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 29

오늘은 나, 내일은 너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도 우리와 비슷했다. 다만,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장의사의 주관하에 의식을 치렀다. 망자의 입안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데 필요한 노잣돈으로 동전을 넣었다. 시신은 위생 목적에서 도시 안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시내 밖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라틴어인데 우리말로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지만,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잊지말라는 문구다. 묘지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더욱 숙연해졌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 여기서 예외는 없..

참살이의꿈 2020.10.31

라틴어 수업

한동일 선생이 서강대에서 강의했던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선생에 대해서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소개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선생은 2003년에 이태리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학 석사 과정을 최우등으로 수료했고, 다음 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인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었다. 로마 로타나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법과 함께 라틴어와 기타 유럽어를 잘 구사해야 한다. 모든 과정을 마쳐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 비율은 5% 정도라고 한다. 은 간단한 라틴어 설명과 함께 라틴어를 사용한 옛 로마제국의 풍습이나 일상을 흥미롭게 소개해 준다. 겸하여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내용의 강의라면 아..

읽고본느낌 2020.10.29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것

교육 현장에 있을 때 자괴감이 컸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을 안 맡거나 보충수업을 거부하는 등 나는 고작 소극적 저항만 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아이들을 신나게 가르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도권 교육에 실망한 일부 학부모는 대안학교를 택하기도 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은 눈을 감고 실상을 외면한다.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현실을 수용하고 체념한다. 잘못된 길이란 걸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실은 비극이다. 세계에는 우리와 다른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나라도 많다. 유럽의 교육 제도, 그중에서도 독일의 교육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청소년 우울증과 자살률 1위의 지옥 나라가 ..

길위의단상 2020.10.28

소천리 느티나무

부석사 가는 길(영주시 부석면 소천6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가을이 되어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부석사까지 죽 이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한 나무로 보이지만 실제는 두 그루가 부부처럼 꼭 붙어 있다. 피부도 하나는 울퉁불퉁하고 다른 하나는 매끈한 것이 어느 쪽이 남편이고 아내인지 금방 확인 된다.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천년의나무 2020.10.27

들깨를 수확하다

어머니의 농사 사랑은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 지팡이를 짚고 가서라도 빈 밭을 놀리지 않으신다. 밭으로 가는 산길이 험해서 자식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올해는 뒷밭에 들깨 한 종류로만 놓으셨다. 300평 정도 되는데 수확은 엄두가 나지 않으셨는가 보다. 일주일 전에 여동생이 내려가서 들깨 베는 걸 도왔고, 털 때는 내가 내려갔다. 이틀 정도 예상했는데, 다행히 하루 만에 끝냈다. 다른 밭작물처럼 들깨도 올해는 수확이 시원찮았다. 경제적으로만 따진다면야 사서 먹는 게 더 이득이다. 그러나 어머니 입장은 다르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농사를 손에서 떼기도 힘들거니와, 길러서 자식 주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생존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다. 만약 집안에만 계..

사진속일상 2020.10.27

건들건들 /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 건들건들 / 이재무 C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받은 시다. "아, 그래!" 하며 잔잔한 물결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상살이 뭐 별것 있는가. 견주고, 탐내고, 다 헛된 짓거리가 아닌가. 하지만 누습에 절어 알면서도 어리석은 길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번 주의 화두는 시의 제목인 '건들건들'로 삼기로 한다. 꽃한테 농이나 걸며, 가지나 희롱하는 바..

시읽는기쁨 2020.10.24

다읽(6) - 백범일지

'다시 읽기' 여섯 번째는 다. 20년 전쯤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백범 선생의 인물됨에 크게 감명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정치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선생의 나라 사랑과 조국에 헌신한 삶을 접하고 경탄과 함께 가슴이 뛰었다.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춘 분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약 선생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도자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한 것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 잘못 끼운 단추로 인해 아직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에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국을 ..

읽고본느낌 2020.10.24

청계산길을 걷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탁구 모임에서 청계산을 걸었다. 아직 탁구장에 들어가기는 무리이고,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월 1회 모임이 당분간은 야외 걷기로 계속해야 할 것 같다. 다섯 명이 청계산입구역에서 10시에 모여 원터골로 올라갔다. 평일이지만 서울에 붙어 있는 산이라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산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떠들며 올라가다 다른 사람한테 주의를 듣기도 했다. 그 뒤부터는 얘기도 소곤소곤 나누었다. 참나무가 많은 청계산 단풍의 주색은 노랑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맛이 있다. 옥녀봉능선을 걷는 산길은 포근하고 편안했다. 양재화물터미널로 내려오는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산길 걷기를 마치고 양재역사거리로 나와 뒷시간을 가졌다. 여러 차례 선전했던 양재닭집의 치킨..

사진속일상 2020.10.23

요광리 은행나무

거인의 당당한 풍모에 압도되는 천연기념물 84호인 요광리 은행나무다. 줄기 둘레가 13m에 달하고, 수령은 1천 년이 넘는다. 원 줄기는 속이 썩어 시멘트로 채웠고, 더 이상 썩지 않도록 통기망을 설치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지치기를 해서인지 새로 이발을 한 것처럼 산뜻하다. 이 나무가 얼마나 컸던지 부러진 가지로 밥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영험한 나무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머리가 둔한 아이를 밤중에 나무 밑에 한 시간쯤 세워 두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도 있다. 또 나라에 나쁜 일이 생기면 나무가 소리를 내어 알려주고, 마을에 전염병이 돌더라도 사흘 간격으로 나무에 제를 지내면 화를 피해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이 되면 주민들은 나무 아래서 향목제를..

천년의나무 2020.10.23

가천리 느티나무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요동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다. 요동마을은 옛날에는 신거랭이, 또는 신그랭이로 불렸다. 요동마을은 전주와 금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관리와 수행원들, 장꾼,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이 쉬었다 가는 쉼터 마을이었다. 자연스레 주막이 밀집해 있었는데, 주민들이 짚신을 삼아 걸어놓으면 갈아신고 갔다 하여 '신거랭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지금은 에코 빌리지로 유명하며, 특산품은 곶감과 두부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목으로 정월 보름에는 주민이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약 500년, 높이는 25m, 줄기 둘레는 5.8m다.

천년의나무 2020.10.21

화암사와 대둔산

전주에 다녀오는 길에 완주를 지나다가 우연히 화암사(花巖寺)로 들어가는 안내 간판을 보았다. 안도현 시인이 찬탄한 바로 그 '잘 늙은 절, 화암사'라는 생각이 떠올라 핸들을 돌려 화살표를 따라 찾아갔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이런 기회가 마중 오기도 하는구나. 시인의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본다. 잘 늙은 절, 화암사 / 안도현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 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늘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

사진속일상 2020.10.21

소셜 딜레마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멘터리다.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나와 SNS의 실상과 폐해를 알려준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내용이었다. 내가 유튜브를 보게 된 건 몇 달 전부터다. 도올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세상의 모든 정보가 이 플랫폼에 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놀랐다. 포털보다는 유튜브에서 검색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유튜브를 열면 내 성향에 맞거나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제가 알아서 보여준다.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사람은 어떤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반대로 그들은 문재인을 나라를 망치는 빨갱이라고 ..

읽고본느낌 2020.10.17

마음대로 안 된다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길위의단상 2020.10.16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새침한 산새는 휙 지나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나무도 한 번 지나가는 이에게 이야기를 걸지 않는다 여러 번 걷고 가만히 보는 자에게만 보이는 길 새의 노랫소리 얽혀 있는 나무의 포옹 꽃의 향기 바람결에 스치우는 풀 그리고 걸음마다 들리는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 가만히 산을 올라보면 알 거야 같은 길도 여러 번 걸어보아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 슬기로운 등산법 / 곽은지 딱 우리 동네 뒷산에 맞는 시다. 10년 동안 살면서 제일 많이 찾은 곳이 뒷산이다. 등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서 부담이 없고 편안하다. 오르는 데 특별한 준비도 필요 없다. 운동화를 신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 늘 같은 길이어서 ..

시읽는기쁨 2020.10.15

가을물 드는 뒷산

아침 기온이 7도까지 떨어졌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뒷산의 나뭇잎도 가을물이 들어간다. 아직은 초록이 우세하지만, 지금 초록은 여름의 초록이 아니다. 깊어지고 잘 익은, 그윽한 초록이다. 체중이 한 달 전보다 2.5kg가 늘었다. 몸이 둔하고 무겁다. 뒷산길을 걷는 것도 전 같지 않다. 여름이라면 무척 헉헉댔을 것이다. 쉬엄쉬엄 가을 뒷산을 한 바퀴 돌았다. 8년 동안 쓰던 휴대폰을 바꾸었다. 수명이 다한 듯 최근 들어 자꾸 고장이 나며 말썽을 부려서다. 선생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자기들은 뭘 먹고 사느냐고 매장 직원이 투덜거렸다. 새로 산 기종은 갤럭시 A31이다. 집 앞 가게에서 37만 원에 샀다. 고급 기종은 아니지만, 렌즈 성능이 전 기계보다 향상된 게 마음에 든다. 카메라가 없을 때 대용으로..

사진속일상 2020.10.14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예수전이다. 도올 선생은 마가복음에 기반한 있는 그대로의 예수 알기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그나마 마가복음이 예수의 원형을 제일 잘 간직하고 있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한 복음서이면서 다른 복음서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을 마가복음으로, 있는 그대로 읽자는 것이 도올 선생의 주장이다. 교회에 다닐 때 마가복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의 축쇄본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이야말로 오리지널한 예수의 모습이 담긴 복음서라는 사실을 이번에 새롭게 발견했다. 선생은 이전에 를 펴냈다. 와 상통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이 책도 곧 사서 읽어볼 예정이다. 도올의 예수는 갈릴리 지평에서 민중에게 하나님 나라를..

읽고본느낌 2020.10.13

단촌리 느티나무(4)

고향집에 가까이 있는 천연기념물 나무라 고향에 내려갈 때면 들러보곤 한다. 언제 어느 때 찾아보아도 외경심을 갖게 하는 큰 어른이시다. 유감인 건 아직껏 노란 단풍이 들 때는 맞추지를 못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사계절의 모습을 모두 담아보고픈 나무 중 하나다. 이번 여름 태풍에 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 같다. 끊어진 가지는 버리지 않고 나무 밑에 고이 모셔 놓았다. 휑하니 빈 줄기 속이 세월의 깊이를 말해 준다. 나무를 보면 늙는다기보다 잘 익어가는 것 같다. 줄기가 꺾어지는 것도 완성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아닌가 싶다.

천년의나무 2020.10.12

성지(27) - 홍유한 유적지

성지 42. 홍유한 유적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인데,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분이 있었다. 경북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에 살던 홍유한(洪儒漢) 선생이시다. 선생은 어릴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던 중,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했다. 천주교의 수계 생활을 위해 1775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서 1785년 선종할 때까지 신앙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스스로 7일 중 하루를 주일로 정해 세속의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30세 이후부터는 정절의 덕을 실천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 수덕자(修德者)라는 칭호가 붙었다. 한국 천주교는 이렇듯 서학의 하나로 들어와 자발적으로 탐구, 실천해 나간 점이 특이하다...

사진속일상 2020.10.12

소수서원 은행나무

우리나라 서원에서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흔히 본다. 원래 공자는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왜 서원의 상징이 은행나무로 대체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한자로는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같은 글자다. 그렇다고 설마 학자들이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착각하지는 않았을 테고, 은행나무를 대용으로 삼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도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수령이 5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아마 소수서원이 세워질 무렵에 심어졌을 것이다. 마치 선비의 기상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간 모습이 기운찬 은행나무다.

천년의나무 2020.10.11

고향에 다녀오다

2박 3일로 고향에 다녀왔다. 늦은 추석 성묘와 퇴원 뒤 회복 중이신 어머니 문안을 겸해서였다. 동생네는 남도에 내려가 있었다.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고향 찾기를 자제했다. 가려고 하면 어머니가 극구 만류하셨다.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네에 폐가 될까 봐 어머니 생신도 집이 아니라 밖에서 모였다. 올해는 추석도 건너뛰고 이렇게 열흘 늦게 조용히 내려왔다. 어디서나 참 좋은 가을날이었다. 이번에는 짬이 나는 대로 마을과 주변을 자주 산책했다. 이웃집 친구들 넷과도 오랜만에 대면했다. 어느새 다들 일흔을 넘었거나 코앞에 두고 있다. 허허, 빈 웃음이 자꾸 나왔다. 서천 산책로와 마을 전경. 산소 가는 길. 서천 산책로에는 코스모스가 환했다. 다행히 어..

사진속일상 2020.10.11

도봉동 느티나무

도봉산 입구 광륜사(光輪寺) 앞에 있는 느티나무다. 수령은 200년 정도로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옆에 비슷한 나이의 은행나무가 있고, 인근의 도봉서원 터에는 더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다. 아마 옛날에는 이 주변에 고목들이 많았을 것 같다. 지금은 산악박물관 등 등산 관련 시설이 여럿 들어서 있다.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하느라 옹색하게 자리 잡은 느티나무가 쓸쓸해 보인다. 보호수 팻말이 있지만 눈길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차라리 자리를 좀 더 확보하고 나무 밑에 쉼터를 만들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 나무 높이는 17m, 줄기 둘레는 3.8m다.

천년의나무 2020.10.08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 햇살의 말씀 / 공광규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20.10.07

도봉산에 도전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등산이 너무 뜸했다. 주로 뒷산길만 걸었지 500m가 넘는 산을 오른 기억이 까마득하다. 아마 2년 반 전의 월출산 등산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체력 테스트 겸 도봉산을 한 번 올라보기로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가용을 몰고 가서 도봉산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료가 5분에 250원이다. 입구를 지나면 등산로는 여러 길로 갈라진다. 다락능선을 타고 포대정상으로 향하는 코스를 택했다. 다락능선을 걷다 보면 여러 조망 포인트가 나온다. 첫 번째 조망 포인트에서는 서울 동북부 지역과 그 뒤로 순하게 앉아 있는 불암산과 수락산을 볼 수 있다. 은석암을 지나고, 두 번째 조망 포인트에서는 포대능선과 망월사가 보인다. 도봉산은 평일인데도 등산객이 많다. 혼자 조용히 걷도록 놓아두지를..

사진속일상 2020.10.06

금강경[31]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군가 '여래는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 이런 모든 나에 대한 견해를 가르친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하는 참뜻을 잘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그런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참뜻을 바르게 알았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행복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는 참으로 그런 나가 아니라 그런 나라고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위 없는 깨달음에 마음 낸 님들은 있고 없는 모든 것들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깨달아서 그것들에 대해 '그것은 어떤 것이다'라는 생각을 내어서는..

삶의나침반 2020.10.05

하이쿠로 본 노년

일본노인요양협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이쿠를 모집해서 입상작을 뽑고 있다. 매년 여는 행사라고 한다. 아래는 올해의 수상작이다. 나도 이제 노년에 들고보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월을 이길 장사가 있는가. 몸과 정신이 쇠해지는 걸 지긋이 바라보며 살고 있다. 일본 노인의 심정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연상이 이상형인데 더 이상 없어 전철 개찰구 안 열려 봤더니 이거 진찰권 LED 전구 내 남은 수명으로는 다 쓰지도 못해 도쿄 올림픽 어디서 보려나 하늘인가 땅인가 이생의 미련 없다고 하지만 지진엔 도망가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손글씨 사실은 손떨림 사랑인 줄 알았건만 부정맥 펜과 종이 찾는 도중에 쓸 문장 까먹어 세 시간 기다려 진찰받은 병명 노환 의사가 갑자기 상냥해지면 불안해 만보계 절반 이..

참살이의꿈 2020.10.04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교수가 쉽게 풀이한 하이데거 철학의 해설서다. 하이데거 하면 실존철학자로만 알고 있지 그분의 사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 소로우나 동양의 선불교, 노장사상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는 전체가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과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한 문장을 보면 하이데거 철학의 대체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장 하나하나가 모두 묵직한 주제들이다. 1장, 고향 상실의 시대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대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시기와 질시 그리고 경쟁이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하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 몰라도 마음은 한없..

읽고본느낌 2020.10.03

코로나 추석

코로나로 이번 추석은 고향에서 모이지 않고 각자 지내기로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추석 차례를 주관하며 지낸 게 40년이 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걸 보니 코로나가 대단하기는 하다. 할 일이 없어진 추석날은 길 걷기에 나섰다. 문득 난설헌이 생각났고, 그곳을 목표 지점으로 정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난설헌 묘가 있다. 전날은 감정 낭비가 심했는데 황폐해진 속도 달랠 겸 느릿느릿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걸어갔다. 난설헌과 두 자식의 묘를 내려다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난설헌의 가련한 생애가 떠올라 마음이 착잡했다. 자동차들의 굉음이 이어지던 중부고속도로는 얼마 되지 않아 상행선부터 정체가 시작됐다. 묘 옆에 있는 시비(詩碑)에는 난설헌 시..

사진속일상 2020.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