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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의 너도바람꽃

봄꽃을 보러 천마산을 찾다. 산 속에 드니 봄은 아직 멀리 있다. 계곡은 얼음으로 덮여 있고, 산길도 녹지 않은 눈으로 미끄럽다. 작년보다도 봄이 늦게 찾아오고 있음을 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맘때 쯤 천마산에서 만날 수 있는 봄꽃은 너도바람꽃, 노루귀, 복수초이다. 나는 이들을 3월의 천마산 3총사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너도바람꽃이 가장 먼저 핀다. 아마 예년 같으면 지금쯤 너도바람꽃은 졌을 때인데 올해는 지금이 한창이다. 대신에 노루귀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복수초는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천마산 '꽃의 계곡'의 너도바람꽃 군락지는 정말 대단하다. 너도바람꽃이 쉽사리 볼 수 있는 꽃이 아닌데 유독 여기서는 엄청나게 많이 피어난다. 맑은 눈요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 천마산에 오르는 ..

꽃들의향기 2005.03.28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 문정희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저 흙 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초록 깃털로 눈뜨는 풀들과 새 떼들을 누가 저토록 간절히 키울 수 있을까요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나도 저 흙 속의 여자가 키우는 초록 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혹은 풀들처럼 싱싱하게 새 떼처럼 가뿐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하나쯤은 곁에 두고 볼을 부비며 살고 싶지만 봄비 오는 들판을 가다 보면 문득 저 나무에도 한 여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끝없이 기도를 하는 푸른 손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초록 나무 속에 사는 여자 / 문정희 돋아나는 새싹 속에 그 여자가 있다. 산골짝을 흘러 내리는 도랑물 속에도 그 여자가 있다. 저 어린 아이의 맑은 눈동자 속에도 그 여자가들어 있다. 땅 풀리는 저 흙 속에, 바람..

시읽는기쁨 2005.03.25

앉은부채

산 속 그늘진 골짜기에는 아직 눈이 남아있다. 눈을 뚫고 피어나는 봄꽃들 중에서 특이한 것이 앉은부채이다.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잎이 나기 전에 먼저 꽃을 피우는데 그꽃의 생김새도 특이하거니와 나중에 돋아난 잎은 마치 열대 식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고도 싱싱하다. 펼쳐진 잎이 마치 부채와 같다고 해서 이름도 앉은부채라고 한다. 그런데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감실 안에 애기부처가 앉아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름이 '앉은부처'에서 '앉은부채'로 변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놈은 주책없이 등산길에도 마구 자라나 애꿎은 등산객들의 발길에 밟히기도 한다. 아직 대부분의 식물이 싹을 틔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앉은부채는 독야청청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며 자라고 있다. 특히 앉은부채는 ..

꽃들의향기 2005.03.23

세상이 무섭다

등 뒤에 한 무리 중학생 아이들이 따라온다.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스치며 지나간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말 한 마디가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또 하나 디졌다.” 옆의 아이들이 따라서 킥킥대며 웃는다. ‘디졌다’ 또는 ‘뒈졌다’는 죽는 대상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인데 짐승이나 미물에게라도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에게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상이 너무 살벌해지고 있다. 특히 아이들의 언어 표현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잠시만 있어보면 옆에 있기가 민망할 정도인 경우가 많다. 저 아이들에게 뭐라고 설교를 해야 할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생명의 아픔에는 같이 연민을 느껴야 한다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

길위의단상 2005.03.22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사는 방식을 가지고 침을 튀기며 큰소리를 쳤다. 날카로운 비수를 상대방의 가슴에 수없이 날렸다.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아파해도 그치질 못했다. 나는 왜 당신의 말에 대해 빙긋이 웃으며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런 좁은 소견머리로 잘난 척 하는 내 모습이 가련하고 처량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있는게 아니었다. 도대체가 나는 언제나 철이 들고, 몇생을 더 살아야 시인처럼 시비 분별을 넘어선 달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몸이 전원에 있어도 마음은 저잣거리에서 분주하기만 하거늘......

시읽는기쁨 2005.03.21

기다려지는 봄

봄기운을 느껴보려고 한강에 나가다. 남쪽의 꽃소식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그러나 이곳 강변의 싸늘한 바람은 몸을 움츠리게 한다. 봄은 마음으로 먼저 찾아와서 애를 태우지만 정작 본인은 느릿느릿 올라오시려는가 보다. 일요일 오후건만 한강 둔치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하다. 뚝섬유원지의 오리 보트들도 아직 겨울처럼 한데 묶여있다. 곧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저기 오리 가족들도 사람들의 명랑한 웃음을 싣고 한강을 헤엄칠 것이다. 차가운 강변에 서니 봄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러나 봄의 선발대는 이미 상륙해 있을 것이다. 대기 중에는 선전포고를 앞둔 듯 벌써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사진속일상 2005.03.20

백점 인생의 조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100점 인생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먼저 영어 알파벳에 차례로 점수를 부여합니다. A에 1점, B에 2점, C에 3점. D에는 4점, 이런 식으로 해서 Z에 26점까지 붙여주면 됩니다. 그런 다음 영어 단어를 점수로 환산해 봅니다. 돈이 많으면 될까요? MONEY는 72점이군요. 건강은 어떨까요? HEALTH는 54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LOVE도 54점이네요. 세상 사는 것은 사랑 만으로는 되지 않나 봅니다. 행운이면 어떨까요? LUCK은 겨우 47점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KNOWLEDGE는 96점까지 되는군요. 열심히 일하면 될까요? HARD WORK은 98점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그럼 100점짜리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참살이의꿈 2005.03.19

큰개불알풀

이름이 재미있는 이 꽃은 이른 봄에 피어나는데 군락을 지어 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꽃의 크기는 아주 작은데 무더기로 모여서 피면 화사한 봄 분위기를 잘 자아낸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통통 튀는 명랑함도 느껴진다. 가만히 '개불알풀' 하고 불러보면 절로 미소가 도는 귀여운 봄꽃이다. 몇해 전 이맘때 선운사에 갔더니 절 앞 밭에 이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한 개면 겨우 보일듯 말듯한 꽃이 무리를 지어서 피어있으니 그것도 장관이었다. 카메라를 꺼냈지만 꽃이 너무나 많아서 허둥대기만 했었다. 선운사는 나에게 절 보다도 주변의 풍광이 훨씬 좋다. 언제 가도 야생화들이 반겨주기 때문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있어 맘에 든다. 다음 주말에는 선운사에 다..

꽃들의향기 2005.03.16

대장부

지난번에 살던 동네의 연세가 들었던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은 자신의 남편을 늘 장부라고 불렀다. 집안 얘기를 할 때면 “우리 집 장부가.......” 하는 식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장부(丈夫)란 뜻이 다 자란 건강한 남자라는 의미 외에도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왠지 어색했는데 그것은 장부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어떤 호탕하고 소위 남자다운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만난 남편의 모습이 왜소하고 부드러워서 장부라는 호칭과의 거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장부가 그러한데 대장부(大丈夫)의 이미지에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영웅호걸쯤 되어야 불릴 수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다. 그것은 남자라면 한때 가슴을 울렁거리..

길위의단상 2005.03.15

산길 걷기

산에 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조용한 산길을 걷는 것이 가장 좋다. 번잡하고 소란스럽던 마음이 산에 드는 순간 고요히 가라앉는다. 이리저리 방황하며 상처받고 토라진 마음도 산에 들면 어느 순간 넉넉하고 너그러워진다. 서울의 산은 휴일이면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아무리 명산이라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리면 시장통과 다르지 않다. 솔바람소리, 새소리, 작은 짐승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산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는 없다. 이쪽으로 이사를 오니 집 부근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산이 하나 있다. 몇 번의 답사 끝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조용한 오솔길을 하나 발견했다. 어느 산이든 주등산로를 벗어나 샛길로 들면 이런 비밀스런 오솔길이 있기 마련이다. 거기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도 아니고 ..

사진속일상 2005.03.14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세상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나도 불쌍하고 세상도 불쌍하다. 병든 세상을 아파하는 깊은 슬픔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측은지심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의 따스하고 순수한 의식이다.사물의 깊은 면을 바라볼 때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세상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다른 존재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며 행복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이다. 맹자(孟..

시읽는기쁨 2005.03.12

동백

내일부터 여수 오동도에서 등백꽃 축제가 시작된다고 한다. 지금쯤은 오동도 동백꽃이 활짝 폈을까? 지난 달에 찾아갔을 때는 때가 아니어서인지만개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돌산도 향일암에서 이 동백을 만났다. 바다를 마주한 곳에 백 년은 넘어보이는 아주 오래된 동백나무에 아름다운 자태의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수 천 그루씩 자라고 있는 오동도나 거제도에서는 보지 못 한 것을 여행의 마지막 날 향일암에 있는 한 그루 동백나무에서 만난 것이다. 그때의 들뜬 기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설렌다.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서만 생활한 나로서 동백은멀리 떨어진 상상 속의 나무나 꽃이었다. 겨울에 남해안으로 여행할 기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동백나무의 육지쪽 북방한계선이 된다는 선운사에는 자주 갔지만 늘..

꽃들의향기 2005.03.11

상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한 구도자가 히말라야 설산을 향해 갑니다. 그는 깨달음에 관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듣고 싶었던 게지요.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기를 반복하며 그는 하나씩 무거운 짐을 버려가며 산꼭대기를 향해 나아갑니다. 가진 것을 거의 다 버리고, 수십 만 번 가쁜 숨을 몰아쉰 다음 마침내 세속적 집착도 거의 다 놓아버렸습니다. 최후의 능선을 오른 그는 동굴에 다다라 안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엔 붓다처럼 보이는 도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구도자는 기쁨에 넘쳐 물었지요. “이 세상 최고의 진리를 알려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생애 최대의 중요한 순간을 맞이한 구도자는 이제 막 깨달음의 문턱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전부를 바쳐 성찰..

읽고본느낌 2005.03.10

망치질하는 사람

이 사람은 키가 22m, 몸무게는50t이 되는 거인이다.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하루 종일 내리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설치 조형물인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가다 보면 곧 만나게 된다. 작품이 워낙 커서 아무리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잠시 멈춰서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모양과 규칙적인 동작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처음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과연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좀 헷갈렸다. 육체 노동의 소중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은데, 다르게 생각하니 쓸쓸한 노동의 종말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이 다니는 도심의 한복판에 높..

사진속일상 2005.03.09

학교대사전

요즈음 인터넷에서 '학교대사전'이 인기라고 한다.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만들었다는데 지금의 입시 위주의 학교 현실을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일종의 현실 고발적인 사전이다. 그러나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것이 거기에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교육의 아픈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미소 짓게도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심한 표현이다 싶은 것도 있지만 이 사전을 만든 학생들의 재치와 현실 너머를 보는 통찰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튼 웃으면서 자신과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사전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교육 문제를 지금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없이 이런 암담한 현..

읽고본느낌 2005.03.08

울안 / 박용래

탱자울에 스치는 새 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에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 해지기 전 불켠 울안 - 울안 / 박용래 내가 화가라면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내가 사진을 잘 찍는다면 이 풍경를 찍어보고 싶고, 내가 작곡가라면 이걸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 이 시에서는 새, 풀, 눈, 닭, 사람이 울안의 한 가족이다. 거기에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특히 '불켠 울안'이라는 표현은 참 따스하다.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돌아오는 안식의 쉼터다. 이 작은 평화의 울안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그런 마을들이 모여 평화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현대의 비극은 이렇게 따스하게 불켜진 울안의 상실에 있지 않는가 싶다. 모든 것이 해체되어 떠난 울안은 이제 삭막하..

시읽는기쁨 2005.03.07

물건리 방조어부림

남해도의 물건리에는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된 방조어부림(防潮漁府林)이 있다. 어촌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는 대개 방풍림이 있지만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규모도 대단하고 나무들의 종류나 나이도 다른 방풍림에 비하여 다양하고 오래 되었다. 곡선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약 1.5km 길이에 걸쳐 팽나무, 말채나무, 이팝나무, 후박나무 등 40여종의 나무 7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방조어부림'이란 뜻은 폭풍우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고기떼를 부르는 숲이라고 한다. 잘 가꾸어진 방풍림이 바다 바람이나 파도를 막아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고기잡이에도 이용된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다. 이것은 물고기들이 녹색을 좋아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 아래로 모여드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건리 사람들에..

천년의나무 2005.03.05

[펌] 폭력 냄새나는 말들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름으로 얼마나 커다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민박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성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 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보, 새싹 비빔밥, 뼈 발린 닭… 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잔..

길위의단상 2005.03.04

GRUMPS

다시 3월이 찾아왔습니다. 밤부터내리기 시작한 눈이 오전까지 계속되더니 지금은 햇볕이 납니다. 땅에 쌓인 눈은 햇볕을 받더니 벌써 다 녹아 버렸습니다. 봄이 이미 가까이 와 있음을 실감합니다. 저에게 3월은 마치 새해의 시작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보냅니다. 곁들여 좀더 아름답고 멋있게 살자고 작은 다짐도 합니다. 이 지상에서 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향유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 조금은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람살이의 제일은 역시 행복입니다. 이 별에 와서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었다고 마지막 독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GRUMPS라는 말이 있습니다. Green(녹색의), Responsible(책임감 있는), Unassuming(겸손하고 욕심이..

참살이의꿈 2005.03.02

야생 / 백무산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야생의 들짐승 야생의 날짐승 그리고 야생의 여자 야생의 수생짐승 그들을 안아볼 때마다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는 산짐승의사나운 눈빛도 밤의 숲 속 짐승들의 거친 교미도 저들끼리 싸워 피 흘릴 때도 나무들이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인 양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저들은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분화도지 않은 무수한 촉수와 날카로운 긴장의 그물을 가졌다 대상과도 자신의 몸과도 동물은 사람뿐이다 - 야생 / 백무산 그래 그래 하며 술술 읽히던 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뒤통수를 친다 - '동물은 사람뿐이다'. 시인은 식물과 동물로 나누는 대신에 식물성이란 표현을 쓴다. 식물성이란 분리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 자연과 하나된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자연..

시읽는기쁨 2005.03.01

운문사 처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 180호인 청도 운문사(雲門寺) 경내에 있는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되고, 높이는 6m, 가지가 옆으로 퍼져있는 길이는 20m에 이르는 아름답고 큰 나무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우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우람한 줄기들의 위용에 압도당하게 된다. 줄기의 무게를 지탱해 주느라 많은 지주를 세워 놓았다. 오래된 절마다 이런 노미수(老美樹) 하나쯤 있다면 절의 분위기는 한층더 살아날 것 같다. 나무 줄기를 보면 남성의 근육을 연상시키듯 힘이 느껴지지만, 멀리서 보면 삿갓을 쓴 듯한 사방 대칭의 균형잡힌 모습이 여성스럽고 우아하다. 겨울인데도 솔잎의 초록색이 윤이 나듯 반질반질거린다. 그만큼 싱싱하고 생명력이 왕성하다는 뜻일 것이다. 운문사에서는 매년 봄이면 이 소나무..

천년의나무 2005.02.28

남도여행

아이들이 자라는데 따라 여행 패턴도 변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아이들 중심으로 여행지가 결정되고 주로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이 되지만, 그러나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대개 끝이 나버린다. 이젠 부모를 따라다니지 않으려고 하거니와 부모 쪽에서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학원에 가야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데 그걸 이길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막내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이제 부부만의 오붓한 여행이 시작된다. 이때쯤 되면 인생의 한 고비가 지나갔음을 저절로 느끼게 되는 나이가 되는 것이다. 바쁜 세상살이에서 아내와 떠나는 여행이라야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다. 그러나 바쁜 세상살이란 어쩌면 핑계일지 모른다.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왜 이런 행복한 시간을 자꾸만 뒤로 ..

사진속일상 2005.02.27

반추동물 장내발효 개선 연구

지난 16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지구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가 공식 발효되었다. 교토의정서 발효는 지구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전지구적인 최초의 환경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선진국들은 2012년까지 1990년의 배출량 기준으로 평균 5.2%의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를 감축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계 1위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인 미국은 이 협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겉으로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제외된데 대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만한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아마도 2003년부터는 이 협약의 감축 대상에 포함될 것 같다. 현재도 우리나라는 세계 9위의 에너지 소비국이고, 온실가스 배출량이나 또는..

길위의단상 2005.02.22

경복궁 돌담길

길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더 아름다운 길이 있다. 광화문에서 영추문(迎秋門)을 지나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경복궁의 서편 돌담길은 내가 사랑하는 길이면서 출퇴근로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직장까지 이 길을 따라 걸어 다닌다. 키 높은 돌담과 아름드리 버즘나무가 도열한 이 길은 청와대 앞이라 경비가 삼엄해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호젓해서 좋다. 대개의 경우 사진처럼 길이 텅 비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아기자기하고 여성적이라면, 경복궁 돌담길은 시원시원하게 뻗어있다. 이 길에 들면 시선이 단순해지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고달팠던 하루의 일상도 이 길에 서면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내면의 존재감이 다시 살아난다. 나에게는 사색과 성찰의 고마운 길이다. 이 길은 걷는 것이 즐거운 일임을 가르쳐 준다. 어떤 날은..

사진속일상 2005.02.21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어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안도현 날이 다시 추워졌다. 서울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

시읽는기쁨 2005.02.20

올림픽공원 부부목

그리스 신화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각각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서 결합할 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올림픽공원을 산책할 때 만나게 되는 이 나무를 보면신화에서 말하는 그런 내용이 떠오른다. 포플러나무인 듯한 이 나무는 멀리서 보면 그냥 온전한 한 그루의 나무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두 그루가 아주 가까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나무가 키도 같고, 생김새도 비슷하면서 그래서 서로 좌우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오순도순 사이 좋게 살고 있다. 둘이지만 둘이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은 두 나무 사이에 있는 틈이다. 자연스런 모양인지, 아니면 사람이 전지를 해서 저렇게 된 것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저 틈이 있음으로써 둘의 관..

천년의나무 2005.02.19

사인

오랜만에 터에 다녀왔습니다. 겨울이면 발걸음이 뜸해지는데 올해도 수도관이 어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보온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지난 1월의 추위에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펌프가 마당에 노출되어 있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자위를 합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정이 깊다면 자꾸만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랜만에 만난다면 반가움 더욱 클 것이고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아무리 정이 깊은 사이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부딪치며 쌓이는 고운 정 미운 정이야말로 단단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기본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덫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오랜만에 찾아..

참살이의꿈 2005.02.18

청소부 베포

옛 수첩을 뒤적이다가 보니 ‘모모’에서 옮겨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한 걸음 - 한 숨 - 한 번 비질’ ‘모모’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다. 베포 할아버지는 원형경기장에서 살고 있는 열 살 소녀 모모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작은 키에 허리는 구부정하고 흰 머리칼에 안경을 쓰고 있는데 초라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그의 직업은 도로 청소부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물어봐도 대답 대신 웃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을 듣는데 어떤 때는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만큼 그는 생각이 깊다. 대답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면 침묵을 지킨다. 그런 그를 이해해 주는 ..

읽고본느낌 2005.02.16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날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빗소리 / 주요한 겨울비가 내린다.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봄을 재촉하듯 조용 조용히 겨울비가 내린다. 비에 젖고 있는 도시의 밤 풍경에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는 비가 올 때면자주 이 시를 읊었다. 얼마나 들었는지 나중에는 나도 외우게 되었다. 뒤에 친구가 이 시를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고는 실소하게 되었지만.....

시읽는기쁨 2005.02.15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 윤동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이 한 구절에는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마력이 숨어있다. 그러나 젊었던 날과 달리 지금은 '괴로와했다' '죽어가는 것' '사랑' 같은 말들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부끄럼 없는 삶이 거저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나이이다. 허나 이런 초월적인 삶을 꿈꾸는 것으로 나는 살고 있다. 내 영혼의 자양분은 거기서 나온다. 맑고 따스한 별빛이 비추인다.

시읽는기쁨 200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