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향기 825

노루귀

가을의 끝에서 봄의 시작을 본다. 3월..... 대기에 봄 기운이 스며들 때, 그러나 아직 산 속은 겨울이다. 그늘진 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새 생명의 싹은 보이지 않는다. 이 때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봄 소식을 전하는 첫 생명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루귀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생화이다. 나의 봄은 이 노루귀와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천마산과 소백산이다. 꽃의 크기라야 1-2cm 정도나 될까, 저렇게 여린 생명이 눈 속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은 경이롭기만 하다. 꽃색은 흰색, 연보라색, 연분홍색 등이 있다. 색깔이 너무 곱다. 그리고 줄기에는 가는 솜털이 빽빽히 나 있는데 역광으로 보면 무척 아름답다. 이 가을의 끝에서 내년 봄을 그려보는 것이 행복하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꽃들의향기 2003.11.18

억새(2)

어느 해 가을, 억새를 보러 명성산에 갔다. 맑고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에 오르는 동안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억새 사진을찍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 소리가 나면서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서 터지기 시작했다. 탱크 수 십대가 포격을 하기 시작하고 비행기까지 날아와 폭탄을 터뜨렸다. 군인들이 기동 훈련하는 한 복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온 산이 출입 통제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산에 올랐던 것이다. 전투기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온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내려왔다. 꼭 오발탄이라도 날아와 내 옆에서 터질 것 같았다. 전쟁이 나면 아마도 먼저 소리에 질려 버릴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황망히 도망치던 그때 생각이 난다.

꽃들의향기 2003.11.10

작살나무

이름도 특이하지만 열매가 색다른 나무이다. 그런데 작살이라는 이름은나무 가지가 원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모양이 작살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가을 열매가 대부분 붉은 색이나갈색 계통인데 작살나무는 밝은 보라색이다. 이 열매를 처음 보고 신기해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워낙 색깔이나 모양이특이하고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 공원 동편 호수가에 이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신혼부부 한 쌍이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면사포를 입은 신부가 이 열매를 발견하고 신기해 하며 사진사에게 물었다. "너무 이쁘다. 아저씨, 이 열매 이름이 뭐예요?" 그러자 대포같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진사 왈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 짓 하고 있겠어요?" 신부가 피식..

꽃들의향기 2003.10.31

자작나무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白石의 이 시 한 구절 때문에 나는 어느 날 자작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자작나무를 본 적도 없었지만 왠지 자작나무가 다정하게 다가온 것이다. 사진으로 본 새하얀 수피와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나뭇잎은 이름 그대로 그렇게 품위있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자작나무의 남방 한계선 아래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가 무척 귀한데 북쪽 지방에서는 땔감으로 사용한다니..... 불에 탈 때는 자작 자작하고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작나무 숲이 망망대해로 펼쳐져 있다..

꽃들의향기 2003.10.18

닭의장풀

[닭의장풀, 영주] 닭장 주위에서 잘 자란다고 해서 닭의장풀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만큼 장소 불문하고 잘 자라는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래서 소홀히 하기 쉬운 꽃이기도 하다. 그냥 보면 별 특징없어 지나치기 쉬우나 코를 꽃에 까지 갖다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이나 귀여운 꽃이다. 특히 카메라 파인더로 들여다보면그 색깔이나 모양이 무지 이쁘다. 그런데 사진은 보는 만큼 나오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내 실력 탓이니 어찌 하랴.

꽃들의향기 2003.10.14

쑥부쟁이

[쑥부쟁이, 고향집 앞] 잔돈푼 싸고 형제들과 의도 상하고 하찮은 일로 동무들과 밤새 시비도 하고 별 것 아닌 일에 불끈 주먹도 쥐고 푸른 달 빛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면서 바람도 맞고 눈 비에도 시달리는 사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망가지고 허물어져 이제 허망하게 작아지고 낮아진 토성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 꽃도 늦서리에 허옇게 빛이 바랬다 큰 슬픔 큰 아픔 하나도 없이 - 신경림 `토성` 고향집 앞 냇가 둑에는 가을이면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 올랐다. 어느 날 아침 이슬을 담은 쑥부쟁이가 아침 햇살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막 아침 세수를 끝낸 앳된 처녀의 얼굴 같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처럼 토성(土城)과 쑥부쟁이, 그것도 왠지 잘 어울릴 것만 같다. 삶의 풍파에 닳고 씻겨서 이젠 비어지고 둥글어진 ..

꽃들의향기 2003.10.07

코스모스(1)

어린 시절 고향 앞에는 신작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이 흰 먼지를 뽀얗게 달고 다녔다. 아름드리 포플러 나무들이 길 양편으로 줄지어 서 있었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길을 따라 만개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경이다. 포플러 나무는 베어져 없어져 길은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쌩쌩 달리는 차들이 무서워 나무도 꽃도 자라지 못하고 사람도 걸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토평에서 열리는 코스모스 축제에 다녀왔다. 엄청나게 넓은 코스모스 꽃밭이 펼쳐져 있었지만 추억 속의 그 옛날 코스모스 꽃길의 정취는 느끼기 힘들었다. 문명의 발달로 편리함은 얻었지만 우리는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꽃들의향기 2003.09.28

사루비아

[사루비아, 한강 둔치] `사루비아 당신은 더운 음악이어요. 한 마당 가득 서러운 가을볕 속에서 이웃 사랑으로 가슴을 씻고 피 흘리며 타고 있는 슬픔 같은 것이어요....` (안도현 님의 詩 중에서) 핏빛 붉은 색이 강렬하여 도리어 슬픈 꽃 우리 꽃은 아니지만 가을 화단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이다. 꽃잎을 따서 꽁지를 빨아먹으면 꿀맛같이 달콤했다.

꽃들의향기 2003.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