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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심다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이미 시들해진 오이와 토마토를 캐내고 거름을 약간 더 넣은 다음에 모종을 심었다. 읍내에서 배추 모종 한 판을 샀는데 120여 포기가 들어있고, 또 옆집에서 주는 모종까지 더해졌으니 약 150포기는 되는 것 같다. 우리 한 집 먹을거리로는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잘 되면 도시의 주변 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을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껏 작물을 가꾼 경험으로 볼 때 맛있는 배추로 자라줄 것으로는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선 시간적으로 정성이 모자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서 물 주고 보살피는 것으로는 식물도 사랑 결핍증에 걸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일을 하는데 불현듯 작년의 일이 떠오른다. 작년에는 비가 오는 속에서 낙담한 가운데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배추를 심었다. 아마도 그날 찾..

참살이의꿈 2004.09.05

인왕산에 오르다

어제는 가을 하늘이 높고 파란게 너무 좋았다. 동료 셋이서 오늘 오후에 짬을 내어 뒷산을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오늘은 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다. 청명한 하늘 구경은 못했지만 대신에 산길을 걷기에는 적당한 날씨였다. 일터에서 약 10여분을 걸어가면 인왕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인왕산은 그동안 쭉 폐쇄되어 있다가 문민정부 들어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별로 높지는 않지만 사방으로 서울을조망하는데는 가장 좋은 산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산의 등산로를 따라 철조망과 초소가 있고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지만 그걸 무시한다면 가벼운 산책으로 나서기에는 알맞은 산이다. 다만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 많아서 걷기에는 불편하다. 개인적으로는 산에 오른 것이 참 오랜만이다. 작년 가을에 북한산을 찾은 후로는 처음이니 꼭 1년..

사진속일상 2004.09.03

범부채

범부채는 화려한 색깔에 어울리게 여름에 피는 꽃이다. 범부채라는 이름은 꽃의 무늬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해서 '범'이라 하고, 잎은 부채살 모양으로 퍼져 있어서 '부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꽃과 잎의 특징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꽃이름만은 누구나 잘기억한다. 나의 경우도 다른 꽃들은 이름을 익히는데 여러 번 반복 학습이 필요했지만 범부채는 단번에 기억하게 되었다. 범부채는 극동 지방에서 자라는 꽃이라는데 아직 야생 상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강이나 도로변에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화단에서 몇 번인가 보았을 뿐이다. 꽃색깔이나 잎 모양이 일반적인 우리꽃들과는 다르게보여서 처음에는 우리나라 자생화가 아니라고 지레 판단했었다. 사진은 잠실의 한강변에서 본 범부채이다. 꽃이 시원시..

꽃들의향기 2004.09.02

막내가 어학연수를 떠나다

막내가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는데 직접 중국에서 어학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를 1년 휴학하고 출국한 것이다. 지난 겨울에 배낭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준비도 하고 수속도 다 마쳤다. 그래도 장기간의 해외 생활에 대한 부담이나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는지 평상시와는 다른 낌새가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주에는 몸살도 진하게 앓았다. 나는 집안에서 아이들과 대화가 부족하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은 많건만 서로 마음을 나누는 대화는 부녀지간이건만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아내와 아이들은 아주 가까이 잘 지낸다. 모녀지간이 아니라 마치 친구 사이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질투..

사진속일상 2004.09.01

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

시읽는기쁨 2004.08.31

극단 '여의도'

70년대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선배 한 분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는데 집에 들어오지를 않은 것이다. 인품이 워낙 중후하고 동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신 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했다. 주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엉뚱한 일을 저지를 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하고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이리저리 찾아다녔지만 도대체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갔을 때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유가 궁금했지만 이상하게도 모두들 입을 닫으며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선배님 집에서도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가 며칠 지나고 나서야 대체적인 진상을 알..

길위의단상 2004.08.30

놀이터의 아이들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명랑하다. 늘 텅 비어있기만 한 아파트 단지의 작은 놀이터인데 오늘은 왠일인지 아이들로 북적댄다. 기구에 매달려 깔깔거리는 아이도 있고, 이러저리 쫒고 쫒기며 달음질치는 아이들도 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병아리들의 지저귐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이 정겨워서 절로 미소가 인다. 그러나 당연한 풍경이 이젠귀하게 느껴지는 세태가 된 것 같아 씁쓰름하기도 하다. 방과 후의 학교 운동장에도 뛰어노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인문계 고등학교쯤 되면 한낮인데도 운동장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예전 우리 때만해도 자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즘은 시분을 다투는 학생들 스케줄이 어른들보다 더 바쁘다. ..

사진속일상 2004.08.29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울지 마라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프게 흔들리는 일이다 영원히 빛나는 별을 꿈꾸지 마라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들판의 꽃들도 흔들리면서 피어나고 나침반의 바늘도 흔들리면서 제 자리를 찾아간다 별이 반짝이는 것도 흔들리기 때문이며 네가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아프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종소리도 자신을 때리며 온 마을로 퍼져 나간다 나무도 흔들리면서 자라난다

참살이의꿈 2004.08.27

꽃며느리밥풀

산길을 걷다 며느리밥풀꽃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꽃에 따르는 전설이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꽃에 '며느리' 자가 붙은 것은 다 그런 것 같다. 며느리밑씻개라는 꽃도 그렇고, 지금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며느리○○라는 꽃도그렇다. 모두다 며느리의 슬픈 신세를 꽃에 이입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여자들 대부분은혹독한 시집살이를 경험했던 것 같다. 지금 시대에야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이혼하고 뛰쳐나가 버리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여자의 경제적 능력이나사회적 인식이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확실히 진보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당연시되던 노예제가 폐지되었듯이 미래의 언젠가는 전쟁도 불법으로 규정되고 사라질 날이 오기를 기대해 ..

꽃들의향기 2004.08.26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 속 굼벵이 작은 웅뎅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그것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은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그들이 살고 있어서 -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인간족 말고 이 말에 동의할 생물은 없을 것 같다. 땅도 하늘도 침묵하고 있지만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잘 살아 보자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멸종시키며 그러고도 당당하게 큰 소리만 치고 있다. 스스로의 묘혈을 파면서도 그걸 지혜로 착각하고 있다. 천성산의 도룡뇽이..

시읽는기쁨 2004.08.24

[펌] 행복의 차이

# 1 아논드는 꿈 많은 여덟살. 가난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방글라데시의 소년. 아논드는 방글라데시어로 '희망'이란 뜻이란다. 가진 것은 없어도 두 눈에 가득 찬 푸른 하늘에 티 없는 마음을 싣고 훨훨 날 줄 아는 녀석이다. 공책과 연필도 없는 거적때기 위 수업시간 '단어'로 문장을 만들라는 선생님 말씀에 "단어야, 너는 발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많은 사람 만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니." 읊조리는 녀석이다. # 2 서울의 K는 벌써 대입 고민에 빠진 여덟살. '팰리스'에 살지만 세상에서 제일 고달프다는 대한민국의 소년. K는 부모님이 "부자 돼라"며 어느 재벌 이름 따 지어주신 것이란다. PDA와 전자사전이 갖춰진 에어컨 빵빵한 학원에서 "사슴이ООО 봅니다"에 알맞은 단어를 채워 넣으라는 선생..

길위의단상 2004.08.23

후회하면 안 돼!

서울을 떠나 시골로 거처를 옮긴 후배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는 탈서울한지 벌써 5년이 되니 이젠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집에 가 보아도 모든 것이 틀이 잡혀 있어 부러울 때가 많다. 나무들도 언제 그렇게 컸는지 처음 심었을 때는 보잘 것이 없었는데 이젠 집을 가릴 정도의 탐스런 나무로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진 전원 주택이지만 그만큼 가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들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후배가 자리잡은 곳은 마석에 있는 전원 주택 단지이다. 20필지 정도의 규모로 업자가 개발해 놓은 것인데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지어 입주했다. 대부분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단지에 들어가는 것이 원주민들의 텃세나 생소한 환경..

참살이의꿈 2004.08.22

각시원추리

작년에 이웃에서 각시원추리 몇 포기를 주길래 집 주변에 심었더니 올 여름에는 노랗게 꽃을 피웠다. 원추리는 각시원추리보다 더 진한 노란색이지만 화초로 감상하기에는 각시원추리의 노란색이 훨씬 밝고 부드러워서 보기에 좋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원추리 종류는 동양이 원산지로서 우리 조상들이 장독대나 뒤뜰에 심어 놓고 사랑해 온 꽃이라고 한다. 원추리는 한자 이름이 훤초(萱草)인데 이것이 발음하기 편하게 변하면서 원추리로 불리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노랑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색이다. 따라서 이 꽃을 집 안에 심어 놓고 바라봄으로써 집에 부귀영화를 불러들일 수 있다고 믿은 일종의 주술 신앙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추리를 심은 직접적인 이유는 남아 선호 사상에 있다고 한다. 애를 밴 부인이 이 ..

꽃들의향기 2004.08.21

아름다운 노년

'우리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중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단계에 있는 사람은 노인들이다. 나이가 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늙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어두운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세계로 차츰 접근해 가는 것, 즉 지복(至福)의 산(山) 정상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보험 회사의 광고였던가, 노부부가 건강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는 광고 사진을 보면서 저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것이 젊은 시절에 상상했던 내 노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생활은 안정되고,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며 자유롭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는데 혼돈의 젊은 시절 뒤에는 그런 평화스런 노년이 찾아오리..

길위의단상 2004.08.20

둘이서 한 마음

태풍 '메기'가 데리고 온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고 비도 간간이 내리는 날이다. 마음이 울적해서 아내와 같이 올림픽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나고 그렇게 계속 허덕거리며 언덕길을 올라가야 하는게 인생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개마루에서 잠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하는 기쁨도 있지만 그런 즐거움은 보통 오래 가지는 않는다. 산책로 옆 잔디밭에 미루나무(?)가 서 있다. 멀리서 보면 한 나무로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자라면서 마치 한 나무와 같은 수형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부부목(夫婦木)'이라고 이름붙여 놓은 나무이다. 키를 같이 맞추면서 그리고 서로 양보하는 건지 묘하게도 가운데로는 가지도 뻗지 않고 있다. 설마 인공적으로 잘라내고 ..

사진속일상 2004.08.19

그 날이 오면 /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 시를 세계..

시읽는기쁨 2004.08.15

징기스칸

조선일보가 '징기스칸'이라는 새 잡지를 만드는가 보다. 무슨 잡지를 만들든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 잡지의 창간호 광고를 보니 영 꺼림찍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다. 굵직한 글씨로 내세운 취지가 '천재에게 감사하는 잡지, 1등의 철학을 나눠 갖는 잡지, 성공한 사람이 큰 소리 치는 잡지'라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엘리트주의, 1등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구인데 성공한 사람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소리를 쳐야그들은 만족하게 되는지 솔직히 겁이 난다. 잡지 이름을 '징기스칸'이라고 정한 것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징기스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도자였습니다. 13세기 초 몽골 인구는 약 100만 명, 징기스칸은 여기서 약 15만 명의 기마군단을 징집하여 고려에서 지금의 헝가리까지 정..

길위의단상 2004.08.14

목계 나루

목계 나루터에 다녀왔다. 신경림 시인의 시 중에서도 '목계장터'는 절창의 노래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예전에 이 시를 만나고 자주 읊조리고 했는데 그래서 목계 나루터는 언젠가 가 보리라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이제야 ..

사진속일상 2004.08.13

우울에 대한 변명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용 중에서 우울증을 생물의 진화와 관련시켜 설명한 부분이 흥미가 있었다. 우울증이 진화의 단계에서 생식에 이롭게 작용한 메커니즘의 하나로 보는 특이한 관점이었다. 그렇다면 우울은 제거되어야 할 정신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종족 보존이나 개체의 생명 유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중증의 우울증은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보통 멜랑콜리라고 부를 때 그 어감이 가지는 조금은 낭만적인 느낌처럼 우울은 도리어 인생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첫째, 우울증이 과거에 이루어졌던 유익한 기능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즉 어떤 유형의 우울증은 원시적 계급 사회 형성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 집단 생활에..

읽고본느낌 2004.08.10

어느 날의 일기

두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이불과 옷들을 잔뜩 널어놓고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뿔싸, 큰 일 났구나.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가 곱게 개어서 처마 아래에 모아 놓았다. 천둥이 치기 시작하니까이웃 분이 미리 챙겨놓은 것이 틀림없다. 옆집이리라 짐작하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니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구인가?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할텐데..... 저녁에 내린 소나기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퍼붓는지 도랑에는 순간에 불어난 물이 급류를 이루고 마당에는 흙이 패이면서 물고랑이 생겼다. 물길 정리를 하러 우의를 입고 밖에 나갔지만 이내 온 몸이 젖는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물이다. 집 뒤의 공사한 ..

참살이의꿈 2004.08.09

아홉살 인생

비디오로 ‘아홉살 인생’을 보았다. 6, 70년대쯤 되는 경상도 어느 중소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이야기인데, 서울에서 우림이라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아이가 전학을 오고 그동안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해 온 여민이 우림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40대 이상의 어른들이라면 대부분 옛 추억에 잠기게 하는 내용으로 각자의 아홉살 시절을 되새겨 보게 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도 어른같은 아이들과 철없는 어른들의 대립 구도가 신경을 좀 거슬리게하는데 아이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는 꼭 모자라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대비되어 그려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60년대에 경상도 산골 지방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 학년에 두 학급씩 있었는데 유교적 전통이 강해서 그랬는지 항상 ..

읽고본느낌 2004.08.08

개망초

'개망초' - 이름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보는 대표적인 꽃이다. '망초(亡草)'라는 어감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데 거기에 접두어로 '개-'가 붙어 있으니 꽃으로서는 참 답답한 노릇이겠다. 망초는 산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이다. 키가 멀쑥하게 커 올라가서는 여러 줄기로 갈라져서 아주 작은 꽃을 피운다. 꽃은 사람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작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패망할 때 곳곳에서 이 식물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망초로 지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해석은 밭이 황폐해지면 맨 먼저 이 식물이 나타나 뒤덮는다고 해서 망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개망초는 한 눈에 보아도 망초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키고 훨씬 작고, 꽃의 크기도 달라 가늘게 방사상으로..

꽃들의향기 2004.08.04

서울의 매미

오랜만에 서울에 돌아오니 매미 소리가 제일 반긴다. 오늘 아침에는 아파트의 방충망에도 한 마리가 찾아왔다. 왠일인지 소리는 내지 않고 가만히 붙어있다. 손으로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다. 나무 대신에 철망에 매달린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서울의 매미 소리는 무척 극성스럽다. 무리가함께 울어댈 때는 마치 한꺼번에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는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특히 도로변이 심해서 자동차 소음과 경쟁이나 하려는지 너무 시끄러워서 이건 또 하나의 소음 공해라는 생각도 든다. 옛날 느티나무 아래서 땀을 식힐 때 '매앰- 매앰-'하고 울며 여름의 정취를 더하던 그 소리는 이미 아니다. 세상이 각박해지니 번성하는 매미 종류도, 매미 소리도 변해가는가 보다. 서울의 매미 소리는 차가운 금속성의..

사진속일상 2004.08.04

마가리의 밤

산속의 밤은 깊어간다. 드문드문 보이던 농가의 불빛도 밤이 깊어가면서 대부분 꺼지고 인공적인 소리와 빛은 거의 다 사라진다. 다만 띄엄띄엄 있는 동네 보안등만이 여기가 사람 사는 마을임을 지켜내려는 듯 외롭게 빛을 뿜고 있다. 이 시간이 되면 완전한 어둠과 침묵이 동네를 감싼다. 도시의 밤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밤의 모습은 일견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침묵의 밤은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다정했던 친구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때는 촛불이 어울린다. 정교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전등이 필요하지 않다. 여름밤에 촛불 아래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 창문에 어린 흐릿한 그림자는 너무나 정겹다. 창문을 열고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잔잔한 풀벌레..

참살이의꿈 2004.08.0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짙은 먹구름..

시읽는기쁨 2004.07.27

목백일홍

온통 초록 세상에서 환한 분홍빛 꽃을 피우는 나무가 목백일홍이다. 남중국이 원산지인데 정식 이름은 배롱나무이고 백일홍, 또는 나무 백일홍으로도 부른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니 이 나무가 더 많이 눈에 띈다. 한여름과 가을에 걸쳐 피어나는 꽃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불 붙은듯 뜨겁다. 목백일홍은 꽃도 눈에 확 뜨이지만나무 줄기도 특이하다. 매끈한 줄기는 손을 대보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다. 겨울에 잎이 떨어지고 나무 줄기만 남았을 때 보이는 조형미가 좋아서 마당에 이 나무를 심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 준비를 단단히 해 주라는 당부를 들었다. 사진은 덕진공원에서 만난 목백일홍이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

꽃들의향기 2004.07.26

지구촌 전염병, 우울증

이번 달 초 뉴스위크 한국판에 우울증에 대한 특집이 실렸다. 표지에는 지구가 우울증으로 찡그린 얼굴을 한 그림과 함께 '지구촌 전염병, 우울증'이란 제목이 달렸다. 선진국 국민의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제 우울증은 선, 후진국 가리지 않고 확산되어 모든 나라에서 심각하게 나타나는 전 지구적 질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동체 분화, 도덕적 확신의 붕괴, 국제 미디어에 대한 노출 증가 등의 사회적 변화로 오지의 빈곤층까지 우울증이 퍼져서 세계 전체로 볼 때 인간의 활동 능력을 앗아가는 제일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 문명이 인간에 가하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국민 소득은 높아지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의 욕망은 커지..

길위의단상 2004.07.26

덕진 연꽃

전주에 간 길에 덕진공원에 들리다. 공원 안에 있는 넓은 호수에는 마침 연꽃이 만개해서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올해는 긴 장마에 흐린 날이 계속되어 연꽃의 개체수가 적다고 하지만 그래도 외지인의 눈에는 여전히 장관으로 보인다. 하나가 주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렇게 수 많은 무리들이 어울려 만드는 아름다움도 있다. 연꽃이 주는 이미지는 역시 종교적이다. 꼭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어서가 아니라 탁한 물과 짙은 색깔의 연잎을 배경으로 솟아올라 환하게 피어난 연꽃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연꽃에서는 침범할 수 없는 경건함과 고귀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꽃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아름답고 선한 기운으로 가득한 것 같다.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수녀님과 비구니 스님..

꽃들의향기 2004.07.25

잔디 깎기

지난 여름과 올 봄 두 번에 걸쳐 잔디를 심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혼자의 힘으로 하지만 잔디를 심을 때는 가족이 도와 주어서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내가 삽으로 잔디를자르면 아이들이 나르고, 아내가 심고하는 식으로 일을 분담하며 한 것이다. 그 여파로 다리가 약한 아내가 잔디를 심은 뒤에 너무 힘주어 밟은 관계로 몇 달간 고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도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너무 힘이 들었다고 지금도 불평을 한다. 작년에 그렇게 공들여 심은 잔디였는데 그 뒤로는 전혀 돌보지 않아서 크는둥 마는둥 하더니 금년에 들어서는 비료도 주고 물도 주기적으로 뿌려 주었더니 쑥쑥 잘 자라 주었다. 길이가 20cm도 넘게 자란 것이다. 그러니 이미 깎아주어야 할 시기가 훨씬 지나 버렸는데 이제야 시간이 나서 며칠 ..

참살이의꿈 2004.07.24

장마의 끝

장마가 끝났다는데 아직 하늘은 흐리다. 가끔 햇살이 보이다가도 이내 구름으로 덮이고 짧게 비가 뿌리기도 한다. 그래도 장마가 끝났음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이번 장마는 막바지에 폭우를 쏟아붓더니 여러 곳에 비 피해를 주고 물러났다. 이곳에 오는 날은 얼마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지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로는 흙탕물로 흘러넘치고 숨가쁘게 움직이는 브러쉬로도 차창의 빗물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퍼붓더니 언제 그랬냐느듯 순간에 잦아들었다. 다행히 터에 피해는 없었다. 아마 작년같았으면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또 한번 고생했을 것이다. 그동안 땅이 다져지고 풀이 덮혀서 흙쓸림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간에 땅도 몸살을 몹시 한 것 같다. 중장비가 들어와 끊고 파헤치고 했으니 땅..

참살이의꿈 200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