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34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시읽는기쁨 2024.02.25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영화를 먼저 보고 감동을 받아 소설을 찾아 읽었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델리아 오언스(Delia Owens)가 일흔 살에 쓴 첫 소설로 30주 넘게 아마존 1위를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이다. 작가 자신의 야생 동물을 벗 삼아 평생을 보낸 경험이 녹아 있는 소설로, 습지 소녀 카야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사랑과 갈등을 잘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무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해안가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습지 지역이다. 카야는 가정폭력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습지에서 고립되어 혼자 살아간다. 고작 일곱 살인 소녀가 살기에는 거친 환경이지만 카야는 자연의 품 안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은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가정폭력..

읽고본느낌 2023.02.20

야생 속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촉망받던 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알래스카의 야생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청년은 크리스 맥캔들리스다. 몇 년 전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를 통해 크리스를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를 읽으며 크리스가 한 행동의 이면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확실히 영상보다는 활자가 논리적이면서 맥을 짚어내는 데는 더 뛰어난 것 같다. 다큐 작가인 크라카우어의 능력인지 모르지만. 책에는 크리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소개한다. 무모한 이상주의자나 철부지 정도로 폄하하는 것 같다. 별 준비도 없이 알래스카의 거친 야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오만으로 볼 수도 있다. ..

읽고본느낌 2022.06.05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친구와 지인

"나에게 친구가 있는가?" 가끔 해 보는 자문이다. 여러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친구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관계로서의 친구라면 다들 고개가 저어진다. 인생에서 한 명의 진실된 친구를 가지는 일이 쉽지 않다. 당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거나, 산길을 같이 걷거나, 또는 학교 인연으로 만나서 옛날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임이 있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저 같은 즐길거리를 공유하는 아는 사이라고 해야 맞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관계는 아니다. 나를 성찰하게 해 주며 우정 속에서 서로 성장해 나갈 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잘 나갈 때는 ..

참살이의꿈 2021.12.15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가끔 나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을 세느라 종일을 보내지. 그러기 위해선 가지마다 기어올라 공책에 숫자를 적어야 해. 그러니 내 친구들 관점에서는 이런 말을 할 만도 해. 어리석기도 하지! 또 구름에 머리를 처박고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물론 언젠가는 포기를 하게 되지만 그때쯤이면 경이감에 반쯤은 미쳐버리지 - 무수한 잎들, 고요한 나뭇가지들, 나의 가망 없는 노력. 그 달콤하고 중요한 곳에서 나, 세상-찬양 충만한 큰 웃음 터뜨리지. -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Sometimes I spent all day trying to count the leaves on a single tree. To do this I have to climb branch by branch and wr..

시읽는기쁨 2021.08.22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가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는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한..

시읽는기쁨 2021.07.24

인투 더 와일드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문명을 박차고 나간 한 젊은이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신이 모은 돈 2만여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크리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 버린다. 영화는 'My Own Birth' 부터 'Getting Of Wisdom'까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리스는 노숙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본다. 길 위에서 만나 집시 부부나 농장의 일꾼과 우정을 나누고, 독거노인과 한동안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에 대한 충고도 듣지만 그 무엇도 크리스의 마음을 되..

읽고본느낌 2020.11.18

외톨이로 당당하게 살기

한겨레신문에서 박홍규 선생의 근황을 들었다. 선생의 삶과 글은 을 통해 여러 차례 접한 바 있다. 생태주의 실천가라 할까, 비슷하게는 윤규병, 황대권 선생 같은 분들이 떠오른다. 선생은 올해 영남대에서 정년퇴직했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경산의 시골집으로 이주한 것은 1999년이었다.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텃밭을 가꾸며 지구에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려고 했다. 머리는 집에서 깎고, 수염도 한 달에 한 번 가위로 자른다. 목욕도 자주 하지 않고 비누만 쓴다. 부인도 평생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생이 정한 땅의 소유 한계는 300평이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 사람에게 300평 정도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집과 텃밭이 부인 몫을 합해 600평이다...

참살이의꿈 2018.08.28

자연이 들려주는 말 /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 자연이 들려주는 말 / 척 로퍼 I Listen I Listen to the trees, and they say: "Stand tall and yield. Be tolerant and flexible."... I Listen to th..

시읽는기쁨 2017.05.14

나의 생명 수업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서남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성호 선생이 20여 년간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줄기에서 만난 자연의 벗들과 만나고 대화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뒷산이라고 표현한 학교 가까이 있는 산이 제일 많이 등장한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생명체가 주인공들이다. 선생의 관심은 다양하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 등 범위가 넓다. 버섯이나 오색딱따구리처럼 수개월 넘게 매달리기도 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생명을 대하는 지은이의 따스한 마음이 감동을 준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큼 사랑하느냐다. 집 앞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거기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닭의장풀에 대해 ..

읽고본느낌 2016.03.07

사람들끼리만 / 백무산

할머니께서 밭에 콩을 심으실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어 날짐승 들짐승 몫도 챙기셨다고요? 그래요, 그건 이야기 시절의 이야기지요 할머니 가신 뒤의 배곯은 산꿩이 내려와 세 알 다 쪼아먹고 멧돼지가 와서 밭을 통째 뒤집고 메뚜기가 떼로 덤비고 까치가 떼로 날고 깔따구와 여치가 떼로 습격하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한 일과 사람들이 싹쓸이로 한 일을 저들은 거꾸로 그렇게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엔 그들도 함께 둘러앉을 자리가 있었습니다 두꺼비도 까치도 온갖 미물들도 둘러앉고 산신도 용왕도 집안의 업의 눈치도 살피고 짐승들이 들을까 알곡들이 삐칠까 나무가 속상해할까 소곤소곤 입조심 하느라 이야기 속에 그들 자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가신 뒤로 세상의 이야기는 사람끼리만 사람의 말로만 떠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은 이야..

시읽는기쁨 2014.09.26

어제를 향해 걷다

가고 싶은 해외여행지 일순위가 일본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라는 섬이다. 수천 년 된 나무들이 자라는 미야노우라 산에는 수령이 7,200년이나 되는 조몬 삼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찾아뵙고 경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조몬 삼나무를 찾아가는 다큐영화 '시간의 숲'이 2년 전에 개봉되기도 했다. 그리고 야쿠시마는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 1938~2002]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마침 선생이 쓴 산문집 를 읽었다. 표지에는 선생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적혀 있다. "시인이자 농부였고 철학자이기도 했던 야마오 산세이는 졸업장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며 와세다 대학 3학년 때 학업을 접고, 1960대 후반부터 '부족'이란 이름으로 대안 문화 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읽고본느낌 2014.06.02

숲의 인문학

지은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보다가 중간쯤 읽고서야 여자인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왜 당연히 남자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되돌아 생각해 보니 이 책은 지은이가 효소 재료를 채취하고 약초를 캐러 산을 돌아다닌 이야기니 응당 남자 일이라 여겼던 것 같다. 다른 하나는 글에 있었다. 소설가 김훈이 떠오르는 간결한 단문형 문체는 여성이 쓴 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김담과 김훈, 외글자 이름도 닮았다. 누군가 생선가시 같다고 했던 이런 문체를 나는 좋아한다. 을 읽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짧은 문장의 매력에 빠졌다. 특히 사투리가 어우러진 우리말이 감칠맛을 더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다. "산뽕나무 아래서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녹두알만 한 오디들을 나뭇가지를 끌어 잡고 바로 입을 대고 따서..

읽고본느낌 2013.07.30

더 바랄 게 없는 삶

책장에서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 1938~2001)의 책 한 권을 꺼내 다시 읽어 본다. 야마오 산세이 하면 그분이 살았던 야쿠 섬과 7,200살의 조몬삼나무가 떠오른다. 에 이 나무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만나러 야쿠 섬에 가리라고 다짐했던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은 선생이 야쿠 섬에 살면서 쓴 에세이집이다. 선생은 1960년대부터 대안문화공동체 운동을 하다가 1977년에 가족과 함께 섬에 들어와 살았다. 버려진 마을을 다시 세우고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시와 글을 발표했다. 삼라만상 온갖 것이 모두 신성한 존재임을 깨닫고 지구의 미래와 희망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이었다. 을 통해 그런 선생의 생각과 삶을 살펴볼 수 있다. 가미미에 군이 배에서 일을 하다가 실수로 식칼을 바다에 떨구고..

읽고본느낌 2012.09.04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자연을 거스르면 몸이 운다 몸이 울면 마음도 아프다 아플 땐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거스르고 무리한 것들 내려놓고 비우기 힘들고 아플 땐 기본으로 돌아가기 새 힘이 차오르도록 그저 비워두고 기다리기 - 가만히 돌아가기 / 박노해 그래, 서둘지도 안달하지도 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내려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뭘 기대할 필요도 없어.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때가 되면 다 무르익어가는 거야. 세상살이 잃고 얻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아픈 상처도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낫게 될 거야. 거스르고 무리하지 않기, 비워두고 가만히 기다리기....

시읽는기쁨 2012.04.10

흐르는 강물처럼

은 송기역 시인이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이상엽이 사진을 찍은 4대강 기행의 르포르타주다. 2010년 한 해 동안 4대강 공사현장을 답사하며 파괴되는 자연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이 시대가 저지르고 있는 범죄의 고발서다. 책의 부제는 ‘우리 곁을 떠난 강,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를 내고 분노한들 이젠 대책이 없다. 4대강 사업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올 가을이면 강을 죽이는 속도전이 마무리된다고 한다.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4대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른다. 구경꾼이거나 방관자로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며 가끔은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부끄럽다. 이 책은 우리의 눈과 귀를 대신하여 처참한 상처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이 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

읽고본느낌 2011.08.27

병산습지 / 공광규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에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 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 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제비꼬리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실망했는지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갯버들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깔아놓겠지요 그러면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매화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발자국 매화꽃잎에 위에 똥을 싸 놓고서는 그걸 매화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 병산습지 / 공광규 검암습지, 마애습지, 풍산습지, 구담습지, 지보습지, ..

시읽는기쁨 2011.08.18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 이정록

갓 깨어난 새들과 시소 놀이해봤냐고 어린 나뭇가지들이 우쭐거리기 때문이다 잠든 새들 깨우지 않으려 이 악문 채 새벽바람 맞아본 적 있냐고 젊은것들이 어깨를 으쓱거리기 때문이다 겨울잠 자는 것들과는 술래잡기하지 말라고 굴참나무들이 몇 개월째 구시렁거리기 때문이다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애벌레들의 발가락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는데 꽃까지 피었으니 벌 나비들의 긴 혀를 어쩌나 가을 되면 겨드랑이 찢어질 텐데 어쩌나 어쩌나 철부지들이 열매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 허튼 한숨에 다람쥐며 청설모들이 입천장 내보이며 깔깔거리기 때문이다 딱따구리한테 열 번도 더 당하곤 목젖에 새알이 걸려 휘파람이 샌다고 틀니를 뺐다 꼈다 하는 늙다리 소나무 때문이다 딱따구리는 키스를 너무 좋아해, 나이테깨..

시읽는기쁨 2011.05.24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컹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 담고 있다 고객님 얼마나 넣어 드릴까요? 나는 L당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아본다 들꽃유로 가득이요 서둘러 주유기를 꽂고 뒤차로 간다 내 뒤 봉고는 콩기름을 주문한다 주유원이 탁탁 엉덩이를 치면 꽃향기를 내뿜으며 부릉거린다 카드전표로 가져온 꽝꽝나뭇가지에 손도장 꾹 눌러주고 출발! 손님, 내리막길은 무동력이구요, 봄은 비과세입니다. -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4대강 삽질 현장을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 차일피일 뒤로 미루기만 한다. 많이 아프고 화가 날 것 같지만 ..

시읽는기쁨 2010.06.11

지구 신발 / 함민복

너 지구 신발 신어 봤니? 맨발로 뻘에 한번 들어가 봐 말랑말랑한 뻘이 간질간질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며 금방 발에 딱 맞는 신발 한 켤레가 된다 그게 지구 신발이야 지구 신발은 까칠까칠 칠게 발에도 낭창낭창 도요새 발에도 보들보들 아이들 발에도 우락부락 어른들 발에도 다 딱 맞아 지구 신발 한번 꼭 신어보렴 - 지구 신발 / 함민복 EBS의 '세계테마기행'을 즐겨 보고 있다. 지난 주에는 알래스카편이 방송되었다. 북극권의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광이 인상적이었지만 자연을 아끼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더 감동이었다. 국립공원에는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지정 차량 외에는 운행도 금지한다. 원래 주인인 동물들을 지키고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함이다.그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읽는기쁨 2009.10.26

무탄트 메시지

호주에 ‘참사람’이라 불리는 원주민 부족이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모든 생명체가 한 형제임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우리 같은 문명인들을 ‘무탄트’라고 부른다. ‘무탄트’는 돌연변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기본구조에 내적 변화가 일어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라는 의미다. 문명의 이기를 내세워 자신의 욕망 추구를 위해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암세포와 같은 돌연변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명이라는 마취약에 취해 자신과 세상을 파멸시키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볼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혜를 말해주는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이 있다. 호주 원주민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픽션..

읽고본느낌 2009.08.17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

시읽는기쁨 2009.04.21

지구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외식을 하고 영화 '지구'를 보았다. 아내는 '맘마미아'를 보고 싶어했으나, 나는 자연 다큐멘타리가 좋아서'지구'를 선택했다. 그러나 보고 나서는 입장이 반대로 바뀌었다. 영상을 어디서 많이 보았다 싶었는데, 이 영화는 BBC에서 촬영한'살아있는 지구'라는 제목의 DVD와 내용이 중복되었기때문이다. 차라리 '맘마미아'를 보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큰 화면으로 보는 자연 다큐의 감동은 새로웠다. 화면은 지구를 북에서 남으로 훑어내려가며 웅장한 풍경과 다양한 동식물들을 보여준다.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와 남극의 오로라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동물들의 모습에서는 가슴이 아팠다. 배가 고파 바다코끼리를 공격하는 북극곰, 물을 찾아 이동하는 아프리..

읽고본느낌 2008.09.07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염소와 같이 뛰노는 하나님은 생각만 해도 귀엽고 유쾌하다. 아니 하나님은 염소를 닮아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구분도 잘 안된다.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거룩한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그 모든 것이시다. 그러나 귀여운 아..

시읽는기쁨 2008.01.04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세상에 대한 절망이 마음속에 자라날 때 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어찌될까 두려워 한밤중 아주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걸어가 몸을 누이네, 야생오리가 물 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려놓은 그곳에, 큰왜가리가 사는 그곳에 나는 야생 피조물들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네 그들은 슬픔을 앞질러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나는 고요한 물의 존재에게로 가네 그리고 느낀다네. 내 머리 위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제 반짝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세상의 은총 속에 쉬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지네 -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웬델 베리(Wendell Berry)라는 이름은 환경서적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접했지만 그분의 저서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분이 소설가며 시인으로 많은..

시읽는기쁨 2007.04.02

부전나비의 교훈

지난 꽃산행에 동행했던 Y 형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의 어느 지방에는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부전나비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있다고 한다. 부전나비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높아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단체의 지지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정치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이 단체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부전나비의 서식지를 사들여 울타리를 치고 부전나비를 더욱 번식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도리어 부전나비의 숫자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생물학자에게 그 원인을 조사케 했다. 부전나비는 마치 뻐꾸기의 탁란처럼 부화된 애벌레를 개미에게 맡겨 자라게 한다. 부전나비가 풀에 알을 까 부화하면 개미는 자기 애벌레로 알고 집으로 물고 간다. 그..

길위의단상 2007.03.03

듣기 / 연인선

마른 강아지풀도 말을 한다 노란 아카시아도 말을 한다 도시를 메운 문명의 소리에 길든 사람들 고요를 못 견뎌 통하지도 않는 말에 매달려 하루, 한달, 일년, 생을 난다 그 사이 사방 귀머거리 된 살기 바쁜 사람들 옆에서 씨앗 피며 봉오리 터지며 나무 크며 단풍 타며 낙엽 털며 자연이 소리없이 말을 한다 누가 듣지 않아도 좋은 자기만의 말을 생명의 말을 한다 그 말 듣기 얼마나 복된가 - 듣기 / 연인선 무슨 영화였던가, 해 뜨는 소리를 듣기 위해 천사들이 바닷가로 모이는 장면이있었다.우리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 청각의 한계거나, 아니면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문명의 소리에 귀 멀어 자연의 소리에는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

시읽는기쁨 2006.08.07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니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락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

시읽는기쁨 200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