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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부채

이 터와의 만남은 마을 안에 있는 S 수녀원에 피정을 온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일들이 우연이기보다는 필연적인 무엇이 있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증명을 할 수는 없다. 그런 심정적인 느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운명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탓인지도 모른다. 침묵 피정에 들어오며 가방 속에는 몇 개의 옷가지, 일용품들과 함께 책으로는 '성서'와 '겨울 부채'가 들어있었다. '겨울 부채'는 일본의 진종불교(眞宗佛敎) 승려인 키요자와 만시(1863-1903)의 짧은 종교 에세이 9편이 들어있는 소책자이다. 번역은 이현주 목사님이 했다. 불교 승려가 쓰고 개신교 목사가 번역한 책을 천주교 수녀원에 피정을 들어와서 탐독을 한 것이 별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내 신앙에..

읽고본느낌 2004.10.13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

재동 백송

지난 주말 오후에는 동료 K와 같이 종로구 재동(齋洞)에 있는 백송(白松)을 보러 갔다. 지금은 헌법재판소 구내에 속해 있는데 정문 수위실에 백송을 보러 왔다고 하니선선히 통과시켜 준다. 본관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서니 뒤편 얕은 언덕 위에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철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품위가 손상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백송은 누가 보아도 절대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흰색 줄기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동 백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는데 과히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백송은 중국 북경 부근이 원산지로 번식시키기가 까다로워 희귀한 나무이다. 중국에서 ..

천년의나무 2004.10.11

토평의 코스모스 꽃밭

서울에서 가까운 토평의 한강변에는 넓은 코스모스 꽃밭이 있다. 마침 오늘은 구리 시민의 날과 겹쳐서 강변북로와 한강 둔치에는 차와 사람들로 넘쳐났다. 철 지난 코스모스 꽃밭에는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니는 바람에 꽃들이 밟혀 죽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발길을 덜 타서 온전한 꽃밭을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늦게 씨를 뿌렸는지 싱싱한 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코스모스는 남미 원산의 외래종이지만 이미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 된지 오래다. 포플러나무가 도열한 신작로 양편으로 코스모스 꽃길이 환했던 옛날 고향 가을 풍경도 아련하다. 지금은 중부 지방 산들의 단풍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는데 가을이익어가고 있는 우리 산하는 어딜 가도 아름다운 풍..

꽃들의향기 2004.10.10

미국쑥부쟁이

암사동 한강 둔치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자연 생태 보전 지역이 있다.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고 출입 금지된지가 1년이 되는데 지금은 억새, 갈대를 비롯해서 온갖 식물들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땅이 되었다. 여기에 가 보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땅은 금방 생명으로 가득차서 생태계가 회복되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장자리를 따라 전에는 보지 못했던 흰 꽃이 군락을 지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꽃 모양은 개망초와 비슷한데 크기는 훨씬 작았으며, 올망졸망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양이 가을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이 꽃은 '미국쑥부쟁이'였다. 70년대에 꽃다발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들여왔는데 지금은 온 나라 산야에 두루 퍼져있다고 한다. 꽃이름에 '미국'이나 '서..

꽃들의향기 2004.10.09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

길위의단상 2004.10.08

이사를 하다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하다. 도시에 내 집이 없는 사람은 현대판 유목민이다. 어떨 때는 집주인과의 관계에서 서러운 일을 겪기도 한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내 집을 가질려고 애쓰는구나 하고 긍정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변화가 두려워진다. 정든 장소,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되는 것이 부담이고 스트레스다. 변화란 젊은 때는 희망이지만 나이가 들면 두려움이 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한 장소에 안주하는 대신 변화는 신선한 자극을 주고 삶의 의미를 깨우쳐 준다. 이사를 자주 할수록 생활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살림이 간소해진다. 너무나 많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이사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을 깊이..

사진속일상 2004.10.07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날씨가 참 좋지요?" 오늘은 이런 인사를 많이 주고받았다. 시리다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것일까, 서울에 나타난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도 푸르다. 너무 파래서 저 하늘에는 서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것만 같다. 파란 색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쓸쓸함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 만든 색깔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가을[秋]과 마음[心]을 합하면 쓸쓸할 수[愁]가 된다. 가을의 모든 풍경 속에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은 쓸쓸함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날은 한 일주일쯤 휴가를 받아 낯선 길로 떠나고 싶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들길과 산길을 따라 마냥 걷고만 싶다. 가을 여행은 혼자서 떠나는 것이 어울린다. 여름의 번잡스러움을 지나서 가을은 홀로 스스로에게 향하는 계절이다..

길위의단상 2004.10.05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경기상고 반송

경기상고에서 반송을 보다. 경기상고는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학교 본관 건물 앞으로 늘어선 반송이 참 봄직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면 대부분이 소나무를 말할 것이다. 소나무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야산에서 구불구불 자라는 소나무도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고, 하늘을 향해 쭉 쭉 뻗은 소나무 또한 시원하고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 중에서도 반송이 좋다. 반송의 가장 큰 특징은 주된 줄기가 따로 없고 땅에서부터 여러 개의 줄기들이 뻗어 나온다. 영어 이름이 'Japanese Umbrella Pine'인데 그 이름대로 생긴 모양이 우산을 쓴 것 같이 대칭형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붉은 색을 띤 줄기도 시원시원하다. 원산지가 우리나라로 알고 있는데 영어 이름에는 'Japanese'가 들..

천년의나무 2004.10.01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도로는 넓어지고 자동차는 더 커지고 많아지고, 지금은 특급열차가 아니라 초고속열차가 산하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그만큼 잘 살게 되었을까? 추석에 찾아가 본 농촌은 황폐한 속살을 그대로 드..

시읽는기쁨 2004.09.30

2004 추석

넷이서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하나는 송편 빚는시범을 보여주는 어머님의 손이고, 하나는 딸 아이의 손이고, 나머지는 조카 둘의 손이다. 우리 집에서 송편 만들기는아이들 몫이다. 내 어린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추석 송편 만들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이쁘게 안 나온다고 몇 개 만들다가는 쫓겨나곤 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농작물을 말리는 계절이다. 마당에도 마루에도 방에도 정성스레 수확한 곡식들이 널려있다. 저 고추는 한낮의 햇살을 쬐다가 밤이 되면 군불을 땐 방으로 들어가 다시 몸을 말린다. 곡식을 가꾸는 것도 힘들지만 뒷 손질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걸 안다면 작은 곡식 한 알도 헤프게못 할 것 같다. 가을 하늘에 눈이 시리다. 집 마당에서 무심결에 쳐다본 하늘이 너무 파래서 ..

사진속일상 2004.09.29

고요히 쉬기

길 아닌 길을 가면 마음도 몸도 고단하기 마련 쉬시기를 길이어도 쉬고 길 아니라도 쉬시기를 - from 이철수 님 판화 나이가 들수록 세상살이는 갈수록 힘들고 바람도 자꾸 거세집니다. 그래도 길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一切唯心造. 힘들수록 더 자주 마음을 챙기고 살아야 겠지요. 이 세상에서 저 그림처럼 가장 편한 자세로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움직이는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고요한 쉼에 머물렀는지요?

길위의단상 2004.09.24

날씨가 너무 좋아요

계속 흐리고 비 내리는 날씨 뒤에 찾아온 맑은 하늘이 더욱 밝고 환하다. 이런 날은 일과는 좀 제쳐두고라도 자리를 뜨고 싶어지는 법이다. 고개는 자꾸만 하늘바라기를 한다. 그래서 옆 사무실의 K를 불러내 같이 뒷산에 오른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길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풀과 나무 이름도 배운다. 조금 올라가다가 소나무 그늘 아래 너른 바위에 앉는다. 나무 사이로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서늘한 가을 공기가 상큼하다. 지상은 복잡하지만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다. 우리는 '자족(自足)'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산 속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한 시간을 경험한다. 나무와 풀과 푸른 하늘이 그리고 잠시의 일상에서의 해방이 날 이렇게 자유롭게 해준다. 내 가슴은 ..

사진속일상 2004.09.23

고마리

오늘도 비가 지나갔다. 올 가을은 유난히 비가 잦은 편이다. 고향에서 가을걷이 하시는 어머님이 비 때문에 더욱 힘드시지나 않으실까 걱정이다. 고향 마을 앞 개울가에는 지금쯤이면 고마리가 무리지어 엄청 많이 피어있을 것이다. 고마리는 멀리서 보면 메밀꽃밭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 가보면아직 덜 핀 것은 윤기나는 쌀알같은 꽃이 탐스럽다. 워낙 작은 꽃이라서 활짝 피어도 조그만하지만 무척 귀엽고 이쁘다. 다가오는 추석에 귀향하면 이 고마리 꽃밭에 찾아가 보고 싶다.

꽃들의향기 2004.09.21

당나귀가 나는 좋아 / 프란시스 잠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챗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 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 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시읽는기쁨 2004.09.20

꾸뻬 씨의 행복 여행

꾸뻬 씨는 파리 한복판에 진료실을 갖고 있는 정신과 의사이다. 그의 진료실은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그는 의사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꾸뻬 씨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여긴다. 마음의 병을 안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지도 않으면서 불행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점점 더 피곤해졌고, 마침내는 자신 역시 불행해져 간 것이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다른 모든 지역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였다. 마침내 꾸뻬 씨는 진료실 문을 닫고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행복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여행..

읽고본느낌 2004.09.19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올 봄에 앞 밭에다가 호박 10여 포기를 심었다. 호박을 얻는 목적보다는 긴 줄기를 뻗어서 맨 땅을 덮어달라고,그래서 풀이 좀 덜 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심은 것이었다. 거름과 비료를 한두 번 정도 준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사람들이지나가면서 호박 참 잘 되었다고 하는 칭찬도 들었다. 올해 어떤 집은 호박이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올해 심은 작물 중에서그런대로 만족하는 것이 이 호박이다. 그래서 호박잎도 따서 쪄먹고, 애호박도 눈에 띄는대로 따다가 맛있게 먹고 도시의 이웃에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때가 지나서 못 딴 호박들은 군데 군데 늙은 호박으로 되어 누워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편안하고 평화롭다. 가을의 풍요함이 저 누런 호박을 통해..

참살이의꿈 2004.09.18

구절초

가을 분위기를 더해주는 꽃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시골의 작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익어가고 있는 해바라기가 있고, 길을 따라가며 청초하게 피어나서 가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코스모스도 있다. 산에서는 노란 마타리가 파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리고, 들판 어디에서나 자라서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쑥부쟁이도 있다. 도시의 베란다에 내놓은 노란 국화 또한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 준다. 이런 가을꽃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구절초이다. 구절초의 하얀 꽃잎만큼 신비감을 주는 색깔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진은 공원에서 군락으로 키워놓은 구절초를 찍은 것이지만 실제 야생 상태에서는 이렇게 조밀하게 피지는 않는다. 가을 산야에 외로이 피어있는 구절초의 모습은 고독하지만 순결함을 잃지 않은 ..

꽃들의향기 2004.09.17

꿈의 달

'꿈의 달'을 보러 일산 호수공원에 갔다. 작품에도 호기심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꿈'과 '달'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컸기 때문이다. 그 말들에서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슬픈 느낌이 들고 그곳에 가서 다른 사람의 꿈들이나마 확인하고픈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규모는 거대하지만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지름 15m의 대형 풍선에 세계 140여개 국가의 어린이들이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그린 작은 그림 13만장을 붙여서 호수에 띄워 놓았다. 밤이 되면 밖에서 여러 색깔의 조명을 비추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구촌 어린이의 수많은 꿈이 모여 분단의 땅 한반도에서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강익중 님의 작품이다. 실제 달처럼 하늘에 띄워놓는다면 더욱 멋있을 것 같은데 지구..

사진속일상 2004.09.15

기도 / 야마오 산세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다여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고쳐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산이여 우리의 병든 욕망을 치유해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강이여 우리의 병든 잠을 고쳐 주셔요 그 푸른 시냇물 소리로 편안한 잠자리를 되찾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여래여 우리의 병든 과학을 고쳐 주셔요 모든 생명에 봉사하는 과학의 길을 찾아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무여 우리의 침울해 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축복해 주셔요 그 곧게 선 푸른 모습에서 우리들도 또한 조용하고 깊게 곧게 설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람이여 우리들의 ..

시읽는기쁨 2004.09.14

블로그 1년

블로그를 시작한지 꼭 1년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가 나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세상일은 연속해서 꼬여가기만 하고 앞길에도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던 믿음이나 신념마저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만난 일종의 도피처가 블로그였다. 원래는 홈페이지를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으며 홈페이지를 만드는 준비를 했는데 진도가 나갈수록 내 능력에는 벅차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어쩌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그 간편성에 끌리게 되었고 역시 우연하게 접하게 된 한미르 블로그의 조용한 분위기와 단순한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가입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독백의 공간이었다. 블로그는 나에게 있어..

길위의단상 2004.09.13

200분의 1

올 봄에 목화씨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 한 웅큼 정도 되었는데 까만 씨에는 하얀 솜털이 붙어있었다. 그 보드라운 촉감이 옛날 고향집 뒤의 목화밭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목화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며 꿈과 기대를 모아 밭에다 씨를 뿌렸다. 이웃 분들도 목화씨를 심었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워했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목화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는 것을 그때 확인했다. 길이가 20m 정도 되는 고랑 세 개에다가 한 구멍에 두세 개씩 심었으니까 땅으로 들어간 씨앗만도 200개는 넘을 것 같다. 그러나 땅이 척박해서였는지 근 한 달이 지나서야 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싹이 나온 목화는 캐내어서 좀더 거름진 땅으로 옮..

참살이의꿈 2004.09.12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시읽는기쁨 2004.09.11

물봉선

이름 그대로 물봉선은 습기를 좋아하는 듯 하다. 터 뒤안의 물기 많은 곳에도 물봉선 군락이 만들어졌다. 손톱에 물을 들이는 봉선화의 야생종이라 할 수 있는데산야에서 자생하는 탓인지거친 환경에도 거리낌없이 잘 자란다. 꽃의 생김새는 도리어 훨씬 더 이쁘다. 뒤쪽으로 가면서 돌돌 말린 모양이 고깔같기도 하고 무척 앙징스럽다. 특히 노랑물봉선과 흰물봉선은 색깔이 아주 곱다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잘 나오는 꽃이 물봉선이다. 그래서 앨범에 보면이 꽃 사진이 많다. 서양에서는 봉선화 꽃말이 'Touch me not(나를 건드리지 말아요)'이라고 한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이 물봉선은 봉선화보다 더 민감하여 씨앗이 익으면 사람이 손을 갖다댈려고만 해도 터져버린다고 한다. 옛날부터 봉선화는 ..

꽃들의향기 2004.09.10

태풍이 지나간 하늘

태풍 '송다'가 지나간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커튼을 열듯 태풍이 지나가면서 칙칙한 하늘의 장막을 걷어 갔다. 가려져 있던 하늘의 본래 면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꾸 하늘을 바란다. 작은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들 마음도 가을 하늘을 닮아 파랗게 물들어가는 것 같다. 저녁이 되니 서쪽 하늘에 걸린 노을이 또한 곱다. 오늘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부자가 되다.

사진속일상 2004.09.08

한 장의 사진(1)

앨범을 보는데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바로 이 사진인데 40년 전에 찍은 우리 가족사진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막내의 돌 기념으로 사진관에 가서 찍은 것이다. 오른쪽에 잔뜩 심술궂은 얼굴로 내가 서 있고, 옆에 어머니가 막내를 안고 있다. 이때 어머니가 30대 중반쯤 되었으니 우리 어머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가 싶게 젊은 모습이다. 그 옆에 계신 분은 외할머니이신데 이제 백수를 바라보시며 생존해 계신다. 앞에는 어린 동생들이 머리 모양으로 봐서는 잔뜩 멋을 내고 서 있다. 왼쪽의 까까머리는 둘째 동생이다. 이 사진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사진에 찍힌 부끄러운 내 모습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만은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

길위의단상 2004.09.07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 순 새록새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는 푸른 숲의 향기로 가득할 거야. 칙칙한 매연 대신에 신선한 산소가 거리를 감싸고 사람들은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할 거야. 잿빛 도시에 꽃이 피어나고, 예쁜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새들 따라서 ..

시읽는기쁨 2004.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