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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개산에 오르다

이천에 다녀오는 길에 가볍게 정개산에 올랐다. 도로 옆에 있는 산 들머리를 자주 지나가면서 언젠가는 한 번 올라가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천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정개산(鼎蓋山, 407m)은 이천시 신둔면에 있으며 한자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솥뚜껑' 산이다. 아마 산이 솥뚜껑 모양이라고 본 것 같다. 정상부가 뾰족 튀어나온 게 솥뚜껑의 손잡이 부분으로 보였나 보다. 산 입구인 넉고개 주차장이다. 작년에 찾아왔을 때는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 세울 데가 없어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제 넓고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약 20분 정도 이런 임도를 따라 걸어 들어간다. '정개산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나온다. 본격적인 등산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능선에 오르면 걷기 좋은 산길이다. 전날 비가 내려 물기 머금은..

사진속일상 2022.03.16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행복 / 심재휘 강릉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지인이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내온다. 강릉에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가 참 많은 것 같다. 지인은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약간은 질투가 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차용하여 속으로 중얼거린다. "매일이 보람 있고 행복하다면 그 역시 힘겹지 않겠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날도 있어..

시읽는기쁨 2022.03.15

봄비 내리고 텃밭을 다듬다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땅이 촉촉해져서 텃밭에 나가 이랑을 다듬었다. 며칠 전에 사다 놓았던 거름을 뿌리고 흙과 잘 섞어주었다. 작년보다는 이랑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 텃밭은 백 퍼센트 아내 몫이다. 나는 요청이 있을 때만 도와준다. 힘이 필요한 일이거나, 또는 두 사람의 손이 있어야 할 때다. 올해 무슨 작물을 심을지 아내 머릿속에는 있겠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텃밭 농사가 시작되니 아내는 설레는 기색이 여실하지만, 나는 무덤덤하다. 솔직히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좀 귀찮다. 그래도 약간의 땀을 흘린 뒤 정리된 텃밭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일을 마치니 다시 빗방울이 한둘씩 듣기 시작했다.

사진속일상 2022.03.14

더 홈즈맨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세 편 모두 인상 깊고 여운이 남았다.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중 한 편이 '더 홈즈맨(The Homesman)'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배경인데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서부영화 장르에 들어갈 테지만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싸움이 소재인 전통적인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 한다. 고통받는 약자를 향하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다. 무대는 서부 개척의 최전선인 네브라스카로 거친 환경과 힘든 노동,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삶은 피폐하다. 그중 세 여자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미혼이었던 커디에 의해 그녀들의 고향인 아이오와로 옮겨지게 된다. 커디는 짐마차에 세 여자를 태우고 400마일의..

읽고본느낌 2022.03.13

상심을 달래주는 제라늄

하루에 30만 명대의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이어지고 있다. 다음 주의 절정기가 되면 40만 명대까지 오른다고 한다. 조심스러워 밖에 나가 타인을 만나지 않은지도 한참 되었다. 딸과 손주까지 코로나에 걸려서 이제야 회복 중이다. 시골에 계신 노모를 찾아뵙지 못한지도 두 달이 넘는다. 방에 있으면 베란다에 있는 제라늄이 보인다. 일 년 내내 한결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제라늄이다. 제라늄은 코로나나 시끄러운 정치판의 현실과도 아랑곳 없다. 나는 부러워하며 멍하니 제라늄을 바라본다. 이러한 저러한 상심을 달래기 위해 자꾸 눈길을 주는 우리집 제라늄이다.

꽃들의향기 2022.03.12

이해한다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있다. 편의상 G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시골에서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인연이 남다르다. 네 명이 올라왔는데, 둘은 일찍 세상을 뜨고 G와 나만 남았다. 그러니 각별한 사이가 아닐 수 없다. G는 나를 대부로 삼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종교적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소원한 이유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견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G는 경상도 출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이고, 나는 반대편이다. 정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티격태격한다. 상대를 잘 아니까 조심하기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정치가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G는 문재인 대통령을 너무 싫어한다. 몇 년 전에 G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

길위의단상 2022.03.11

마르코복음[41]

제자들이 물었다. "어째서 율사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고요? 그러면 인자에 대해서는 성서에 어떻게 씌어 있습니까? 많은 고난을 겪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말하거니와, 과연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성서에 씌어 있듯이 사람들이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 마르코 9,11-13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의 입으로 앞으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했으니 제자들 생각으로는 영광의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예수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말도 한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거나 하..

삶의나침반 2022.03.10

봄 맞는 뒷산

산 입구에서부터 박새가 맞아준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겨울철과 달리 맑고 경쾌하다. 산 중턱에서는 어치 네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있다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날아간다. 어치는 깃털의 고운 색깔과 달리 목소리는 억세다. 어치의 지저귐 역시 활기에 차 있다. 산의 봄은 청각과 촉각으로 온다. 살짝 맺힌 땀을 씻어주는 바람의 느낌이 부드럽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봄이 한결 가까워져 있다. 저쪽에서 연치가 높으신 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저분에게도 겨우내 간절히 기다린 봄이었을 것이다. 산길에는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가 있다. 나무도 걷고 싶은 걸까, 꼭 껴안아준다.

사진속일상 2022.03.09

인듀어런스

20세기 초반은 극점 탐험의 시대였다. 1911년의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아문센과 스콧의 경쟁은 유명하다. 둘의 명성에 가려진 또 다른 위대한 탐험가가 있다.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영국의 어니스트 셰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이다. 셰클턴은 1909년에 남극점에 도전했다가 식량 부족 때문에 155km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만약 무리하게 전진했다면 스콧처럼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2년 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자 셰클턴은 목표를 바꾸어 남극 대륙 횡단에 나선다. 27명의 대원과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알렉산더가 쓴 는 이 탐험에 관한 기록이다. 동행한 사진사 헐리가 찍은 사진이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며 우리를 현장으로 안내한다..

읽고본느낌 2022.03.08

너무 많은 비밀번호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이젠 열쇠를 보기 힘들다. 집이나 사무실에는 도어록이 되어 있어 비밀번호를 이용해 출입한다. 차 안에 지도가 사라진 것도 마찬가지다. 길을 찾아가자면 지도가 필수였는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대신한다. 그러다 보니 기억해야 할 비밀번호가 너무 많다. 일일이 구분하지 못하다 보니 비밀번호를 적어두는 장부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내 경우도 비밀번호 비망록이 따로 있다. 나는 도대체 몇 개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을까. 현관, 휴대폰, 와이파이, 카드 2, 도서관, 포털 3, 통신사, 카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페이, 원드라이브, 삼성계정, 넷플릭스, 국립공원, 광릉수목원, 사진 2, 야생화 2, 걷기 3, 바둑 2, 모야모, 교직원공제회, 국민비서구삐..

참살이의꿈 2022.03.07

한 장의 사진(30)

3월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때다. 학생이나 선생 모두 새로운 만남 앞에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본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중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가 나에게는 3월이었다. 아이들은 봄 방학을 마치고 3월에 개학을 하면 새 반이 편성되고 담임을 배정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담임이 될지 제일 관심사일 것이다. 지금 손주를 봐도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걸 본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3월 첫날 전체 조회가 열린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이 담임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40여 년 전인 1979년 - 아니면 1980년일지도 - Y여중에 근무할 때 운동장에 전체 학생이 모인 가운..

길위의단상 2022.03.06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와 고독,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선 말 같다. 그렇다면 둘을 잘 조화시키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아도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고독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가 아니..

시읽는기쁨 2022.03.05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신화화된 그리스도는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교회 쇼윈도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한완상 선생이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다. 교회가 예수를 앞세우지만 정작 예수의 정신은 없다. '믿습니다'의 열정에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의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은 '따름'에 있어서는 자국민의 경멸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은총만 강조하다 보니 질문과 성찰은 소홀히 하고 값싼 기복신앙만 난무한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치매'라고까지 표현한다. 선생은 먼저 역사적 예수의 매력을 되찾자고 한다.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살아 있는 예수의 역동성을 외면한다. 구속 드라마 속의 예수는 구속사에서 배우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읽고본느낌 2022.03.04

불암산 바위종다리

바위종다리를 만나기 위해 불암산에 올랐다. 산행 들머리는 불암사였다. 불암사(佛岩寺)는 남양주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 쪽에 비하면 찾는 사람이 적어 조용하고 주차 공간이 넉넉했다. 낮 기온이 10도까지 올라 겨울 점퍼는 일찍부터 벗어야 했다. 불암사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석천암(石泉庵)을 지난다. 이름으로 볼 때 바위에서 석간수가 솟아나는가 보다. 수직으로 선 너른 바위에는 푸근한 느낌의 미륵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겨울이 지나가는 한낮의 따스한 햇살에 절집의 개 두 마리가 오수중이시다. 가까이 다가가니 귀찮다는 듯 무거운 눈을 겨우 뜨고 쳐다보더니 이내 무시해 버린다. 절집에서는 개들도 순해진다. 불암사에서 정상까지는 1.6km 정도밖에 안 된다. 한 시간 정도면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불암산 등산 길..

사진속일상 2022.03.03

경안천 버들(220228)

시끄러운 인간세 속에서 버둥대다가 자연 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곳은 내가 마음의 위안을 받는 장소다. 반대편에는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강 가운데 생긴 모래톱에는 한 그루 버드나무가 인자한 할아버지로 앉아 있다. 버드나무가 자리한 곳이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버드나무는 다정하고 의젓하다. 나무를 마주보고 가만히 서 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버드나무는 말 없는 가르침을 설하신다. 그러나 고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미풍처럼 부드러운 속삭임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버들도 있지만 모양이 대조적이다. 이처럼 균형 잡힌 몸매가 아니다. 각자 살아온 이력이 외양에 나타나고 있다. 이 버들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두 그루의 나무가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둘은 생존의..

천년의나무 2022.03.01

길 떠날 준비하는 고니

경안천의 고니들 숫자가 줄면서 행동도 달라졌다. 일부는 이미 북쪽으로 떠난 것 같다. 남아 있는 고니들도 먹이 활동보다는 움직임을 자제하면서 대기 모드로 들어가 있다. 다수는 사람을 피해 강 맞은편에 몰려 있다. 가만히 있으면서 체력을 비축하는가 보다. 아마 자기들끼리 인간이 모르는 신호를 주고받고 있으리라. 그래서 때가 되면 힘차게 날아올라 북쪽의 번식지로 떠날 것이다. 계절 변화에 연동하여 움직이는 철새들의 루틴이 신기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이 갖지 못한 초감각이 저들한테는 있는 게 틀림없다. 고니는 일부일처제를 지키면서 가족 단위로 생활을 한다. 여기서 같이 모여서 움직이는 고니들 역시 한 가족이 아닌가 싶다. 고니 다섯 마리가 상류 쪽으로 이동한다. 한 켠에는 민물가마우지가 모여 있..

사진속일상 2022.03.01

마르코복음[40]

엿새 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처럼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번쩍였다. 그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었다. "랍비,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랍비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들 겁에 질려 있었다. 이윽고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감싸더니 구름에서 소리가 울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얼른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고 곁에 예수만 계셨다.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

삶의나침반 2022.02.28

인연

현재 전 세계 인구는 80억 명이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로 지구상에 생존했던 사람들의 총 숫자는 약 1천억 명이라고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다 당신과 만나게 되었을까. 바늘 끝 같은 한 점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 끌리게 되었을까. 호텔 커피숍을 들어서는 당신을 멀리서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내 사람이구나. 밤색 투피스를 입고 고개를 약간 치켜든 채 당신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무슨 신호를 접수한 것일까, 내 몸 안에서는 호르몬이 홍수처럼 분출했고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일까. 짧은 일별일 뿐인데도 치명적인 끌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반면에 수십 년을 알고 지내..

참살이의꿈 2022.02.27

가장의 밤 / 김용화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 가장의 밤 / 김용화 가장으로서의 남자에게는 두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내 울타리를 소중히 지키려는 마음과, 경계에 갇힌 답답함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의 세 연과 끝 연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 나에게는 읽혔다. 나는 늘 뒤쪽이 승했다. 반면에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넘쳐나는 것 같다. 엊저녁에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아나운서가 소개해 주어서 이 시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 이불 덮어주는 일도, 딸 지갑에 지폐 찔러주는 일도, 아들놈 우산 갖다주는..

시읽는기쁨 2022.02.26

예수냐 바울이냐

"바울의 기독교 신학 안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정신은 없다." 저자인 문동환 선생이 이 책에서 맺는 결론이다. 책의 '시작하는 말'의 서두 부분은 이렇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바울 신학을 추종해 왔다. 그리고 이것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온 세계에 전파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 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메시아 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어처구니없는 민족주의다." 는 예수와 바울을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밝힌다. 이 책은 바울이 예수의 정신을 왜곡했다고 보는 ..

읽고본느낌 2022.02.25

신륵사와 흰죽지

수녀님을 만나러 이천에 갔다가 여주를 지나는 길에 신륵사에 잠시 들리다. 신륵사는 '신륵(神勒)' - 신령의 힘으로 굴복시킴 - 이라는 이름과 함께 풍광 좋은 남한강변에 위치한 것도 다른 절과 달리 특이하다. 남한강의 옛날 이름은 여강(驪江)이었다. 강월헌(江月軒)에서 바라보는 여강의 경치는 일품이다. 눈맛이 제일 시원한 곳이 강월헌과 불탑이 있는 이곳이다. 해 지는 이곳에서 속울음 삼키며 하염없이 앉아 있던 때가 있었다. 높이 9.4m의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벽돌 탑이라고 한다. 은행나무 관세음보살. 신륵사 경내에는 옛 조포(潮浦) 나루터가 있다. 조포나루는 삼국시대부터 한양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여주 이포나루와 함께 4대 나루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통행자의..

사진속일상 2022.02.24

경안천 오포 구간을 걷다

햇볕이 좋아 밖에 나왔더니 낮 기온이 겨우 0도에 걸치는 싸늘한 날씨다. 바람이 약간만 세게 불어도 한기가 느껴진다. 아내와 함께 오포대교를 중심으로 해서 상하류를 오가는 길을 걷다. 경안천 풍경. 이 구간에는 십여 마리의 고니를 언제나 볼 수 있다. 이 가족은 좋은 데 터를 잡은 것 같다. 왜가리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한데 모여서 쉬고 있다. 민물가마우지 흰뺨검둥오리 물닭 강 모래톱 갈대밭에 고라니가 보인다. 이곳 경안천은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어 산에서 멀다. 얘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하다. 여기서 사는 걸까, 아니면 인적이 드문 한밤중을 틈타 산으로 왕래를 하는 걸까. 경안천에 나오면 다양한 생명붙이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다들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대로 조화롭게 살아간다. 종마다 자신..

사진속일상 2022.02.23

도올의 로마서 강해

내가 한때 회심을 하게 된 계기가 '로마서'였다. 수녀원의 조용한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이 나를 찔렀다. -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서 1,17). -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로마서 3,21)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로마서 3,22).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로..

읽고본느낌 2022.02.22

한 장의 사진(29)

돌이켜 보면 내가 예수에 미친(?) 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20대 때, 또 한 번은 50대 때였다. 50대 때는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고 서울 아파트를 처분해서 밤골 빈 터에 집을 짓고 세상과 격리되고자 했다. 그 여파로 예기치 못한 격랑에 휩쓸리면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 사건의 결과물이다. 20대 때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돌연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일이었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때였다. 캠퍼스에서도 뜨거운 성령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신앙 분위기가 지배했다. 물리 전공인 우리 과 30명 중에서도 목사가 3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나는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

길위의단상 2022.02.21

우수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 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밑 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 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우수(雨水) / 나종영 봄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문자대로라면 입춘(立春)이 봄의 시작일 텐데 우리나라에서 2월 초순은 봄이라기에..

시읽는기쁨 2022.02.20

마르코복음[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진실히 말하거니와,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더러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마르코 9:1 다음에 나올 마르코복음 13장에 종말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자세히 들어 있다. 여기서는 종말의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세상의 종말을 볼 수 있다는 것은 50 년 안에는 세상의 끝이 도래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예언은 틀렸다. 그때로부터 2천 년이 지나고 있건만 아직도 세상은 건재하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고대하는 한편 하느님의 심판으로 세상의 악을 쓸어버리는 종말의 때를 기다리기도 했으리라. 종말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보면 예수도 종말을 믿었던 듯하다. 그것도 확고하게 곧 닥칠 사실에 대해 의심..

삶의나침반 2022.02.19

선녀바위 석양

선녀바위 뒤로 지는 석양을 보기 위해 용유도해수욕장에 갔다. 바위 사이의 틈으로 해가 떨어지는 모양은 11월부터 2월 사이에 만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날씨여서 바위 사이로 오메가 석양을 볼 수 있었다. 오메가 일출은 몇 차례 봤지만 오메가 일몰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서해의 오메가는 만나기 어렵다. 나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10여 명 모여서 짧은 순간을 남기느라 몰입했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지고 나니 바다 색깔은 비단결 마냥 부드러워졌다. 마치 물 밑에서 조명이 비치는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붉은색 기가 빠지고 바다는 다른 풍경으로 변신한다. 좀 무겁더라도 DSLR을 자주 들고 다녀야겠다. 아무리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일취월장한다 한들 한계는 있다고 생각한다. 새..

사진속일상 2022.02.18

비행기를 보면 가슴이 뛴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가슴이 뛴다. 탈것에 대한 동경이 있지만 그중에 제일은 역시 비행기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해 보고 싶은 직업 일순위는 여객기 조종사다. 어렸을 때 고향 마을 앞을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운전석에 앉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잠시 철도고등학교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런데 비행기 조종에 대해서는 아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지금처럼 비행기가 보편화되고 다양한 조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목표로 했을지 모르겠다. 영종도에 가는 길에 하늘정원에 들러서 비행기 구경을 실컷 했다. 하늘정원에서는 인천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멀리 남쪽에서 한 점으로 나타나서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잠시 뒤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머리 위를 스쳐 간다. 창에는 ..

사진속일상 2022.02.18

아, 시원하다!

엔도 슈사쿠의 글에서 본 대목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정신도 좋고 정정한 분이었는데 하루는 며느리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먼저 옷을 벗고 욕탕 속으로 들어가더니 탈의실에 있는 며느리를 향해 말했다. "아, 시원하다!" 잠시 후에 며느리가 욕탕 속으로 들어가니 시어머니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걱정이 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할머니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이렇게 행복한 죽음도 있을 수 있구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이 "아, 시원하다!"로 너무나 행복하고 평온하게 세상을 뜨신 것이다. 글자 ..

참살이의꿈 2022.02.17

다읽(15) - 예수는 없다

세 번째 다시 읽는 책이다. 20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한 글에 가슴 한 편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번민만 있을 뿐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신앙의 정체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가 나오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선생의 인기를 반영하듯 넓은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청중 중에는 선생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 중에 그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또, 선생의 친구라면서 조영남 씨가 나와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 자..

읽고본느낌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