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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업

'돈 룩 업(Don't Look Up)'이 지구 종말에 관한 영화라고 해서 봤다. 지구와 혜성이 충돌하는 상황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인류의 안위보다는 제 이익이 우선인 정치나 미디어계를 비판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혜성 충돌에 관한 사실적 묘사는 부족하다. 여러 군데 건너뛰면서 봤지만 인상적으로 들리는 말이 있었다. '돈 룩 업(Don't Look Up)'과 '룩 업(Look Up)'이다. 하늘에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절체절명의 때지만 상반되는 두 목소리가 있다. "올려다보지 마!"와 "올려다봐!"다. "올려다보지 마"는 지구가 파멸하든 말든 자기의 기득권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너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길만 보라고 한다. 세월호에서 객실에 갇힌 학생들에게 ..

참살이의꿈 2022.01.13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시읽는기쁨 2022.01.12

멸공

나는 1970년대에 군 복무를 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구호는 '필승'이었다. 3년 동안 얼마나 '필승'을 외쳤던지 지금도 머리에 손이 올라가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멸공'은 익숙하지 않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부대에 갔을 때 '멸공'이라는 구호를 듣고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철책선이 지척이라 살벌한 기운이 후방과는 달랐다. 멸공(滅共)은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를 박멸한다는 뜻이다. 반공(反共)과는 어감이 다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없애야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멸공에는 진한 화약 냄새가 풍긴다. 50년 전 군대에 있을 때도 어색했던 '멸공'인데, 최근에 생뚱맞게 되살아났다. 신세계 그룹 부회장인 정용진이 SNS에 '멸공'을 올리니, 대선 후보인 윤석열이 다음날 이마트에서 가서 ..

길위의단상 2022.01.11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傳記)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데 음양으로 헌신했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아니라 도리어 우울하고 음습한 그늘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이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 둘은 1903년에 결혼했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뒤에 고백했다. 실제로 수학 분야에서는 아인슈타인보다 밀레바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밀레바는 훌륭한 품성에다 지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었..

읽고본느낌 2022.01.10

풍경(49)

도시를 지나는 하천은 빌딩에 둘러싸인 채 인공의 수로로 변해 자연스럽지 않다. 하천은 주변의 산과 어우러져야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다행히 경안천은 아직 하천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런 풍경 속에 있으면 아늑해지면서 가슴이 훈훈해진다. 자연에서 받는 위안만큼 따스한 것도 없다. 괜스레 마음이 헛헛한 날, 경안천의 겨울 풍경 속에 들다.

사진속일상 2022.01.09

경안천에 찾아온 고니

집 앞 경안천에도 고니가 찾아왔다. 대략 스무 마리 정도다. 작년에는 먼 걸음을 해야 만날 수 있었는데, 올해는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여기는 왕래하는 사람이 많고 서식 환경이 좋지 않아 계속 여기서 머물 것 같지는 않다. 사진에 보이는 고니 한 쌍은 연애 중이다. 일행과 떨어진 채 둘이 꼭 붙어서 서로 목을 비비며 애정 표시를 과하게 한다. 내년에는 새끼를 데리고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먹이를 찾는 청둥오리들이 고니 주위를 맴돈다. 고니나 청둥오리나 물 속 수초를 먹이로 하는데, 고니가 건져 올린 수초 조각을 얻어먹으려는 전략 같다. 목이 짧으니 깊은 물에서는 고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 청둥오리에 개의치 않고 둘 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염려스러운 건 경안천 물이 그다지 깨끗하지 ..

사진속일상 2022.01.08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 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양재에 나가 ..

시읽는기쁨 2022.01.07

마르코복음[35]

그리고 그들은 베싸이다로 갔는데, 사람들이 맹인을 예수께 데려와서 만져 주십사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려가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어 주신 다음, "무엇이 보입니까?" 하시자 그가 보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다니는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눈에 손을 얹어 주시자 그는 똑똑히 보게 되었다. 눈이 성해져서 모든 것을 훤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보내며 "마을로 들어가지는 마시오" 하고 이르셨다. - 마르코 8.22-26 예수가 치유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복음서에 예수의 치유 활동이 다수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갈릴래아 민중에게 예수는 환자의 병을 고쳐주는 치유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당시에는 예수 외에도 보수를..

삶의나침반 2022.01.06

스킨을 바꾸다

스킨은 블로그가 입는 옷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포털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스킨이 있지만, HTML이나 CSS에 능숙한 사람은 자신이 스킨을 만들어 개성을 뽐내기도 한다. 나처럼 컴맹인 사람은 기본 스킨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니 스킨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오랫동안 한 옷만 걸치고 사는 꼴이다. 지금 내가 쓰는 스킨이 오래되었으니 새로운 스킨으로 바꾸라는 통지가 티스토리 홈페이지에 떴다. 10년 전에 티스토리로 강제 이주하고 나서 받은 스킨을 지금까지 계속 써 왔다. 그런데 옛 스킨은 블로그 서비스에 제한이 있으니 새로운 반응형 스킨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현재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스킨은 열 종류가 있다. 어제는 이 열 종류를 돌아다니며 어느 것이 나한테 맞는지 체크하느라 하루를 헤맸다. 마치 옷가게에서..

길위의단상 2022.01.05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20세기 물리학과 수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을 중심으로 과학과 철학의 여러 쟁점을 소개하는 책이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서 같이 출퇴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서로 상이한 성격의 두 천재가 함께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추론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과학 작가인 짐 홀트(Jim Holt)가 썼다. 에는 과학과 수학, 철학의 다양한 분야가 논의되고 있다. 시공간과 우주, 상대성과 양자론, 수학계의 여러 쟁점들, 인류의 미래와 인간의 삶 등 다양하다. 다만 지은이가 20년 간 쓴 글 모음이라 내용의 일관성이 부족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기에는 넉넉하다. 책에는 여러 수학자와 수학적 논쟁이 나오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리에서 사용하는 도구적 수학..

읽고본느낌 2022.01.04

팔당에 찾아온 고니

팔당에서 열 달만에 다시 큰고니와 만난다. 지난봄에 시베리아로 가서 번식을 하고 겨울이 되면서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온 고니들이다. 고니는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데 약간 잿빛을 띄는 게 작년에 태어난 유조다. 얘들은 한국의 산천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고니의 평화로운 몸짓을 보다가 하남 당정뜰을 짧게 산책하다. 낮이 되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며 추위가 풀리는 것 같다. 얼굴을 간지리는 따스한 햇살이 반갑다.

사진속일상 2022.01.03

겨울바람 / 박근태

달가닥 달가닥 황소바람 춥다고 창문을 두드린다 달가닥 달가닥 방에 들어오려고 틈만 나면 빠끔빠끔 내려다본다 따뜻한 방에 잠시 쉬었다 가라고 커튼 걷고 창문을 열었다 조금 추웠지만 상쾌했다 새해 아침이다 - 겨울바람 / 박근태 새해 첫날이라고 뭐 별 다른 게 있겠는가. 카톡의 수신 표시만 유별나게 자주 눈에 뜨일 뿐이다. 창문을 여니 여느 아침처럼 냉기가 쏴 하고 몰려온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일흔이 되어서 맞는 새해는 덤덤하다. 기대도 없고 다짐도 없다. 이 나이가 되면 세월의 속임수를 어느 정도 눈치채기 때문이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할 텐데 과연 말처럼 쉬울까. 에 나오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움을 푼다[挫銳解粉]'는 구절을 떠올리며 음미해 본다. 나는 좀 더 무뎌질 필요가 있겠다. 그러..

시읽는기쁨 2022.01.01

경안천 버들(211230)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늘 여일(如一)한 모습은 편안하다. 이곳 경안천 버들 앞에 서면 그렇다. 산 능선은 유순하게 흐르고, 겨울 강물은 느긋하게 잠들어 있다. 가끔 바람이 억새의 머리를 흔들며 지나간다. 강 가운데 모래톱에서 너는 꼬리날개를 편 공작처럼 우아하게 서 있다. "세월이 빠르다", 세밑이면 자주 듣는 이 말이 올해는 뜸하다. 아마 코로나 탓이 아닌가 싶다. 답답함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시간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지도록 했을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나에게도 1년이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진 느낌이다. 우여곡절이 있었고, 한숨 쉴 일도 많았다. 세상사가 다 그러려니, 한다.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의젓하고 당당하게 살아야겠다. 경안천 버들처럼.

천년의나무 2021.12.31

마르코복음[3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서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는데, 예수께서 "주의하시오,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시오" 하고 엄명하시자 "빵이 없구나" 하고들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 알아차리고 말씀하셨다. "빵이 없다고 왜 수군거립니까?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까? 그토록 마음이 둔합니까?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습니까?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오천 명을 위해 빵 다섯 개를 떼었을 때 남은 빵조각을 몇 광주리에 가득 담았습니까?"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였다. 또 "사천 명을 위해 빵 일곱 개를 떼었을 때는 몇 바구니에 가득 담았습니까?" 하시니, "일곱입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까?" - 마르코 8,14-21..

삶의나침반 2021.12.29

물빛버즘(211227)

네 앞을 지나가며 '겨울나무'를 나직이 읊조린다. 오늘은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리는구나. '늘 한 자리'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 자리가 아닌가. 비가 오면 비와 한 몸이 되고, 눈이 오면 눈과 한 몸이 되고, 바람이 불면 바람과 한 몸이 된다. 너의 몸짓은 오로지 순리(順理)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공자가 말한 '태어나면서 아는 자[生而知之者]'가 바로 네가 아니던가.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천년의나무 2021.12.28

차가운 물빛공원

분당에 나갔다 오는 길에 물빛공원에 들렀다. 요 며칠 강추위가 찾아와서 호수 물이 꽁꽁 얼었다. 어제 기온은 영하 18도까지 내려갔다. 40년 만의 최저 기온이었다고 한다. 집에만 들어앉아 있어서 뉴스로만 접했지 체감은 못했다. 오늘은 날이 풀어졌다는데도 남은 냉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물빛공원 둘레길을 한 바퀴 돌면서 옆에 있는 야산 길도 조금 걸었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렸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하면서 반주로 소주 몇 잔을 즐겼다. 그리고 시공간의 환영(幻影)에 대한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요사이 읽고 있는 책 탓인지 몰랐다. 시간이 직선상의 절대적인 흐름이 아님은 이미 밝혀졌다. 공간 역시 무한대로 펼쳐져 있지 않은지 모른다. 종이 두께로 겹쳐져 있어도 인간의 의식은 무한대로 인식할 수 ..

사진속일상 2021.12.27

에브리맨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줄이다. 작가가 인간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병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 여기는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 의료가 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은 미국 작가인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브리맨(Everyman)은 '모든 사람', 또는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 주인공은 이름 대신 '그'라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라는 한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 이야기다. 중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삽입되지만 그것 또한 병이나 죽음과 연관..

읽고본느낌 2021.12.26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몇 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시읽는기쁨 2021.12.25

마르코복음[33]

바리사이인들이 와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는데, 그분을 떠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예수께서 당신 영으로 한숨을 쉬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찾는가? 진실히 말하거니와, 이 세대에는 표징이 주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버려두고 다시 배에 올라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셨다. - 마르코 8,11-13 4천 명을 먹인 기적 뒤에 바로 이어 나오는 대목이다. 예수를 주목하고 있었던 바리사이인들이 이 기적을 몰랐을 리가 없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특별함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드러내 보이는 기적이 없다. 그런데도 바리사이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기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

삶의나침반 2021.12.24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이라서 더 관심이 생겼다. 영상의 마술사라는 스필버그 감독이 링컨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감독이라는 걸 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1864년과 1865년에 걸친 링컨 대통령의 마지막 두 해를 집중적으로 그린다. 당시는 남북전쟁의 막바지였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13차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영화의 대부분이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원과의 줄다리기다. 당시 미국 정치의 내막을 잘 모르면 지루할 수 있지만 감독의 역량이 이를 커버한다. 정파들 사이의 불꽃 튀는 싸움이며, 뒤에서 조종하는 링컨의 포용력과 수완이 볼 만하다. 단조롭게 보일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연출의 힘이 ..

읽고본느낌 2021.12.22

그러려니

나는 '그럭저럭'이라는 말을 잘 쓴다. 누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말이다. "그저 그럭저럭 지내." 사전을 찾아보니 '그럭저럭'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 그렇게 저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덧'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지내는 상태를 그럭저럭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그럭저럭'보다 좀 더 진화한 말이 '그러려니'가 아닐까 싶다. '그러려니'에는 세상살이를 흘러가는 대로 관조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그럭저럭'보다 내 의지가 더 탈색된 느낌으로, 체념에 가까운 태도다. [체념(諦念)은 '살필 체(諦)'에 '생각할 념(念)'으로 원래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본뜻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일흔이 되니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21.12.21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배추 세 포기 절이려고 소금 항아리 열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 한 번 가지 않고 들리는 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낯선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힘이 빠진다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온다 큰언니의 번호를 눌러본다 소금 몇 공기 퍼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먹이자 이 바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말끝을 흐린다 내 요리책이었던 엄마 음식 만들다 말고 전화기만 들면 몇십 년 한결같이 초판 내용을 유지했었다 몇 번을 물어도 반갑게 말해주던 엄마 음성 그리워 배추를 절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물로 푹 절여진 얼굴 간이 밴 표정이 엄마를 닮았다 -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감사할 일 투성이네." 얼마 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들은 말이다. 아흔 노모가 시골에서 건강하게..

시읽는기쁨 2021.12.20

그 겨울의 선물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 빽빽할 정도로 승객이 많았다. 다행히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내 맞은편에는 한 아가씨가 책에다 시선을 묻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마주보기를 애써 피하며 창 밖만 내다봤다. 대학 1학년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었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1년은 어영부영 지나갔다.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서 낙제한 과목은 방학 때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2학기를 마쳤을 때 세 개 과목인가가 성적 미달이 되어 윈터 스쿨을 듣고 늦게서야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차는 원주역을 지나면서 한산해졌다. 셋씩 비좁게 앉았던 자리도 두 사람으로 줄어들며 여유로워졌다. 그제서야 앞에 앉은 아가씨와 말문을 트게 되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지만 계란 같..

길위의단상 2021.12.19

죽음을 배우는 시간

부제가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이다. 지은이는 한림대학교 류마티스내과 교수로 근무하는 김현아 선생이다. 의료 현장에서 여러 죽음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배우고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병원의 '죽음 비지니스'에 속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사실 죽음은 개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은 병과 죽음에서 예외인 듯 행동한다. 지은이의 말대로 사람들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죽음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화와 죽음을 병원의 일로 만들고, 그 시간에 노동을 하고 재화를 축적하거나 소비 생활로 삶을 즐기도록 선동한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노화와 죽음은 개인을 ..

읽고본느낌 2021.12.18

묵언수행 중인 뒷산

초겨울 뒷산은 묵언수행 중인 선방처럼 고요하다. 그 적요(寂寥)를 방해할까 저어되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처남 부부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연락이 왔다. 열이 나길래 미심쩍어 검사를 받았더니 부부가 동시에 확진이란다. 다행히 목이 간지러운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고 한다. 이웃의 한 분은 몸살기가 있어 약을 먹고 일시 괜찮아졌다가 다시 심해져서 병원에 갔는데 다음날 사망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뒤에 확인이 되었는데, 원인 불명의 폐 손상에 의한 급사였다. 가까이 지냈던 한 분이 인생이 허무하다면서 엉엉 우는 걸 봤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곁에까지 다가온 느낌이다.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졸지에 위급한 환자가 되기도 한다. 백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비..

사진속일상 2021.12.17

마르코복음[32]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다시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군중이 측은합니다.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굶주린 채 집으로 헤쳐보냈다가는 길에서 기진해 버리겠습니다. 더구나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여기는 외딴 곳인데 어디서 빵을 구해다가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대들은 빵이 몇 개나 있습니까?"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군중에게 명하여 땅바닥에 자리잡게 하시고, 빵 일곱 개를 들어 사례하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며 나누어 주게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작은 물고기도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역시 축..

삶의나침반 2021.12.16

친구와 지인

"나에게 친구가 있는가?" 가끔 해 보는 자문이다. 여러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친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친구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관계로서의 친구라면 다들 고개가 저어진다. 인생에서 한 명의 진실된 친구를 가지는 일이 쉽지 않다. 당구를 치거나, 바둑을 두거나, 산길을 같이 걷거나, 또는 학교 인연으로 만나서 옛날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임이 있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저 같은 즐길거리를 공유하는 아는 사이라고 해야 맞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관계는 아니다. 나를 성찰하게 해 주며 우정 속에서 서로 성장해 나갈 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잘 나갈 때는 ..

참살이의꿈 2021.12.15

소원수리 / 권순진

내 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오밤중 담 너머로 쌀 가마니 세 개를 넘기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부터다 불의에 수발을 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다 그 일을 보조하기 위해 방위 둘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후방 헌병대였고 쌀은 남아돌았다 수감자들에겐 정량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헌병들은 외식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음날 워커발로 조인트를 여러 차례 까였다 동료 사병들도 내가 포크 창에 찍힌 노란 단무지 같은 신세인 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비겁 위에 물구나무 선 연민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찍힌 건 나 말고도 더 있다 소원수리 때 '황소무사통과탕'에 대한 진실을 까발렸다가 필적감정으로 들통 난 K상병이다 나도 종이 앞에서 딸막딸막한 적은 있으나 다른 병사처럼 '현재 생활 만..

시읽는기쁨 2021.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