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18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 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 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광주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우연히 후배 B를 만났다. 성체를 영하는 줄에 그가 서 있었다. 그만의 약간..

시읽는기쁨 2012.08.26

장자[216]

장자가 장차 죽으려 하자 제자들이 후한 장례를 치르려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로 관곽을 삼고 일월로 구슬을 두르고 별들로 거울을 삼았고 만물로 제물을 삼았으니 이미 장례를 다 준비했거늘 어찌 부족하다 하며 무엇을 더하려 하느냐?" 제자가 말했다. "까마귀와 솔개가 선생을 뜯어 먹을까 염려됩니다." 장자가 말했다.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아래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되어야 하거늘 이들에게서 빼앗아 저들에게 주려 하니 어찌 편벽됨이 아니겠느냐?" 莊子將死 弟子欲厚葬之 莊子曰 吾以天地爲棺槨 以日月爲連璧 星辰爲珠璣 萬物爲재送 吾葬具 豈不備邪 何以加此 弟子曰 吾恐烏鳶之食夫子也 莊子曰 在上爲烏鳶食 在下爲루蟻食 奪彼與此 何其偏也 - 列禦寇 6 생사를 초월한 장자의 스케일이 느껴지..

삶의나침반 2012.08.20

아름다운 마무리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최악의 경우도 상상된다. 암에 걸려 고통에 시달린다든지, 치매로 정신줄을 놓아버릴까 봐 겁이 난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선종(善終)'이라는 말 그대로 아름답게 이 세상을 뜨고 싶다. 스코트 니어링이 떠오른다. 그분은 100세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써 품위 있는 죽음을 만들었다. 옆에서 도와준 아내의 역할도 컸다. 작년에 봤던 영화 '청원'도 생각난다. 안락사를 다룬 내용인데 전신마비의 고통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약물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의 순간이 친구들이 모여 노래하고 추억하는 즐거운 파티가 되었다. 박기호 신부님이 쓴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끝 부분에 어..

읽고본느낌 2012.08.18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낯익은 사람들이 한둘씩 내린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겠다 버둥대다가 우악스런 손에 끌려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웃음을 머금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깥은 새까맣게 얼어붙은 어둠 열차는 그 속을 붕붕 떠서 달리고 나도 반쯤은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땀내 비린내로 숨막히는 열차 속 새 얼굴들과 낯을 익히며 시시덕거리지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음을 잊고서 -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몇 년 전 직장 건강 검진에서 심전도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재검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왔지만 무시했다. 요사이 겨울 찬 바람 속을걸을 때면 가슴에 통증이 올 때가 있다. 정말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 쪽 질병은 대개 급사로 이어진다...

시읽는기쁨 2012.01.15

크나큰 수의 / 김왕노

어머니 요양원에 계신다. 요양원에 가면 둘째 시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나 미안하지 말라고 병들고 늙으면 요양원에 있는 것이 어머니 편하고 자식들 다 편한 일이라며 누누이 말하지만 요양원이 현대식이라 위생적이고 넓고 의료시설 잘 갖춰진 곳이지만 집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안드리지 못하는 마음이 요양원에 면회 갔다 올 때마다 무릎이 세상 모서리에 부딪친 듯 생채기 하나 둘 늘어난다. 늙어도 어머니 욕심이 없을까? 어머니와 친한 할머니 자식이 비싸고 질 좋은 수의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날마다 자랑이라고 해서 어머니가 죽으면 뭐 입고 자시고 알기나 아나, 그냥 구름이니 새벽이니 바람이니 햇살이니 다 크나큰 수의라고 여기며 그보다 더 큰 행복 없다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선소리처럼 앞세우..

시읽는기쁨 2011.07.04

염장이와 선사 /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고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 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은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

시읽는기쁨 2011.02.06

나의 임종은 / 김관식

남향 미닫이, 재양한 마루끝에 귀여운 젖먹이 무릎에 안고 앉아 조용히 엄마의 얼굴처럼 화색이 되는 자애로운 하늘 아래 하찮은 미물들과 푸나무 떨기조차 은총에 젖어 축복을 받는 오늘은 춘분! 낮과 밤이 같은 날. 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 비인 방에 호올로 누워 천고의 비밀을 그윽히 맛보노니... 가여운 아내 아들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일랑 들레지 말라. 그동안 신세끼친 여숙을 떠나 미원한 본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벌판에 내던지면 소리개와 사갈의 밥이 될 게고 땅에 묻으면 아미와 구더기의 즐거운 향연. (발가숭이로 왔으니 발가숭이로!) 불타여. 피 빨아먹고 산 공변된 공변된 업이요 보가 아니오니까. 백운대 위에 세워 풍장을 해도숱연키야 하..

시읽는기쁨 2011.01.29

언젠가는 / 조은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 언젠가는 / 조은 ‘HODIE MIHI, CRAS TIBI’. 서양의 묘지에서..

시읽는기쁨 2010.12.07

행복전도사의 자살

‘행복전도사’로 불리던 최윤희 씨가자살해서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부부동반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생을 마감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고도 착잡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한 동료는 그럼 그동안 사기를 친 게 아니냐며 반문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 못한다. 방송을 통해 강의를 몇 번 들은 적밖에 없다.스무 권이나 되는 책을 썼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전업주부에서 성공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행복론에 대한 스타강사로 변모한 그녀의 경력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경탄을 샀다. 현란한 말솜씨와 거침없는 자기표현으로 그녀의 행복론은 인기..

참살이의꿈 2010.10.11

종시 / 박정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종시(終詩) / 박정만 몇 해 전, 박정만 시인을 그린 TV 다큐멘터리를 아프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 시단에서 가장 순수하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꼽혔던 시인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얽혀 단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호된 고초를 겪는다. 야만의 시대였던 1981년의 일이었다. 폭력과 고문으로 심신이 망가진 시인은 술에 의지해 살며 무너져 갔다. 직장도 잃고, 아내도 떠나가고,모든 것을 잃은 그는 세 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죽어갔다. 연약한 영혼이 감당하기에 한 시대는 너무나 잔인했다. 시인은 죽기 전 몇 달 동안 술을 양식으로 삼으며신 들린 듯 수백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제목이 없는 이 시도 그가 죽고난 뒤 발견된 것이다. 그때 권좌에 앉아 호령하던..

시읽는기쁨 2009.10.09

세월이 오며는 / 김대중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넓고 큰 광장에서 춤을 추면서 깃발을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얼굴을 부비댄채 얼싸안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눈물과 한숨을 걷어치우고 운명의 저줄랑 하지 말 것을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입춘의 매화가 어서 피도록 대지의 먼동이 빨리 트도록 생명의 몸부림을 끊지 말아요 - 세월이 오며는 /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오늘 열린다. 약 3 개월 사이에 전직 두 대통령이 운명하시게 되었다. 묘하게도 두 분 다 진보쪽을 대표하는 분들이어서 더욱 아쉬움이 크다. 이 시는 김 전 대통령이 1973년 6월 16일 일본에서 미국 달라스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쓴 것으로적혀 있다. 당시 비행기에서 이 시를 받은 사람이 이번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19..

시읽는기쁨 2009.08.23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도 유언장을 써 놓을 필요를 느낀다. 죽음이란 게언제 어떤 방법으로 찾아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말짱한 가운데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과정이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가족에게는 미리 내 의사를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유언장에는 현대 의료기술에 의한 생명 연장책에는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다. 어떤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경우 자연스레 죽음에 이르는 길을 나는 택한다. 다만 병원으로부터는 고통을 줄이는 한도 안에서만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장기기증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 다른 생명을 살리는 차원에서는 공감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기술적인 방법에 의해 조작되는 점은 ..

참살이의꿈 2009.08.18

풍장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

시읽는기쁨 2009.08.17

이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1909년에 나셨으니 꼭 100년 동안의 지상에서의 삶이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세 딸을 홀로 키우신 뒤 나중에는 큰딸 집에서 50여 년을 사셨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외손자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넋두리를 자주 들었는데 정말 말처럼 되었다. 마지막 임종이라도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연이 닿지 않았다. 말년의 치매를 앓는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사람을 찾고 기다렸다. 혼자 있는 걸 못 견뎌하셨다. 그만큼 외할머니의 일생에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쌓여 있었다. 이제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니 좀더 살갑고 다정하게 대해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짜증이 났을 때는 좀 빨리 가셨으면 하고 바랐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옆에서 딸의 시중을 받으시며 천수..

사진속일상 2009.08.1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눈물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노 대통령 개인에 대한 연민과 함께그 무언가에 대한 분노가 나를 흔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추모 열풍은 의외이다. TV에서는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며 참배하는 사람들과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코 끝이 찡해지는 광경이다. 우리는 불과 며칠전만 해도 그의 도덕성을 비난했다. 심지어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는 어느 자리에서나 감히노 대통령의 칭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롱과 힐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서민들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죽음과 함께 일순간에 변했다. 물론 노무현을 반대한 사람은 지금 침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서 방관자거나 아니면 ..

길위의단상 2009.05.26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 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 어떤 채..

시읽는기쁨 2009.02.14

히말라야 / 이시영

라다크에서 어느 할아버지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집앞 흔들의자에 앉아 소년처럼 잠시 붉은 얼굴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사람의 삶이 아직 광활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 - 히말라야 / 이시영 히말라야 기슭에 사는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닮았다. 라마 호텔 롯지의 늙은 주인의 얼굴에서도 문명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간적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물론 라마 호텔은 이름만 호텔이지 겨우 바람만 막는 허술한 숙소였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마저 궁핍한 것은 아니었다. 히말라야 쪽 네팔인들은 티베트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나이가 든 그들의 모습에서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디언의 풍모가 연상되었다. 사람의..

시읽는기쁨 2009.01.31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생전 처음 가본 나라에 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늙은 밀수꾼모양 국경선 길잡이나 해야겠지요. 고향 사람 아는 사람 데려오는 심부름이나 맡겠지요. 신출내기들이니 쉬운 일이나 시키겠지요. 사자(使者)밥을 먹으면서 떨지 마라 두려울 것 없다 손을 내밀겠지요. 나도 엊그제까진 여기 사람이었다, 담배를 건네겠지요. 그새 그쪽 편을 들면서 우쭐대겠지요. 그래도 지금 당신이 가야 할 나라는 얼마나 친절한 나라냐. 세상에, 어느 나라가 장씨나 이씨 한 사람을 위해 안내원을 보내주더냐.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기행문 한 편 없는 나라가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그곳의 우두머리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나라 체면이 구겨져서 안 되겠다 그러면 어쩌랴. 지위고하 막론하고 혼자서 걸어오게 하라, 물어물어 찾..

시읽는기쁨 2008.10.11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시읽는기쁨 2008.10.06

친구가 떠나가다

친구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났다. 인간 세상에서 만나면 이별이 있고, 이별은 다시 만남을 전제로 하건만 이렇게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이별도 있다.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 사이였다. 같은 마을에서 산 것은 아니지만 여러 명의 동기 중에서도 닮은 점이 많아둘이는 가까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헤어져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초등 동기모임이 만들어지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통하는 공통점을 많이 발견했다. 아주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심중으로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투병 중에서도 나와 통화를 할 때면 자신의 처지보다는 도리어 나를 더 위로해 주었다. 친구가 떠나고 나니 생전에 좀더 자주 찾아가서 얼굴을..

사진속일상 2007.06.21

도심길을 쓸쓸히 걷다

날씨는 더없이 맑은데 마음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그러면 표정에 금방 드러나는가 보다. 가까이 있는 동료는 무심한데, 멀리 있는 동료는 걱정을 해준다. 어제 저녁에 친구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퇴근하며 청운동에서 서울역까지 도심길을 따라 걷다. 인간의 도시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는데,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 오늘은 무척 낯설게 보인다. 병상에서 의식이 오락가락한다는 친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서는 이승에서의 이별을 준비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낮의 도시는 뜨겁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걷고 싶지만 도시 보도를 걷기가 쉽지 않다. 부근의 성공회 성당에 들어가서 잠시 쉬다. 결혼식이 있었는지 성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미소가 햇살만큼 환하다. ..

사진속일상 2007.06.16

이별 의식

친척 한 분이 돌아가셨다. 노령이고 병중이라 이미 예상된 죽음이었지만 지상의 남은 사람들이 치르는 마지막 이별 의식은슬프다. 그리고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장례 의식은 망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을 위한 절차라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런 의식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는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깨닫게 된다. 남은 사람은 먼저간 사람을 슬퍼하지만 백 년이 지나지 않아 여기 모인 이들 역시 예외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분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간을 치매 요양원에서 보내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해 자식들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 몇 달 전에 찾아갔던 그 요양원의 분위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거기는 가정에서 돌보기 힘든 치매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

사진속일상 2007.01.31

한 여인의 죽음

장맛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한 여인의 죽음이 내 마음을 아프고 무겁게 짓누른다. 새만금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계화도 어민 류기화 님이 불의의 사고로 별세했다는 소식 때문이다.갯벌의 그레질로 생계를 이어오던 님은 여느 때처럼 백합을 잡기 위해 갯벌에 나갔다가 깊은 곳에 빠져 변을 당했다고 한다. 님에 대해서는 새만금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어느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 프로그램 제목이 '새만금의 여전사'였다고 기억하는데, 야성적인 모습으로 새만금 반대운동에 앞정서는 모습을 감명 깊게 보았다. 동시에 방관자로 남아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게 느껴졌었다. 새만금 방조제 둑이 완성되면서 바다 물길이 달라지고 군데군데 뻘이 생겨, 님은 이같은 뻘에 빠져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사진속일상 2006.07.15

신비체험과 임사체험의 불가사의

인간의 신비한 정신 현상 중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종교적 신비체험과 임사체험이 아닐까 싶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성인들, 그리고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그들이 경험한 종교적 신비체험이 늘 따라다닌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은 것으로 암시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돈오(頓悟)라고 부르는 깨달음의 순간도 이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종교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힌두교의 요가 수행자들에게서는 이런 체험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오랜 침묵이나 기도, 또는 은둔과 고행을 통한 감각의 제어에서 그런 체험은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찾아오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런 신비체험에서는 주로 빛과 소리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런 종교적 신비체험의 특징은 체험 후에 완전..

참살이의꿈 2006.04.27

품위 있는 죽음

동료의 부친 되시는 분이 암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을 마다시고 5개월여 생존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일흔이 넘으신 연세에 그분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신 것이다. 아마 수술을 했다면 몇 년은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자식들이야 수술 하시기를 강권했지만 본인이 극구 반대하셨다고 한다. 암 말기의 고통은 진통제로 완화시키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 어느 집 어머니가 역시 암에 걸리셨다. 역시 많은 연세 탓에 수술 여부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들이 수술을 시켰고, 어머니는 지금 두 해째 계속 항암 치료를 받고 있지만 거동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 간병 문제로 자식간에 알력이 생겨 지금은 형제간의 의에 금이 가버렸다. 수술을 강력히 희망했던 딸들도 이젠 나 몰라라 하고, 어머니는 본..

길위의단상 2005.12.27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 귀천 / 천상병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인품이 온화하고 따스했음을 압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 사랑을 어찌 버려두고 가실 수 있었나요? 다시 못 올 먼 길을 어찌 그리 빨리 재촉해 떠나셨나요? 남은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래도 당신은 행복했었다고 얘기합니다. 병고에무너져 내리는 당신을 보며 유약하다고 탓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당신..

시읽는기쁨 2004.10.19

처남의 10주기

꼭 10년 전이었다. 강릉에 살고 있던 처남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평소 건강하고 활동적인 사람이었기에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달려갔다. 처남은 병원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연구실에있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병명도 원인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를 며칠, 위험하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울 중앙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역시 응급실에 있으면서 종합 검진을 받았다. 의사들도 처음에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급성 폐암으로 진단이 나왔다. 너무나 악화된 상태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의사 소통을 하기도 했으나곧 혼수 상태로 빠져 들었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만났던 짧은 면회 시간, 귀..

길위의단상 2003.10.22

산다는게 뭔지

가을은 떠나가는 계절인가 보다. 일주일 사이에 지인 세 사람의 부음을 들었다. 오늘 새벽에는 친구의 장례 미사에 다녀왔다. 앞 자리에 앉은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의 처진 어깨가 더욱 슬펐다. 지금까지도 기분이 우울하고 스산하다. 나도 언젠가는 앞자리에 앉아 가까운 이를 떠나 보내는 이별 의식을 치러야 하리라. 그리고 또 언젠가는 나 자신이 이 의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리라. 나는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이다. 가장 분명한 이 사실을 또 대부분 가장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마치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듯이 말이다. 늘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산다는게 뭔지 정말 모르겠다. 이런 걸 보면 뭘 얻었다고 기뻐하고, 뭘 잃었다고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나는 이내 과거의..

길위의단상 200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