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방탕한 남편과의 불화와 병으로 괴로워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 짧은 약력과 시 몇 편으로 그녀를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슬퍼진다..

시읽는기쁨 2020.05.25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 셸리

영국의 노동자들아, 무엇 때문에 그대들을 업신여기는 지주들을 위해 밭을 가는가? 그대들의 폭군들이 입을 사치스런 옷을 무엇 때문에 힘들이고 근심하며 짜는가? 무엇 때문에 나서 죽을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지켜 주는가? 그대들의 땀을 짜내려 드는 아니 그대들의 피를 마시려 드는 저 배은망덕한 게으름뱅이들을 영국의 부지런한 자들아, 무엇 때문에 많은 무기와 사슬과 채찍을 만드는가? 고통을 모르는 이 게으름뱅이들은 그것으로 그대들의 강요된 노동의 생산물을 약탈할 텐데 그대들은 여가, 안락함, 평온, 피난처, 음식, 부드러운 연인의 향기를 누리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값비싼 고통과 근심으로 그대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이 뿌린 씨를 다른 사람이 거둔다네 그대들이 찾아낸 재산을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네..

시읽는기쁨 2020.05.14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잃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이바라기 노리코 늙어가면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려 한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는 것도 적응할 수 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자연의 법칙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나 감성이 매말라가는 걸 느낄 때는 한숨이 나온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드라이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

시읽는기쁨 2019.05.01

동방의 등불 /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는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 And the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of the East - 동방의 등불(The lamp of the East) / 타고르(R. Tagore) 삼일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 아침이다. 100년의 무게감이 묵직하다.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함성을 생각한다. 그때 우리 민족의 꿈이 독립이었다면, 이 시대의 과제는 분단 극복과 통일이다. 어제 하노이에서는 북한과 미국 정상이 핵 담판에 ..

시읽는기쁨 2019.03.01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

시읽는기쁨 2018.11.19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

시읽는기쁨 2018.05.24

5월의 노래 / 괴테

아, 대자연이 찬연하게 내게 빛을 보내요! 아, 햇살이 밝게 비쳐요 온 들판이 미소 지어요! 가지가지 이파리마다 꽃망울 터지고 수풀 사이 수천 가지 노랫소리가 들려요 가슴 가슴마다 환희와 축복이 넘쳐요 오, 대지여, 태양이여, 기쁨이여, 환희여 오, 사랑이여, 사랑하는 이여! 저 높은 언덕 위 드높은 아침 구름처럼 모두가 황금빛으로 아름다워요! 찬연한 그대 모습도 온 들판을 환하게 축복해주는 이 넓은 세상을 온통 안개꽃으로 감싸요 소녀여, 소녀여, 그대를 사랑해요! 참으로 빛나는 그대의 눈빛! 나를 사랑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대! 사랑 때문에 종달새들도 높이 대기 속에서 노래하고 아침 꽃들도 모두 하늘 냄새를 사랑해요 뜨거운 가슴, 뜨거운 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듯 그대는 내게 기쁨과 젊음과 용기를 줘요..

시읽는기쁨 2018.05.13

술 노래 / 예이츠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우리가 죽기 전에 알 것은 다만 이것뿐 나, 잔 들어 입 맞추고 나, 그대를 바로보며 한숨짓노라 - 술 노래 / 예이츠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s;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 A drinking song / W. B. Yeats 최근의 진화생물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단순한 데서 온다고 한다. 행복은 생물의 본성을 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 한 잔 나누는 ..

시읽는기쁨 2018.02.04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시읽는기쁨 2017.08.25

자연이 들려주는 말 /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 자연이 들려주는 말 / 척 로퍼 I Listen I Listen to the trees, and they say: "Stand tall and yield. Be tolerant and flexible."... I Listen to th..

시읽는기쁨 2017.05.14

슐레지엔의 직조공 /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부자인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주기는 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

시읽는기쁨 2016.12.01

내가 만약 / 디킨슨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괴로움 달래줄 수 있다면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 내가 만약 / 디킨슨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r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onto his nest, I shall not live in vain. - If I can / Emilly Dickinson 은둔과 고독의 삶을 택한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까마귀 떼를 떠나 백로 한 ..

시읽는기쁨 2016.11.21

백조 / 메리 올리버

넓은 물 가로질러 무언가 떠 오네- 가냘프고 섬세한 배, 흰 꽃들 가득한- 불가사의한 근육들로 움직이네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선물들을 메마른 기슭에 가져다주는 것이 감당하기 벅찬 행복인 것처럼. 이제 검은 눈을 돌리고, 구름 같은 날개를 가다듬고, 암회색 정교한 물갈퀴발을 끌며 오네. 곧 여기 닿겠지. 오, 나 어떻게 할까? 저 양귀비 빛깔 부리 내 손에 닿으면 시인 블레이크의 부인이 말했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이는 너무 자주 천국에 있어요. 물론!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땅에 있지 않아. 상상력 속에 있지 네가 이 세상을 인지하는, 그리고 네가 세상을 찬미하는 몸짓들에. 오, 나 어떻게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저 흰 날개들 기슭에 닿으면. - 백조 / 메리 올리버 자..

시읽는기쁨 2015.12.08

선택의 가능성 /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

시읽는기쁨 2015.11.29

배움을 찬양함 / 브레히트

배워라 단순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시대가 왔다 너무 늦는 법은 없는 것이다! 배워라 가나다라를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겠지만 우선 배워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일랑 하지 말고 시작해라!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배워라 여인숙에 사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부엌의 여자들이여 배워라 60세의 여인이여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학교를 찾아라 집 없는 사람들이여 지식을 손에 넣어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여 굶주린 사람들이여 책을 잡아라 손에 그것은 무기의 하나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동지여 질문하라 망설이지 말고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음미해 보라!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앎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감정서를 검..

시읽는기쁨 2015.10.19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우리는 너무 거창한 걸 좇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작은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행복을 찾아 멀리 나가보..

시읽는기쁨 2015.09.18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양팔을 활짝 펼쳐도 하늘을 조금도 날 수 없지만 날으는 작은 새는 나처럼 땅 위를 빨리는 달릴 수 없어 내가 몸을 흔들어도 고운 소리 나지 않지만 저 우는 방울은 나처럼 많은 노래 알지는 못해 방울과 작은 새와 그리고 나 모두 달라서, 모두가 좋아 -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은 일본의 동요 시인이다. 27세로 요절한 그녀의 생애는 난설헌을 연상시킨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남편은 가네코의 작품 활동과 편지 왕래까지 금지시켰다. 결국 이혼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딸을 데려가려고 하자 수면제를 먹고 생을 마감했다. 남동생이 보관하던 유고집이 발견되어 그녀의 시가 세상에 드러났다. 작고 여린 것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가네코의 시는 순수한..

시읽는기쁨 2015.02.07

야만인들을 기다리며 / 카바피

- 우리가 이렇게 광장에 모여서 기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한다고 한다. - 원로원은 어째서 저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가? 왜 의원들은 아무 법률도 통과시키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가? 그것은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의원들이 법률을 제정해야 하는가? 법률은, 야만인들이 도착하면,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 어째서 우리의 황제는 오늘 저렇게 일찍 일어나서 도시의 가장 큰 관문 위에 자리를 잡고 엄숙한 모습으로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는가? 그것은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들의 지도자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황제는 양피지 두루마리까지 갖고 나와 그 지도자에게 많은 명예로운 칭호와 작위를 수여할 준비를 갖추었다. - 어..

시읽는기쁨 2014.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