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사물들

프랑스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장편소설이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가 배경으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잘 들어 있다. 대신에 파리의 생소한 골목과 가게 등 다양한 지명이 나와서 파리 사람이 아니라면 어딘지 몰라 좀 혼란스럽다. 은 제롬과 실비라는 두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오직 물질적으로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이 작품의 의도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부평초 같은 삶을 그리려는 것 같다. 제롬과 실비, 그리고 친구들은 상품들의 유혹과 현란한 광고의 공세에 덧없이 휩쓸려가는 군상들이다. 이 소설은 건조한 문체와 특이한 시제가 흥미롭다. 마치 사회과학자가 사회 현상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글 같다. 60년 전의 소설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해당하는 경고로 읽힌다. 그저 주어진 일상에 매몰될 때, 아무런 철학과..

읽고본느낌 2022.10.10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임사 체험 후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인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는 인도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결혼한 후에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4년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에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고 임사 체험 상태에 들어갔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고 병도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감각에 눈을 떠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각한다는 임사 체험은 많이 알려져 있으며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다. 아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안과 행복에 잠..

읽고본느낌 2022.10.06

날마다 구름 한 점

자신을 '구름추적자'라고 부르는 개빈 프러터피니(Gavin Pretor-Pinney)의 구름 책이다. 책 제목처럼 365장의 구름 사진이 실려 있다. 지은이는 2005년에 '구름감상협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 책의 구름 사진의 다수는 구름감상협회의 회원들이 찍은 것이다. 은 구름에 관한 종합세트와 같다. 구름 종류에 따른 생성 원리와 여러 광학 현상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사진마다 붙어 있다. 또한 문학 작품에서 인용한 구름에 관한 글, 명화 속에 그려진 구름 등 다양한 구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도 한 때 구름 사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구름을 찍은 필름이 몇 박스가 되었다. 구름 책을 내고 싶은 꿈이 있어서 모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생의 전환기에 살림을 단촐하게 정리하면서 전부 ..

읽고본느낌 2022.10.01

다정소감

책 제목인 '다정소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다정소감(多情小感)이라고 짐작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책 내용도 내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이런 단어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다정소감(多情所感)이다. 내 엉뚱한 추측에 실소를 했다. 은 김혼비 작가의 산문집이다. 글에서는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지은이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도 해 본다. 김혼비 작가는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 다이내믹한 분 같다. 정과 동을 겸비한, 그래서 만나면 무척 재미있을 분으로 느껴졌다. 풋풋한 햇사과를 먹는 것..

읽고본느낌 2022.09.30

모든 요일의 여행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 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을 만난 것만으로도 책을 든 본전은 뽑은 셈이다. 나에겐 '여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면서, 사람마다 여행의 색깔이 다르다는 점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지은이가 모든 여행의 끝에 내린 결론이란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지만 우리는 매번 다른 곳에 도착한다. 은 카피라이터인 김민철 작가가 쓴 여행기다. 유명 관광지나 풍물을 소개하는 대신 여행지와 나와의 내면적인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기록이다. 낯선 뒷골목, 우연히 만난 사람, 의외의 풍경이 주는 기쁨 등이 정감 있는 사진과 ..

읽고본느낌 2022.09.23

조선의 뒷골목 풍경

우리는 왕조나 위인 중심으로 역사를 배운다.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라면, 정사(正史)란 역사 스토리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긴 시간 우리 역사를 만들어 간 수많은 평민, 상놈들의 땀내 나는 사연은 통째로 잊혀 있다. 왕이나 양반, 위인들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삶을 드러내는 작업도 역사가의 책무라고 본다. 은 일반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재현한 사람 냄새 나는 생활의 역사서다. 지은이인 강명관 선생은 한문을 전공한 교수로 옛 서적에 나오는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백성을 살린 이름 없는 민중의, 군도와 땡추, 유흥가를 지배한 무뢰배들, 조선의 오렌지족, 투전 노름에 골몰한 도박꾼,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탕자,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 금주령과 술집, 가부장 체제에 반기를 든 여인 등..

읽고본느낌 2022.09.18

러빙 어덜츠

넷플릭스에 혹시나 볼 만한 게 있는지 들어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영화다. 많은 경우 실망을 하지만 이 영화는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 제목이 '러빙 어덜츠(Loving Adults)'인데 번역하면 '사랑스런/사랑하는 어른들' 쯤 될까, 그러나 내용은 제목과 반대로 끔찍한 살인을 소재로 한 치정물이다. 영화는 미제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랑과 결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진행과 두 부녀의 대화가 교차하며 스토리는 전개된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쓴 애착과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영화는 잘 보여준다. 두세 차례 반전도 나온다. 청순해 보이는 아내 레오노라가 뒤로 갈수록 섬뜩한 여자로 변한다. 불륜을 저지른 어리바..

읽고본느낌 2022.09.16

부탄, 행복의 비밀

"첫눈이 오면 학교나 일터로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낭만을 즐긴다. 모든 공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아이를 낳으면 6개월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고, 아이가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근로시간을 하루 2시간 줄여준다. 전 국토의 70%를 숲으로 보전한다. 고을마다 며칠씩 전통 축제가 열린다." 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부탄은 면적이 39,000㎢(한반도의 1/3), 인구가 80만,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정도인 아시아의 가난한 소국이다. 부탄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유명하다. 부탄은 국가 운영의 첫째 지표가 경제 성장이 아닌 행복이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

읽고본느낌 2022.09.13

부러진 사다리

불평등이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를 보여주는 책이다. 불평등의 거시적 원인이나 경제적 영향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간 심리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드러낸다. 부제가 '불평등은 어떻게 나를 조종하는가?'이다. 인간은 절대적 가난보다 상대적 빈곤감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소유량보다는 남들과 비교했을 때의 내 위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을 비롯한 일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사다리는 길어지고 중간에 부러지기까지 한 상태다.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은이의 희망인 것 같다. 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키스 페인(Keith Payne)이 썼다. 책은 많은 심리 실험 사례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불평등이 ..

읽고본느낌 2022.09.06

고독의 매뉴얼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카페에서 읽었다. 카페에서 책 읽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카페에서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생활 소음이 일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조용하지 않으면 몰두할 수 없다. 늘 조용한 데서 책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며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 소리까지 들리는 마당에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은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 선생이 쓴 책이다.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모두가 삶의 허망함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가족을, 연인을, 동지를, 술과 텔레비전을, 때로는 애꿎은 신을 욕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읽고본느낌 2022.08.30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은행원 리카가 연하남 애인과 불장난을 하면서 고객 돈을 횡령하는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줄거리인데, 돈에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리카 외에도 여러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돈에 휘둘리는 군상들이다. 지리하고 우울한 삶을 소비로 만족하려 하지만 돈은 잠깐의 단맛을 줄 뿐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기승전'돈'일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 슬프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행복하지 않다. 예외적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살아가는 유코도 마찬가지다. 돈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돈에서 멀어지려 하지만 그럴수록 돈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돈을 마구 써대도 아껴도 돈에서 벗어나지..

읽고본느낌 2022.08.25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지은이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다가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직장을 잃었다. 수입이 끊어진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돈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삶의 우아함을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 이다. 이제 풍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지은이의 말은 불안한 국제 정세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면 동감이 된다. 전과 같은 고성장의 호황기는 다시 올 것 같지 않고 절약이 불가피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과거와 같은 성장과 자원 낭비가 계속되면 지구가 여러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환경 파괴도 심각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읽고본느낌 2022.08.21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톨스토이는 50세에 회심(回心)의 경험을 하면서 삶이 바뀐다. 거짓되고 타락한 삶을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먼저 진실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도 이때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항상 괴로워하며 시달림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올바른 삶의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석영중 선생이 쓴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에 관한 책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를 중심으로 톨스토이의 생각을 더듬어 본다. 에서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레빈이다. 레빈은 지주 귀족이었지만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일하면서 삶의 의의를 깨닫는다. 육체의 쾌락에 빠진 안나가 비극적인 죽음..

읽고본느낌 2022.08.01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와 '가난'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가난과 단순한 삶을 예찬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짚었다. 는 가난해도 멋있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MZ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소비하는 세대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부모 세대처럼 근검 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부유한 생활을 즐기고, 통장 잔고가 바닥을 쳐도 눈앞의 케이크를 황홀하게 탐닉하는 것이 이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돈 버는 방법은 잘 몰라도 돈 쓰는 방법 하나는 귀신 같이 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카르페 디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가난할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걸 이미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는 수밖에 ..

읽고본느낌 2022.07.24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요사이 책 읽기에 게을러졌다. 핑계를 대자면 장마철의 후덥지근한 날씨다. 아직 에어컨을 켤 정도는 아니지만 책에 집중하기에는 꿉꿉하다. 보통 일주일에 한두 권을 읽는데 이 책은 두 주일이 걸렸다. 그것도 듬성듬성 읽었다. 영국의 역사 평론가인 그레그 제너가 쓴 는 발상이 재미있다. 현대인의 하루 일상을 -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고 아침을 먹고 몸을 씻고 입을 옷을 고르고 시간을 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이를 닦고 침대에 들어가 자명종을 맞추는 것 -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관습화된 행위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내용이다.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힌 책이다. 우리의 일상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식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수백 년, ..

읽고본느낌 2022.07.21

나의 해방일지

지인이 추천해줘서 다시보기로 닷새 동안 몰아서 본 드라마다. 16회분으로 올봄에 jtbc에서 방송되었다.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의 키워드는 '추앙'과 '환대'인데 이 단어들 자체가 낯설고 생경해서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정과 구씨 관계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뭐, 애매한 것은 애매한 채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환대'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화의 세계라면 가능하겠지만. 지지난주에 어느 모임에서 MZ세대의 의식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요사이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을 알고 싶으면 '나의 해방일지'를 보라고 한 분이 말해줬다. 경기도 산본에 살면서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애환과 꿈, 사랑이..

읽고본느낌 2022.07.09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80세 넘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80세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이 책은 미국의 SF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에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올린 글을 모은 책이다. 이 분은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블로그는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자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낯선 사람들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마라구 작가를 보고 생각을 바꿔 블로그를 하게 되었다. 작가는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으로 자유로움을 든다. 사마라구처럼 독자들과 소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 블로그 글쓰기다. 지난번 도널도 홀의 수필처럼 어슐러의 글에서도 노년의 지혜와..

읽고본느낌 2022.06.25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미국의 시인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이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집이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지만 나이에서 오는 노숙한 시인의 풍모가 글에서 느껴진다. 글은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 재미있다.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의 여유가 부럽다. 지은이는 12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70년 넘게 40권의 책을 출간했고 2006년에는 미국 계관시인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상을 받게 된 사연이며 에피소드가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시인은 2018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이 책에 실린 글은 그가 말년에 쓴 에세이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펜을 놓지 않았다. 책 제목으로 쓰인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은 노년에 든 누구나 느끼는 감..

읽고본느낌 2022.06.19

과학인문학

직장에 있을 때 후배 P가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던 후배였다. 수시로 나를 찾아와서 양자론에 대해 질문하는 통에 혼줄이 났다. 딴에는 물리를 공부했으니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 말이 길어지고 어려운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과 함께 하는 물리학 산책'이라는 부제를 가진 은 드물게 시인이 물리학에 관해 쓴 책이다. 시인이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은이인 김병호 선생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시인이 된 분이었다. 물리학의 소양에 문학의 감성이 더해져서 '과학인문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만들어졌다. "문학과 과학은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며 그 호기심을 밀고 나..

읽고본느낌 2022.06.13

야생 속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촉망받던 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알래스카의 야생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청년은 크리스 맥캔들리스다. 몇 년 전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를 통해 크리스를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를 읽으며 크리스가 한 행동의 이면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확실히 영상보다는 활자가 논리적이면서 맥을 짚어내는 데는 더 뛰어난 것 같다. 다큐 작가인 크라카우어의 능력인지 모르지만. 책에는 크리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소개한다. 무모한 이상주의자나 철부지 정도로 폄하하는 것 같다. 별 준비도 없이 알래스카의 거친 야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오만으로 볼 수도 있다. ..

읽고본느낌 2022.06.05

콰이어트

사색적인, 지적인, 책벌레, 꾸밈없는, 섬세한, 사려 깊은, 진지한, 숙고하는, 미세한, 내성적인, 내면을 향하는, 부드러운, 차분한, 수수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수줍음 많은, 위험을 싫어하는, 얼굴이 두껍지 않은 - 이는 내향 성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두세 명 중 한 명은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회식보다는 독서를 좋아한다. 혁신과 창조에는 열광하지만 자기 자랑은 싫어한다. 여럿이 일하기보단 혼자 어딘가에 콕 박힌 채 고독한 작업을 즐긴다. 이 책 는 내향성을 가진 사람의 숨겨진 힘에 초점을 맞추고 격려한다. 부제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지은이인 수전 케인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내..

읽고본느낌 2022.05.29

나의 사적인 그림

사람한테는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있다. 공적인 생활은 드러나지만 사적인 생활은 숨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적인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할 뿐이다. 우지현 작가의 은 작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책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글과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글이 중심이지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설명은 많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글과 연관된 그림을 보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작가가 소개하는 그림은 사탕처럼 달콤하고 봄 햇살처럼 화사하다. 이 책에서도 새로운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데 우리말로 하면 '황홀한 죄책감' 쯤 되겠다.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움을 주는 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

읽고본느낌 2022.05.24

고흐, 영원의 문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888년에 아를로 옮긴 이후의 인생 후반부를 그린 영화다. 한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고흐 그림의 느낌이 나는 화면에 잘 담겨 있다. 고흐의 격정적인 삶을 차분하면서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내면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적대적이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힘들게 예술혼을 불태우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던 한 인간의 고군분투가 안타깝다. 그렇다고 고흐가 늘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는 상당 부분을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고흐를 보여준다. 화구를 메고 그림의 소재를 찾아 초원을 걷는 행복한 고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간관계는 서툴렀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는 예민한 촉수를 갖..

읽고본느낌 2022.05.14

숲의 즐거움

우석영 선생의 숲에 관한 철학 산문집이다. 숲을 산책하며 느끼고 사유한 사색의 단상들이 묵직한 무게로 담겨 있다. 숲은 '수풀'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수풀은 '수(樹)'와 '풀'의 합성어다. 숲은 나무와 풀만 아니라 온갖 생물이 살아가는 다(多)세계의 총합이다. 또한 숲은 여러 삶의 주체들이 각자의 삶을 공생의 문법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집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 태초의 고향인지 모른다. 우리는 숲을 거닐며 마음의 고요를 회복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은 숲 산책의 행복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몇 새로운 단어를 발견해서 기뻤다. 그중 하나가 '유산(遊山)'이다. 옛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산의 숲길을 거니는 일을 유산이라고 불렀다. 거니는 전통이 소멸되면서 지금은 유산 ..

읽고본느낌 2022.05.12

혼자 있기 좋은 방

"화가, 작가, 꾸준함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이 책 지은이인 우지현 씨 소개의 첫 문장이다. 지은이의 그림은 보지 못했지만 글은 무척 잘 쓰시는 분이다. 글의 기교보다는 글에서 풍기는 향기와 깊이가 독자를 끌리게 한다. 은 그림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처음 보는 예쁜 그림들이 많아 눈호강을 하면서 화가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림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미가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책은 '조용히 숨고 싶은 방' '완벽한 휴식의 방' '혼자 울기 좋은 방' '오래 머물고 싶은 방' 등 4부로 나누어져 있으나 큰 의미는 없다. 꼭 방에 관한 그림도 아니다. 잔잔한 일상을 ..

읽고본느낌 2022.05.07

오래된 생각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고뇌 속 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말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 책은 대통령을 옆에서 모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쓴 노 대통령에 대한 회고 기록이다. 은 기득권 세력만 아니라 여권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고독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육백 년 기회주의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

읽고본느낌 2022.05.02

레고로 만든 집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 책은 그 이후에 쓴 소설을 모아서 펴낸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레고로 만든 집'을 포함해 아홉 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소설은 '레고로 만든 집'이었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 더욱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사지마비가 된 아버지와 장애인 오빠를 돌봐야 하는 주인공은 대학교 앞 복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집을 날린 뒤 쓰러지고, 어머니는 전세금을 빼서 도망가버렸다. 낡고 작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부엌에서 잠을 자며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간다. 그녀는 너무 가난하고 쓸쓸하다. 작가의 소설에는 이런 주인공들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은 사람이..

읽고본느낌 2022.04.21

구경꾼들

도서관에서 윤성희 소설가의 책을 세 권 빌려 왔다. 구할 수 있는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볼 예정이다. 작가의 작품을 연속으로 읽어 볼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얼마 전에 만났던 이었다. 그때 느낌이 강렬하여 윤성희 소설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윤성희 소설가의 작품은 짧은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이 통일된 구도 아래 부드럽게 이어져 나간다. 이번에 읽은 은 장편소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경꾼들인지 모른다. 소설가 또한 진지한 세상의 구경꾼일 것이다. 책 제목대로 작가는 구경꾼의 시선으로 애틋한 한 가족의 삶을 그려낸다. 은 '나'의 성장소설이면서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족 서사다. 이 가족은 외조모를 포함해서 9명이다. 조부모, 부모, 삼촌 ..

읽고본느낌 2022.04.14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날마다 만우절'을 비롯해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날마다 만우절'은 소설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된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아쉽게 생각될 정도로 소설은 흡인력이 강하면서 잔잔한 울림을 준다. 주인공은 주로 여성들인데 이들이 펼치는 인간사가 애잔하고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걸 담아내는 소설가의 담백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속도 빠른 짧은 장면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나는 11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 밤'이 제일 인상 깊었다. 한밤중에 킥보드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쓰러진 여성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칠순을 앞둔 주인공은 남편이나 딸로부터 소..

읽고본느낌 2022.04.07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탁현민 씨가 쓴 여행 수상집이다.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이 대선에 패배했던 직후인 2013년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일한 탁현민 씨는 패배의 충격으로 파리에서 석 달간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한다. 이때의 감상을 글로 적어서 책으로 냈다. 탁현민 씨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된 후 이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공연 연출가로 중요한 대통령 행사를 지휘했다. 대표적인 게 남북 정상이 만난 판문점 회동이다. 고식적인 형식을 탈피한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금방 남북 화해가 이루어질 듯 가슴을 뛰게 했으나 지나고 보니 결과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당시 야권에서 보여주기식 쇼는 그만두라고 했는데 일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에는 선거 결과에 상심한 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나도 그때 허탈한 기분을 달..

읽고본느낌 2022.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