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89

민망하다

얼마 전에 뒷산길을 걸을 때였다. 굽은 길을 돌아나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길 옆에서 한 여자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보고 있었다. 거리는 5m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뒤로 비스듬히 돌아앉은 여자는 외간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황당 시추에이션을 어떡 하지? 나는 알아채지 못하게 돌아서서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도망쳤다. 다행히 서너 걸음만 걸으면 보이지 않게 길은 굽어 있었다. 그리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인기척이라도 내서 여자가 알아챘더라면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내가 민망한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방심은 가끔 이렇게 황당한 일을 생기게 한다. 사전에 여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을 테지만 때로 투명인간이 있음을 잊은 것 같다. 4..

길위의단상 2021.07.13

덕 볼 일이 없으면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제일 강력한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이욕(利慾)'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개체의 생존과 종족 번식의 욕구는 이기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돈 많고 권력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뭔가 덕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덕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발걸음을 끊는다. 오죽하면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 나잇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손주를 자주 보는 방법은 올 때마다 용돈을 듬뿍 쥐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효자인 줄 알았더니 속셈은 따로 있었다. 제가 부모한테 덕 볼 일이 없어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척할지는..

참살이의꿈 2021.05.26

완벽한 타인

개봉한 지 벌써 2년 반이나 지난 영화다. 그때 지인한테서 재미있는 영화라고 추천받았는데 극장에 가지는 못했고, 느지막이 넷플릭스를 통해 봤다. 고향 친구 넷이 부부동반으로 집들이 모임을 갖는다. 한 사람의 제안으로 각자의 휴대폰을 테이블 중앙에 내놓고 연락 오는 내용을 모두 공개하기로 한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서로의 관계는 파탄 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응큼하다. 만약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대부분의 인간 관계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산다. '완벽한 타인'은 그런 인간의 본질을 코믹하게 잘 드러내 주는 영화다. 흔히 부부를 일심..

읽고본느낌 2021.03.12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난봉꾼 타고난 끼로 숱한 아녀자를 농락했다. 성난 주민들 관아에 고발, 심판 받게 된 것이다. 원님 가로되 "저놈이 다시는 나뿐 짓 못하게 거시기를 잘라 버리도록 해라!" 그러자 그 아비가 일어서서 간청했다. "나리. 저 녀석이 우리 집안 4대 독자입니다. 대를 이어가야 하므로 저 아이 대신 제 거시기를 자르십시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불쑥 원님 앞에 나섰다. "사또, 법대로 하옵소서." 그러자 큰일 났다 싶은 며느리가 손사래, 손사래 치며 "어머님. 남정네 하는 일에 여자들은 빠집시다." -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만 해도 벅찬데 이번에는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이 터졌다. 권력과 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힘이 생기면 어디에든 과시해 보고 싶은 걸까. 성 욕망에는..

시읽는기쁨 2021.01.27

재미와 의미

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

참살이의꿈 2020.12.07

지적 생명체 실험 실패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실제 주인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지적 존재인 인간을 이용할 뿐이다. 처음부터 지적 존재가 되도록 계획하고 유도한 주체는 유전자다. 인간은 오로지 '유전자 기계'에 불과하며, 유전자의 이기성이 제일 잘 발현된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다. 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내용이다. 지구는 살아 있다. 지구는 토양과 대기, 해양과 생물 생태계를 포함해서 조화롭게 작동하는 신성하고 지성적인 존재다. 지구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무기물은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지구의 상태를 조절 유지해 왔다. 만약 지구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인이 생기면 지구는 그를 제거할 것이다. '가이아 이론'이다. 두 이론이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지구의 위기 상황이..

길위의단상 2020.05.16

코로나 이후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 무성하다. 심지어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역사를 구분하자는 얘기도 한다. 과연 그 정도일까? 코로나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궁금한 문제다. 과연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이 생길까? 인류가 개과천선해서 더 나은 대안적 삶을 찾을까? 이 정도가 아니라면 코로나로 세상이 바뀐다고 큰소리를 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지 회의적이다. 코로나19가 올해 안에 진정되고 경제 회복이 이루어지면 코로나19는 표피에 상처에 남긴 채 사라질 수 있다. 다만 코로나19가 수년간 지속하며 우리를 괴롭히거나,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

참살이의꿈 2020.04.19

머스크의 테러

어느 분이 얼마 전에 찍은 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가운데로 낙서를 한 것처럼 흰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분의 설명으로는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여러 대가 열을 지어 이동한 흔적이라고 했다. 사진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그분 입장에서는 '머스크의 테러'라고 부를 만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야심을 가진 사업가다. 그가 꿈꾸며 실행하는 스케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 불허다. 그중 하나에 '스타링크 프로젝트(Starlink Project)'가 있다. 인공위성으로 세계 전역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는 프로젝트다. 2027년까지 지상 550km의 우주 궤도에 인공위성 12,000개를 올려서 사막이나 극지방 등 지구 어디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초고속 인터..

길위의단상 2020.03.30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김규항 선생의 아포리즘이다. 선생의 글에서 핵심 되는 부분을 모았기 때문에 선생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선생의 주장에는 동의되는 부분이 많다. 선생의 글은 간결하면서 주장이 선명하다.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이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

읽고본느낌 2019.09.25

어려운 인간관계

얼마 전에 남한산성에서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서 눈이 마주쳤다. 10m 앞쯤 되었을까, 놀란 건 나보다 멧돼지였다. 멧돼지는 후다닥 달아났고, 그 뒤로 새끼 세 마리가 뒤따랐다. 멧돼지 가족은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약 멧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멧돼지보다 훨씬 더 무서웠을 것이다. 무슨 해코지를 하지나 않을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여자 입장에서는 공포감이 더 클 것이다. 산속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멧돼지는 사람을 해치기보다 십중팔구 제가 먼저 도망간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떤 흑심을 품을지 ..

참살이의꿈 2019.01.18

강신주의 감정수업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특히 다양한 감정 변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욕망에 따른 무수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산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부정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멸시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샘솟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본다. 환희나 영광만 아니라 슬픔, 비애, 절망 등의 감정도 우리에겐 소중하다. 은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인 책이다. '감정의 철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기본으로 깔고, 그 감정이 드러난 문학 작품을 소개한..

읽고본느낌 2019.01.15

죄와 벌 /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죄와 벌 / 김수영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김수영 시인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치부를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까발려도 되는지 고개가 저어진다. 우산으로 여편네를 패고는 우산 두고 온 게 아깝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인간쓰레기라고 부를 만하다. '성(性)'이라는 시는 더 노골적이다. 이런 시가 발표되면 부인의 심정은 어떨까. 당시 ..

시읽는기쁨 2018.10.21

사랑고파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라고 시작하는 노래다. 가끔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향해 부르는 경우를 본다. 어느 경우든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불편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주는 능력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건 유년기에 한정된 얘기다. 인간의 일생에서 사랑을 받기만 하는 시기는 유년기다. 이때는 온전히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사랑 받는 타령만 한다면 정신적으로는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다. 부모로부터 정신적 독립이 안 된 채로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이 ..

참살이의꿈 2018.10.19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하는가 / 예창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세상 환하게 밝히고 사람 살맛나게 하는 것이 살뜰한 인정말고 또 있던가 그러나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 꽃이 꽃을 속이던가 꽃이 꽃의 것을 빼앗던가 꽃이 꽃을 죽이던가 장미가 되겠다는 풀꽃이 있던가 모란이 호박꽃을 깔보던가 아침에 피는 나팔꽃이 밤에 피는 박꽃을 비웃던가 꽃은 저마다 꽃답고 꽃답게 사느니 그러므로 모든 꽃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 사람 세상에 꽃처럼 사는 이가 얼마나 된다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하는가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하는가 / 예창해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들으면 거북하다. 뇌는, 그렇지 않아, 라고 계속 중얼거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역설적인 절규처럼 들리는 건 나만의..

시읽는기쁨 2018.07.22

다만 어리석을 뿐

매일 저녁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든다는 한 지인은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자주 토로한다. 사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 과거에 자신이 잘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 괴롭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야 즐겁게 반추할 수 있지만, 하필 후회스럽고 자책할 일만 생각나니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잠 잘 자는 나도 어쩌다 불면의 새벽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상념이 오가는데 옛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인과 마찬가지로 자랑할 일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로 머리가 꽉 찬다. 어떤 때는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추억으로 산다는 데, 노년에 되씹는 추억이 꼭 감미롭지만은 않다. 그중에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셋째를 낙태시킨 일이다. 딸 둘을 두고 수년이 지나 아..

참살이의꿈 2017.12.04

강자와 약자

일부러 약자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강자가 될 수는 없다. 일부 사람은 강자에게 빌붙어 강자 행세를 한다. 일종의 호가호위다. 위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있다. 자발적으로 몰려든 무리로 인하여 강자는 지배를 정당화한다. 찾아온 알렉산더에게 디오게네스는 "거참,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주쇼"라고 답했다. 강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런 말로 존경을 나타냈다고 한다. 강자에게는 욕심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사람이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강자는 아니다. 성공했다고 강자는 아니다. 살아남았다고 강자도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주체적으로 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17.06.26

호모 데우스

전작 가 인류가 어떻게 지구를 정복하게 되었는가를 다루었다면, 이 책은 21세기 신기술과 만나게 되는 인류의 미래를 예견한다. 인간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믿는 능력으로 대규모 협력이 가능했고,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을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다. 이 책 에서는 인본주의 혁명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신이 사라진 자리의 빈 구멍을 메워준 것이 인본주의 종교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새로운 교리가 인본주의다. 중세에서는 모든 판단을 종교의 경전이 했다. 진리는 이미 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서 의미와 권위의 최고 원천은 자신의 내면이 되었다. 기아, 질병, 전쟁을 극복한 인류는 자유 인본주의 정신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

읽고본느낌 2017.06.25

사피엔스

다섯 달 전에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흥미도 있어 단숨에 독파했다. 인간 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많아 책상 위에 두다가 이번에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이라는 부제대로 동물에서 출발한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는지를 묻고 밝힌다. 지금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한 유기적 생명의 시대에서 지적 설계에 의한 비유기적 생명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사피엔스가 근본적인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한 불장난으로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면 사피엔스는 전혀 새로운 종으로 대체될 것이다. 사피엔스의 종말이 눈앞에 왔다. 아마 우리가 사피엔스의 거의 마지막 세대에 가까워졌다. 저자는 사피엔스가 20만 년 전에 등장해서 지..

읽고본느낌 2017.06.13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말 왜 그럴까 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세밑에 이르렀다. 아쉬움과 회한이 많이 남는 해다. 나이를 먹는다..

시읽는기쁨 2016.12.30

사람

경지 정리가 매끄럽게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잘되기만을 바라는 경쟁적인 요행심을 갖는 것보다 차라리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 자와 컴퍼스로 그려진 정치한 설계도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집 지을 땅 위에 서서 바람의 소리를 따르고 태양의 길을 살펴 점 몇 개와 말뚝 몇 개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애써 자기 말을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자,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믿고 있던 것들이 흔들릴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

참살이의꿈 2016.11.10

문제는 유전자야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이 한 말이다. 종종 이 말은 위대한 업적이 1%의 천재성과 99%의 노력에 의한다고 오해되고 있다. 특히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이 노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자주 인용했다. 어렸을 때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대로 믿기도 했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인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누가 땀을 더 흘리느냐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나는 왜 안 되지, 하면서 더욱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살고 보니 순전히 거짓말이란 걸 알겠다. 에디슨의 말도 아마 영감을 강조하는 취지였을 것이다.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땀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영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다.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유전자를..

길위의단상 2016.06.07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대략 의미만 파악하기 위해 훑어보는 데만도 닷새가 걸렸다. 굳이 정독할 필요까지는 없다. 책의 많은 부분이 다양한 통계와 그래프로 되어 있다. 전체의 요지만 이해하면 족하다. 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인류와 역사에 대한 희망적인 보고서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내면에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다. 초기의 야만과 폭력의 세계로부터 인류는 점차 개명되어 천사의 힘이 악마를 누르는 데까지 발전했다. 전 세계적인 폭력과 전쟁의 감소 현상을 통계로 보여주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아름답게 보는 경향이 있다. 루소를 비롯한 자연주의자의 관점이 대표적이다. 문명이 등장하기 전의 인류는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상상한다. 그것..

읽고본느낌 2016.06.06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비스듬히 / 정현종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둘이서 기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있는 존재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필기체로 쓸 때는 한 획이 다른 획보다 짧다. 긴 쪽을 지탱해 주느라 허덕이는 모양새다. 세상 현실의 한 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기울어짐 없이 적당한 균형을 잡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쪽이 다른 쪽을 날카로운 창이 되어 찌르기도 한다.

시읽는기쁨 2016.02.18

소스라치다 /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소스라치다 / 함민복 경안천에는 오리가 많다. 경안천을 걷다 보면 천변 풀섶에서 먹이를 먹는 오리를 만난다. 방해하지 않으려 피해서 걷지만 오리는 인기척만 느껴도 천 가운데로 도망간다. 미안하다. 어떤 때는 너무 예민한 그들이 야속할 때도 있다. 시에 나오는 뱀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그마한 곤충을 만나도 놀란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오히려 지상의 다른 생명들이다. 덩치가 산더미만 한 인간이 다가오는데 위협을 느끼지 않을 동물이 있을까. 역지사지해야 한다. 지상에서 인간보다 더 무서운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 모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16.02.04

호기심

8개월 된 손자는 이제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작은 몸이 나아가는 목표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의 눈이 꽂히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TV 리모컨 같은 전자기기라는 게 신기하다. 특히 리모컨만 보면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이 된다. 몸이 굳어지고 돌진한 태세를 갖춘다. 희한하다. 검은 직사각형 플라스틱 막대기의 무엇이 아기를 사로잡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지는가 보다. 손주를 지켜보면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징이 호기심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일부 영장류의 새끼도 주변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기의 눈은 세세하게 주위를 스캔하는 카메라 같다. 낯선 것..

참살이의꿈 2015.07.06

뭔지 모르지만

아주 아주 오래전 빅뱅이 있었대. 지금 우주에 있는 수소는 전부 그때 만들어졌지. 내 몸에 들어 있는 수소의 나이가 무려 137억 년이래. 무한대의 수명을 가진 재료로 된 육체지만 우리는 고작 백 년밖에 못 살아. 뭔지 모르지만.... 수소가 뭉쳐서 별이 되었지. 핵융합이 일어나는 내부는 원소를 만드는 공장이야. 헬륨부터 차례로 만들어졌어. 아주 오래전 큰 별 하나가 뻥 하고 터졌지. 우주의 불꽃놀이였어. 별의 물질들은 차가운 우주 공간으로 흩어졌어. 뭔지 모르지만.... 50억 년 전 어떤 요동이 있었을 거야. 태양이 생기고 주위로 행성들이 모이고 가족이 되었어. 세 번째에 지구가 있었지. 아주 아주 특별했어. 수많은 화합물이 생성 소멸하는 가운데 생명이 탄생했대. 뭔지 모르지만.... 진화의 사닥다리..

길위의단상 2015.02.24

목련에 대하여 / 박남철

1 국민학교 때 나는 학교 화장실 뒤의 콘크리트 정화조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개 한마리를 보았었다. 지금도 나는 그 생각만 하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마 그 개는 그 정화조에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자신에 절망한다.... 덥썩 잡아서 끌어올려야 하는 건데 그러나 개는 잡는 시늉만 해도 이빨부터 먼저 드러낸다 으르렁 2 나는 자본주의의 정화조에 빠진 한 마리의 개다. - 목련에 대하여 / 박남철 어떤 상황을 말하려는 거지, 하며 무심코 읽어내려 가다가 시의 마지막 행에서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는 결국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구해주려는 손길에도 적대감을 드러내며 분노한다. 자본주의가 아..

시읽는기쁨 2014.12.08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종류의 책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맛있게 요리를 하느냐에 읽는 재미가 결정된다. 지은이의 손맛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에 관한 획기적인 발상이 나오기 어려운 시점에서 발굴된 화석과 자료를 가지고 흥미 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헤닝 엥겔른(Henning Engeln)이 쓴 는 인간의 기원에서 미래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친절한 설명서다. 따라서 책 역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7백만 년 전에 유인원에서 갈라져서 진화하고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인류 발생사의 마지막 장면은 유전학, 언어학, 고고학의 조사 결과로 이젠 분명해졌다...

읽고본느낌 2014.11.29

가슴 따스한

대안 미디어 '너머'에 재미있는 내용이 실렸다. '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최준영 님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22명의 정치인에 대해 짧은 평을 한 것이다. 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인물 품평이 중국 전통이었다고 한다. 공자도 자신의 문하생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간명한 말로 평가했다. "자로는 과감하다", "자공은 사리에 통달했다", "염유는 재주가 많다" 등이다. 문학적으로 멋진 건 루쉰의 천두슈(陳獨秀)와 후스(胡適)에 대한 비교 품평이다. "두 사람의 도략을 창고에 비유한다면, 천두슈는 창고 앞에 '안에 무기가 가득 들어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쓴 깃발을 꽂아놓은 것 같다. 그러나 깃발과 달리, 막상 문을 열어보면 총 몇 자루에 칼 몇 자루가 전부라 사람을 허탈하게 만든다. 후스는 꼭꼭 걸어 잠..

길위의단상 2014.09.21

오래된 연장통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전중환 교수가 쓴 책이다. 지은이가 인간의 뇌를 정의하는 한 마디가 바로 '오래된 연장통'이다. 인간은 텅 빈 백지로 태어나는 게 아니다. 인간의 뇌는 우리 조상들이 무사히 살아남아 번식하게끔 해 주었던 행동지침들로 가득하다. 즉, 현대인의 두개골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망치, 대패, 톱 같은 도구가 들어 있는 연장통과 같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의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된 수많은 심리 기재들의 집합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연장통'이 인간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인간의 뇌는 현대의 복잡한 사회생활이나 정보화 시대에 맞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백만 년이 넘는 오랜 살았던 아프리카 초원 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선택된 해결책들이 지금도 우리..

읽고본느낌 2014.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