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872

고독의 매뉴얼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카페에서 읽었다. 카페에서 책 읽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카페에서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생활 소음이 일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조용하지 않으면 몰두할 수 없다. 늘 조용한 데서 책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며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 소리까지 들리는 마당에 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은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 선생이 쓴 책이다.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모두가 삶의 허망함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가족을, 연인을, 동지를, 술과 텔레비전을, 때로는 애꿎은 신을 욕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읽고본느낌 2022.08.30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은행원 리카가 연하남 애인과 불장난을 하면서 고객 돈을 횡령하는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줄거리인데, 돈에 지배당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리카 외에도 여러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돈에 휘둘리는 군상들이다. 지리하고 우울한 삶을 소비로 만족하려 하지만 돈은 잠깐의 단맛을 줄 뿐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기승전'돈'일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 슬프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행복하지 않다. 예외적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살아가는 유코도 마찬가지다. 돈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돈에서 멀어지려 하지만 그럴수록 돈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돈을 마구 써대도 아껴도 돈에서 벗어나지..

읽고본느낌 2022.08.25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지은이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다가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직장을 잃었다. 수입이 끊어진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돈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삶의 우아함을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 이다. 이제 풍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지은이의 말은 불안한 국제 정세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면 동감이 된다. 전과 같은 고성장의 호황기는 다시 올 것 같지 않고 절약이 불가피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과거와 같은 성장과 자원 낭비가 계속되면 지구가 여러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환경 파괴도 심각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읽고본느낌 2022.08.21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톨스토이는 50세에 회심(回心)의 경험을 하면서 삶이 바뀐다. 거짓되고 타락한 삶을 반성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먼저 진실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도 이때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항상 괴로워하며 시달림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올바른 삶의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석영중 선생이 쓴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에 관한 책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를 중심으로 톨스토이의 생각을 더듬어 본다. 에서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레빈이다. 레빈은 지주 귀족이었지만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일하면서 삶의 의의를 깨닫는다. 육체의 쾌락에 빠진 안나가 비극적인 죽음..

읽고본느낌 2022.08.01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와 '가난'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가난과 단순한 삶을 예찬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짚었다. 는 가난해도 멋있고 풍요롭게 살고 싶어 하는 MZ 세대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소비하는 세대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부모 세대처럼 근검 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부유한 생활을 즐기고, 통장 잔고가 바닥을 쳐도 눈앞의 케이크를 황홀하게 탐닉하는 것이 이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돈 버는 방법은 잘 몰라도 돈 쓰는 방법 하나는 귀신 같이 안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카르페 디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가난할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걸 이미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는 수밖에 ..

읽고본느낌 2022.07.24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요사이 책 읽기에 게을러졌다. 핑계를 대자면 장마철의 후덥지근한 날씨다. 아직 에어컨을 켤 정도는 아니지만 책에 집중하기에는 꿉꿉하다. 보통 일주일에 한두 권을 읽는데 이 책은 두 주일이 걸렸다. 그것도 듬성듬성 읽었다. 영국의 역사 평론가인 그레그 제너가 쓴 는 발상이 재미있다. 현대인의 하루 일상을 -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고 아침을 먹고 몸을 씻고 입을 옷을 고르고 시간을 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이를 닦고 침대에 들어가 자명종을 맞추는 것 -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관습화된 행위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내용이다.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힌 책이다. 우리의 일상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식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수백 년, ..

읽고본느낌 2022.07.21

나의 해방일지

지인이 추천해줘서 다시보기로 닷새 동안 몰아서 본 드라마다. 16회분으로 올봄에 jtbc에서 방송되었다. 잘 만들었다기보다는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의 키워드는 '추앙'과 '환대'인데 이 단어들 자체가 낯설고 생경해서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정과 구씨 관계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뭐, 애매한 것은 애매한 채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환대'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화의 세계라면 가능하겠지만. 지지난주에 어느 모임에서 MZ세대의 의식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요사이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을 알고 싶으면 '나의 해방일지'를 보라고 한 분이 말해줬다. 경기도 산본에 살면서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애환과 꿈, 사랑이..

읽고본느낌 2022.07.09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80세 넘은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80세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이 책은 미국의 SF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에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올린 글을 모은 책이다. 이 분은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블로그는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자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낯선 사람들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마라구 작가를 보고 생각을 바꿔 블로그를 하게 되었다. 작가는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으로 자유로움을 든다. 사마라구처럼 독자들과 소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 블로그 글쓰기다. 지난번 도널도 홀의 수필처럼 어슐러의 글에서도 노년의 지혜와..

읽고본느낌 2022.06.25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미국의 시인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이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집이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지만 나이에서 오는 노숙한 시인의 풍모가 글에서 느껴진다. 글은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 재미있다.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의 여유가 부럽다. 지은이는 12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70년 넘게 40권의 책을 출간했고 2006년에는 미국 계관시인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예술가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인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상을 받게 된 사연이며 에피소드가 책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시인은 2018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이 책에 실린 글은 그가 말년에 쓴 에세이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펜을 놓지 않았다. 책 제목으로 쓰인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은 노년에 든 누구나 느끼는 감..

읽고본느낌 2022.06.19

과학인문학

직장에 있을 때 후배 P가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던 후배였다. 수시로 나를 찾아와서 양자론에 대해 질문하는 통에 혼줄이 났다. 딴에는 물리를 공부했으니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 말이 길어지고 어려운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과 함께 하는 물리학 산책'이라는 부제를 가진 은 드물게 시인이 물리학에 관해 쓴 책이다. 시인이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은이인 김병호 선생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시인이 된 분이었다. 물리학의 소양에 문학의 감성이 더해져서 '과학인문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만들어졌다. "문학과 과학은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며 그 호기심을 밀고 나..

읽고본느낌 2022.06.13

야생 속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촉망받던 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알래스카의 야생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청년은 크리스 맥캔들리스다. 몇 년 전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를 통해 크리스를 알게 되었지만 이번에 를 읽으며 크리스가 한 행동의 이면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확실히 영상보다는 활자가 논리적이면서 맥을 짚어내는 데는 더 뛰어난 것 같다. 다큐 작가인 크라카우어의 능력인지 모르지만. 책에는 크리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소개한다. 무모한 이상주의자나 철부지 정도로 폄하하는 것 같다. 별 준비도 없이 알래스카의 거친 야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오만으로 볼 수도 있다. ..

읽고본느낌 2022.06.05

콰이어트

사색적인, 지적인, 책벌레, 꾸밈없는, 섬세한, 사려 깊은, 진지한, 숙고하는, 미세한, 내성적인, 내면을 향하는, 부드러운, 차분한, 수수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수줍음 많은, 위험을 싫어하는, 얼굴이 두껍지 않은 - 이는 내향 성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두세 명 중 한 명은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회식보다는 독서를 좋아한다. 혁신과 창조에는 열광하지만 자기 자랑은 싫어한다. 여럿이 일하기보단 혼자 어딘가에 콕 박힌 채 고독한 작업을 즐긴다. 이 책 는 내향성을 가진 사람의 숨겨진 힘에 초점을 맞추고 격려한다. 부제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지은이인 수전 케인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내..

읽고본느낌 2022.05.29

나의 사적인 그림

사람한테는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있다. 공적인 생활은 드러나지만 사적인 생활은 숨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적인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할 뿐이다. 우지현 작가의 은 작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책이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글과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글이 중심이지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설명은 많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글과 연관된 그림을 보는 재미는 여전히 쏠쏠하다. 작가가 소개하는 그림은 사탕처럼 달콤하고 봄 햇살처럼 화사하다. 이 책에서도 새로운 단어 하나를 알게 되었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인데 우리말로 하면 '황홀한 죄책감' 쯤 되겠다.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움을 주는 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

읽고본느낌 2022.05.24

고흐, 영원의 문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888년에 아를로 옮긴 이후의 인생 후반부를 그린 영화다. 한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고흐 그림의 느낌이 나는 화면에 잘 담겨 있다. 고흐의 격정적인 삶을 차분하면서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내면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적대적이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힘들게 예술혼을 불태우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던 한 인간의 고군분투가 안타깝다. 그렇다고 고흐가 늘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는 상당 부분을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하는 고흐를 보여준다. 화구를 메고 그림의 소재를 찾아 초원을 걷는 행복한 고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간관계는 서툴렀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는 예민한 촉수를 갖..

읽고본느낌 2022.05.14

숲의 즐거움

우석영 선생의 숲에 관한 철학 산문집이다. 숲을 산책하며 느끼고 사유한 사색의 단상들이 묵직한 무게로 담겨 있다. 숲은 '수풀'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수풀은 '수(樹)'와 '풀'의 합성어다. 숲은 나무와 풀만 아니라 온갖 생물이 살아가는 다(多)세계의 총합이다. 또한 숲은 여러 삶의 주체들이 각자의 삶을 공생의 문법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집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인간 태초의 고향인지 모른다. 우리는 숲을 거닐며 마음의 고요를 회복하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은 숲 산책의 행복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몇 새로운 단어를 발견해서 기뻤다. 그중 하나가 '유산(遊山)'이다. 옛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산의 숲길을 거니는 일을 유산이라고 불렀다. 거니는 전통이 소멸되면서 지금은 유산 ..

읽고본느낌 2022.05.12

혼자 있기 좋은 방

"화가, 작가, 꾸준함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이 책 지은이인 우지현 씨 소개의 첫 문장이다. 지은이의 그림은 보지 못했지만 글은 무척 잘 쓰시는 분이다. 글의 기교보다는 글에서 풍기는 향기와 깊이가 독자를 끌리게 한다. 은 그림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처음 보는 예쁜 그림들이 많아 눈호강을 하면서 화가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림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미가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책은 '조용히 숨고 싶은 방' '완벽한 휴식의 방' '혼자 울기 좋은 방' '오래 머물고 싶은 방' 등 4부로 나누어져 있으나 큰 의미는 없다. 꼭 방에 관한 그림도 아니다. 잔잔한 일상을 ..

읽고본느낌 2022.05.07

오래된 생각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년 5월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고뇌 속 한 인간이 남긴 마지막 말에 가슴이 짠해진다. 이 책은 대통령을 옆에서 모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소설 형식을 빌려 쓴 노 대통령에 대한 회고 기록이다. 은 기득권 세력만 아니라 여권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고독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말대로 육백 년 기회주의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대통령..

읽고본느낌 2022.05.02

레고로 만든 집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 책은 그 이후에 쓴 소설을 모아서 펴낸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레고로 만든 집'을 포함해 아홉 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소설은 '레고로 만든 집'이었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 더욱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사지마비가 된 아버지와 장애인 오빠를 돌봐야 하는 주인공은 대학교 앞 복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집을 날린 뒤 쓰러지고, 어머니는 전세금을 빼서 도망가버렸다. 낡고 작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부엌에서 잠을 자며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간다. 그녀는 너무 가난하고 쓸쓸하다. 작가의 소설에는 이런 주인공들이 자주 나온다. 주인공은 사람이..

읽고본느낌 2022.04.21

구경꾼들

도서관에서 윤성희 소설가의 책을 세 권 빌려 왔다. 구할 수 있는 작가의 책은 모두 읽어볼 예정이다. 작가의 작품을 연속으로 읽어 볼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얼마 전에 만났던 이었다. 그때 느낌이 강렬하여 윤성희 소설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윤성희 소설가의 작품은 짧은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이 통일된 구도 아래 부드럽게 이어져 나간다. 이번에 읽은 은 장편소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구경꾼들인지 모른다. 소설가 또한 진지한 세상의 구경꾼일 것이다. 책 제목대로 작가는 구경꾼의 시선으로 애틋한 한 가족의 삶을 그려낸다. 은 '나'의 성장소설이면서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족 서사다. 이 가족은 외조모를 포함해서 9명이다. 조부모, 부모, 삼촌 ..

읽고본느낌 2022.04.14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날마다 만우절'을 비롯해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날마다 만우절'은 소설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된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도 그에 못지않게 뛰어나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아쉽게 생각될 정도로 소설은 흡인력이 강하면서 잔잔한 울림을 준다. 주인공은 주로 여성들인데 이들이 펼치는 인간사가 애잔하고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걸 담아내는 소설가의 담백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속도 빠른 짧은 장면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나는 11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 밤'이 제일 인상 깊었다. 한밤중에 킥보드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쓰러진 여성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칠순을 앞둔 주인공은 남편이나 딸로부터 소..

읽고본느낌 2022.04.07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탁현민 씨가 쓴 여행 수상집이다. 글을 쓴 시점이 문재인이 대선에 패배했던 직후인 2013년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일한 탁현민 씨는 패배의 충격으로 파리에서 석 달간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한다. 이때의 감상을 글로 적어서 책으로 냈다. 탁현민 씨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된 후 이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공연 연출가로 중요한 대통령 행사를 지휘했다. 대표적인 게 남북 정상이 만난 판문점 회동이다. 고식적인 형식을 탈피한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금방 남북 화해가 이루어질 듯 가슴을 뛰게 했으나 지나고 보니 결과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당시 야권에서 보여주기식 쇼는 그만두라고 했는데 일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에는 선거 결과에 상심한 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나도 그때 허탈한 기분을 달..

읽고본느낌 2022.04.02

다읽(16) - 과학혁명의 구조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대학생이었을 때 필독서였다. 그때 번역서가 나왔는지, 아니면 원서로 도전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완전히 읽어내지는 못했다. 읽어야 한다는 책이지만 읽지는 못하고 뒤로 남겨진 책이었다. 토머스 쿤(T. S. Kuhn)의 는 워낙 자주 인용되는 책이라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읽지 않고도 무얼 말하는지 한 마디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유명해진 단어가 '패러다임(paradigm)'이다. 과학의 한 분야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뛰어난 성취를 통해 정상과학에 진입한다. 일단 정상과학이 되면 이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명료화하는 방향으로 과학은 발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변칙현상이 일어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읽고본느낌 2022.03.27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막달라 마리아를 보는 시각이 신선한 기독교 영화다. 부제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다. 신약성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을 지킨 여인으로 나온다.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 마르코 15,40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마르코 15,47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마르코 16,1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

읽고본느낌 2022.03.20

술과 바닐라

작년에 나온 정한아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술과 바닐라'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섰는데 이런 젊은 여성 작가의 글에서는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좋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인생의 스산한 면을 드러내어 쓸쓸하다. 특히 일과 육아의 무게에 짓눌린 결혼한 여자의 삶을 사실 그대로 잘 그려낸다.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거실에 걸린 화사한 가족사진은 빙산의 드러난 부분일 뿐, 수면 밑의 차가운 진짜 세계를 작가는 가차 없이 재현해 낸다. 일곱 편 중에서 눈에 띈 것은 '기진의 마음'이었다. 기진은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둔 유방암 투병을 하는 주부다. 이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암 환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 소설이다. 남편이나 자식, 친구..

읽고본느낌 2022.03.18

더 홈즈맨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세 편 모두 인상 깊고 여운이 남았다.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중 한 편이 '더 홈즈맨(The Homesman)'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배경인데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서부영화 장르에 들어갈 테지만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싸움이 소재인 전통적인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 한다. 고통받는 약자를 향하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다. 무대는 서부 개척의 최전선인 네브라스카로 거친 환경과 힘든 노동,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삶은 피폐하다. 그중 세 여자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미혼이었던 커디에 의해 그녀들의 고향인 아이오와로 옮겨지게 된다. 커디는 짐마차에 세 여자를 태우고 400마일의..

읽고본느낌 2022.03.13

인듀어런스

20세기 초반은 극점 탐험의 시대였다. 1911년의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아문센과 스콧의 경쟁은 유명하다. 둘의 명성에 가려진 또 다른 위대한 탐험가가 있다.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영국의 어니스트 셰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이다. 셰클턴은 1909년에 남극점에 도전했다가 식량 부족 때문에 155km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만약 무리하게 전진했다면 스콧처럼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2년 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자 셰클턴은 목표를 바꾸어 남극 대륙 횡단에 나선다. 27명의 대원과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알렉산더가 쓴 는 이 탐험에 관한 기록이다. 동행한 사진사 헐리가 찍은 사진이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며 우리를 현장으로 안내한다..

읽고본느낌 2022.03.08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신화화된 그리스도는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교회 쇼윈도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한완상 선생이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다. 교회가 예수를 앞세우지만 정작 예수의 정신은 없다. '믿습니다'의 열정에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의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은 '따름'에 있어서는 자국민의 경멸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은총만 강조하다 보니 질문과 성찰은 소홀히 하고 값싼 기복신앙만 난무한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치매'라고까지 표현한다. 선생은 먼저 역사적 예수의 매력을 되찾자고 한다.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살아 있는 예수의 역동성을 외면한다. 구속 드라마 속의 예수는 구속사에서 배우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읽고본느낌 2022.03.04

예수냐 바울이냐

"바울의 기독교 신학 안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정신은 없다." 저자인 문동환 선생이 이 책에서 맺는 결론이다. 책의 '시작하는 말'의 서두 부분은 이렇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바울 신학을 추종해 왔다. 그리고 이것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온 세계에 전파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 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메시아 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어처구니없는 민족주의다." 는 예수와 바울을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밝힌다. 이 책은 바울이 예수의 정신을 왜곡했다고 보는 ..

읽고본느낌 2022.02.25

도올의 로마서 강해

내가 한때 회심을 하게 된 계기가 '로마서'였다. 수녀원의 조용한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이 나를 찔렀다. -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서 1,17). -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로마서 3,21)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로마서 3,22).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로..

읽고본느낌 2022.02.22

다읽(15) - 예수는 없다

세 번째 다시 읽는 책이다. 20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한 글에 가슴 한 편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번민만 있을 뿐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신앙의 정체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가 나오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선생의 인기를 반영하듯 넓은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청중 중에는 선생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 중에 그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또, 선생의 친구라면서 조영남 씨가 나와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 자..

읽고본느낌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