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론 15

장자[22]

어느 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된 것이 기뻤고 흔쾌히 스스로 나비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장주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 깨어나자 틀림없이 다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분별이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사물의 탈바꿈[物化]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昔者 莊周夢爲胡蝶 허허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遽遽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 齊物論 15 앞에서도 꿈 이야기가 나왔는데 장자는 여기서도 우리의 삶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나비가 된 꿈도 깨어나서야 알았듯,내가 지금 나로살아가는 현실도 다른 나비가 꾸는 꿈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그것..

삶의나침반 2008.05.25

장자[21]

그늘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금방 당신은 걷다가 지금은 그치고 금방 앉았다가 지금은 일어섰소. 어찌 그대는 자주(自主)하는 지조가 없는가요?" 그림자가 답했다. "나는 나와 흡사한 모상이 있어서 그럴까요? 또 나를 닮은 모상도 그의 모상 때문에 그럴까요? 나는 뱀 허물이나 매미 허물을 닮아서 그럴까요? 어찌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겠으며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까요?" 罔兩問景 囊子行今子止 囊子坐今子起 何其無特操與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부조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 齊物論 14 과학 용어로는 '罔兩'은 반 그림자, '景'은 본 그림자를 뜻한다.반 그림자는 광원이 점이 아니라 일정한 크기가 있을 때 본 그림자 둘레에 생긴다. 그러니 반 그림자는 본 그림자를 따라 움직..

삶의나침반 2008.05.18

장자[20]

자연의 분계에 화합하고 혼돈의 무극에 따르는 것이 생을 다하는 방법일 것이오. 무엇을 자연의 분계에 화합한다고 말하는 것이오? 시(是)는 시가 아니요, 연(然)은 연이 아니라고 말하겠소. 시가 과연 시라면 시는 불시(不是)와 다를 것이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없소. 연이 과연 연이러면 연은 불연(不然)과 다를 것이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없소. 세월을 잊고 의리를 잊고 경계가 없는 대로 나아가시오! 그래서 경계가 없는 경지에 머무르시오! 和之以天倪 因之以曼衍 所以窮年也 何謂和之以天倪 曰 是不是 然不然 是若果是也 則是之異乎不是也 亦無辯 然若果然也 則然之異乎不然也 亦無辯 忘年忘義 振於無竟 故寓諸無竟 - 齊物論 13 시(是)와 비(非)의 세계 속에서 시와 비를 초월하며 살기는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

삶의나침반 2008.05.12

장자[19]

꿈속에서 즐겁게 술 먹은 자가 아침에는 통곡을 하고 꿈속에서 통곡을 한 자가 아침에는 명랑한 기분으로 사냥을 떠난다. 방금 그가 꿈을 꾸고 있었으나 그것이 꿈인 것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꿈을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인 것을 안다. 역시 큰 깨달음이 있은 후에야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 큰 꿈인 것을!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 而後知此 其大夢也 - 齊物論 12 장자는 우리 인생은 한 바탕의 꿈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인생이 꿈인 것을 아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나야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눈 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꿈이..

삶의나침반 2008.05.03

장자[18]

만약 일월 곁에서 우주를 품고 다스림이 입술처럼 부합하고 혼돈에 맡겨두고, 노예를 돕고 존중한다면 어떻겠나? 세상은 모두가 안달인데 성인은 우둔하며 삼만세를 한결같이 순수를 이루어 만물은 모두 자연 그대로 감싸고 덮어준다면 어떻겠나? 奚旁日月挾宇宙 爲其문合 置其滑혼以隸相尊 衆人役役聖人愚芚 參萬歲而一成純 萬物盡然而以是相蘊 - 齊物論 11 구작자(瞿鵲子)의 질문에 대하여 장오자(長梧子)가 성인의 경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모든 종교나 가르침에서는 이상적으로 숭앙하는 인간형이 있다. 노장에서의 성인은 무위(無爲)가 내면화된 초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을 벗어나 있는 은둔자는 아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세속에서 도피하여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나침반 2008.04.26

장자[17]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이 걸려 죽을 수도 있으나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오르면 무서워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이 셋 중에서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안다고 생각하는가? 民濕寢則腰疾偏死 鰍然乎哉 木處則췌慄恂懼 猿후然乎哉 三者孰知正處 - 齊物論 10 장자는 인간 중심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는 우열이 없다. 선악, 미추, 귀천의 구분은 인간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옛 사람들이 목숨까지 걸었던 도덕이니 인의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사회나 문화, 역사적 환경이 만든 임의적인 규범에 불과할 뿐이다. 장자의 관점은 철저히 상대적이며, 사물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장자가 바른 거처, 바른 맛, 바른 아름다움에 대해서 예를 들며 사람..

삶의나침반 2008.04.22

장자[16]

큰 도는 일컬을 수 없고 큰 이론은 말할 수 없으며 큰 어짊은 어질다 하지 않으며 큰 고결함은 겸양이라 하지 않으며 큰 용기는 용감하다 하지 않는다. 大道不稱 大辯不言 大仁不仁 大廉不겸 大勇不기 - 齊物論 9 장자를 통해 진정한 표현, 사랑, 겸손, 용기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장자는 진리의 역설을 강조한다. 노자가 말한 '上德不德' '天地不仁'과 같은 의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무척 말이 많아졌다. 말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 주장이나 고집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 내면의 허기짐이나 결핍, 또는 공허함이드러나는 것에다름 아니다. 드러나는 것은 좋지만 그걸 말로 위장하거나 가식하는 것이 문제다. 장자가 말하는 지인(至人)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내 생각이나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

삶의나침반 2008.04.13

장자[15]

천하는 가을철의 가늘어진 털끝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하면 태산은 더욱 작은 것이며, 어려서 죽은 갓난아기보다 오래 산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백 살을 살았던 팽조도 일찍 죽은 것이다. 천지와 내가 함께 태어났다면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이다.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泰山爲小 莫壽於상子 而彭祖爲夭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 齊物論 8 앞에서 장자는 옛사람의 지극한 지혜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분별과 선택을 초월하는 세계다.삶과 죽음, 낮과 밤, 좋음과 싫음, 취함과 버림이 반복되는 이분적 현상들에서 모든 것이 구별 없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체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는 관점에 따라서 사물이나 현상이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사물이 어떤 ..

삶의나침반 2008.04.06

장자[14]

옛사람들은 지혜가 지극한 데가 있었다.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처음부터 사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지극하고 극진하여 더 보탤 수가 없다. 그다음은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너와 나'의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음은 경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시비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비가 밝아짐으로써 도가 훼손되었고 도가 훼손됨으로써 사랑(유묵의 仁義와 兼愛)이 생긴 것이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盡矣 不可以可矣 其次以爲有物矣 而未始有封也 其次以爲有封焉 而未始有是非也 是非之彰也 道之所以훼?也 道之所以? 愛之所以成 - 齊物論 7 우리들 대개는 시비와 분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무엇을 바라고 구하면서, 그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

삶의나침반 2008.03.30

장자[13]

원숭이 주인이 아침 먹이로 알밤을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성을 냈다. 이에 주인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狙公賦서 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 朝四而暮三 衆狙皆悅 - 齊物論 6 화 내는 원숭이를 보고 어리석다고 비웃지만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더 심하다. 장자가 말하려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리라. 우리는 대개 눈 앞의 이해득실에 얽매여 사물의 깊은 측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 따라 일희일비한다. 분별과 시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의 주의나 관념, 종교, 이데올로기에 편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보다, 아침에..

삶의나침반 2008.03.23

장자[12]

사물은 본래 그런 것이고, 본래 옳은 것이다. 사물은 그렇지 않은 것이 없고,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고의적인 인위로 대립시킨 것이 들보와 기둥, 문둥이와 서시의 경우다. 우원하고 괴이하지만 도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 그것을 나누어 분별하는 것은 다듬어 다스리는 것이고 그 다듬어 다스리는 것은 훼손하는 것이다. 무릇 사물은 다듬어 훼손함이 없으면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 오직 달인만이 통함을 알고 하나 되게 한다.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故爲是擧 정與楹 라與西施 恢궤휼怪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唯達者知通爲一 - 齊物論 5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일 솜씨가 어느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소개하는 프로인데,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재주를 ..

삶의나침반 2008.03.16

장자[11]

저것과 이것을 패거리 짓지 않는 것이 도의 추뉴(樞紐)라고 말한다. 추뉴가 고리의 중앙을 잡기 시작하면 응변이 무궁하다. 옳다는 것도 하나같이 끝이 없고 그르다는 것도 하나같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자연의 명증함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 莫若以明 - 齊物論 4 세상을 사는 데 옳고 그름의 구별이 없을 수가 없지만 어느 한 쪽에 매이는 것이 늘 병폐다. 거기서 시비와 분별이 생기고, 너와 나의 구분이 일어난다. 성인이 보는 눈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이 도추(道樞)다. 앞에 나온 표현으로는 '성인은 따르는 것이 없으며'[聖人不由], '자연에 비추어 본다..

삶의나침반 2008.03.09

장자[10]

한번 육체를 받아 태어났으면 죽지 않는 한 다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물질과 서로 적대하고 또는 서로 따르면서 그칠 줄 모르고 달리는 말과 같으니 슬픈 일이 아닌가? 죽을 때까지 발버둥 치지만 공을 이루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 늙어가면서 돌아갈 곳을 모른다면 슬픈 일이 아닌가? 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盡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終身役役 而不見其成功 날然疲役 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 齊物論 3 장자의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성경의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오로의 탄식이 떠오른다.선을 바라는 마음과 악에 끌리는 경향 사이의 갈등을 설명하며 바오로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탄식했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절절히 인식한 뒤라야 우리는 ..

삶의나침반 2008.02.21

장자[9]

이러한 정욕이 아니면 내가 없고 내가 아니면 정욕도 나올 곳이 없다. 이것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키는 자를 알지 못한다. 만약 진짜로 주재자가 있을 지라도 별다른 조짐을 알아차릴 수 없다. 非彼無我 非我無所取也 是亦近矣 而不知其所爲使 若有眞宰 而特不得其朕 - 齊物論 2 장자 사상이 여타 중국 철학과 다른 점이 제물론에 잘 나타나 있다. 장자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세계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인간의 희노애락, 걱정과 한탄, 변덕과 공포, 아첨과 방종, 정욕과 교태 등은 당시 춘추전국 시대에 살았던 백성들의 고충으로 읽힌다.위정자들이 정치를 잘 함으로써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 점이 유가와 도가가 갈라서는 지점인 것 ..

삶의나침반 2008.02.15

장자[8]

지금 나는 내 몸을 잃었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아마 너는 사람의 음악은 듣지만 땅의 음악은 듣지 못하고 땅의 음악은 듣지만 하늘의 음악은 듣지 못하는 것 같다.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汝聞人뢰 而未聞地뢰 汝聞地뢰 而未聞天뢰夫 - 齊物論 1 이것은 남곽(南郭)의 자기가 제자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吾喪我'는 장자 전체를 꿰뚫는 핵심 문장이다. 비단 장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나 깨달음의 가르침에서의 핵심 의미이기도 하다. 앞의 '吾'와 뒤의 '我'는 서로 다른 '나'이다. '吾'가 '나'라는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我'는 그 중에서도 초월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기세춘 선생은 이 '我'를 '내 몸'이라고 번역했는데, 단순히 육체적인 나를 뜻하지는 않는 것이라 본다. 나는 이것을 육(..

삶의나침반 2008.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