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75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즐겁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유쾌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시간을 재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행복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몸에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에도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건강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다투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연에게 다정해진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진정한 평화.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지구를 계속 사랑하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우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나다. -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2001년에 일본에서 '분발하지 않기 운동'이 일어났었다. 이와테 현의 지사를 지낸 마스다 히로야 씨가 이끈 운동으로, 다른 지역..

시읽는기쁨 2013.08.23

거짓말 / 예브게니 옙투셴코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천국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이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아이들은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네. 아이들도 인간이거든 아이들에게 숱한 어려움에 대해 말해주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히 보게 해 줘야 하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장애와 난관에 대해 말해주게 마주치게 될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해주게 지옥 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려주게 행복의 대가를 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거짓말 /..

시읽는기쁨 2013.07.08

장난감 / 타고르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아침 나절을 저렇게 보잘것없이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을 하시네!'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이와 은덩이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감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 유희를 하고..

시읽는기쁨 2013.05.16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틈이 난 벽에 핀 꽃 그 갈라진 틈에서 널 뽑았다 여기, 뿌리째,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 - 하지만 너는 무엇인지 뿌리째, 전부,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신(神)과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련만 - 틈이 난 벽에 핀 꽃 / 알프레드 테니슨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 - 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 Flower in the Crannied Wall / Alfred Tenn..

시읽는기쁨 2012.11.24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도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추억의 ..

시읽는기쁨 2012.04.03

아침 / 호치민

감옥 벽 위로 해가 떠올라 감옥 문을 비추는구나 감옥 안은 아직 깜깜하지만 바깥에는 땅 위로 햇살이 퍼지네 일어나서 모두 경쟁하듯 이를 잡고 종이 여덟 번 치면 아침 식사 시간 형제여, 나온 것은 다 먹게나 이제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 아침 / 호치민 호치민[胡志明]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중이던 1942년에 국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길에 경찰에 체포된다. 호치민은 중국 감옥 안에 있는 동안 를 썼는데 그 안에 그가 지은 시가 전한다. 유교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호치민은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문주의자며 시인이기도 했다. 이 시를 보면 그가 낙관주의자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어떤 경우에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

시읽는기쁨 2012.02.24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 바츨라프 하벨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 바츨라프 하벨 홍세화 씨가 이 시를 인용하며 진보신당 당 대표에 출마하는 변을 밝혔다. 그분이 당 대표에까지 나서게 된 것이 의외이긴 하지만 작금의..

시읽는기쁨 2011.11.14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도우미의 물음에 난처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잘못됐다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웃을 뿐이었습니다 - 아흔여섯의 나 / 시바타 도요 시바타 도요, 1911년에 태어났으니 백 세를 넘었다. 아흔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해서 산케이 신문의 '아침의 시'에 입선되었다. 그리고 시집까지 내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에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백 세가 넘어서도 시를 쓸 수 있다는 건보통 축복이 아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싱그러운 감성이 유지된다는 게 기적처럼 보인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한 관심이 없으면 시는 나오지 않는다. TV에도 가끔 장수 노인이 나오지만 아흔이 넘은 나이에 시를 쓴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

시읽는기쁨 2011.11.06

평온한 삶 / 포프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이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 평온한 삶 / 알렉산더 포프 Happy the man whose wish and care A few paternal..

시읽는기쁨 2011.07.0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사람은 누구든 섬은 아니리, 온전한 자체로서. 각각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리라. 만일 모래톱도 그리되면 마찬가지. 마찬가지리라 만일 그대의 땅이나 친구가 그리되어도. 어느 사람의 죽음이 나를 작게 만드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알려고 보내지 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시읽는기쁨 2011.03.18

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지나치게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이 미워서 혁명을 해서는 안된다 그저 그들의 눈에 침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을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을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쪽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건 얼마나 재미있는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작은 귀족이 되는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우리가 이제껏 너무 많이 해온 게 아닌가 노동을 폐지하자,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

시읽는기쁨 2010.02.05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힘든 일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오늘이 슬프다 해도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것은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옛날 이발소에는 돼지 그림에 이 시의 첫 구절이 적힌 액자가 의례 걸려 있었다. 우리 세대라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시가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글귀가 러시아 시인이 쓴 유명한 시의 한 부분인 줄 전혀 몰랐다. 푸슈킨이라는 이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십대 때는 이 시가 왠지 싫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싼 위로를 준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고뇌하던 시기, 그런 가..

시읽는기쁨 2009.12.05

친구가 / 이시카와 도쿠보쿠

친구가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엔 꽃 사들고 돌아와 아내와 즐겼노라 이시카와 도쿠보쿠(1886-1912). 26세로 요절한 천재 시인. 짧은 생애동안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폐결핵으로 죽은 불행한 시인. 시인은 요즈음 말로 하면 ‘루저’라고 불렸을까? 아내마저 생활고로 집을 나간 뒤 시인은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와 아내 역시 시인과 비슷한 시기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남은 두 딸도 어린 나이에 모두 폐결핵으로 죽는다. 이 시에서는 고단한 현실을 초월하려는 자족의 경지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인생의 본원적인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승화된 정신만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현실의 벽 같은 것. 이시카와는 짧은 단가(短歌)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일본의 국민시인이다. 시인 백석(白石)..

시읽는기쁨 2009.11.26

가을날 /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가을날 / R. M.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 이름을 가만히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시심(詩心)이 저절로 샘솟지 않는가. 릴케야말로 가장 시인다운 이름을 가진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그저 그가 좋았던 건 순전히 ..

시읽는기쁨 2009.11.05

이니스프리 호수섬 / 예이츠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 진흙과 욋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고랑 콩밭 일구며 꿀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거기서 천천히 내려오는 평화를 누리리라 안개 아련히 피어나는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녁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별빛, 한낮엔 보랏빛 꽃들의 향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그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항상 호숫가에 철썩이는 물결의 낮은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가슴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 이니스프리 호수섬 / 예이츠 I will arise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

시읽는기쁨 2008.11.26

청춘 /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세이든 십육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

시읽는기쁨 2008.07.18

묻는다 / 휴틴

땅에게 묻는다 :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존경하지. 물에게 묻는다 :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채워주지. 풀에게 묻는다 : 풀은 풀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짜여들며 지평선을 만들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 묻는다 / 휴틴 휴틴은 현재 하노이에 살고 있는 베트남 시인이라고 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는데, 이념의 차이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경험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만물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지 않은가. 인간만큼 욕심 많고 그래서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욕심 뿐만이 ..

시읽는기쁨 2008.06.11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 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

시읽는기쁨 2007.12.03

저녁놀 / 요시노 히로시

항상 그렇듯이 전철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젊은이와 아가씨가 앉아 있고 노인은 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허둥지둥 노인이 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옆쪽 틈새에서 밀려왔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노인은 다음 역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난다는 말 그대로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또 밀려왔다 가엽게도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다음 역도 그 다음 역도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긴장된 몸은 굳어졌고...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몸을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고 아..

시읽는기쁨 2007.12.01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옛날에는 무슨 행사..

시읽는기쁨 2007.06.15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세상에 대한 절망이 마음속에 자라날 때 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어찌될까 두려워 한밤중 아주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걸어가 몸을 누이네, 야생오리가 물 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려놓은 그곳에, 큰왜가리가 사는 그곳에 나는 야생 피조물들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네 그들은 슬픔을 앞질러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나는 고요한 물의 존재에게로 가네 그리고 느낀다네. 내 머리 위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제 반짝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세상의 은총 속에 쉬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지네 -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웬델 베리(Wendell Berry)라는 이름은 환경서적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접했지만 그분의 저서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분이 소설가며 시인으로 많은..

시읽는기쁨 2007.04.02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William Henry Davies(1871-1940)는 영국의 '걸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시읽는기쁨 2007.02.23

기탄잘리 39 / 타고르

가슴이 굳어 바싹 마를 때엔 자비의 소나기와 더불어 오십시오 우아함이 생활에서 잃어질 때엔 드높은 노랫소리 더불어 오십시오 시끄러운 일이 사방에서 극성 떨며 나를 가둬버릴 때엔 말없는 주여 님의 평화와 휴식을 가지고 내게로 오십시오 구석에 갇히어서 내 거지 같은 마음이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엔 왕이여 이 문을 부수어 여시고는 왕의 위의를 갖추고 오십시오 욕망이 마음을 망상과 먼지로 눈멀게 할 땐 오, 거룩한 이여, 깨어 있는 자여 님의 빛과 우레를 가지고 오십시오 - 기탄잘리 39 / 타고르 103 편의 노래로 된 기탄잘리(Gitanjali)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이라고 한다.신을 향한 인간의 순수한 종교심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 타고르는 힌두교 신자이지만 그가 노래한 신이 우리와 다른..

시읽는기쁨 2007.02.11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 프로스트

이 숲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 그는 내가 여기 멈추어 서서 눈 덮인 자기 숲을 보는지 모를 거야 내 작은 말도 이상한가 봐 숲과 꽁꽁 언 호수 사이 농가 없는 이곳에 멈춰 서다니 그것도 올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마구의 종을 흔들어 그는 뭐 착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묻는 듯 그밖에 다른 소리는 잔잔한 바람소리와 떨어지는 눈송이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어 하지만 난 아직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 로버트 프로스트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

시읽는기쁨 2006.12.28

담장 고치기 / 로버트 프로스트

무엇인가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보다. 그것이 담장 밑의 땅을 얼어 부풀게 하여 위에 있는 둥근 돌들을 햇빛 속에서 떨어뜨린다. 그리하여 거기에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만한 틈이 생긴다. 사냥꾼들도 담장을 부순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서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부숴놓은 담장을 수선했었다. 그래도 그들은 숨어있는 토끼를 몰아내어 짖어대는 개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내가 말하는 틈이란 그것이 생기는 것을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는데 봄철 수선기가 되면 나타나는 틈을 말한다. 나는 언덕 너머 이웃 사람에게 알린다. 그리고 하루 만나서 경계를 걸으며 그 경계에 무너진 담을 다시 쌓는다. 우리는 담장을 중간에 두고 걸어간다. 자기편에 굴러 떨어진 돌들을 주워 올린다. 어떤 것들은 빵떡 같고 어떤 ..

시읽는기쁨 2006.10.31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 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 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좇을 수 있지만 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의 형제지만 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 나는 숲 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 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험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시읽는기쁨 2006.10.09

언젠가는 / 제임스 카바노

언젠가는 떠나련다 자유로워지련다 무미건조한 것들을 지나 안전한 밋밋함을 떠나 연락처도 남기지 않으련다 황량한 광야를 가로질러 그곳에 세상을 떨구기 위해 아무런 근심 없이 떠돌련다 한가한 지도책처럼 - 언젠가는(Some Day)/ 제임스 카바노(James Kavanaugh) 새장 속에 새들이 있다. 그들은 새장 안에서 태어나 새장 안에서 죽는다. 그들은 새장 안 좁은 공간이 온세계라 알고 있다. 그중의 한 마리가 새장 밖의 세계를 꿈꾼다. 자유와 해방을 꿈꾼다.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를 만든 목적은 아니다.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할 때 배는 살아있다. 이 시를 읽으면 또한 갈매기 조나단도 연상된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보다는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자주적 사..

시읽는기쁨 2006.09.28

왜 / 야마오 산세이

왜 너는 도쿄 대학에 갈 생각을 않느냐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물었다 저는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키에르케고르 전집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시험 공부할 사이가 없었다 왜 너는 대학을 그만 두냐고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물었다 나는 방자하게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생각이 없었고 졸업장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고 중학교만 졸업한 아버지의 길에도 거스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왜 너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냐고 올 삼월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물었다 그 친구는 깊은 연민과 힘을 가지고 평생을 사랑 하나로 일관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나 다 중심이고 또 거기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정부 따위는 필요없는 게 아니냐고 대답하..

시읽는기쁨 2006.09.09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비에도 지지 않고..

시읽는기쁨 2006.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