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76

H 선배를 추모함

"가장 선한 상인보다는 가장 악한 공무원이 더 선하고, 가장 선한 공무원보다는 가장 악한 교사가 더 선하다." 사범대학에 입학해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이다. 당시에 너무 의아하게 들린 발언이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사실이지도 않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료 교사들을 만났다. 교사 집단이라고 해서 더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교사들이 다른 직업의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도 있다. 내가 만난 동료 교사들을 돌아볼 때 서너 명의 존..

길위의단상 2023.11.15

40년

40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 후배 셋을 만났다. 우연히 한 사람과 통화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다른 둘과도 연결이 되었다. 마침 셋 모두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내가 먼저 만나보자고 했다. 우리는 1981년에 M중학교에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개설 학교인지라 신입생밖에 없어 교직원이 30명 정도 된 단촐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나는 두 번째 학교였지만 셋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첫 발령이었다. 싱그러웠던 20대의, 순수했던 꿈과 열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얼굴에서 중첩된 40년 세월의 아득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을 공유하면서 신기하게도 이내 그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40년의 긴 시간도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듯했다. 내가 가졌던 ..

길위의단상 2023.09.01

가슴에 박힌 가시들

학폭을 소재로 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인 모양이다. 드라마가 일부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소환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복수극에 통쾌해하는 것 같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녔던 60년대는 학교 폭력이나 왕따가 거의 없었다. 힘깨나 쓰는 치들은 저희들끼리 놀았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학폭이나 왕따라는 못된 문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학폭과 함께 교폭(교사 폭력)에 대한 비난 글도 많이 올라온다. 그 시절에 교사한테서 억울한 체벌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개중에는 교사 실명을 공개하며 적의를 드러내는 글도 있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당시의 교사들은 상당수가 처벌 대상이 되고 감옥에 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매가 아닌 교사의 감정을 못 이긴 채 어린..

참살이의꿈 2023.03.21

한 장의 사진(31)

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박용도 선생님은 면목중학교에서 만났다. 그때 면목중학교는 막 개설된 학교였는데 형님은 개설요원으로 미리 발령받아 새 학교가 문을 여는 준비를 맡았고, 나는 3월의 정규 발령으로 갔다. 개설 학교의 첫 해는 학생이 1학년밖에 없으니 선생이라야 30명 남짓이어서 가족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개설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오래가는 편이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다. 지금은 다들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면목중학교는 첫해에 신입생이 입학했지만 교사(校舍)가 완성되지 않아 청량중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가을이 되어서 장안동의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 면목동에 없는 면목중학교여서 면목이 없다고 우리는 농담을 했다. 형님은 체육을 전공했고 학교 업무에서도 중..

길위의단상 2022.04.06

한 장의 사진(30)

3월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때다. 학생이나 선생 모두 새로운 만남 앞에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본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중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가 나에게는 3월이었다. 아이들은 봄 방학을 마치고 3월에 개학을 하면 새 반이 편성되고 담임을 배정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담임이 될지 제일 관심사일 것이다. 지금 손주를 봐도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걸 본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3월 첫날 전체 조회가 열린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이 담임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40여 년 전인 1979년 - 아니면 1980년일지도 - Y여중에 근무할 때 운동장에 전체 학생이 모인 가운..

길위의단상 2022.03.06

무거운 밤

어설프게 술을 마신 뒤에는 잠을 설친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온갖 꿈이 난무한다. 꿈은 대체로 어둡고 무겁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어도 영 기분이 씁쓸하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어제는 직장과 군대 꿈에 시달렸다. 둘 모두에서 나는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나온다. 직장은 학교 교무실과 교실이 주무대다. 늘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게 늦거나 교실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시간표를 착각해서 아예 수업을 빼먹기도 한다. 교실에 들어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서툴다. 수업 준비를 안 해서 무엇을 가르칠지 몰라 진땀을 흘린다. 나는 교무실 동료나 교실의 아이들한테서나 왕따 신세다. 35년 동안 한 선생 노릇이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길래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따위 꿈에 계속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교직이 적..

참살이의꿈 2021.09.04

한 장의 사진(27)

40년 전쯤 여름방학 때 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담삼봉으로 캠핑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학교에도 교복 자율화 등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 정권은 교과목 외에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했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G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은 내가 만난 교장 중 가장 특이하고 개성이 있었다. 고시 출신으로 문교부에서 행정 관료로 지내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상관과 의견 충돌로 좌천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고집 세고 자기 소신이 강했다. 학교 점검차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참관도 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사나 귀찮고 긴장이 된다. 맨손 수업..

길위의단상 2021.07.21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1971년에 나왔으니 올해로 50년이 된다. '아침이슬'은 긴 세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곡 중 하나다. 반정부 집회에서 많이 불려진 탓인지 70년대 중반에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이 좋다. '아침이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만난 후배 P 여선생이다. P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남달랐다. 다른 신임교사들은 일찍 나와 교무회의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P만 보이지 않았다. 교감이 신임교사 소개를 하려는 찰나 교무실 문이 꽈당 열리며 등산복에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P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

길위의단상 2021.06.25

3월 2일

등교하는 아이들을 오랜만에 본다. 오늘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다. 마스크를 쓴 채 느릿느릿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주로 재가 학습을 했으니 교실에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일이 낯설지 모른다. 3월 2일이 스트레스인 건 교사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레임보다 또 어떻게 일 년을 티격태격하며 보낼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의 3월 2일은 늘 그렇게 납덩이처럼 무거운 심정으로 시작했다. "그래, 다섯 달만 버티면 방학이야."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30년 넘게 교직에 있었지만 내 체질에는 맞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늘 사람과 접촉해야 해서 나 같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서툰 입장에서는 가혹한 직업..

길위의단상 2021.03.02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시인의 마을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는 세 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넓은 평원의 단조로운 풍경이 질리도록 펼쳐졌다. 다들 눈을 감은 채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를 운전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레이어에 꽂았다. 정겨운 우리 가요의 멜로디가 독일 버스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독일에 연수를 온 지 두 주일째, 뒤에서 소곤거리며 잡담이 들리던 버스 안이 숙연해졌다. 몇 곡의 트로트가 지나가고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이 나왔을 때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노래 분위기와 당시 상황이 어쩜 그리 절묘하게 맞았는지 모르겠다. 어울리지 않게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주리오 누가 내 마음의 위안 돼주리오 ..

참살이의꿈 2020.05.19

35년 된 셔츠

특별한 옷이 하나 있다. 35년 된 셔츠다. 장롱에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입고 있다. 천에는 보푸라기가 생겼고 소매 끝은 헤져서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입기에는 아직 무난하다. 오래된 만큼 편안해서 좋다. 이젠 정이 들어서 조강지처처럼 버릴 수 없다. 이 옷에 얽힌 기억이 선명하다. 35년 전인 1984년 봄, 서울 변두리에 있는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새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 학생은 몸이 가늘고 얼굴이 유난히 하얬다. 어머니 얘기로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담임이 잘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학생의 어머니가 선물한 옷이다. 셔츠 주머니에는 우산 모양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천의 감촉이 좋고 편해서 나들이..

길위의단상 2019.01.04

얼굴 흉터

내 얼굴 왼쪽 눈 옆에는 100원짜리 동전만 한 불그스름한 흉터가 있다. 20년 전 K 고등학교에 근무했을 때 생긴 것이다. 그때는 내 교직 생활 중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다. 안 하던 담임을 맡았는데 아이들과 늘 엇박자였다. 교과목 가르치는 것도 벅찬데 반에서는 연신 사고가 터지고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코드가 맞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반대로 그쪽에서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K 고등학교는 교사들 사이에 근무 희망 경쟁이 벌어지는 A급 학교였다. 학교 내에서도 서로 담임을 하려고 지저분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눈치가 빨랐으면 애초부터 담임 신청을 말았어야 했다. 한번 해 보지 뭐, 하다가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

길위의단상 2018.04.08

도대체 학교가 뭐길래

이상석 선생님의 교단일기다. 솔직히 이런 책을 읽으면 자책이 많이 된다. 선생으로서의 내 행적이 너무 후회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사랑과 열정의 부족이다. 30년 넘게 선생 시늉을 하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껴안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좋은 선생의 조건은 아이들과의 소통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을 전하는 건 그 뒤의 일이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교단에 설 때 아이들과의 사이에 늘 벽을 느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벽이었다. 그 벽을 깨뜨리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고 경력이 쌓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교육의 '교'자도 모른 채 선생 흉내를 낸 건 아닌가 싶다. 교사가 되자면 우선 ..

읽고본느낌 2016.08.17

황당한 부탁

모교에서 전화가 왔다. 제자라는 사람이 나를 찾는데 전화번호를 가르쳐줘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했더니 잠시 후 벨이 울렸다. 10여 년 전에 J고등학교에서 2학년 때 담임을 했던 제자였다. 이름을 말하는데 간신히 얼굴이 기억났다. 졸업 후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다음다음 주에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달라는 부탁이었다. 너무 황당했다. 고작 결혼식 두 주를 앞두고 느닷없이 전화로 주례 부탁이라니, 선생이 무슨 커피 자판기도 아니고 내심으로는 많이 불쾌했다. 몸 핑계를 댔더니 제자도 싹싹하게 전화를 끊었다. 주례를 부탁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 줄은 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싶다. 최소한 몇 달 정도만 미리 얘기했어도 고민을 했을 것이다...

길위의단상 2012.08.15

한강 가톨릭회에서 천진암에 가다

한강 가톨릭회에서 천진암에 갔다. 그동안 등산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천진암을 찾았지만 성지 순례로 함께 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천진암(天眞菴)은 일반적인 순교 성지와는 달리 한국 천주교가 태동한 의미 있는 장소다. 1700년대 후반에 광암 이벽(李檗)을 비롯한 학도들이 이곳에 모여 학문을 연마했다. 그중에는 서학(西學)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국에 들어왔던 천주교 교리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생적인 신앙 단체로 발전했고 한국 천주교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10대였던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이곳에서 공부했고, 이때 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권철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등이다. 이들은 천진암 공동체에서 실학 연구와 강의 외에 천주학 연구, 공동 신앙생활 실천,..

사진속일상 2011.12.13

개화산 약사사

서울 강서구 개화산에 있는 약사사(藥師寺)는 원래 이름이 개화사(開花寺)였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이 있는 걸로 보아 꽤 오래된 절로 보인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開花寺'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지금의 약사사를 한강 건너편에서 그린 것이다. 마침 전 직장 동료들과 개화산에 갈 기회가 생겨서 머리로 겸재의 그림을 떠올리며 약사사와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산이나 절의 모습은 그림과 많이 달랐고, 다만 삼층석탑은 그림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많이 변했을 법도 하다. 산세도 나무가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림에서는 개화산 바로 아래로 한강이 흐르고 있는데 지금은 한강이 멀리 후퇴해 있다. 절밑에 버드나무와 밭이 보이..

사진속일상 2011.10.15

빈 책상

사무실에 나가 마지막 짐을 쌌다. 4, 5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다녔으나 이번은 완전철수다. 짐은 생각보다 가볍다. 텅 빈 책상이 쓸쓸하다. 너무 슬퍼하지 마. 찬 바람이 잠시 스쳐간다. 35년 세월의 문이천천히 닫힌다. 안녕~ 기쁨도, 슬픔도, 미련도, 아쉬움도, 모두에게 안녕~ 사랑하는 당신, 떠나는 나를 축복해 주오. 이제는 가야 할 때, 누구나가 다 그러했듯이.... 누구나가 다 그러하듯이....

사진속일상 2011.02.15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 이형기 '이제 3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스스로 원한 것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고 허전한 마음 역시 숨길 수 없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싸웠던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도 많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좋았던 일보다는 후회되고 자책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오..

시읽는기쁨 2011.02.11

곤명 풍경

4일 저녁 8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밤 12시가 넘어 곤명(昆明)에 도착했다. 바로 호텔로 직행하여 잠을 잤는데 난방이 안 되는 방은 너무 추웠다. 곤명을 춘성(春城)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시사철 따뜻한 봄이기 때문이란다. 온화한 기후는 난방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이런 시기의 밤이면 일정 부분 추위를 감내해야 하는 것 같다. 마치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의 추위를 힘들어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러시아는 밖은 춥지만 대신 실내 난방은 무지 잘 되어 있다고 들었다. 호텔 15층에서 내려다 본 곤명은 예상 외로 큰 도시였다. 인구가 500만이 넘는다고 한다. 낡은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섞여 있어 이곳에서도 변하는 중국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물 옥상마다 가득 찬 태양전지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춘성이라는..

사진속일상 2011.01.17

운남 석림

지난 4일부터 9일까지 중국 운남에 다녀왔다. 직장 동료들과의 퇴직 기념여행이었다. 6일간이지만 출발일과 도착일을 빼면 실제는 4일 동안 곤명을 중심으로 한 운남 지역에 있었다. 운남(雲南, 윈난)은 중국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다. 베트남, 미얀마 등과 접하고 있으며, 성도는 곤명(昆明, 쿤밍)이다. 북위가 25도 쯤 되는 지역이라 사시사철 따뜻하다. 지금 기온도 5도에서 15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그런데 호텔에는 난방 시설이 안 되어 있어 잘 때는 무척 추웠다. 따뜻한 곳에서 도리어 덜덜 떨면서 잤다. 운남 석림(石林)은 곤명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족(彛族)자치현 지역이다. 옛날에 이곳은 바다였는데 2억7천만 년 전에 융기해서 육지로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해발고도는 180..

사진속일상 2011.01.10

산디과 2반

오랜만에 학교에 나왔는데 책상 위에 코팅 된 롤링페이퍼가 놓여 있다. 산디과 2반 아이들이 만든 것이다. 방학 전에 일주일 동안 병가를 내고 쉬었는데 아이들이 위로해 준다고 만든 모양이다. 그동안 남자 고등학교에만 있었기 때문에 여고생을 가르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녀공학이지만 한 반에 여학생이 2/3 정도 되기 때문에 교실은 여고 분위기가 난다. 그래서 가르치는 게 훨씬 부드럽고 아기자기하다. 특히 산업디자인과는 전공의 특성 탓인지 예쁜 아이들이 많다. 이 학교는 중학교에서 내신 60% 이내의 아이들이 들어온다. 반당 인원도 25명이다. 그래서 요사이 문제가 되는 교실 붕괴 현상이 거의 없다. 입시에 대한 부담이 적으니 아이들도 교사들도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다. 마지막 교직 생활을 아주 좋은 분위..

사진속일상 2011.01.03

용주사 범종

경기도 화성시 화산(華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주사(龍珠寺)는 1790년에 정조 임금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긴 후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신라 말기에 세워진 괄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용주사에는 국보 120호로 지정된 범종이 있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종은 겉면에 새겨놓은 조각이아름답다. 특히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을 휘날리며 날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8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인의 표정이며 잘룩한 허리선은 여전히 아름답다. 허리 부분은 육감적인 느낌마저 든다. 내 눈에만 그랬던가, 어쨌든 뛰어난 조각솜씨에 감탄하게 되는 종이다. 그리고 부원들과의 마지막 나들이,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사진속일상 2010.12.11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출발했다. 한 팀은 북한산 향로봉을 향했고, 우리는 진관사(津寬寺)에서 효자동 방향으로 둘레길을 걸었다. 직장 동료 9명이 함께 했다. 눈 때문에 출발을 많이 망설였다. 다행히 북한산 아래에 들어서니 함박눈은 그쳤다. 산의 나무들에 예쁜 눈꽃이 피었다가 이내 녹았다. 길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일부 산길의 눈은 녹지 않아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북한산 둘레길은 처음 걸어보았다. 진관사에서 효자리 입구까지 왕복 8 km 정도를 걸었는데 숲을 지나고 동네도 지나는 게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었다. ‘내시묘역길’로 불리는 구간이었다. 길에서 전 직장 동료들을 우연히 만났다. 옛 얼굴들이 반가웠다. 그분들도 북한산 둘레길 걷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밤에는 잃었던 지갑을 되찾는..

사진속일상 2010.12.09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드디어 오늘 명퇴원에 도장을 찍었다. 평생을 다닌 직장 그만 두는 게 무척 간단했다. 두 장의 종이에 인적사항 적고 도장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홀가분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그리고 뒤통수 맞을 일도 없을 것 같다. 멋지게 사직서를 던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내 결단을..

시읽는기쁨 2010.12.02

수타사 산소길과 구룡령 옛길

강원도 여행 첫날은 공작산에 있는 수타사 산소길을 걸었다. '산소길'은 강원도에서 만든 숲길 이름이다. 2018년까지 약 70개의 산소길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총 길이는 500 km 가까이 된다.수타사 산소길은 그중에서 첫 번째로 만들어진 길이다. 길은 수타사(壽陀寺)에서 시작하여 수타사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해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전체 길이는 약 4 km가 된다. 계곡 오른쪽으로 해서 올라가는 길은 부드럽고 완만한데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상대적으로 오르내림이 심하다. 수타사 계곡은 흰 암반과 바위가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길 중간 쯤에 있는 귕소는 특히 눈길이 갔다. '귕'은 소여물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굵은 나무를 길게 파내어 소여물을 담았다. 이곳의 생긴 모양이 닮아서 그..

사진속일상 2010.10.16

유니스의 정원

부원들과 꼬불꼬불 찾아간 안산의 '유니스의 정원', 내비가 없었으면 찾기가 힘들 정도로 숨어 있었다. 작은 산자락에 꾸며 놓은 정원이 예뻤고 음식맛도 괜찮았다.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주차장은 차들로 넘쳐났다. 손님들 대부분은 역시 여자들....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여자들이 더욱 좋아하게 생겼다. 가까이에 반월저수지가 있는데, 음식점 앞으로 고가철로가 지나는 게 흠이다. 그리고 옆에 레미콘 공장이 있어 트럭들이 쉴새없이 다니며 분주하다. 식당 가득한 사람들을보니 그래도 인기만점인 것 같다. 맛있는 음식 먹고, 꽃구경 하며 산책로를 걷고.... '유니스의 정원'(Eunice's Garden),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예쁘게 꾸민음식점이다.

사진속일상 2010.10.13

독방살이

독방살이를 2년 동안 하고 있다. 옆에 조교가 있지만 서로 말이 별로 없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하루 내내 몇 마디밖에 못 할 때도 있다. 다른 사무실로 마실을 가는 일도 별로 없으니 늘 혼자다. 그나마 교실에 들어가서 떠들 일이 있으니 입에 곰팡이가 생기지는 않아 다행이다. 독방살이의 결과인지 사람을 만나면 말이 많아졌다. 나는 과묵한 편이고 주로 듣는 쪽이다. 예전에는 ‘크렘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나도 말을 많이 한다. 또 마음 속 생각도 잘 드러낸다. 아마 독방살이의 외로움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말에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가 보다. 어쩌다 말 할 기회가 찾아오면 얼씨구나, 하고 떠들게 된다. 말이 많아진 나를 보고 내가 놀라기도 한다. 열심히 지껄이고 있는데 상대방은 딴..

길위의단상 2010.10.08

D-50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 싫다. 출근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납덩이를 안은 듯 무겁다.이증상은그만 둔다고 결심하고 나서부터 심해졌다. 여기 아이들이나 근무 여건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뺏겼으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이제 실제 수업해야 될 날짜가 50일밖에 남지 않았다. D-50! 일말의 아쉬움이 있을 만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 그만 두고 싶다. 오늘도, 이제 50번이야, 하고 주문을 걸고 있다. 며칠 전에는 L 선생님의 정년 퇴임식이 있었다. 정년까지 교단을 지킨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제 다음은 내 순서다. 나는 퇴임식 같은 것은 안 하고 조용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만약에 퇴..

길위의단상 2010.09.01

북한산 원효봉에 오르다

어제 오후에는 직장 동료들과 북한산에 올랐다.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마침 비가 그친 날이었다. 대신 후덥지근한 날씨여서 땀을 무척 많이 흘렸다. 나로서는 작년 가을 이후 아홉 달 만에 산에 오르는 탓이라 더 힘들었다. 일곱 명이 산행을 시작했는데 자연스레 두 팀으로 나누어져서 뒤에 처진 셋은 백운대를 포기하고 원효봉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런 거북이 산행도 재미있었다. 앞 팀이 백운대에 다녀오는 동안의 시간 여유가 있으니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고 쉬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올랐다. 더구나 평일이니 등산객도 적어 호젓했다. 느릿느릿 걸으니 작은 꽃들도 저 자주 눈에 띄었다. 산에 들어 산길을 걷는 것이 중요하지, 많이 걷고 높이 오르는 것은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은평구의 산성매표소에서..

사진속일상 201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