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다읽(16) - 과학혁명의 구조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대학생이었을 때 필독서였다. 그때 번역서가 나왔는지, 아니면 원서로 도전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완전히 읽어내지는 못했다. 읽어야 한다는 책이지만 읽지는 못하고 뒤로 남겨진 책이었다. 토머스 쿤(T. S. Kuhn)의 는 워낙 자주 인용되는 책이라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읽지 않고도 무얼 말하는지 한 마디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유명해진 단어가 '패러다임(paradigm)'이다. 과학의 한 분야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뛰어난 성취를 통해 정상과학에 진입한다. 일단 정상과학이 되면 이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명료화하는 방향으로 과학은 발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변칙현상이 일어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읽고본느낌 2022.03.27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막달라 마리아를 보는 시각이 신선한 기독교 영화다. 부제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다. 신약성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을 지킨 여인으로 나온다.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 마르코 15,40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마르코 15,47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마르코 16,1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

읽고본느낌 2022.03.20

술과 바닐라

작년에 나온 정한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술과 바닐라'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는데 이런 젊은 여성 작가의 글에서는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좋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인생의 스산한 면을 드러내어 쓸쓸하다. 특히 일과 육아의 무게에 짓눌린 결혼한 여자의 삶을 사실 그대로 잘 그려낸다.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거실에 걸린 화사한 가족사진은 빙산의 드러난 부분일 뿐, 수면 밑의 차가운 진짜 세계를 작가는 가차 없이 재현해 낸다. 일곱 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기진의 마음'이었다. 기진은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둔 유방암 투병을 하는 주부다. 이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암 환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 소설이다. 남편이나 자식, 친구..

읽고본느낌 2022.03.18

더 홈즈맨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세 편 모두 인상 깊고 여운이 남았다.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중 한 편이 '더 홈즈맨(The Homesman)'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배경인데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서부영화 장르에 들어갈 테지만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싸움이 소재인 전통적인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 한다. 고통받는 약자를 향하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다. 무대는 서부 개척의 최전선인 네브라스카로 거친 환경과 힘든 노동,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삶은 피폐하다. 그중 세 여자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미혼이었던 커디에 의해 그녀들의 고향인 아이오와로 옮겨지게 된다. 커디는 짐마차에 세 여자를 태우고 400마일의..

읽고본느낌 2022.03.13

인듀어런스

20세기 초반은 극점 탐험의 시대였다. 1911년의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아문센과 스콧의 경쟁은 유명하다. 둘의 명성에 가려진 또 다른 위대한 탐험가가 있다.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영국의 어니스트 셰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이다. 셰클턴은 1909년에 남극점에 도전했다가 식량 부족 때문에 155km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만약 무리하게 전진했다면 스콧처럼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2년 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자 셰클턴은 목표를 바꾸어 남극 대륙 횡단에 나선다. 27명의 대원과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알렉산더가 쓴 는 이 탐험에 관한 기록이다. 동행한 사진사 헐리가 찍은 사진이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며 우리를 현장으로 안내한다..

읽고본느낌 2022.03.08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신화화된 그리스도는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교회 쇼윈도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한완상 선생이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다. 교회가 예수를 앞세우지만 정작 예수의 정신은 없다. '믿습니다'의 열정에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의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은 '따름'에 있어서는 자국민의 경멸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은총만 강조하다 보니 질문과 성찰은 소홀히 하고 값싼 기복신앙만 난무한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치매'라고까지 표현한다. 선생은 먼저 역사적 예수의 매력을 되찾자고 한다.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살아 있는 예수의 역동성을 외면한다. 구속 드라마 속의 예수는 구속사에서 배우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읽고본느낌 2022.03.04

예수냐 바울이냐

"바울의 기독교 신학 안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정신은 없다." 저자인 문동환 선생이 이 책에서 맺는 결론이다. 책의 '시작하는 말'의 서두 부분은 이렇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바울 신학을 추종해 왔다. 그리고 이것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온 세계에 전파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 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메시아 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어처구니없는 민족주의다." 는 예수와 바울을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밝힌다. 이 책은 바울이 예수의 정신을 왜곡했다고 보는 ..

읽고본느낌 2022.02.25

도올의 로마서 강해

내가 한때 회심을 하게 된 계기가 '로마서'였다. 수녀원의 조용한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이 나를 찔렀다. -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서 1,17). -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로마서 3,21)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로마서 3,22).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로..

읽고본느낌 2022.02.22

다읽(15) - 예수는 없다

세 번째 다시 읽는 책이다. 20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한 글에 가슴 한 편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번민만 있을 뿐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신앙의 정체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가 나오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선생의 인기를 반영하듯 넓은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청중 중에는 선생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 중에 그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또, 선생의 친구라면서 조영남 씨가 나와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 자..

읽고본느낌 2022.02.16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손주가 와서 내 방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얘기 중에도 내가 먼저 책 이야기를 꺼낸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 책보다는 다른 데 관심을 둘 나이지만 책상에 놓인 책들을 보고 손주가 먼저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주말에 왔을 때는 마침 마종기 시인의 라는 책이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책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 주었다. 손주가 반에서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내가 고른 것은 '우화의 강'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설명을 곁들여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말해주니..

읽고본느낌 2022.02.08

다읽(14) - 회상

얼마 전에 영화 '사일런스'를 5년 만에 다시 감명 깊게 봤다. 이 영화와 함께 원작 소설인 엔도 슈사쿠의 도 종교 분야에서는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본질 및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토록 심도 있게 그린 작품도 드물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새롭게 느꼈다. 어쩌면 곁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첫째는 일본인의 잔혹성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과 '사일런스'는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이야기다. 붙잡힌 천주교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방법이 너무 악랄하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일본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서양인 신부는 죽이는 게 아니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줘서 끝내 배교하게 만든다. 후미에를 한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는 실존 인물이다. 우리나라..

읽고본느낌 2022.02.06

사랑 아니면 두려움

"사람에게는 중요한 이틀이 있는데, 첫 번째 하루는 모든 이에게 있지만 두 번째 하루는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첫 번째 하루는 '태어난 날'이고, 두 번째 하루는 '그 하루의 이유'를 깨친 날이랍니다." 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이현주 선생이 쓴 이 책은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수행 안내서다. 책은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마음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로 마음공부/수행에 들어가는 안내다. 2부 '동굴문답'은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통해 참에 접근해 가는 길을 보여준다. 3부 '꿈으로 나를 닦다'는 선생이 침묵 피정 중에 찾아왔던 꿈들을 소개한다. 선생은 마음공부를 '두텁고 무거운 무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마음공부에는..

읽고본느낌 2022.02.02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부제가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으로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상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책이다. 역사에 등장한 대표 사상에는 사회의 진보를 위한 사색과 고뇌가 담겨 있다. 철학을 전공한 안광복 작가가 썼다. 은 정치, 철학 예술, 국가, 경제, 사회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 32가지 사상을 소개한다. - 정치 공화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아나키즘, 포퓰리즘 - 철학 예술 낭만주의, 니힐리즘,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 국가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프런티어 정신, 대동아 공영권, 마오이즘, 주체사상 - 경제 자본주의, 공산주의, 개발 독재, 신유교 윤리, 신자유주의, 기업가 정신 - 사회 오리엔탈리즘,..

읽고본느낌 2022.01.27

국수

김숨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국수'를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무겁고 납덩이가 얹힌 듯 가슴을 짓누른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심정은 어떠할까. 표제작인 '국수'는 죽음을 앞둔 새어머니에게 따끈한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조리를 하면서 새어머니와 마음으로 대화하고 화해하는 소설이다.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난 여인이 새어머니로 들어오는데 첫날 새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국수를 끓여준다. 새어머니를 차갑게 대한 주인공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모성이 품고 지켜야 하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공감한다. 냉혹한 현실을 그린 작가의 소설에서 그나마 이 소설이 따스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한다. 제일 흥미롭게 읽은 소설은 '아..

읽고본느낌 2022.01.22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傳記)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데 음양으로 헌신했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아니라 도리어 우울하고 음습한 그늘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이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 둘은 1903년에 결혼했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뒤에 고백했다. 실제로 수학 분야에서는 아인슈타인보다 밀레바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밀레바는 훌륭한 품성에다 지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었..

읽고본느낌 2022.01.10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20세기 물리학과 수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을 중심으로 과학과 철학의 여러 쟁점을 소개하는 책이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은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서 같이 출퇴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서로 상이한 성격의 두 천재가 함께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추론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과학 작가인 짐 홀트(Jim Holt)가 썼다. 에는 과학과 수학, 철학의 다양한 분야가 논의되고 있다. 시공간과 우주, 상대성과 양자론, 수학계의 여러 쟁점들, 인류의 미래와 인간의 삶 등 다양하다. 다만 지은이가 20년 간 쓴 글 모음이라 내용의 일관성이 부족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기에는 넉넉하다. 책에는 여러 수학자와 수학적 논쟁이 나오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리에서 사용하는 도구적 수학..

읽고본느낌 2022.01.04

에브리맨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한 줄이다. 작가가 인간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병과 죽음을 자연의 순리라 여기는 동양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현대 의료가 병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은 미국 작가인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브리맨(Everyman)은 '모든 사람', 또는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소설 주인공은 이름 대신 '그'라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그'라는 한 인간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 이야기다. 중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삽입되지만 그것 또한 병이나 죽음과 연관..

읽고본느낌 2021.12.26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작품이라서 더 관심이 생겼다. 영상의 마술사라는 스필버그 감독이 링컨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감독이라는 걸 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1864년과 1865년에 걸친 링컨 대통령의 마지막 두 해를 집중적으로 그린다. 당시는 남북전쟁의 막바지였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한 13차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영화의 대부분이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하원과의 줄다리기다. 당시 미국 정치의 내막을 잘 모르면 지루할 수 있지만 감독의 역량이 이를 커버한다. 정파들 사이의 불꽃 튀는 싸움이며, 뒤에서 조종하는 링컨의 포용력과 수완이 볼 만하다. 단조롭게 보일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연출의 힘이 ..

읽고본느낌 2021.12.22

죽음을 배우는 시간

부제가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이다. 지은이는 한림대학교 류마티스내과 교수로 근무하는 김현아 선생이다. 의료 현장에서 여러 죽음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 있을 때 죽음을 배우고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병원의 '죽음 비지니스'에 속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사실 죽음은 개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은 병과 죽음에서 예외인 듯 행동한다. 지은이의 말대로 사람들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죽음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화와 죽음을 병원의 일로 만들고, 그 시간에 노동을 하고 재화를 축적하거나 소비 생활로 삶을 즐기도록 선동한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노화와 죽음은 개인을 ..

읽고본느낌 2021.12.18

SF 소설 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분량이 엄청나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는 6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이다. 이번에 영화로 만들어져 책 읽는 대신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의 감동이 크면 책을 사서 읽어볼 작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굳이 책을 읽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기대가 커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듄'은 10,000년 뒤의 우주를 무대를 한다. 인류는 거대한 은하 제국을 만들고 황제가 통치하면서 귀족 가문들이 각자의 행성을 다스린다. 꼭대기에 왕이 있고 성을 중심으로 봉건 군주들이 통치하던 중세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우주 전쟁도 성 뺏기 전투에 다름 아니다. 아트레이디스 가문은 본거지를 떠나 아라키스 행성으로 이주해 통치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 아라키스는 사막으로 되..

읽고본느낌 2021.12.08

육체 탐구 생활

김현진 작가의 산문집으로 제목에 낚이면 안 된다. 아니 낚여서 도리어 더 큰 만족을 느낄지 모른다. 오랜만에 시원하고 상쾌한 글을 읽었다. 답답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작가의 의지가 놀랍다. 본인 추스리기도 힘들 텐데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연대와 정의감이 불꽃처럼 뜨겁다. 또한 글에서 반짝이는 위트와 유머는 작가 내면의 깊이를 말해준다. 작가는 몸과 노동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한다. 2년 가까운 녹즙 배달원과 카페 아르바이트 생활이 글의 소재가 되고 있다. 방 안에서 머리만 굴려서 쓰는 글이 아니라, 육체로 부딪쳐 나간 싱싱한 이야기다. 화끈한 행동파의 살아 있는 글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비슷한 삐딱이로서 글 내용에 공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스트라이크 존을..

읽고본느낌 2021.12.03

비바리움

인간의 삶을 시니컬하면서 재미나게 그린 영화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생을 한 꺼풀 벗겨낸 실상은 어쩌면 이 영화와 같은 악몽인지 모른다. '비바리움'은 은유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는데 큰 수고를 요하지는 않는다. 톰과 젬마는 결혼 후 살 집을 알아보러 부동산 회사에 들린다. 마틴이라는 직원을 따라 주택 단지에 들어가 한 집을 소개받지만 단지 밖으로 나갈 길을 잃어버린다. 똑같은 집들이 사방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세트장이다. 탈출할 온갖 방도를 써 보지만 실패한다. 난데없이 박스로 아이가 배달되면서 영화는 우리의 결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초반에 탁란으로 크는 뻐꾸기가 나오는데 이 가족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근..

읽고본느낌 2021.11.29

작별 일기

노약한 부모를 실버타운에 모신 뒤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2016~2018)의 기록이다.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가 부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면서 구술생애사 작가면서 딸인 최현숙씨가 썼다. 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이며/특수한 과정이 애틋하면서 또한 담담하게 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이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작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그리고 작가를 포함한 남매들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 집 남매들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정성은 각별하다. 지은이는 2008년부터 가난한 노인을 돌보는 일을 맡아왔다. 그 경험이 본인 부모를 케어하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

읽고본느낌 2021.11.19

마리 퀴리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그것도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각각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남편인 피에르 퀴리도 노벨상을 받았고, 그녀의 딸인 이렌과 사위들도 노벨상을 받았다. 2대에 걸쳐 무려 다섯 명의, 여섯 개의 메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결과다. '마리 퀴리'(원제는 Radioactive)는 위대한 과학자면서 선구적인 여성이었던 마리 퀴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1934년에 퀴리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퀴리는 남성 중심의 당시 과학계에서 아웃사이더였다. 그녀는 과학 연구만이 아니라 여성을 무시하고 진입을 막는 장벽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읽고본느낌 2021.11.16

다읽(13) - 의식 혁명

20여 년 전에 화제를 모았던 책이다. 인간의 개인과 집단 의식의 중요성을 과학적 근거를 들며 갈파한다. 이 책에서 특이한 사항이 운동역학적 근육 테스트다. 수평으로 내민 팔에 힘을 가할 때 근육이 저항하는 정도로 인간계의 모든 현상에 대한 진위 구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데이비드 호킨스가 쓴 이 책의 원제는 다. 'Force'는 지각할 수 있는 외적인 힘이고, 'Power'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력이다. 인간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힘 덕분에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잠재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엄청날 정도로 강력한 끌개의 에너지 패턴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개개인의..

읽고본느낌 2021.11.02

푸르른 틈새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로 1996년에 발표한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작가의 10대, 20대, 30대의 삶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어느 작가나 첫 작품은 이야기 전개나 구성이 미흡할지라도 풋풋한 느낌이 들어 좋다. 더구나 성장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젊은 시절로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에서 작가는 손미옥으로 나온다. 서른한 살의 미옥은 눅눅한 단칸 지하방에서 이사를 가려고 한다. 이사는 한 삶의 종착이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사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소녀와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교대로 나오면서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으며 커간다...

읽고본느낌 2021.10.29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모르는 영역' 등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 작가의 글을 읽으면 사람살이의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책의 단편들도 모두 그런 범주에 들어 있다. 작가는 아프지만 세상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폭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가련하고 쓸쓸한 존재들이다. 누구는 아빠 찬스로 50억을 받고 떵떵거리는데, 다른 누구는 노동 현장에서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간다. 이 세상은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그런 점이 이 단편집의 제목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손톱'이라는 소설에 '아직 멀었다'라는 말이 스쳐가듯 나온다. 소희는 엄마와 언니가 집을 나가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녀다. 손톱을 다쳐 빠지게 되었는데도 ..

읽고본느낌 2021.10.20

콜로니아: 사악한 믿음의 마을

종교에 빠지는 인간의 심리에 관심이 많다. 한 번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이성이 마비되고 너무나 쉽게 맹신의 늪에 떨어진다. 사악한 종교 지도자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교묘히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취한다. 유사 이래 종교의 탈을 쓴 이런 집단은 반복적으로 나타나서 인간의 마을을 파괴해 왔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현재진행형일지 모른다. '콜로니아: 사악한 믿음의 마을'은 최근에 넷플렉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1961년 칠레에 독일인들 수백 명이 이주해 와서 신앙 공동체(콜로니아 디그니다드)를 만든다. 우두머리는 파울 셰퍼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출신이다. 전후의 황폐한 시기에 기독교 리더로 등장해 활동하다가 소아 추행에 관련되어 추방 당하자 추종자를 이끌고 칠레에 정착한 것이다. 콜로니아 디그니다..

읽고본느낌 2021.10.18

백세 일기

모임에 나가면 김형석 선생님이 자주 화제가 된다. 자기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자처하는 이도 있다. 선생님은 192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102살이다. 그런데도 한 해에 100회가 넘는 강연을 다니시고, 꾸준히 책도 내신다. 가 작년에 나왔으니 101살에 쓰신 책이다. 예로부터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아무리 장수시대라지만 아흔을 넘기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백세를 채우고도 여전히 정정하다니 부럽다 못해 질투가 생긴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한다고 되는 일일까. 아무튼 대단한 복을 타고나신 분이다. 선생님은 쉼없는 공부와 일을 강조하신다. 삶의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공부와 일을 놓치지 않는 사람에게 노년기는 없다. 65세..

읽고본느낌 2021.10.12

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어서 호주 이주를 택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다. 호주 시민권을 얻기까지의 6년의 과정이 한국과 호주 생활을 대비하며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이렇게 항변하는 주인공 계나는 자신을 톰슨가젤에 비유한다. 톰슨가젤은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서 사자한테 늘 잡아먹히는 동물이다. 사자가 다가올 때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가 있는데 자신이 꼭 그 꼴이었다는 것이다. 계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취직해 직장인이 되지만 살벌한 경쟁 사회..

읽고본느낌 202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