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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

시읽는기쁨 2004.06.17

개구리밥

여름이 되면서 시골 논이나 연못에는 초록의 개구리밥이 가득하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풀인데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떠다닌다. 부평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름이 더 익숙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부평초 같아서 저 풀을 보면서 비슷한 연민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지만 정착이란 없다. 한 곳에 머무르는 순간 이미 떠남을 준비하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한 삶을 버린다는 것은 고통이 수반된다. 떠남과 고통,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인간의 성숙이 삶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풀의 이름이 왜 개구리밥일까? 개구리는 육식성으로 식물은 먹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풀이 떠있는 논 가운데로 개구리가 신나게 헤엄치며 ..

꽃들의향기 2004.06.16

저녁 한강에서

오랜만에 저녁 한강에 나가 보다. 집이 한강변에 있어 몇 발자국만 걸으면 한강에 나갈 수 있지만 무엇에 그리 바쁘게 쫓기며 살았는지 저녁 산책을 나간 것이 몇 달 만이다. 넓은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낮의 열기를 식혀준다. 강가에 걸터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 젊은 연인들부터 다이어트를 하는지 강변 길을 따라 열심히 걷는 사람들로 저녁 한강은 활기가 가득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하늘을 난다. 그리고 탁 트인 시야가 마음까지 넓게 열어준다. 낮 동안 답답하고 폭폭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위무를 받는다. 강을 바라보며 아내와 나란히 앉는다. 이럴 때는 아내가 친구같다. 어려울 때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기만 하다. 참된 친구란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한다. 점점 어두워지며 건너..

사진속일상 2004.06.12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

오늘 아침에 만난 사진 한 장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강 다리 난간 위에 '힘들다!! 너무나 힘들어!!'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사진이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이 지상에 마지막 짧은 글 하나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까? 과연 무엇이 한 사람을 저토록 절망하도록 만들었을까? 절박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저 사진을 보면안타깝기만 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투신을 방지하기 위해 이젠 경찰이 한강 다리를 순찰한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자살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도 있었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뭘 하든 못 살까하며 그들을 질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각양각색이듯 충격에 대한 반응의 정도도 사람마다 ..

길위의단상 2004.06.11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이 시는 지난 달에 발표된 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이다. 시어가 투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편안하게 읽힌다. 무거운 주제를 부담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현대는 온갖 ..

시읽는기쁨 2004.06.08

묵주

터에 찾아온 J 수녀님에게서 묵주를 선물 받았다. 돌아가신 언니 수녀님이 사용하셨던 묵주인데, 수녀님이 보관하고 계시다가 기도를 많이 하라면서 내 손에 건네 주셨다. 아마 최근에 침체된 내 상태를 전해 들으시고 자극을 주시려는 것 같다. 묵주는 황색의 묵주알에 나무 십자가가 달려있는 작고 소박한 것이다. 손때가 묻고 닳아있는 것이 오랜 기간 수녀님의 기도와 함께 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T 수녀님으로부터도 사용하던 묵주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묵주는 전부 나무로 된 것이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십자가의 귀퉁이는 닳아 없어지고 나무 색깔도 까맣게 변해 있었다. 기도가 생활화된 수녀님들이지만 이 정도까지 되자면 보통 세월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분신처럼 묵주가..

사진속일상 2004.06.07

함박꽃나무

함박꽃나무에 피는 함박꽃은 북한의 국화이다. 김일성이 이 꽃을 유난히 좋아해서 개나리였던 국화가 함박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목란(木蘭)이라고 부른다는데 우리 주위에서는 좀체 보기가 힘든 나무이다. 설마 북쪽의 국화라고 기피하는 건 아닐테고, 정원수로도 좋은 나무건만 보기가 쉽지는 않다. 몇 년전 축령산에 갔다가 등산로에서 함박꽃나무를 보았다. 일부러 심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자연 상태로 자라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숲 속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이 때쯤이었을 것 같은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함박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꽃은 목련만큼 큰 편이고 순백의 꽃잎에 핏빛같은 붉은 색의 수술대가 눈길을 끈다. 순결과 정열을 동시에 간직한 듯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 꽃이다. 올 봄에는 터에 이 ..

꽃들의향기 2004.06.04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나무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식물의 특징으로 단순함을 들면서 그 단순함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단순함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천년 전의 바람은 지금도 똑 같이 불지만 지리하지 않고 늘 새롭다. 무위(無爲)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이루려는 마음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길을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그저 말없이 생각없이 맞기만 할 일이다. 쓸데..

시읽는기쁨 2004.06.03

길상사의 오후

날씨가 더워졌지만 활짝 개인 푸른 하늘이 자꾸 밖을 바라보게 만든다. 오후에는 동료와 짬을 내어 길상사와 간송미술관에 들러 보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길상사는 요정을 하던 보살님이 기증을 해서 조성된 사찰이라고 알고 있고, 그리고 도심에 있지만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해서 한번 가보고 싶었던 절이었다. 어느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는 내부적이든 아니면 외부로 부터든 새로운 바람이 늘 불어 들어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전통의 고수나 옳음에 대한 확신은 진리 자체의 싱싱한 생명력을 잃게 될 위험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길상사는 새로운 자극을 주는 사찰이라고 알고 있는데, 짧은 시간 겉모습만 둘러보았지만 평소에 느꼈던 이..

사진속일상 2004.06.01

명함

한국에서 근무하던 인도인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그 동안의 한국 생활에서 가장 난감했을 때가 명함을 가지지 않고 외출했을 때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이 서툴러서 명함이 없으면 자기 소개가 잘 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명함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한국 사회의외피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인지는 잘 구분되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명함인 모양이다. 어떨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불쑥 명함을 내밀어서 이상할 때도 있다. 서로 초면의 인사를 나누면서 명함을 받기만 하고, 줄 명함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없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나 아니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보..

길위의단상 2004.06.01

배수로 작업

터의 뒤쪽에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성가시게 한다. 시멘트블록 50개를 사다가 한 줄로 쌓았다. 시멘트블록을 나르랴, 줄 맞추어 쌓으랴, 안 그래도 서툰 노동인데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줄도 삐툴삐툴, 높낮이도 들쭉날쭉, 다른 사람이 본다면 허허 하며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사람을 사서 할려니 요사이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내 땀의 흔적을 보게 되는 보람일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땀이 정신적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 육체적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복잡한 세상사는 잊어버리게 된다. 내 일을 하면서 명상의 효과까지 덤으로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러..

참살이의꿈 2004.05.31

이팝나무

우리 민족의 밑바탕 정서에는 한(恨)이 숨어 있다고 한다.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한은 핏줄을 따라 대대로 이어지며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팝나무를 보면 이상하게도 그런 한이 먼저 떠오른다. 5월에 흰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는 겉으로만 보면 화사하고 화려하다. 마치 함박눈을 뒤집어쓴 듯 온통 하얀색인데 햇빛이라도 비치는 날이면 눈이 부실 정도이다. 이름 그대로 하얀 쌀알을 나무에 붙여놓은 것 같다. 그런데 나무 이름 탓일까, 결코마음 편하게 꽃을 감상할 수는 없다. 이팝은 이밥을 뜻하는데, 배 곯은 사람들이 저 꽃을 보며 한 공기 가득 담겨나온 하얀 이밥을 연상하며 이름을 붙였으리라고 충분히 상상이 된다. 집에 양식은 떨어지고 새끼들은 배 고프다고 울 때 풀뿌리라도 캐러 산에 오른 ..

꽃들의향기 2004.05.29

봄비의 속삭임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도시의 보도 블록 위로 비가 내린다. 도시의 소음에 묻혀 소리도 없이 비가 내린다. 시멘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작은 생명에게는 단비가 되어 내린다. 그 위를 지나가는한 사람의 발걸음이 바쁘다. 이런 날은 산골에 있는외딴 집 툇마루에 앉아 빗소리만 듣고 싶다. 황토 마당에 구멍을 내며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만 듣고 싶다. 세상에서 멀어지면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외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쉼없이 내리는 봄비는 자꾸만 나에게 속삭인다. 이젠 돌아가라고, 무거운 짐 벗고 이젠 홀가분해 지라고..... 일어나 지금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가지 얽고 진흙 발라 조그만 초가 지어 아홉 이랑 콩밭 일구어 꿀벌 치면서 벌들 잉잉 우는 숲에 나 홀로 살리 거기 평화 깃들어 고요히 날개 펴..

사진속일상 2004.05.28

능원사에서

터에 오가는 길에 능원사가 있다. 그 앞으로 지나다니기만 했는데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축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능원사에 들렀다. 어릴 때 외할머니를 따라 간 초파일 날의 절 분위기가 내 머리에는 아직 남아있다. 고향 마을에서 산모퉁이를 하나 돌면 청계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평시에는 들어가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적했다. 그런데 사월 초파일이 되면 여러 마을에서 모인 할머니, 어머니들로 좁은 절은 축제터로 변했다. 아이들은 맛있는 것도 얻어먹으며,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밑에서 사람들은 마음 속 소원을 부처님께 빌고, 그 가피를 믿으며,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을 경축하는 축제의 날, 이 정도가 석..

사진속일상 2004.05.27

나무가 아파요

서울 시내를 걷다보면 가로수에 번호가 적힌 명찰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못을 박아서 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바라볼 때마다 영 기분이 꺼림찍하다. 물론 충분히 검토를 하고 나무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나무에 박힌 못은 왠지 불편하다. 몇 년 전에 소백산을 찾았을 때였다. 순흥 쪽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사라는 작은 사찰이 하나 있다. 그런데 절 경내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소나무 두 그루에 큼지막한 대못이 박혀있는 것이었다. 보통 볼 수 있는 못이 아니고 대형 공사장에서나 쓸 법한 아주 큰 못이었다. 그 광경은 날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가 적혀있는 플랭카드를 걸기 위해서 그 짓을 한 것이었다..

사진속일상 2004.05.25

목화싹이 나오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목화밭 목화밭.....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이 목화씨를 구해 주셔서 세 고랑에 씨를 뿌린 것이 두 주전이었는데 드디어 싹이 돋아났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흙을 뚫고 나온 목화의 싹이다.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목화밭이다. 하사와 병장이 노래한 목화밭을 이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때 우리 집 뒤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을이면 하얀 솜 가득한 목화밭 풍경이며, 그리고 목화의 열매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따서 먹으면 달콤했던 맛의 느낌도 떠오른다. 또 목화 솜을 수확해서 마당에서 할머니가 흰 실을 뽑아내던 광경도 ..

참살이의꿈 2004.05.24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작년에 어느 분이 코멘트에 올려준 것이다. 이 시를 가사로 한 안치환의 노래도 있다고 하는데 귀뚜라미의 애절하고 외로운 울음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시읽는기쁨 2004.05.22

한글은 싫다

5월초에 서울시에서 주관한 축제가 있었다. 시청 앞에 잔디 광장을 꾸미고 그곳을 중심으로 10여일간 시민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그 축제의 이름이 'Hi Seoul Festival'이어서 지나치게 영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사실 그 때의 포스터를 보면 온통 영어로 뒤범벅되어서 과하다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축제의 주제를 'RED'로 정하고 R은 Refreshing하는 식으로 행사의 의미를 설명해 놓아 외국인을 위한 행사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Hi Seoul' 대신에 '안녕 서울' 한다고 해서 시대에 뒤져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국인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서울시가 이번에는 시내 버스 노선을 개편하면서 버스를 4종류로 나누고 색깔로 구..

길위의단상 2004.05.21

낙화

오가는 출퇴근길의 중간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옛날 권력자들의 안가로 사용되었던 집들을 헐고 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공원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몇 종류의 꽃들도 자라고 있다. 흠이라면 너무 인공적이고 깔끔한 것인데, 그래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과거에는 여기가 서슬 퍼렀던 높은 분들의 회식과 밀담 장소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같았으면 감히 옆을 지나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원 한 귀퉁이에 모란이 피었다가 얼마 전에 보니까 꽃잎이 모두 떨어졌다. 싱싱한 꽃잎이 시들지 않은 채 그대로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동백만큼 비장하지는 못해도 왠지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사진속일상 2004.05.20

흰씀바귀

터가 위치한 마을은 5월이 되면 마을길을 따라 흰씀바귀가 환하게 피어난다. 대개 노란색의 씀바귀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흰씀바귀 세상이다. 6년 전이었던가, 처음 이 마을에서 봄을 맞았을 때 길 양쪽으로 하얗게 흰씀바귀가 피어있는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수녀원이 여럿 들어와 있어서 길을 따라 오가는 수녀님들을 보게 되는데, 봄이면 흰씀바귀가 피어있는 길을 따라 하얀 수녀복의 수녀님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무척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이곳의 흰씀바귀는 꽃이 크고 화사하다. 보통 씀바귀에서 느끼는 작으며 약간은 촌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 꽃을 보면 누구나 시선이 끌리게 되고, 그 순수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에 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씀바귀의 이미지 ..

꽃들의향기 2004.05.19

아빠는 꽃처럼 살자고 했죠

나이가 들수록 동요의 노랫말이 가슴에 저며온다. 어릴 때부터 '파란마음 하얀마음'의 노랫말을 좋아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정이 가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동요가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고 옛 동무를 만난 듯 반갑기만 하다. 가끔씩듣게 되는 다른 동요의 노랫말들도 어쩌면 그리 이쁜지 모르겠다. 옛날 노래 가사에는 인간의 순수한 그리움이나 정이 자연과 잘 조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며칠 전에 '파란마음 하얀 마음'의 노랫말을 지으신 어효선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옛날에 부르던 동요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 분이 지은신 노래 중에서 널리 알려진 세 곡의 노랫말을 다시금 흥얼거려 본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

길위의단상 2004.05.18

반가운 손님

빈 터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작년에 흙을 들여와깔아놓은 터에 봄이 되니 하나 둘씩 풀들이 나기 시작한다. 흙 속에 들어있던 씨들이었는가,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왔는가, 맨 땅이 초록 옷을 입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사실 이름을 모르는 풀들도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낯 익은 꽃을 피우고 미소짓는 것들도 있다. 대부분은 꽃이 아주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저것들이 귀엽고 반갑다.

참살이의꿈 2004.05.16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 여자 하나는 국화 -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오래 전 일이지만 시내 버스가 노선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달려서 신문의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운전 기사의 말이 재미있었다. "매일 똑 같은 길로만 다니려니 답답해서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막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인의 상상력은 버스를 하늘로 날리고 있다. 버스 안에 꽃다발은 든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도 유쾌한데, 그 버스는 땅에서 떠올라 하늘을 난..

시읽는기쁨 2004.05.14

신록

신록의 계절이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에서 신록을 유년과 장년과 노년으로 나누었는데 아마 지금의 신록은 유년과 장년의 사이쯤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른 봄, 이제 막 나무에서 새 잎이 나온 직후의 연한 연둣빛 색깔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아직 녹음에 이르기 전, 연초록의 빛깔이 나무를 감싸고 그래서 온산이 초록 물감으로 뒤덮인 이 때도 좋다. 사람으로 치면 파릇파릇한 십대의 모습일 것이다. 확실히 신록에는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묘한 힘이 있는 듯하다. 지난 주말에 고향을 다녀오며 대둔산에 들렀다. 나이가 들어서 찾는 고향은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들이 낡고 허물어지고, 어릴 적 동무들은 그 자리에 없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병과 세월의 무게 앞에서 힘들어 하신다. ..

사진속일상 2004.05.13

웰빙 유감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마시는 물이 화제가 되었다. "서울 부자들은 새벽에 뜬 한라산 약수를 비행기로 공수해 와서 아침 식사를 하며 마신다고 해." "몸에 좋다고 바다의 심해수를 사다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러니까 웰빙을 실천하자면 돈이 많아야 한다니까."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웰빙 바람이 식을 줄을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고 보게되는 웰빙이란 무엇인가? 웰빙의 시초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웰빙 바람은 변질되어 뭔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라지만, 웰빙도 몸과 건강에 대한 환상을 키우며 상품 판매와 소비에 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덩달아 매스컴이 부추기는 얼짱, 몸짱 신드롬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바닥에는 우리 ..

참살이의꿈 2004.05.12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한미르 커뮤니티에 김정란 님의 '현대시 읽기'라는 칼럼이 있다. 몇 번 게재되다가 지금은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쉬운데, 옛 글 중에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김정란 님은 언젠가 TV 프로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인이 정치 토론 프로에 나온게 특이해서 유심히 지켜 보았다. 보수쪽 공격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눈이 느껴졌는데 이 글에서도 비슷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우리 부모님도 불쌍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하다.' 나에게도 그런 느낌이 가끔식 찾아와 가슴이 아려지는 요즈음이다. 누구든 자기 한 몸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지요. 조금씩 그 고통을 가볍게 만들기..

길위의단상 2004.05.11

자운영

자운영(紫雲英)..... 자운영은 상상 속의 꽃이었다.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한 꽃의 이름이 고와서일까, 봄이면 남도의 논에 지천으로 피어난다는 자운영은 내 마음속에서도 곱게 자라고 있었다. 자운영은 고우면서도 왠지 슬픈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름을 불러보면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소녀의 모습이 연상되는데, 몇 해전에 읽었던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라는 책의 제목도 그런 느낌을 더해 주었다. 며칠 전에 전북 봉동을 지나다가 논에 피어있는 자운영 꽃밭을 만났다.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와, 자운영이다!"하고 감탄하는 소리에 차를 세우고 논에 내려섰다. 이곳 저곳 논 가득히 마치 가꾼 듯 자운영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자운영을 한꺼번에 본 것도 처음이었다..

꽃들의향기 2004.05.10

그리스도의 수난

어제 밤에 본당에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상영했다. 많은논란과 화제가 된영화라서 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분위기, 작고 선명하지 못한 화면 등이 흠이었지만 꼭 옛날의 시골 극장같은 분위기여서 색다른 맛이 있었다. 영화는 그리스도의 체포로부터 죽음까지 하루도 못 되는 마지막 시간을 다루고 있는데 성서에 충실하게 당시 상황을 재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말이 당시에 사용되었다는 아람어와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더욱 실감이 났다. 미국에서논란이 되었다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대체로 성서에서 묘사한 것과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성서의 기술을 그대로 따라 영화를..

읽고본느낌 2004.05.07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산등성이의 나무들도그러하다. 고르게 키를 맞추며 자라는 모습이 꼭 전지를 해 놓은 것 같아 신기하게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나가는 지혜를 절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네들 세계에도 경쟁..

시읽는기쁨 200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