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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터에 가는 길에 두물머리에 잠시 들리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양서면 양수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동안 차로 지나다니기만 했지 내려서 강변에 나가보기는 처음이다. 사람이없는 곳을 찾아서 강가에 서니 갈대를 비롯한 수생식물들이 강을 가득 덮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강에도, 산에도 가을이 잔뜩 익었다.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가는 고가도로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음만 아니라면 몇 시간이고 이 고즈넉한 풍경과 같이 있고 싶어진다. 그래도 짧은 시간이지만 도시인의 탁한 눈이 맑게 씻어짐을 느끼며 자리를 뜬다. 인근에 세미원(洗美苑)이라는 수련 전시장이 있다. 이미 철 지난 연못에는 한 생을 마친 연잎이 마른 몸을 물 위에뉘고 편히 쉬고 있다. 오후의 가을 햇빛이 눈부시다. 실..

사진속일상 2004.11.07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빨리 빨리가 미덕이 되었고, 분주함은 일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현대 문명의 속도전에 이유도 모른채 내몰린 힘없는 병사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쁜 일상의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저녁 어스름, 고향의 초가 지붕 위로 느릿느릿 피어오르던 연기를 떠올리면 나는 슬프다. 바삐 달려오기만 한 내 이 자리는 어디인가?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시읽는기쁨 2004.11.06

작은 전시회

저녁부터 가을비가 내리다. 그림을 그리는 동료의 작품 전시회에 가다. 찻집의 한쪽 벽면을 이용한 작은 전시회이다. 전시된 작품은 다섯 점인데 모두 생소한 기법으로 제작되어 있다. 액자의 유리 표면에도 물감을 칠해서 효과를 낸 것이 인상적이다. 소재는 전원 풍경과 현대 도시의 구조물들이다. 그러나 가장 좋았던 것은 간소하고 작은 전시회인 것이다. 보통 생각하는 미술 전시회라면 입구에 화환이 늘어서 있고, 부담을 주는 큰 방명록도 펼쳐져 있고, 그리고 관람객의 기를 죽이는 넓은 홀과 환한 조명이 연상된다. 그런 곳에서 나 같은 사람은 괜히 의기소침해진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작은 찻집의 벽면을 이용했다. 작품 밑에서 차를 마시며 부담 없이 얘기를 나눈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작가가 아닌 보통 사..

사진속일상 2004.11.05

라마크리슈나 어록

갈등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분열과 투쟁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지금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갈등이 표출되면서 몹시 불안정하다. 이때는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기보다는 같음을 찾아서 인정하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상호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에 서있는 상대방은 나를 비쳐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 그럴 필요를 더욱 느낀다. 보편적 종교의 지혜는 시간, 장소, 교리의 차이를 떠나 인간 영혼에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손을 맞잡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만의 진리 독점주의는 우리 모두를 파멸시킨다. ..

읽고본느낌 2004.11.04

교정의 가을

가을비가 지나가니 가을 색이 더 깊어졌다. 가을 교정은 빨강, 노랑, 초록의 빛깔로 가득하다. 나무는 물론 땅도 사람 얼굴도 온통 단풍물이 들었다. 가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초순의 짧은 한 때, 스쳐가듯 우리 마음을 흔들며 가을의 정령이 지나가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 떨어진 낙엽이 곱고도 포근하다. 복자기나무에도 빨간 물이 들었다. 건물 벽에 매달린 담쟁이 덩굴도 대부분 떨어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밑에서 올려다 본 층층나무 잎도 은은하게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사진속일상 2004.11.03

대한민국은 공사중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다. 도시나 농촌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땅을 파고 산을 뚫고 시멘트 구조물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이젠 깊은 산 속 골짜기까지도 굴삭기가 들어가 길을 내고 터를 닦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경치가 좋은 곳이면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공사가 목적이 아니라 마치 건설 장비를 놀리지 않기 위하여 일을 꾸미고 있는 느낌마저 있다. 최근에 읽은 신문에서는 나라의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건설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제일 효과가 있다면서 대규모 공사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설 공사라는 것이 자연을 망치고 아름다움을 깨뜨리게 되니 문제가 있다. 애꿎은 산허리가 잘려나가고 들판이 시멘트로 덮혀진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시골 마을이 자동..

참살이의꿈 2004.11.02

산국

이젠 산과 들에서 야생화를 보기 힘든 계절이 되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노란 산국이 아닌가 싶다. 산국(山菊)과 감국(甘菊)은 구별하기가 무척 힘들다. 둘의 차이점을 설명 듣기는 했으나 막상 실전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둘은 너무 비슷해서 정확히 구별하는 것은 포기하고, 산에서 자주 눈에 띄는 노란 꽃은 그냥 산국이라고 부른다. 감국은 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화주나 국화차로 이용하는 것은 감국이라고 한다. 산국은 독성이 있다니 조심해야 되겠다. 이 조락의 계절에 저 산 아래 어딘가에는 노란빛의 산국 한 무더기가 아직 남아있어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꽃들의향기 2004.11.01

가을 나들이

동료들과 경기도 가평에 있는 매봉을 찾았다. 7명이서 지프와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고 외진 산이어서선지 험한 비포장길을 한참을 가야 했다. 결국 승용차는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K와 나는 자원해서 뒤에 처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상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산 아랫쪽에서 수락폭포라는 비경을 만나서 늦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었다. 산의 나무들은 벌써 몸의 물을 비우면서 겨울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땅으로 돌아온 나뭇잎들이 발에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사각거렸다. 특히 계곡의 물 위에 떨어진 잎은 단풍의 선명한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 평화롭고 아름답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려한 단풍철은 지나서마치 잔치가 끝난 자리처럼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대신에 늦가을의 산은 삶의..

사진속일상 2004.10.31

가을날 / 허영자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 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 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 열린다 - 가을날 / 허영자 올해는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되돌아보니 봄에는 황사도 덜 했고, 여름 태풍도 비켜갔고, 비 피해도 적었고, 다른 해보다 자연 혜택을 많이 받은 해인 것 같아 고맙다. 상대적인지 이웃 일본은 태풍과 지진의 자연 재해로 ..

시읽는기쁨 2004.10.29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합시다!) 유럽의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 사이에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말이라고한다.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자는 마음다짐이 이 인사말 속에는 들어있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결정적 문제인 이 죽음만큼 무시되고 경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애써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이웃의 죽음에 슬퍼 하지만 가까운 가족이 아닌 경우 그 효과가 며칠 가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천년 만년 살 듯이 일상을 살아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죽음만큼 우리 존재를 뒤흔들어놓을 사건도 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거대한 블랙홀이다. 죽음은 이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이며 모든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는 가위이다. 저 세상 너머의 일을 알 수 없는 한 ..

길위의단상 2004.10.28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사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도 가을이 한껏 익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맞으러 멀리 찾아 나서지 않아도 좋다. 단풍이 든 한 그루의 나무, 그 아래에 쌓이는 낙엽, 그리고 청명한 저 하늘과 바람이 온 가을을 다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생명은 사라질 수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 벚꽃이 1년 내내 피어 있다면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겠는가? 사라진다는 것은 새 생명에 대한 약속이다. 죽음이 없으면 태어남도 없다. 잎사귀가 떨어진 가지에는 이미 새 눈이 움트고 있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들은 아름답다. 우리의 사라져 가는 청춘에, 또 지나가는 한 해에 너무 아쉬워 말자. 꽃도 시간도 사랑도 사람도 결국엔 모두 사라져 가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뒤를 따라오는 새..

사진속일상 2004.10.27

[펌] 저 황금빛 들녘의 비애

경남 밀양의 가을 들녘을 걸으며 눈이 시리다 못해 충혈이 되도록 안부를 묻는다. 청명한 가을 햇살과 찬 서리를 맞아 속살부터 단맛이 차오르는 얼음골 사과의 표정으로, 그리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사자평 억새꽃의 이름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 그대는 정녕 이 가을에 행복하신가. 220일을 넘도록 걷고 걸으며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수상하고 수상할 뿐이다. 황금빛 출렁이는 저 들녘의 풍요는 어느새 풍요가 아니라 처절한 결핍이 되었다. 추수의 '감사'가 아니라 농산물 수입개방 문제 등으로 인해 생존권 사수의 '결사'가 되었다. 이따금 참새들이 날아와 벼이삭을 쪼더라도 화를 내는 척하지만 어느새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허수아비들의 여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의 ..

참살이의꿈 2004.10.26

귀로

단풍철이어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다. 그래도 도착지를 알리는 저 불빛이 정겹다. 집에는 포근한 가족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따스하다. 가을은 돌아옴의 계절이다. 낙엽이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듯, 길 떠났던 사람들이 지친 몸을 돌려 본향을 찾아 회귀하는 계절이다. 세파에 지치고 상채기가 난 몸을 고향은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위로해 준다. 옛집을 찾아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는 마을 어귀까지 마중나와 반기면서 잔치를 베푼다. 이 계절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저 세상의 관문에서 따스한 빛의 존재를 만날 것 같다. 그 기쁨과 환희의 마음이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되어 지상에 남은 우리들에게 비쳐..

사진속일상 2004.10.25

안면도 모감주나무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옆에 모감주나무 군락이 있다. 모감주나무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닌데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게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138호로 보호받고 있다. 마을과 바다 사이의 바닷가를 따라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아마도 옛 사람들이 바람막이 숲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안내문 설명에는 모감주나무 씨가 중국에서 황해의 해류를 타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해안가에 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매는 염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모감주나무의 영어 이름이 'Pride of India'인데 원산지는 아마도 인도가 아닌가 싶다. 원래 키 큰 나무인데 이곳 안면도의 모감주나무는 세찬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키가 잘 자라지 못하는 것 같다. 고달픈 세파를 상징하듯 나무들은 겨우생..

천년의나무 2004.10.21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 귀천 / 천상병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인품이 온화하고 따스했음을 압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 사랑을 어찌 버려두고 가실 수 있었나요? 다시 못 올 먼 길을 어찌 그리 빨리 재촉해 떠나셨나요? 남은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래도 당신은 행복했었다고 얘기합니다. 병고에무너져 내리는 당신을 보며 유약하다고 탓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당신..

시읽는기쁨 2004.10.19

그 소리가 그립다

가을걷이로 한창 바쁜 농촌이지만 마을 안은 조용하다. 벼 수확 작업이 대부분 기계의 힘으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벼를 베는 일에서부터 탈곡하고 나르는 작업이 밖에서 다 이루어진다. 집으로 들어오는 벼는 없고 직접 건조장이나 도로 위로 옮겨진다. 예전에 이 무렵에는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모든 일이 오직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이루어졌다. 낫으로 벤 벼를 논에서 말린 다음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해서 볏단을 집으로 옮겼다. 딸랑 딸랑 목에 달린 종을 울리며 쉼 없이 벼를 실어 나르던 우리 집 황소가 기억난다. 저녁이 되면 볏가래를 쌓는다. 등불을 여기 저기 켜놓고 마치 탑이 쌓아지듯 하늘로 올라간다. 볏가래는 가운데가 볼록한 항아리 모양으로 생겼다. 높이가 점점 올라갈수록 밑에서 볏단을 던져주는 일꾼들의 숨소..

길위의단상 2004.10.15

테니스 대회

직장 테니스 대회가 열리다. 20명이 A, B조로 나누어 복식 시합을 하다. 그런데 파트너를 잘 만나서 B조에서 우승을 하다. 20대때 테니스를 시작했으니 경력은 오래되었으나 중간에 공백이 많아 지금도 시작할 때 실력 그대로다. 더구나 금년 들어서는 라켓을 잡는 것이 두 번째이다. 운동을 즐길 여유가 그만큼 없었다. 그러나 맑은 가을 하늘 아래서 동료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웃음 소리, 고함 소리에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린다. 끝나고 저녁 식사자리에서 소주 맛이 너무 좋아 여러 잔을 마시다. 몸은 뻐근하지만 고였던 찌꺼기가 빠져나간 듯 몸도 정신도 개운하다. 바쁘더라도 운동을 즐길 여유를 되찾아야겠다.

사진속일상 2004.10.14

겨울 부채

이 터와의 만남은 마을 안에 있는 S 수녀원에 피정을 온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일들이 우연이기보다는 필연적인 무엇이 있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증명을 할 수는 없다. 그런 심정적인 느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운명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탓인지도 모른다. 침묵 피정에 들어오며 가방 속에는 몇 개의 옷가지, 일용품들과 함께 책으로는 '성서'와 '겨울 부채'가 들어있었다. '겨울 부채'는 일본의 진종불교(眞宗佛敎) 승려인 키요자와 만시(1863-1903)의 짧은 종교 에세이 9편이 들어있는 소책자이다. 번역은 이현주 목사님이 했다. 불교 승려가 쓰고 개신교 목사가 번역한 책을 천주교 수녀원에 피정을 들어와서 탐독을 한 것이 별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내 신앙에..

읽고본느낌 2004.10.13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

재동 백송

지난 주말 오후에는 동료 K와 같이 종로구 재동(齋洞)에 있는 백송(白松)을 보러 갔다. 지금은 헌법재판소 구내에 속해 있는데 정문 수위실에 백송을 보러 왔다고 하니선선히 통과시켜 준다. 본관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서니 뒤편 얕은 언덕 위에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철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품위가 손상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백송은 누가 보아도 절대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흰색 줄기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동 백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는데 과히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백송은 중국 북경 부근이 원산지로 번식시키기가 까다로워 희귀한 나무이다. 중국에서 ..

천년의나무 2004.10.11

토평의 코스모스 꽃밭

서울에서 가까운 토평의 한강변에는 넓은 코스모스 꽃밭이 있다. 마침 오늘은 구리 시민의 날과 겹쳐서 강변북로와 한강 둔치에는 차와 사람들로 넘쳐났다. 철 지난 코스모스 꽃밭에는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니는 바람에 꽃들이 밟혀 죽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주차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사람들의 발길을 덜 타서 온전한 꽃밭을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늦게 씨를 뿌렸는지 싱싱한 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코스모스는 남미 원산의 외래종이지만 이미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 된지 오래다. 포플러나무가 도열한 신작로 양편으로 코스모스 꽃길이 환했던 옛날 고향 가을 풍경도 아련하다. 지금은 중부 지방 산들의 단풍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는데 가을이익어가고 있는 우리 산하는 어딜 가도 아름다운 풍..

꽃들의향기 2004.10.10

미국쑥부쟁이

암사동 한강 둔치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자연 생태 보전 지역이 있다.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고 출입 금지된지가 1년이 되는데 지금은 억새, 갈대를 비롯해서 온갖 식물들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땅이 되었다. 여기에 가 보면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땅은 금방 생명으로 가득차서 생태계가 회복되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장자리를 따라 전에는 보지 못했던 흰 꽃이 군락을 지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꽃 모양은 개망초와 비슷한데 크기는 훨씬 작았으며, 올망졸망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양이 가을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이 꽃은 '미국쑥부쟁이'였다. 70년대에 꽃다발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들여왔는데 지금은 온 나라 산야에 두루 퍼져있다고 한다. 꽃이름에 '미국'이나 '서..

꽃들의향기 2004.10.09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는 만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쇼핑을 하면서 어느 물건을 고를 것인가에 대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의 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고비의 선택도 있다. 영화 '선택'에서처럼 특히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극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을 문제 삼아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고 전향의 고문과 압박을 가한 것이 어제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물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기준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게 될 때 자신의 안전이나 편의성, 또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에 우선 가치를 둘 경우 크고 비싼 차에 마음을 앗길 것이고, 지구 환경이나 에너지 차원에 가치..

길위의단상 2004.10.08

이사를 하다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하다. 도시에 내 집이 없는 사람은 현대판 유목민이다. 어떨 때는 집주인과의 관계에서 서러운 일을 겪기도 한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내 집을 가질려고 애쓰는구나 하고 긍정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변화가 두려워진다. 정든 장소,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되는 것이 부담이고 스트레스다. 변화란 젊은 때는 희망이지만 나이가 들면 두려움이 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한 장소에 안주하는 대신 변화는 신선한 자극을 주고 삶의 의미를 깨우쳐 준다. 이사를 자주 할수록 생활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살림이 간소해진다. 너무나 많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이사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을 깊이..

사진속일상 2004.10.07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날씨가 참 좋지요?" 오늘은 이런 인사를 많이 주고받았다. 시리다는 표현이 이와 같은 것일까, 서울에 나타난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도 푸르다. 너무 파래서 저 하늘에는 서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것만 같다. 파란 색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쓸쓸함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 만든 색깔이 아닌가 싶다. 한자로 가을[秋]과 마음[心]을 합하면 쓸쓸할 수[愁]가 된다. 가을의 모든 풍경 속에는 쓸쓸함이 배어있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은 쓸쓸함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날은 한 일주일쯤 휴가를 받아 낯선 길로 떠나고 싶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들길과 산길을 따라 마냥 걷고만 싶다. 가을 여행은 혼자서 떠나는 것이 어울린다. 여름의 번잡스러움을 지나서 가을은 홀로 스스로에게 향하는 계절이다..

길위의단상 2004.10.05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경기상고 반송

경기상고에서 반송을 보다. 경기상고는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학교 본관 건물 앞으로 늘어선 반송이 참 봄직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면 대부분이 소나무를 말할 것이다. 소나무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야산에서 구불구불 자라는 소나무도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고, 하늘을 향해 쭉 쭉 뻗은 소나무 또한 시원하고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 중에서도 반송이 좋다. 반송의 가장 큰 특징은 주된 줄기가 따로 없고 땅에서부터 여러 개의 줄기들이 뻗어 나온다. 영어 이름이 'Japanese Umbrella Pine'인데 그 이름대로 생긴 모양이 우산을 쓴 것 같이 대칭형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 붉은 색을 띤 줄기도 시원시원하다. 원산지가 우리나라로 알고 있는데 영어 이름에는 'Japanese'가 들..

천년의나무 2004.10.01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도로는 넓어지고 자동차는 더 커지고 많아지고, 지금은 특급열차가 아니라 초고속열차가 산하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그만큼 잘 살게 되었을까? 추석에 찾아가 본 농촌은 황폐한 속살을 그대로 드..

시읽는기쁨 2004.09.30

2004 추석

넷이서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하나는 송편 빚는시범을 보여주는 어머님의 손이고, 하나는 딸 아이의 손이고, 나머지는 조카 둘의 손이다. 우리 집에서 송편 만들기는아이들 몫이다. 내 어린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추석 송편 만들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런데 모양이 이쁘게 안 나온다고 몇 개 만들다가는 쫓겨나곤 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농작물을 말리는 계절이다. 마당에도 마루에도 방에도 정성스레 수확한 곡식들이 널려있다. 저 고추는 한낮의 햇살을 쬐다가 밤이 되면 군불을 땐 방으로 들어가 다시 몸을 말린다. 곡식을 가꾸는 것도 힘들지만 뒷 손질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걸 안다면 작은 곡식 한 알도 헤프게못 할 것 같다. 가을 하늘에 눈이 시리다. 집 마당에서 무심결에 쳐다본 하늘이 너무 파래서 ..

사진속일상 200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