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911

앙코르 인문 기행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책이다. 인천공항에서 씨엠립까지 다섯 시간 정도 걸리니 책 한 권 읽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일부러 집에서 읽지 않고 배낭에 넣어 비행기 안으로 가져간 책이다. 은 대만의 쟝쉰(蔣勳) 선생이 썼다. 선생이 앙코르 유적지에서 친구에게 쓴 편지들을 엮었다. 선생은 앙코르를 14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앙코르 사랑에 빠진 분이다. 그는 폐허가 된 앙코르 유적을 보면서 문명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폐허 구석에 앉아 가만히 눈물을 흘리는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앙코르 유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찾은 책은 대부분 여행 안내서였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단순한 여행의 감상이 아닌 인간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건드리는 인문서다. 인간의 가..

읽고본느낌 2024.01.23

임윤지당 평전

임윤지당(任尹摯堂, 1721~1793)은 조선에서 드문 여성 성리학자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 연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존여비의 유교 가부장사회에서 성리학을 통해 인격 완성을 추구한 임윤지당은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그가 다짐하듯 강조한 말이 있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부여받은 본성은 남녀간에 다름이 없다." 임윤지당은 유복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깨쳤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가족들은 학문을 닦도록 도와주었고, 특히 오빠인 임성주는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다.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며 임성주는 그의 재질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그가 여사(女士)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열정이 있었기..

읽고본느낌 2024.01.09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는 부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든다. 남편인 현수에게 몽유병(렘수면 행동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얼굴을 긁어 상처가 나고, 냉장고에서 생고기를 씹어먹고, 심지어는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반려견을 냉장고에 집어넣어 죽이기도 한다. 임신한 아내 수진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은 수진마저 강박증에 시달리고 현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믿은 나머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다. '잠'은 공포 미스터리 장르에 들어갈 영화다. 인간의 망상과 집착이 심해져 파멸로까지 나가는 지를 보여준다. 둘은 합리적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었다. 아기를 낳은 뒤에는 분리해서 생활하는 게 상식이지만 부부는 둘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고집한다. 여기에 확증편향이 더해져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 이 영화를 본 ..

읽고본느낌 2024.01.07

중세 유럽인 이야기

학창 시절에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Dark Ages)'라고 배웠다. 지금도 중세라고 하면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오른다. 대략 서기 500년부터 1500년에 이르는 1천 년의 시간으로 봉건제와 미신에 가까운 종교가 인간 정신을 옭아맨 몽매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기가 되어서야 문화의 빛이 살아나고 서구 문명이 개화했다고 한다. 를 쓴 주경철 선생은 이런 선입견은 버리라고 말한다. 중세는 야만성과 함께 세련된 문화가 공존한 콘스라스트가 강한 시대였으며, 이 시대 사람들은 독특한 문명을 건설하여 후대에 물려준 총천연색의 화려한 중세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는 중세를 살았던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중세의 속살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 있어 단숨에 읽었다. 책은 5부로..

읽고본느낌 2024.01.03

혼자 사는 사람들

진아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여자다. 혼자 살면서 집과 회사(카드 회사 콜센터 직원)만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동료들과 대화도 없고, 점심도 외딴 식당에서 혼자 먹으며, 출퇴근 때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 화면만 본다. 휴대폰에 집중하는 것은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와 같다. 외부와 단절된 삶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 두 가지가 생긴다. 하나는, 신입사원 수진을 1:1로 연수를 시켜야 하는 일로 진아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붙임성 좋은 수진에게 매몰차게 대하지만, 솔직하고 관계를 중시하는 수진을 보며 진아의 마음에는 미묘한 파장이 인다. 다른 하나는, 홀로 사는 옆집 남자가 고독사한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된 사건이다. 뒤이어 입주한 남자는 떠난 사람..

읽고본느낌 2023.12.26

사임당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우리가 교육받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의 사임당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요로 순종과 희생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세뇌 과정의 일부였다. 가부장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열녀효부(烈女孝婦)'라는 말로 여성성을 억압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있기 마련이다. 당대나 직후에 사임당은 '여성화가 신씨'로 불렸다.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송시열에 의해 '율곡의 어머니'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율곡을 대성현으로 모시게 되니 자연스레 율곡을 기른 어머니의 모성성을 숭앙..

읽고본느낌 2023.12.23

어머니를 돌보다

정상뇌압수두증(正常腦壓水頭症)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 기록이다. '1994년 말, 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로 책은 시작한다. 뇌에 생긴 이상으로 인지장애가 생긴 어머니는 11년 동안 세 딸과 간병인들에 의지하며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인 린 틸먼(Lynne Tillman)은 미국의 소설가로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혼돈스러운 심경을 아프게 고백한다. 원제는 다. 지은이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케어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가족과의 마찰, 의사와 간병인과의 갈등, 불안, 낙담, 우울감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여타 간병 기록이 어두운 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에 비중을 두지만, 지은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읽고본느낌 2023.12.21

남아 있는 나날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소설이다. 작가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낸다고 한다. 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가 과거에 함께 일했던 켄턴을 찾아가는 6일 동안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티븐스로서는 달링턴 홀을 떠나 평생 처음 해 보는 여행이다. 중간중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여정과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품격'이다. 품격과 충성심, 성실, 명예 등을 빼놓고는 스티븐스를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븐스는 귀족을 섬기는 자신의 직..

읽고본느낌 2023.12.16

쓰기의 말들

당구 책을 읽는다고 당구를 잘 칠 수 없듯이,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글쓰기 책을 힐끔거리는 건 되도록이면 글을 잘 쓰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무엇에고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은 '글 쓰는 사람'인 은유의 글쓰기 안내서다. 부제가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글을 써 보고 싶어지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잘 쓰고 싶어진다. 은유의 글쓰기 수업은 이론보다는 실용적인 팁이 많아 실제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된다. 이 책은 유명인이 남긴 104개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지은이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쓰기의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가지는 나올 것이다. 이번에..

읽고본느낌 2023.12.13

괴물

열흘 전에 개봉한 따끈따끈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따스한 인간애를 다루지만 대체적으로 밍밍한데, 이 영화는 관객을 살짝 긴장시키면서 우리 사회 및 인간의 내면을 잘 담아낸 수작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중 최고라고 할 만하다. '괴물'은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학교 폭력이나 인간 심성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영화는 아니다. 같은 사안이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는 3막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어머니인 사오리, 교사인 호리, 사건의 중심에 있는 두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교차한다. 영화의 중심은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가 ..

읽고본느낌 2023.12.10

그래도 우리의 나날

일본 작가인 시바타 쇼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불안과 방황을 그렸다. 소설에는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거나 간접적으로 관련된 젊은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조직이 와해되어 이념의 공백 상태를 겪으면서 허무와 권태에 빠져든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과 연결시킨 작품이다. 은 제51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인 사노는 혁명가를 꿈꾸었으나 뻔뻔하지 못했다. 진압 경찰과 맞섰을 때 무서워서 도망한 사실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여린 감성을 가진 젊은이였다. 공산당 무장 조직이 해체되면서 이상이 붕괴되는 현실을 사노는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감정이입이 되면서 만났다. 상황은 딴판이지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

읽고본느낌 2023.12.03

뜬 세상에 살기에

김승옥 작가의 최근 글을 만나는 기대감에 책을 열었으나 1970년대에 나온 수필집이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20대와 30대에 쓴 글인데 책 제목에 낚인 감도 있다. '뜬 세상에 살기에'라는 제목만 보고 노년에 들어 쓴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은 작가의 청년기 삶과 생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소설가로 등단한 계기,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에 대한 단상, 다양한 세평들이 들어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의 대학 생활은 흥미로웠다. 동인지 를 만드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학창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활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이 수필집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의 분위기가 작가를 그대로 닮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한 글에서 을 쓰게 된..

읽고본느낌 2023.12.02

비닐하우스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오래 한숨을 쉬었던 영화다. 내용이 스릴러 영화로 분류될 정도로 긴장을 시키지만, 나는 영화에서 비중 있게 나오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삶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문정은 아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소년원에 있는 아들은 곧 출소할 예정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문정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학 증세가 나오는데 이는 문정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정은 성심성의껏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간병하는데, 어느 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문정은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든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만다. 가족이라는 족쇄가 문정..

읽고본느낌 2023.12.01

다읽(21) - 걸리버 여행기

'다시 읽기'가 아니라 '제대로 읽기'였다. 이때껏 기이한 여행담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은 당대의 정치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었다. 소인국이나 거인국이라는 소설의 소재도 왜곡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지 않나 싶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쓴 는 4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소인국인 릴리펏 여행기, 2부는 거인국인 브롭딩낵 여행기, 3부는 라퓨타, 바니발비, 그립덥드립, 럭낵, 일본 여행기, 4부는 휘넘국 여행기다. 주목할 점은 여행의 후반부로 갈수록 걸리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넓어지면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어떤지가 드러난다. 작가는 재미보다는 교훈을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읽고본느낌 2023.11.23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걷기가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유,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현존, 평안 등 책의 차례에 등장하는 용어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걷기의 대표 주자라고 할 만한 여러 인물들(니체, 랭보, 루소, 소로, 네르발, 칸트, 프루스트, 벤야민, 간디, 횔덜린)도 소개한다. 이들은 걸으면서 사유하고 자기 세계를 완성해 나간 사람들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걷기는 소요나 산책에 가깝다.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라는 별명이 붙은 루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하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서다. ..

읽고본느낌 2023.11.16

동주

구효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윤동주 시인이 직접적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겐타로와 요코라는 제삼자를 통해 윤동주를 그린 소설이었다. 윤동주, 겐타로, 요코 셋은 두 세계 사이에 불안하게 서 있는 경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겐타로는 1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니며 윤동주의 유고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요코라는 인물을 기록으로 마주하게 된다. 요코는 아이누인이었지만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하다가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여자다. 윤동주가 동경에서 하숙을 할 때 요코는 하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윤동주를 가까이서 보았다. 요코의 추억을 톻해 윤동주가 어떤 인물인지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읽고본느낌 2023.11.13

낮의 목욕탕과 술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떠 있을 때의 목욕과 술에 대한 예찬이다. 이런 소재로 재미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에서 즐길거리는 사방에 널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은이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본의 만화가로 도쿄와 근교의 오래된 목욕탕을 순례하는 복고풍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목욕 후 마시는 낮술의 달콤함도 빠질 수 없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 최고×최고, 그게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암, 그렇고말고. 이히히히...

읽고본느낌 2023.11.07

그늘에 대하여

일본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산문집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전통미에 경도해 이를 글로 아름답게 살려내는 새로운 경지를 연 작가다. 여기에 실린 '그늘에 대하여'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그늘에 대하여'를 비롯해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흔히 전통미를 말할 때 형태와 맵시에 주목하지만 작가는 일본 건축에 스민 그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늘에 대하여'는 빛을 다루는 일본인의 섬세함을 일본적 감성으로 잘 그려내 보여준다.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이다. '음예(陰翳)'는 생소한 용어인데 '그늘인 듯한데 그늘이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

읽고본느낌 2023.11.05

나를 살리는 글쓰기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문장 노동자, 독서광 - 이 책의 저자인 장석주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작가는 40년 동안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낼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다. 작가는 말한다. "글쓰기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는 글쓰기에 임하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행위다. 전업작가의 글쓰기는 종교인의 처절한 수행과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발견이면서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글쓰기의 엄중함과 치열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서관에 묻혀 살며 읽고 글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이 '..

읽고본느낌 2023.10.23

다읽(20) - 로빈슨 크루소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까마득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 생활을 할 때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에 부지런히 다닐 때인 20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역본을 다시 읽어보니 같은 책이지만 새롭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디포가 를 영국에서 출간한 해는 1719년이다. 당시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식민지의 자원을 약탈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크루소의 사고방식도 철저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크루소의 사고나 행위를 보면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기독교 사상이 결합하여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인다. 크루소는 치밀하면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도전하는 근대인의 모습 그대로다. 크루소는 노예로 쓸..

읽고본느낌 2023.10.19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작가의 글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늦가을 저녁의 분위기가 진하다. 쓸쓸하지만 석양의 기운이 따스하다. 이 계절에 읽기에 적당하다. 작가의 산문집인 에는 그런 느낌의 글이 가득하다. 음미하며 조금씩 읽었다. 책에 실린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요일의 문장'에 연재한 것이다. 책 표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와 정원 그리고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며 햇빛과 의자를, 대숲과 바람을, 고전과 음악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한다." 작가의 글에는 안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작가는 안성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추알처럼 잘 익어가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부서뜨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

읽고본느낌 2023.10.13

시인

은 이문열 작가가 김삿갓의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가정사를 안다면 김삿갓을 빌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然, 1807~1863))으로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 항복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나이 6세 때였다. 죄인의 집안 자식이라는 올가미를 쓴 채 숨어 살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는 즉흥시를 남겼다. 초기에는 신분 상승의 꿈을 가졌으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체제의 일탈자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이문열 작가의 부친은 서울농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6.25가 터지자 월북했다. 그런 연유로 전쟁 뒤 ..

읽고본느낌 2023.10.11

서울대 10개 만들기

"한국은 교육지옥이다." 이런 명제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고등학교를 전쟁터라고 생각하는 학생 비율이 우리나라는 80%에 달하는데, 중국은 41%, 미국은 40%, 일본은 13%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럽 학교와의 비교는 아예 되지 않는다. 한국만큼 사교육이 번창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 없다. 한국 교육은 '시민'이 아니라 '전사'를 기른다. 그렇다면 "왜 한국만 교육지옥인가?"라는 물음이 따른다. 사회학자인 김종영 선생이 쓴 는 여기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선생은 이런 교육지옥의 원인이 대학 서열 체제로 인한 병목 현상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서울대를 필두로 한 SKY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인다. 여기에는 정부관료와 사교육 세력,..

읽고본느낌 2023.10.03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당신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닐봉지를 줄이려고 에코백을 샀는가? 페트병에 담긴 음료를 구입하지 않기 위해 텀블러를 갖고 다닐까?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입했을까? 단언한다. 당신의 그런 선의만으로는 무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유해하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온난화 대책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믿는 당신이 진정 필요한 더 대담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에코백과 텀블러 등을 구입하는 소비 행동은 양심의 가책을 벗게 해주며 현실의 위기에서 눈을 돌리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있다. 그런 소비 행동은 그린 워시(green wash), 즉 자본이 실제로는 환경에 유해한 행동을 하면서도 환경을 위하는 척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에 너무도 간단히 이용되고 만다." 의..

읽고본느낌 2023.09.26

소공녀

본 지 꽤 되었지만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다.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는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지켜나가는 젊은이다. 일당 45,000원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욕심 없이 살아간다. 또래 젊은이들이 꿈꾸는 돈이나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미소의 소확행이라면 일이 끝난 뒤의 위스키 한 잔, 담배, 그리고 미소만큼 착한 남자 친구다. 어느 날 거처하고 있던 단칸방의 오른 월세를 부담할 수 없어 미소는 홈리스가 된다. 미소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싸들고 나서며 길 위의 여행자로 살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밴드 활동을 함께 하던 멤버들을 찾아간다. 영화는 옛 멤버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미소와의 교감이나 갈등을 다룬다. 집도 없으면서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미소를 보며 염..

읽고본느낌 2023.09.23

인간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은 이렇게 시작한다.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공감되는 바가 더 있었을까, 사실 지금 나 같은 나에는 감정 이입이 쉽게 되지는 않는다. 전후 일본의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려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지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인 요조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태생이 인간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사회공포증이다. 이들은 사람의 심리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대인 접촉을 기피한다. 많은 경우 격리된 삶을 살지만 요조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면서 도리어 적극적으로 '익살'을 부리며 인기를 얻으려 한다. 이런 이중적인 자기모순이 결국 절망에 빠져들며 방황하게 된다. 1940년대 후반의..

읽고본느낌 2023.09.2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선생이 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신문 칼럼이 다루는 다양한 소재의 글감을 일상, 학교, 사회, 영화, 대화의 5부로 나누어 실었다. 선생의 세상을 보는 시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한 글맛을 느낄 수 있다. 5년 전 이맘때 경향신문에 실렸던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은 세간의 화제를 끌었던 모양이다. 선생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추석에 만나는 친척들에게도 원용해보라고 충고한다.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

읽고본느낌 2023.09.16

다읽(19) - 싯다르타

대학생 때 한 친구는 좋아하는 여학생과 가까이하고 싶어 불교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여학생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친구는 여학생한테서 수시로 불교 관련 서적을 빌려왔다. 나도 따라서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친구보다 내가 더 열심이게 되었다. 이 도 그때 읽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당시 상황과 관계없는 나중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헤세는 인간의 문제, 그중에서도 인간 성장과 완성의 길을 다루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동양 사상도 짙게 배어 있다. 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헤세의 특징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바라문 계급의 싯다르타는 요사이 말로 하면 금수저로 태어났다. 더구나 잘 생기고 총명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제도 종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는 없었다. 고뇌하던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

읽고본느낌 2023.09.09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의 허무에 대한 김영민 선생의 산문집이다.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많은 문학, 철학, 예술 작품을 소개된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줄기찬 노력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닿는다. 지은이의 진단을 보자. "현실은 복잡성과 딜레마와 역설로 가득하다. 외로워서 결혼을 했더니 더 외로워지는 역설. 배가 나와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역설. 포기했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되더라는 역설. 미래를 예측한다며 약을 파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삶이 정녕 법칙과 예측대로 흘려가던가. 모르겠다. 대체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빔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지 않던가. 그러다가..

읽고본느낌 2023.09.02

더 웨일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어버린 찰리라는 남자가 있다. 강박적인 폭식으로 27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이 되어 보조 기구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 웨일[The Whale]'은 자학 끝에 죽음을 맞는 - 동시에 세상과 화해하려고 하는 - 찰리의 마지막 며칠을 담고 있는 영화다. 찰리의 인생은 기구하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두었지만 동성 제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렸다. 파트너마저 세상을 떠나자 찰리의 삶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폭식증에 걸려 지금의 몸이 된 채 망가졌다. 다행히 글쓰기 시간강사로 인터넷 강의를 하며 생계는 유지한다. 찰리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마지막으로 딸과 화해하려 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단출하다. 찰리 외에 딸 엘리, 간호사 리즈, 전도사 토마스 정도다. 그러나..

읽고본느낌 2023.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