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28

만약은 없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이라는 부제 그대로 병원 응급실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연들을 날것 그대로 기록한 책이다. 긴박한 죽음을 마주하는 응급실 의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매순간 선택에 직면한다. 만약 다른 처치를 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라는 의문과 후회는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는 일회성인 인간의 삶과 죽음을 대변하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응급의학과를 전공한 남궁인 선생이 썼다. 책에 실린 38개의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과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수많은 죽음을 직접 접하면서도 지은이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죽음에 대해 쉽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것이 타인의 문제이건 혹은 자신의 문제이건 간에 아무도 ..

읽고본느낌 2022.11.28

나의 장례식 / 임채성

눈물은 보이지 마라 내 앞에선 누구라도 슬픔을 꾸미려는 곡소리도 내지 마라 비로소 삶의 완성판 무아無我에 들었으니 추모를 꼭 하려거든 헤비메탈을 울려 다오 회심곡 장송곡이 빈소에 들지 못하도록 이승의 마지막 축제 걸판지게 놀아보자 빛깔부터 마뜩찮은 수의는 입지 않을래 리바이스 청바지에 빨간색 폴로셔츠면 물놀이, 꽃놀이 가듯 발걸음도 가볍겠다 다비 후 뼛가루는 먼바다에 뿌려 다오 내게 먹힌 광어 숭어 그 넋 다시 돌려 놓듯 그들의 살과 피가 돼 태평양을 누벼보게 - 나의 장례식 / 임채성 초등 동기인 S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왔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예후를 살핀 후 수술 여부를 결정한단다. 이제 우리는 노(老), 병(病), 사(死)의 단계에 진입했으며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 시기의 ..

시읽는기쁨 2022.11.22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인 로버트 판타노는 삼십대 중반에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 이 문서는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노트북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원제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Notes from the End of Everything)'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쓴 글이라 책은 전체적으로 우울하면서 세상에 대한 비관이 담겨 있다. 그는 존재의 불안, 인생의 혼란과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두 가지 필연적인 경험을 대동하는데 바로 삶과 죽음이다. 실로 이 두 가지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러면서 세상의 끝에서 어떤 가치와 ..

읽고본느낌 2022.11.15

인섬니악 시티

책 내용이나 지은이인 빌 헤이스(Bill Hayes)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그러다가 엉뚱한 데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눈치를 못 채고 그나마 책의 뒷부분에 가서였다. '십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아기처럼 자는 남자하고 살았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러니 지은이를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 남자를 남편이 아닌 '파트너'라고 지칭하는 게 약간 이상하긴 했으나 서양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책의 부제가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다. 파트너였던 스티브가 죽고 뉴욕으로 주거를 옮긴 지은이는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는 - '불면의 도시'라는 뜻으로 뉴욕을 가리킨다 - 흥미로운 뉴욕 생활과 올리버 색스와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읽고본느낌 2022.10.27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어제 친구와 통화하면서 옛 동료의 투병 소식이 화제에 올랐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분인데 지금은 인지 능력이 떨어져 친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신다는 전언이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다. 통계에 의하면 80세까지 생존 확률이 30%라는 것이다. 지금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의 70%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때가 10년도 안 남았다. 물론 내가 포함될 확률도 70%다. 100세 시대라고 떠들면서 오래오래 살 것 같..

시읽는기쁨 2022.10.25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임사 체험 후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인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는 인도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결혼한 후에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4년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에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고 임사 체험 상태에 들어갔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고 병도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감각에 눈을 떠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각한다는 임사 체험은 많이 알려져 있으며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다. 아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안과 행복에 잠..

읽고본느낌 2022.10.06

스님이 선택한 죽음

며칠 전 연관(然觀) 스님의 영결식이 열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연관 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이셨고, 특히 한문에 조예가 깊으셨다. 스님은 독거 수행승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1년에 8개월 정도는 선 수행을 하신 분이시다. 또한 도법, 수경 스님과 지구 환경과 생명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 참여하셨다. 스님이 화제가 된 것은 돌아가신 방식 때문이다. 돌아가실 때가 되었음을 인지하신 뒤에는 항암치료 대신 곡기를 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마지막을 맞으셨다고 한다. 마지막 일주일 전쯤부터 곡기를 끊고 물과 차만 마시다가, 마지막 사흘간은 아예 물도 끊으셨다. 여느 사람들이 마지막에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과 달리 스님은 평생 수행을 해 온 분답게 입적 하루 전까지도 의식이 또렷했고, 찾아온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고..

참살이의꿈 2022.06.21

임사선(臨死船) / 다니카와 슌타로

모르는 사이에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었다 제법 붐비고 있다 늙은이가 많지만 젊은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아기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혼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남녀도 있다 저승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이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면 너무 편하다 하고 생각했으나 왠지 허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른다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는지 문득 위를 올려다봤더니 여기에도 하늘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늦은 오후의 빛이다 바랜 청색을 아련한 주황색이 베일처럼 덮어 있다 깰 것 같으면서도 깨지 않는 꿈 같다 배는 낮고 고풍스러운 기관음을 내고 달린다 저승이 아직 멀었나 옆에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시읽는기쁨 2022.03.24

아, 시원하다!

엔도 슈사쿠의 글에서 본 대목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정신도 좋고 정정한 분이었는데 하루는 며느리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갔다고 한다. 할머니는 먼저 옷을 벗고 욕탕 속으로 들어가더니 탈의실에 있는 며느리를 향해 말했다. "아, 시원하다!" 잠시 후에 며느리가 욕탕 속으로 들어가니 시어머니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걱정이 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할머니가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이렇게 행복한 죽음도 있을 수 있구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이 "아, 시원하다!"로 너무나 행복하고 평온하게 세상을 뜨신 것이다. 글자 ..

참살이의꿈 2022.02.17

에브리맨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줄이다. 작가가 인간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병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 여기는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 의료가 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은 미국 작가인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브리맨(Everyman)은 '모든 사람', 또는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 주인공은 이름 대신 '그'라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라는 한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 이야기다. 중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삽입되지만 그것 또한 병이나 죽음과 연관..

읽고본느낌 2021.12.26

죽음을 배우는 시간

부제가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이다. 지은이는 한림대학교 류마티스내과 교수로 근무하는 김현아 선생이다. 의료 현장에서 여러 죽음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배우고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병원의 '죽음 비지니스'에 속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사실 죽음은 개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은 병과 죽음에서 예외인 듯 행동한다. 지은이의 말대로 사람들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죽음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화와 죽음을 병원의 일로 만들고, 그 시간에 노동을 하고 재화를 축적하거나 소비 생활로 삶을 즐기도록 선동한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노화와 죽음은 개인을 ..

읽고본느낌 2021.12.18

작별 일기

노약한 부모를 실버타운에 모신 뒤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2016~2018)의 기록이다.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가 부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면서 구술생애사 작가면서 딸인 최현숙씨가 썼다. 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이며/특수한 과정이 애틋하면서 또한 담담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작가를 포함한 남매들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 집 남매들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정성은 각별하다. 지은이는 2008년부터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맡아왔다. 그 경험이 본인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

읽고본느낌 2021.11.19

낙엽 /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 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 낙엽 / 복효근 '투신'은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말이다. '낙하'가 아니라 '투신'이라고 한 데에 이 시가 살아 있다. '투신'은 죽음을 회피하거나 죽음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맞이하는 태도다. 그래서 아름답고 찬란하다. 가을이 짙어진다. 어디에나 낙엽이 가까이 있다. 발에 밟혀 바삭거리는 낙엽은 재잘대는 아이들처럼 명랑하다. 낙엽한테는 거부의 몸짓을 찾을 수 없다. 생의 막바지에서 왜 노을빛처럼 아름다운지를 생각한다. 올 가을에 낙엽을 보며 내가 떠올려야..

시읽는기쁨 2021.10.30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 송현숙 논설위원 모멸감.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지난달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쫓는 내내 떼어낼 수 없었던 감정은 이 세 글자였다. 어제까지 일하던 직원의 죽음을 한사코 모른 체하려는 그 조직의 모습에, 고인이 생전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달 26일 아침, 남편과 함께 출근했던 59세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퇴근하지 못했다. 막내딸과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은 당시 힘들고 멍한 고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평소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던 그는 관악학생생활관(서울대 925동·기숙사)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사망 열흘 만이었다. 가족..

참살이의꿈 2021.07.25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

반년 전이었다. '양자인문학'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친구의 소개로 B 선생의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 양자론은 물리를 공부한 나도 몇 문장 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니, 라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블로그에서 만나게 된 B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영민한 분이었다. 그분 블로그에는 종교, 철학, 예술, 여행, 과학 등에서 수준 높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B 선생은 암 투병중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양자인문학' 등 다양한 글을 쉼 없이 쓰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암 투병 과정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힘든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B 선생은 항암치료를 '살래의 길'이라고 명명하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연..

참살이의꿈 2021.07.14

제법 안온한 날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이 책에서 건진 한 문장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글쓴이는 수많은 죽음과 불행을 지켜보며 인간은 조건이 아무리 척박하더라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이러하니까 타인이 불행하다고 재단하는 것은 나의 오만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은 이대목동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중인 남궁인 님이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을 감성적인 필체로 보여주는 책이다.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연들이 많다. 저자는 살벌한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여리고 따스한 분인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곁에서 접하며 그는 삶과 죽음에..

읽고본느낌 2021.07.11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종양내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는 김범석 선생이 쓴 책이다. 암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만난 여러 죽음과 사연을 소개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한다. 부제가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Hodie Mihi, Cras Tibi" - 로마 시대 때 공동묘지 입구에 적혀 있었다는 글귀인데,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갈래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끝은 똑같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이 내일 나의 죽음이 된다. 타인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며, 그래서 너무나 절절이 가슴을 울린다. 여러 사례 중에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맞은 어느 할머니의..

읽고본느낌 2021.06.24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습니다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

시읽는기쁨 2021.06.20

청소를 끝마치고 / 강소천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잡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 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

시읽는기쁨 2021.05.27

어떤 죽음

지인한테서 들은 한 노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자식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 한 자식한테 신세를 지기 싫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녔지만, 모든 자식의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자식들 사이의 관계도 안 좋아졌다. 약간 다리가 불편할 뿐 정신은 말짱했으니 요양원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던 자식들도 차츰 빈도가 뜸해졌다. 노인은 70대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았다. 그럭저럭 살 만 했지만 다리를 다친 뒤부터는 거동하기가 불편해졌다. 작은 아파트를 팔아 다섯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식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각자 한두 달씩 아버지를 맡기로 한 것이다. 초기에는 괜찮았으나 몇 해 지나면서부터 자식들이 귀찮아하는 게 보였다. 어서 다른 집으로 갔으면 하는 압박이 느..

참살이의꿈 2021.04.25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히말라야와 산티아고를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졌다. 전에는 마음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몸의 문제다. 12년 전에 찍었던 히말라야 사진을 보면서 다시 그곳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바로 지금 내 심정이다. 이런 경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종내는 슬퍼할 수조차 없는 때가 찾아올 것이다. 늙음이든, 병이든, 집안의 변고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찌할 수..

시읽는기쁨 2021.04.24

갈 때 되면 가야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라고 말하며 나를 깨우치겠다고 새해의 마음 다짐을 했다. 보름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다. 죽는다는 -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 의식이 내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한다. 좀 더 초연해진다 할까, 세상사의 헛됨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때는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날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죽음에서 예외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열심히 살..

참살이의꿈 2021.01.16

금방 죽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 세상의 하고많은 애착과 욕심을 들여다보아라. 자신만은 죽음과는 관계없다는 행동으로 가득하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일부러 회피하는 것 같다. 깊고 어두운 허무의 심연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운지 모른다. "금방 죽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말을 몇 번 읊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어느 분이 말했다. 단지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생생히 느끼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새해를 맞으며 나도 이분의 지혜를 차용하기로 한다. 아둔하면 반복적으로 세뇌..

참살이의꿈 2021.01.01

오늘은 나, 내일은 너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도 우리와 비슷했다. 다만,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장의사의 주관하에 의식을 치렀다. 망자의 입안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데 필요한 노잣돈으로 동전을 넣었다. 시신은 위생 목적에서 도시 안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을 할 수 없었다. 로마 시내 밖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라틴어인데 우리말로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지만,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잊지말라는 문구다. 묘지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더욱 숙연해졌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다. 여기서 예외는 없..

참살이의꿈 2020.10.31

이집트 사자의 서

고대 이집트는 신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수천의 신이 있었다. 그중에서 태양신 '라'가 제일 유명하고, 다음으로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오시리스'다. 이집트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었기에 미라를 만들고 오시리스를 경배했다. 오시리스 신화는 드라마틱하기에 잠깐 소개하면, 오시리스에게는 동생인 세트(악의 신)가 있고 부인은 이시스다. 세트의 부인은 네프티스인데 이시스와 네프티스는 자매 사이다. 세트는 이시스를 좋아하고, 네프티스는 오시리스를 좋아한다. 여기서 갈등과 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세트는 오시리스를 죽이고 시신을 나일강에 버린다. 이시스는 우여곡절 끝에 시신을 찾아내 부활시키고, 오시리스는 지하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BC 20세기부터 시작된 오시리스 축제는 이런 과정을 재현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

읽고본느낌 2020.09.12

다읽(3) - 티벳 사자의 서

책 표지를 넘기니 내지에 이런 글을 적어 놓은 게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은 마음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나니.... 1996년 2월, 삶과 죽음의 신비! 1999년 12월, 지금 여기 나에게 주는 메시지 2002년 10월, 진리를 향한 길 읽었을 때마다 짧은 감상을 적은 것이다. 책에는 거의 메모를 남기지 않는데 는 예외였던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잊히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개안을 한 느낌이랄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책이다. 역설적으로 를 만남으로써 가톨릭 신앙이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환생을 다루고 있다..

읽고본느낌 2020.08.27

메멘토 모리

로마 시대 때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하면 환영 퍼레이드를 했다. 당사자는 마치 최고 권력자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장군 옆에 탑승한 노예가 개선 행진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장군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쳤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잔칫날에 재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관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게 대단하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잘 나갈 때 도리어 겸손하게 행동하라. 교만하지 말라."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현재 삶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 모리'와 비슷한 말로 '이 또한 ..

참살이의꿈 2020.07.04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현장 실습생으로 CJ에서 일하던 특성화고등학교 김동준 학생은 회식 자리에서 선임자한테 뺨을 맞았고, 며칠 후 회사 기숙사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폭행이었지만 그 전에 과도한 업무와 강압적인 회사 분위기가 있었다. 2014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에 들어간 김 군은 현장 실습을 나가서는 전혀 엉뚱한 일을 배정받았다. 햄과 소시지를 만드는 진천 육가공공장에 배치된 것이다. 학교에만 있다가 갑자기 현장에 나가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모든 실업계고등학생이 겪는 문제지만 사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라는 말이 나온다. 은 은유 작가가 김 군의 주변 사람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김 군 가족..

읽고본느낌 2020.06.14

장수 지옥, 마지막 사진 한 장

의술이 발달하고 생활 환경이 개선되면서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여성의 평균 수명은 거의 90세에 가깝다. 일본은 2007년에 이미 노인 인구가 21%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2017년에 노인 인구 비율이 14.8%로 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일본이 겪는 문제를 우리 역시 뒤따르며 경험해야 한다. 노년과 죽음 문제를 다루는 책 두 권을 읽었다. 과 이다. 옛날에는 장수가 축복이었고 노인이 존경을 받았다. 노인이 드물었던 시대의 이야기다. 오래 사는 대가는 쇠약, 고통, 질병에 시달리며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동반한 채 몇 년씩 버텨야 한다. '죽지 못해 산다'라는 말이 결코 노인의 엄살이 아니다. 은 제목이 쇼킹하다. 마쓰바라 준코라는 일본 작가가 썼다..

읽고본느낌 2019.12.30

첫눈 오신 날(12/3)

올해 첫눈이 오셨다. 맛보기로 하라는 듯 눈가루가 살짝 뿌리더니 금방 그쳤다. 조금 지나니 가는 비로 변하고 첫눈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생뚱맞게도 거실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내 죽는 날에도 이렇게 눈이 오면 좋을 것 같다. 침대는 창가에 있어야겠지. 주위에 모인 사람들과 와인으로 건배하고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지. 소주를 좋아하지만 마지막 술잔에는 달콤한 와인이 담겨야 할 것 같다. 그런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며칠 전 뉴스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었다. 손에는 모두 와인잔을 들었고, 다들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나 보다. 눈 내리는 날에 내 죽음을 연상한 ..

사진속일상 2019.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