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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

어제는 비가 많이 내렸다. 중국으로 들어갔던 태풍 '카눈'이 서해로 빠져나오며 소멸되었으나 남아있던 비구름이 한반도를 지나간 탓이다. 시내에 볼일을 보러 나갔는데 우산을 썼지만 비로 흠뻑 젖었다. 마침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키아로스타미 사진전 를 보았다. 키아로스타니는이번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란의 영화감독인데 예술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를 보고 전시회에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이번 사진전의 주제가 '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량해 보이는 산야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의 흑백사진이 시선을 끌었다. 인생을 나타낼 때 '길'만큼 적당한 이미지도 없는 것 같다. 길은 설레임이기도 하고 덧없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꼬불꼬불 구부러지며 끝없..

읽고본느낌 2005.09.14

웰컴 투 동막골

며칠 전에 극장에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았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한국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것은 군대 있을 때 외출 나가 본 ‘겨울여자’ 이후 거의 30 년만입니다. 두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집중하며 볼 수 있었으니 한국영화도 이제 많이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어색하고 어설픈 장면들도 있었지만 크게 트집 잡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었느냐고 같이 영화를 보았던 아내에게 물었더니 ‘꽃을 꽂은 소녀’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두는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 소녀를 안고 한 동막골 주민이 “이 아이를 어찌 할까요?”하는 말이 애절하고 감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그 장면에서 눈물이 어렸습니다. ‘꽃을 꽂은 소녀’는 “아파, 아파”라고 하면서 둘러싸고..

읽고본느낌 2005.09.13

블로그 2년

오늘로 블로그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다. 블로그란 ‘웹(Web)에 쓰는 개인 일기’라는 정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라면 나는 블로그의 충실한 고객인 셈이다. 전부터 일기를 써오던 습관 그대로가 일기장에서 블로그로 바뀐 채 계속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그는 고립적인 기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한 네트워크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거기에는 정보의 공유, 상호 대화 같은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중요시되는데 그런 의미라면 나는 아직 자격 미달이다. 글쓰기 외에 다른 기능을 활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고 코멘트를 남기고 할 여유가 아직은 없다.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에 연결하는 것이 일상이 되긴 했지만 사실 내 글만 써 넣는데도 동작이 느려서 ..

길위의단상 2005.09.12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옆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시읽는기쁨 2005.09.10

'나비'의 일생

태풍 '나비'가 우리나라 남동해안과 울릉도, 그리고 일본에 큰 피해를 주고 어제 북해도 위쪽에서 소멸했다. '나비'는 올해 발생한 열네 번째 태풍으로 초대형급이어서 무척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일본으로 방향을 틀어 우리나라 전역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나비'는 가을 태풍의 전형적인 경로인 활 모양으로 휘어지며 비켜간 것이다. '나비'는 지난 달 29일에 북위 15도상 아열대 해상에서 생겨나 세력이 점점 강해졌는데 한 때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 뉴오리온즈를 쑥대밭으로 만든 초특급 허리케인인 '카트리나'에 비견될 정도였다. 중심기압이나 최대풍속은 떨어졌으나 폭풍반경은 '카트리나'보다 더 컸다. 특히 태풍의 눈이 아주 발달해 그 크기가 100km에 이르렀다. 만약 우리나라를 관통했다면 엄청난 피해..

사진속일상 2005.09.09

안심리 포플러나무

어릴 적 고향 마을 앞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은 비포장의 좁고 울퉁불퉁한 길이었는데 가끔씩 자동차가 나타나 뽀얀 먼지를 날리며 지나갈 뿐 늘 한적한 길이었다. 차 보다는 걷는 사람이 훨씬 많았고, ‘구루마’라고 불렀던 소달구지가 도리어 눈에 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도로였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도시로 통하는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신작로에는 키다리 포플러나무가 길 양쪽으로 끝없이 길게 서 있었다. 어린 우리들 둘이서 팔을 벌려도 잡히지 않을 만큼 큰 나무들이 남에서부터 북으로 약 10km에 걸쳐서 초록의 띠를 만들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우리들의 통학로였으며, 포플러나무들은 우리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여름에 포플러나무는 매미들의 집이었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들이 찰랑찰랑 흔..

천년의나무 2005.09.08

고운 하늘에 취하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참 곱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늘에 취한 하루였다. 낮에는 짬을 내어 인왕산에 올랐다. 중턱 소나무 그늘 아래 앉으니 맑게 세수를 한 서울의 초가을 풍경이 맑고 아름답다. 왼쪽이 북악산이고 가운데 멀리에 남산과 남산 타워가 보인다. 오늘은 땅도 하늘색을 닮아 날아갈 듯 가볍고 밝다. 이런 날은 모든 것을 가진 듯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저녁에는 토평의 한강변에 나갔다. 해가 지면서 하늘은 순간 순간 색채의 마술을 보여준다. 그 노을마저 사라지고 난 뒤 무채색으로 변한 하늘은 더욱 아름답다. 금성과 초생달이 나란히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아쉽게도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찍으려던 계획은 위치를 잘못 잡아서 어긋나 버렸다. 그래도 마냥 기분이..

사진속일상 2005.09.07

금성과 목성의 데이트

초저녁 남서쪽 하늘에서는 금성과 목성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숨어서 밀회를 즐기던 둘은 해가 지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두 별은 지난 2일에 가장 접근을 했다는데 어제 저녁에는 약 4도 정도 떨여져 있었다. 왼쪽 밝은 별이 금성이고, 오른쪽에 있는 약간 어두운 별이 목성이다. 이 두 별은 워낙 밝아서 도심에서라도 고개를 하늘로 돌리면 수월하게 만날 수가 있다. 금성의 남쪽 아래로는 처녀자리의 스피카도 볼 수 있었는데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석양을 보러 왔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둘만이 남은 자리, 하늘에서는 두 별이 점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하늘을 잊고 별을 잊고 사는 것이 당연시되는 요즈음인데, 그래도 가끔씩 이렇게 별을 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진속일상 2005.09.06

사는게 그런 거지

형제간의 우애도 어릴 적 얘기인가 보다. 철 없던 시절에는 같이 웃고, 뒹굴고 싸우고, 그러다가 금방 화해하고 세상에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크고 나면 어떤 때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서로간에 너무 기대가 커서일까,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특히 형제간에는 돈 문제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돈 한 푼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의 정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기 일쑤다. 웬수가 되는 것이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고이 키워놓아도 다 크고 나면 잘 난 것은 제 탓, 못 난 것은 부모 탓이다. 그래도 부모-자식 사이의 핏줄은 어짜할 수 없다고 아무리 애물단지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 아파하랴 부모는 늘 노심초사다. 우리 집안만 그럴까 하고 심각하게 ..

길위의단상 2005.09.05

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드리다. 이곳은 예전에 양화나루였던 곳으로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조 이후에는 송파나루, 한강나루와 함께 서울의 삼대 나루로 상업적 기능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절두산은 양화나루 옆에 솟아있는 높이 약 20m 되는 암벽이다. 원이름은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모양 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었는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140년 전에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형을 당해서 그 이름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는 비극의 현장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나루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

사진속일상 200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