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45

응답하라 1988

고뿔이 찾아온 지 일주일 째다. 1년에 한두 번씩 겪어야 하는 연례행사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찬 기운을 좀 쑀다고 금방 탈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온실 속 화초처럼 바깥출입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거울 속 비실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쉰다. 머리가 띵 하고 얕은 기침, 콧물이 흐르는 감기 몸살이다. 심하면 병원이라도 가겠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니 버텨본다. 내일이면 덜해지겠지,하는 기대를 품게 하니 얄밉다. 요만한 병에도 내 일상은 깨어졌다. 독서와 블로그 글쓰기가 전혀 안 된다. 아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는 드라마에 빠지는 게 제일 낫다. 이번에 고른 드라마는 '응답하라 1988'이었다.  2015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와 ..

읽고본느낌 2024.12.30

유유히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12월 3일 이전에 고른 것이지만 묘하게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맞아떨어졌다. 어제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이 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광란의 칼춤'을 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만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8년 전의 촛불 시위와 달리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많이 나왔다. 정치에 무관심한 MZ세대라고 폄하했었는데 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축제 마냥 즐기는 그..

참살이의꿈 2024.12.15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 뜨거웠던 올여름에 본 영화들이다. 밖은 펄펄 끓는데 거실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1. 디 아워스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1950년대와 2000년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그려진다.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지, 여성으로서의 고민과 불안 등 정체성을 묻는 영화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속앓이를 잘 표현했다. 제도적 관습과 틀 안에서 해방을 꿈꾸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일부분이나마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2. 내 사랑  캐나다 화가인 모드 루이스(Maud Lewis, 1903~1970)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모드 루이스를 처음 알게 되었..

읽고본느낌 2024.09.07

내 어머니 이야기

김은성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의 일생을 그린 4권으로 된 만화책이다. 전부터 이 책의 유명세를 알고 있었으나 만화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가벼운 만화가 어떨까 싶어 도서관 서가에서 꺼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마치 판화와 같은 흑백의 그림이 주는 효과가 더해져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가의 어머니는 함경도 북평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며 살다가 6.25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북과 남에서 일제 강점시대와 전쟁, 분단과 근대화 과정을 전부 체험한 것이다. 한 개인의 일생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험난한 세월을 견뎌낸 한 여인의 사연이 안쓰러우면서 따뜻하다. 특히 함경도에서 보낸 어머니의 소녀 시절 이야기는 옛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내 고향 마을..

읽고본느낌 2024.08.20

떡국 한 그릇 / 박남준

섣달 그믐 어머니의 한숨처럼 눈발은 그치지 않고 대목장이 섰다는 면소재지로 어머니는 돈 몇 푼 쥐어 들고 집을 나서셨다 사고 싶은 것이야 많았겠지요, 가슴 아팠겠지요 섣달 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 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다들 있는 것인디 돈 들일 것 있느냐고 못난 아들 눈치보며 두부전, 명태전을 부치신다 큰형이 내려오면 맛보이신다고 땅 속에 묻어 뒀던 감을 내어 오시고 밤도 내어 오신다. 배도 내어 오신다 형님의 방에는 뜨근뜨근 불이 지펴지고 이불 호청도 빨아서 곱게 풀을 멕이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 오것제 토방 앞 처마 끝에 불을 걸어 밝히시고 오는 잠 쫓으시며 떡대를 곱게 써신다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지나는 바람소리 개 짖는 소리에 가는 귀 세..

시읽는기쁨 2023.01.24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오누이 / ..

시읽는기쁨 2023.01.16

당연한 일은 없다

기억할 때마다 낯 부끄러워지는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외할머니가 살림을 맡으시고 동생과 함께 서울에 살 때였다. 부모님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날은 왠지 심사가 삐딱했었던 것 같다. 나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당연한 일 가지고."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다면 저 놈이 내 고마움도 모를 터가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이 말을 부모님한테 전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모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말은 내 금기어가 되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

참살이의꿈 2022.10.19

한 장의 사진(32)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분기점을 통과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험난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봉우리인지는 넘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지나온 길을 멀리서 조망하게 될 때 삶의 매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능선길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볼 때 지나온 산봉우리들의 모양과 높이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몇 차례 파고가 밀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30대 중반에 경험했던 디스크 수술이었다. 아마 1986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 불릴 만큼 - 그 시절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허리를 절개하고 칼로 디스크를 잘라내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던 때였다.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도..

길위의단상 2022.04.18

가장의 밤 / 김용화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 가장의 밤 / 김용화 가장으로서의 남자에게는 두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내 울타리를 소중히 지키려는 마음과, 경계에 갇힌 답답함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의 세 연과 끝 연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 나에게는 읽혔다. 나는 늘 뒤쪽이 승했다. 반면에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넘쳐나는 것 같다. 엊저녁에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아나운서가 소개해 주어서 이 시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 이불 덮어주는 일도, 딸 지갑에 지폐 찔러주는 일도, 아들놈 우산 갖다주는..

시읽는기쁨 2022.02.26

한 장의 사진(28)

귀향(歸鄕)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고, 귀성(歸省)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다. 귀성에는 '살필 성(省)'이 들어 있듯이 물리적인 거리 이동만 아니라 부모를 뵙는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는 행동에는 귀성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이 설날인데 귀성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성인이 된 뒤로 50년이 흘렀는데 설 명절은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추석은 몇 차례 못 내려간 적이 있지만, 설날 당일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는 일은 철칙처럼 지켰다. 그런데 올해부터 달라졌다. 이젠 교통 정체를 견디며 이동하기도 힘들고, 형제가 명절에 모인다 한들 서먹하니 따스한 귀성의 의미가 별로 없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께 ..

길위의단상 2022.02.01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배추 세 포기 절이려고 소금 항아리 열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 한 번 가지 않고 들리는 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낯선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힘이 빠진다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온다 큰언니의 번호를 눌러본다 소금 몇 공기 퍼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먹이자 이 바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말끝을 흐린다 내 요리책이었던 엄마 음식 만들다 말고 전화기만 들면 몇십 년 한결같이 초판 내용을 유지했었다 몇 번을 물어도 반갑게 말해주던 엄마 음성 그리워 배추를 절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물로 푹 절여진 얼굴 간이 밴 표정이 엄마를 닮았다 -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감사할 일 투성이네." 얼마 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들은 말이다. 아흔 노모가 시골에서 건강하게..

시읽는기쁨 2021.12.20

구들목 /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 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 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 방바닥만큼 넓었다 차가워지는 겨울이면 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 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 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 온기를 안고 숨어있었다 오포 소리가 날 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 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 주루르 눈물을 흘렸다 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 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 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 사랑을 키웠다 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 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 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 콩나물은 자랐고 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 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 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였다 구들목 중심에는 책임이 있었고 때론 배려..

시읽는기쁨 2021.02.28

공휴일 /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히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공휴일 / 김사인 저 시절 중랑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을까? 밑으로는 시커먼 중랑천이 흐르던,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래도 서울 구경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가 보다. 사진천국이 된 지금는 누구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

시읽는기쁨 2020.12.17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작은 아씨들

영화 '작은 아씨들'을 봤다. 소설을 안 읽은 탓인지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94년에 나온 '작은 아씨들'을 추가로 봤다. 1994년 영화는 시대순으로 진행되어 이해하기가 쉬웠다. 왼쪽이 2019년 영화 포스터이고, 오른쪽이 1994년 포스터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올해 아카데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여러 부문에서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어선지 다정다감하면서 아기자기한 여자들의 세계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소설을 소재로 한 두 영화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어 더 흥미로웠다. 35년 전에 나온 1994년 작품에서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났고, 2019년 작품은 현대적이면서 다이내믹했다. 19세기 중반을 재현한 면에서는 ..

읽고본느낌 2020.03.26

비밀번호 / 문현식

우리 집 비밀번호는 0000000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000 0000는 엄마 00 000 00는 아빠 0000 000는 누나 할머니는 0 0 0 0 0 0 0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 비밀번호 / 문현식 착상이 빛나는 동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의 리듬으로 엄마, 아빠, 누나, 할머니를 구별하는 예민함에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빨리 얼굴 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어락 소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중에서 백미는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다.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눈이 침침해서 숫자판의 번호가 잘 안 보였을 것이다. '보 고 싶 은 / 할 머 니'라고 생전에..

시읽는기쁨 2020.03.23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둘의 조합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새로운 시도는 상찬받을 만하다.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인데 이 영화는 솔직히 기대에 못 미쳤다. 동양과 서양의 어색한 동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되브)는 성공한 여배우인데 일밖에 모른다. "나쁜 엄마, 나쁜 친구가 되어도 괜찮아. 여배우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만족해." 이런 멘트가 파비안느의 인생관을 말해준다. 당연히 딸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엄마를 못마땅해하는 미국에서 사는 딸이 가족과 함께 엄마를 찾아온다. 엄마의 자서전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부딪치고 갈등을 겪은 뒤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읽고본느낌 2019.12.14

식구

가족(家族)은 나를 기준으로 배우자와 부모, 자식까지를 가리킨다. 가까운 혈연관계로 맺어진 집단이다. 반면에 식구(食口)는 혈연보다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같이 음식을 먹으며 생활한다면 한 식구로 보는 게 보통이다. 가족과 식구를 겸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가족이면서 식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식구를 직역하면 '먹는 입'이니 그다지 아름다운 말은 아니다.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 제목을 '식구'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는 김별아 작가의 체험적 가족 이야기다. 부제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인데, 가족만큼 빛과 그늘의 양면성이 두드러진 집단도 드물다. 위로와 따스함의 원천이면서 상처와 집착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거의 유일한 피난처지만, 어떤 때는 족쇄가 ..

읽고본느낌 2019.10.10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고미숙 선생의 글을 읽다가 꽤 오래전에 본 이 영화가 생각났다. 글 제목이 '스위트 홈은 없다'다. 가족은 '상처의 온상'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화폐, 권력과 함께 스위트 홈에 대한 망상을 우리가 깨뜨려야 할 벽으로 본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 나오는 가족 이야기는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뺨친다. 불륜과 돈, 부모 형제간의 갈등이 아버지 장례식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폭발한다. 메릴 스트립은 약물 중독에 구강암 환자로 나온다. 그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세 딸은 내면에 상처를 갖고 있다. 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선인장 같다. 결국 각자는 뿔뿔이 흩어진다. 서로에게 절망하고 해체된 다음에야 다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볼 여유가 생긴다. 내면의 상처를 극복해야 상처의 대물림도 막을 수 있고, 다시 ..

읽고본느낌 2018.12.17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영화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고레에다 감독 작품은 거의 다 보았다. '아무도 모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 '엔딩 노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리어리' '환상의 빛' '태풍이 지나가고' '세 번째 살인' 등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어느 가족'은 유감스럽게도 비켜 지나갔다. 고레에다 감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상을 정감있게 담아낸다. 화려한 기교나 볼거리는 없어도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이나 인물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사소한 데서 삶의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평범 속의 비범이랄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지는데, 서정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

읽고본느낌 2018.10.30

어느 휴일 하루

경안천을 산책하다가 하늘에 홀려서 석양을 기다리다. 한 시간 산책길이 세 시간으로 늘어났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그림에 가슴이 뛴다. 그냥 흘낏 일별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이 야속하다. 이전, 평화로운 청석공원이다. 경안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새로 생겼다. 건너편으로 산책길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새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생겨 좋다. 가을이 되면 경안천은 억새와 갈대밭이 된다. 여기는 인간이 손 대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아직은 남아 있다. 더 이전, 둘째가 찾아와서 한강변 '강마을 다람쥐'에 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진속일상 2018.09.28

대물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어쩌다 아버지 옆에서 잠자게 되면 숨소리조차 내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따라서 아버지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서워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들은 기억도 별로 없는데, 그냥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엄격한 원칙주의자셨다.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를 어려워했다고 뒤에 들었다. 아버지가 길을 가시면 미리 피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면장으로 계실 때 지역 국회의원이 면사무소를 방문했다. 국회의원이라고 내가 왜 마중 나가냐며 아버지는 면장실에서 그를 맞았다고 한다. 그만큼 꼿꼿하신 분이었다.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바가 한..

참살이의꿈 2017.07.05

졸혼

일본에서는 노년층에서 '졸혼(卒婚)'이 유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혼인 관계를 졸업한다'는 뜻이다. 졸혼은 이혼이나 별거와는 다르다. 사이가 나빠서 갈라서는 게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따로따로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상대의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해혼(解婚)'이 있다. 역시 '혼인 관계의 해제'라는 뜻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남자가 가장의 임무를 마친 뒤 구도의 삶을 원하면 해혼식을 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간디는 삼십 대 후반에 아내와 해혼을 합의하고 인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해혼 문화가 존재한다. 졸혼은 장수 사회의 한 단면도다. 대개 60대 중반이 되면 자식을 짝지어 보내고 부부만 남는다. 옛날 같..

길위의단상 2016.05.15

소금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구조를 드러내 보이겠다고 했지만,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러워 효과가 반감된다.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 소설 은 우리 시대와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자본주의는 빨대와 깔대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란 작가의 말에 동의하지만 아버지만 희생자라고 할 수도 없다. 피해자는 아버지를 포함한 체제 속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소설은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선명우는 열심히 일해서 회사의 상무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가정에서 그의 자리는 없다. 아내와 세 딸의 화려한 소비를 뒷받침해주기 위한 돈 버는 로봇일 뿐이다. 별나긴 하지만 우리 시대 아버지의 표상으로 봐도 무난하다. 어느 날 선명우는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

읽고본느낌 2016.04.27

손주와 나들이

손주가 찾아와서 나흘째 머물고 있다. 한 번은 서울대공원으로, 또 한 번은 에버랜드로 나들이를 나갔다. 자기 의사 표시가 분명한 아이인데, 아직은 낯선 광경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나이다. 내년쯤이나 되어야 동물들과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두 군데 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에버랜드는 방학이 끝난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밤이 될수록 더했다. 소음과 번쩍이는 조명에 나 역시 쉽게 적응이 안 되었다. 손주와 함께 나들이하는 건 기사에, 포터에, 지킴이가 되는 것. 그래도 즐거운 노동이라는 것.

사진속일상 2015.08.18

이소 / 송진권

오빠랑 언니들도 아까부터 지달리구 있는디 뭘 그르케 자꾸 꾸물대는 겨 그르케 자꾸 꾸무럭거리믄 떼 놓고 갈 텡께 알아서 햐 어여어여 날 새기 전에 가야 하니께 싸기싸기 내려오니라 비얌이랑 쪽제비가 일어나기 전에 어여 물로 가야 하는디 당최 쫑마리가 저런다니께 엄마두 이제 몰러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햐 엄마 원앙이가 언니들 앞에 서자 일곱 마리 원앙이가 졸래졸래 따라간다 멈칫대던 막내가 그때사 느티나무 고목 둥치에서 뛰어내린다 엄마 같이 가 하냥 가자니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둥구나무 딱따구리가 뚫어 놓은 원앙이네 둥지 - 이소 / 송진권 원앙이 가족의 모습이 정겹다. 삶의 기본에서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차이가 없다. 동물이 새끼를 돌보고 기르는 지극함은 인간에 못지않다. 다른 점이라면 새끼가 성장하..

시읽는기쁨 2015.06.13

스모그에 갇힌 서울

한반도가 엿새째 미세먼지에 갇혔다. 여기에 스모그까지 더해져 서울의 공기는 최악이었다. 그래도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으로 떨어진다길래 배낭을 멨는데 별로 잘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나마 산에서는 덜 했는데 도심으로 내려오니 목이 칼칼하고 눈이 따끔거리는 게 도저히 사람이 숨 쉴 공기가 아니었다. 참말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닌가. 생명의 기본인 물과 공기를 더럽혀 놓고는 행복과 웰빙을 찾느라 난리니 말이다. 공기 청정기를 틀어놓아야 안심이 되는 게 현실이 되었다. 물을 사 마시듯이 공기마저 사서 들고 다니며 호흡해야 할 시대가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착잡한 심정으로 아내와 독립문에서 출발하여 인왕산을 넘어 창의문까지 걸었다. 서울을 뜬지 처음으로 다시 찾은 인왕산이었다. 인왕산은 338m지만 독립문 쪽..

사진속일상 2014.03.01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한국 어머니들의 과도한 자식 집착에 대해 사회학자가 분석한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제일 큰 원인은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고 부부관계가 껄끄러우니까 남는 에너지를 자식에게 쏟는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남편은 바깥 일이고, 아내는 자식이다. 핑계는 가족을 위한다지만 실은 배우자에게서 생긴 공허함을 잊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일 뿐이다. 아이를 잘 기르고 싶다면 먼저 부모가 행복해야 한다. 집에는 냉기류가 흐르는데 자식은 행복해지라고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뿌리가 병든 나무와 같다. 아무리 가지를 치료하고 정성을 쏟아도 뿌리가 병들어 있으면 허사가 된다. 건강한 가정의 바탕에는 성숙한 개인이 있다. 성숙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끼리 결혼하면 건강한 가정을 바라기 어렵다. 독립적이지 못한..

참살이의꿈 2013.12.21

축생의 시대

제 자신과 제 새끼만 아는 시대다. 인간이 축생(畜生)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축생만도 못하다. 짐승은 제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내보낼 줄 안다. 그러나 인간 축생은 죽을 때까지 품안에 가두려 한다. IMF 쇼크 이후 한국 사회가 변했다고 한다. 위기가 결국 생존에만 집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 먹을 양식은 갖고 태어난다는 믿음에서 내가 다 챙겨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뀌었다. 깊이가 없는 민족은 고통을 배움의 기회로 삼지 못한다. 사회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파이 조각만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툰다.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새끼 사랑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가정이라는 울타리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제 새끼만 쳐다보느라 눈이 멀어 버린다면 배 부른 돼지에 다름 아니다...

참살이의꿈 2013.08.03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얼마 전 KBS TV '아침마당'에 이근후 선생 부부가 출연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름답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마침 선생이 펴낸 책이 있어 찾아 읽어 보았다.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이라는 부제가 붙은 라는 책이다. 선생은 굉장히 활발하고 적극적이시다.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분이다. 이화여대 정신과 교수로 퇴직하신 뒤에도 네팔 의료봉사, 청소년 상담, 보육원 봉사, 석불 연구, 부모와 노인 교육, 연구 활동 등을 왕성하게 하신다. 특히,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 졸업하기도 했다.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이나 당뇨, 고혈압, 통풍, 디스크 등 여러 가지 병도 장애가 되지 못한다. 선생의 장..

읽고본느낌 201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