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40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하늘에서 굽어보면 보리밭이 좋아 보여 종달새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밭에서 쳐다보면 저 하늘이 좋아 보여 다시 또 쏜살같이 솟구칩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다 하루 해가 집니다. -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소년 시절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자면 벌판을 지나야 했다. 가운데에 둑방이 있었는데 왼쪽으로는 하천 언저리의 터가 넓었고, 오른쪽으로는 논과 밭, 과수원이 있었다. 우리는 둑방 위로 날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갔다. 봄날이면 벌판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우짖으며 바삐 날아다녔다. 아지랑이와 종달새 노랫소리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어릴 적 봄 풍경이다. 하지만 종달새를 가까이 볼 수는 없었다. 멀리 작은 점으로 하늘에 떠 있거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모습으로만 ..

시읽는기쁨 2024.04.20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귀가 따가워도 이 동네 매미가 다 저러는 건 아닐 거야 날개를 비비다 말고 가만히 쉬는 매미가 있을 거야 어쩌면 수줍음 많은 매미도 있을지 몰라 그런 매미 좋다고 찾아오는 암컷도 있을지 몰라 -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매미의 울음소리는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세레나데다. 암컷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소리를 내야 유리하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절한 생존경쟁인 셈이다. 땅 속에서 10년 정도 애벌레로 살다가 지상으로 나온 매미는 고작 한두 주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필사적인 매미의 외침이 이해될 만하다. 한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 중에서 혹 엉뚱한 매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매미일 수도 있고, 내가 왜 소리를 내야 하는지..

시읽는기쁨 2023.12.22

공짜 / 박호현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 공짜 / 박호현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더니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글이 큰 깨우침을 준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은 전부 공짜가 아닌가. 나도 공짜 목록을 적어보며 불평하는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어느 노래 가사에도 이런 게 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온 놈이 이만큼 가졌으면 부자가 아닌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에 결핍을 느낄 ..

시읽는기쁨 2023.08.21

섬집 아기 / 한인현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 섬집 아기 / 한인현 이 동시가 194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는 해방 직후의 혼란하고 궁핍한 시대였다. 시의 배경도 외딴섬의 외딴집에 사는 가난한 엄마와 아기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갔거나 아니면 없는지도 모른다. 이 동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동요로 만들어졌다. 아기를 혼자 집에 남겨 두고 굴 따러 나온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갈매기 울음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로 들렸을지 모른다. 맘이 설렌 엄마는 굴 따는 걸 그만두고 갯벌을 가로질러..

시읽는기쁨 2023.07.18

허깨비 상자 / 김창완

TV를 보는데 뉴스가 나왔다 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도망가고 애들이 울고 연기가 하늘같이 올라가는데 탱크가 달려오고 난리 난리가 났다 금세 장면이 바뀌고 광고가 나왔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웃고 춤추며 걸어갔다 저래도 되나 싶었다 - 허깨비 상자 / 김창완 TV만 아니라 이 세상도 허깨비 놀음이겠지. 쯧쯧 몇 번 혀를 차주고는 금방 고개를 돌리고 희희덕거린다. 세상만사에 대해서 그렇다. 하긴 타자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여긴다면 몸성히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자리에서 지인이 그랬다. 자신은 사람들과 투명한 벽을 쌓고 살아간다고. 상대의 온기나 사정을 알려고 하..

시읽는기쁨 2023.02.04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아기 업기 / 이후분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아기 업기 / 이후분 우리가 어렸을 적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상례였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꼴을 베거나, 뒷산에서 땔감을 하거나, 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하는 일은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송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제일 인기 있었다. 송아지는 제가 알아서 풀을 뜯고, 그동안에 우리는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한참 뒤에야 송아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저녁 느지막..

시읽는기쁨 2022.09.19

뽑기 해 먹기 / 김창완

준비물 설탕 소다 국자 불 뚜껑을 열면 연탄 냄새 콧구멍 수세미질을 한다 코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날름거리는 불꽃 위에 설탕 담은 국자를 갖다 대면 꿀이 된다 젓가락으로 소다를 찍어 녹은 설탕물을 저으면 부풀어 오르면서 뽑기가 된다 황홀하게 달콤하고 위험하게 고소하다 국자 색깔은 새카맣다 이제 얻어맞는 일만 남았다 - 뽑기 해 먹기 / 김창완 '오징어 게임' 때문에 다시 뽑기가 유행하는가 보다. 그것도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부는 열풍이다. 드라마에서는 '달고나'라고 하는데, 이걸 만드는 달고나 만들기 세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종류가 엄청 많다. 대략 1만 원 정도 하는데 워낙 인기가 있어서 처음보다 두 배나 값이 올랐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취방이 바..

시읽는기쁨 2021.10.14

새 / 정유경

새는 길을 외어 두지 않아요 새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하늘을 날고 그래서 새가 가는 길은 늘 새 길 - 새 / 정유경 새는 늘 '새' 길을 날아서 이름이 '새'인가 보다. 반면에 더위가 계속된다고 짜증 내고, 매일이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라고 불평하는 나는 '헌'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게다. 기억의 찌꺼기를 걷어내면 오늘은 얼마나 찬란한 하루인가. 마침 창 밖으로 물까치 한 마리가 짧은 선을 긋고 지나간다. 저 상쾌한 가벼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 흔적을 바라본다.

시읽는기쁨 2021.07.29

청소를 끝마치고 / 강소천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뚜러 놓인 교탁을 바로 잡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인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 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

시읽는기쁨 2021.05.27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붉은머리오목눈이'를 알게 된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이름을 불러주게 되다니, 그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자책이 되었다. 이 동시에 나오는 '비비새'가 붉은머리오목눈이다. 또는 '뱁새'라고도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에 나오는 바로 그 뱁새다. 살펴보니 비비새, 즉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자주 눈에 띈다. 얼굴이 통통한 게 무척 귀엽게 생겼다. 대체로 갈대 덤불 속에서 무리를 지어 지낸다. 그런데 여기 묘사된 비비새는 특이하다. 혼자서 그것도 전봇줄 위에 있는 경..

시읽는기쁨 2021.05.02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설탕 두 숟갈처럼 몸무게가 25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북방사막딱새는 남아프리카에서 북극까지 삼만 킬로미터, 지구 한 바퀴를 난다고 한다. 살다가 가끔 내 몸무게보다 마음의 무게가 몇 백 배 더 무겁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나는, 설탕 두 숟갈의 몸무게로 지구 한 바퀴를 날고 있을 아주 작은 새 한 마리 떠올리겠다. -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언젠가 길을 가다가 건물 옆에 쓰러져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어딘가 부딪쳐서 잠시 기절한 것 같았다. 다치지 않도록 옆 화단으로 옮길 때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새의 무게에 깜짝 놀랐다. 깃털 하나 놓인 듯 전혀 무게감이 없었다. 이렇게 가벼운 생명체도 있구나, 경탄스러웠다. 북방사막딱새는 25그램, 설탕 두 숟갈의 가벼운 몸무게로 거센 바람과 ..

시읽는기쁨 2021.04.12

설날 아침 / 남호섭

설날인데 앞집 할아버지 화났다. 아들이 주고 간 용돈 그새 어디 둔지 몰라 찾고 있는 할머니한테도 화나고 또 까먹고 간 손자 장난감에도 화나고 고속도로 꽉 막혔다는 뉴스에도 화나고 새배 마치자마자 텅 빈 집 안,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다. - 설날 아침 / 남호섭 명절 후유증은 고향에 남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도로가 막힌다고 경쟁하듯 박차고 떠나면 텅 빈자리가 심연처럼 깊고 크다. 화가 나서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앞집 할아버지만이겠는가. 뭐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할아버지 심사가 불편한 게 틀림 없다. 명절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회오리바람 같은 건지 모른다. 한 바탕 휘저어놓고는 나 몰라라 슬그머니 사라진다. 덕분에 우리의 허약한 바탕을 깨닫게 되는 이점도 있지만....

시읽는기쁨 2021.02.14

저녁 하늘과 그믐달

산책길에서 만난 저녁 하늘의 구름과 그믐달, 음력 그믐날은 내일이지만... 그믐달이나 초승달은 손톱 모양으로 생겼다. 그래서 '손톱달'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시 한 편이 있다. 어느 분의 작품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옮긴다. 비죽배죽 나온 손톱 가지런히 다듬을 때 손가락은 열 손가락 놓인 손톱 아홉 개 톡, 톡, 톡, 톡 깎을 적에 뛰는 소리 내더니 어디까지 뛰었나 하늘까지 뛰었네 하늘에 걸린 달이 왼손 약지 손톱달

사진속일상 2020.08.23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후두두둑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마을버스가 서둘러 정류장에 들어왔어. 사람들은 우산을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스에 오를 준비를 했지. 그때 교복을 입은 오빠가 가만히 버스 줄 밖으로 비켜서는 거야. 다른 차를 타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버스에 다 오를 때까지 한참동안 우산을 높이 펴 들고 서 있더니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거야. 그것을 본 만원 버스 속 사람들은 한 발짝씩 자리를 옮겨 오빠가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어. 마을버스는 걷는 사람들에게 빗물이 튀지 않게 더 천천히 움직였지.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거야. -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따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누가 공익 광고로 찍어줬으면 좋겠다. 배려..

시읽는기쁨 2020.08.23

낮에 나온 반달

오후에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원 모양의 달이 또렷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에서 물상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태양과 달의 운동 단원이었던 것 같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선생님, 달은 낮에 볼 수 없나요?"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볼 수 없지. 낮에 달이 떠 있어도 하늘이 너무 밝기 때문에 달은 안 보이는 거란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눈치챘다. 명색이 과학을 전공한 선생이 낮에 뜬 달을 본 적이 없었다니. 아니, 봤더라도 그러려니 했지 앎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라는..

길위의단상 2020.05.31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벌은 꽃 속에, 꽃은 정원 속에, 정원은 토담 속에, 토담은 마을 속에, 마을은 나라 속에, 나라는 세계 속에, 세계는 하느님 속에, 그래서, 그래서, 하느님은, 작은 벌 속에. - 벌과 하느님 / 가네코 미스즈 "일본 센자키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온순했다. 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재혼한 뒤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어른들이 정한 남자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그녀가 글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방탕한 남편과의 불화와 병으로 괴로워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 짧은 약력과 시 몇 편으로 그녀를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슬퍼진다..

시읽는기쁨 2020.05.25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위층에 코끼리가 이사를 왔다 걸을 때마다 쿵쿵 천정이 울린다 아래층에는 토끼 아줌마가 산다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 깡충깡충 뛰어 올라온다 우리 집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발소리가 날까 봐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 위층 아래층 / 한현정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끔 아래층에서 항의를 받았다. "네,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라며 마땅찮아 했다. 이제 늙어서 둘만 남게 된 지금은 가끔 위층에 연락한다. "잠을 못 자요.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공손한 대답과 달리 위층의 속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한다.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에게는 역지사지를 요구하지만, 내가 역지사지하는 데는 인색..

시읽는기쁨 2020.04.17

안내 방송 / 주미경

아, 아, 오늘 늘푸른공원에 약을 친다고 합니다. 단풍나무 길 거위벌레 씨 아기 방 창문 꼭 닫아 주세요. 벚나무 길 자벌레 씨 아침 운동 참아 주시구요. 꽃등에 씨 라일락꽃은 비 온 뒤에 찾아 주세요. 아, 아, 돌배나무 길 비단벌레 씨 비단 마스크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참, 말매미 씨 바쁘시더라도 때맞춰 사이렌 부탁합니다. - 안내 방송 / 주미경 아파트 단지 안 수목에 약을 친다는 안내 방송이 가끔 나온다. 약이 들어갈 수 있으니 저층 세대는 창문을 닫아 달라고 당부하는 방송이다. 그런데 이 시를 보고 뜨끔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볼 줄 알았지, 나무에 살고 있을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 신선한 시도 나온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

시읽는기쁨 2020.04.06

비밀번호 / 문현식

우리 집 비밀번호는 0000000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000 0000는 엄마 00 000 00는 아빠 0000 000는 누나 할머니는 0 0 0 0 0 0 0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 비밀번호 / 문현식 착상이 빛나는 동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의 리듬으로 엄마, 아빠, 누나, 할머니를 구별하는 예민함에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빨리 얼굴 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어락 소리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그중에서 백미는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다.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눈이 침침해서 숫자판의 번호가 잘 안 보였을 것이다. '보 고 싶 은 / 할 머 니'라고 생전에..

시읽는기쁨 2020.03.23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찬 바람이 제아무리 많이 불어도 애기는 꼭 밖에 나가 노올지. "감기 들라, 가지 마라." 할머니가 붙들면 고개를 잘래잘래 도리질하며 "아냐, 아냐 감기 없쪄." 문 열고 내다보면 바람맞이 밭길에 아,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떼지어 몰려가는 겨울바람 속으로 저기 우리 애기는 뛰어다니네. - 애기와 바람 / 이원수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손주를 맞아 집으로 돌아올 때 할머니와 손주는 자주 실랑이한다. 놀이터 옆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그네 타고 놀래." "안 돼. 추워서 감기 걸리면 큰일 나." "난 안 춥단 말이야." 손주가 떼를 쓰면 할머니가 질 수밖에 없다. 따스한 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할머니는 또 걱정이다. 우리가 자랄 때는 공기 걱정, 날씨 걱정이 어디 있었는가. 고삐 풀린 망아..

시읽는기쁨 2019.12.06

엄마가 숙제하라고 했는데 잠깐만 놀고 하려고 놀이터에 갔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져 치과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어쩌다 이랬냐고 물어서 한 말 / 김창완

모아요 - 엄마가 숙제하라고 했는데 잠깐만 놀고 하려고 놀이터에 갔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져 치과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어쩌다 이랬냐고 물어서 한 말 / 김창완 시 제목이 길고 내용이 단 한 마디로 된 게 재미있다. 역시 재치있는 김창완 시인이다. 사건이 일어난 상황부터 아이의 대답까지 따라가는 내내 웃음이 나온다. 아이의 "모아요" 한 마디가 절정을 찍는다. 천진난만한 시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예순 여섯 나이에 어디서 이런 동심이 샘솟는지 정말 '모아요'다.

시읽는기쁨 2019.09.09

겨울 나무 / 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지내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 겨울 나무 / 이원수 겨울에는 산에 거의 가지 않지만, 가볍게 오르는 뒷산 길에서 가끔 이 동요를 읊조린다. 산꼭대기 가까운 비탈에 이 노래와 비슷한 이미지의 겨울 나무가 있다. 지금도 초등학생이 이 노래를 배우는지 모르지만 우리 때는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노래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아이들보다 차라리 지금의 나한테 더 맞는 것 같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이 구절만으로도 쉽게 감정 이입이 되며 나무를 쓰다듬게 된다.

시읽는기쁨 2019.01.25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빈 땅을 보면 노는 땅 아깝다 그러지 말고 딱정벌레 방 내주고 풀꽃이나 피우면서 한 해 놀게 두자 집도 짓지 말고 콩도 심지 말고 맘도 두지 말고 - 맘도 두지 말고 / 주미경 고향에서 어머니가 부치는 밭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힘에 부쳐서 모두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년에는 한 마지기 정도는 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노는 땅을 보면 혀를 찼던 어머니지만 이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신다. 빈 자리에 딱정벌레가 찾아오고 풀꽃이 사는 걸 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갈고 닦고 하는 것보다 가끔은 텅 빈 자리 그대로 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젠 그만 채워 넣어야 한다. 비닐을 걷어내고 비바람 그대로 맞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

시읽는기쁨 2017.10.14

강냉이 / 권정생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

시읽는기쁨 2017.09.22

선풍기 / 이정록

우리 집 선풍기는 열한 살 나랑 동갑내기, 땀 뻘뻘 일을 해도 "어이구 고물! 아이구 저 늙다리!" 구박받네 섧 고 서 러 워 도리질하던 선풍기 갑자기 고개를 끄덕끄덕 - 선풍기 / 이정록 선풍기 하나가 고장 나서 남은 선풍기가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여름 시작하면서 청소한다고 선풍기를 뜯었다가 부주의로 날개를 조이는 플라스틱 캡이 부러졌다. 간단한 부품 하나가 없어 멀쩡한 선풍기가 방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혹시 길거리에 버려진 선풍기가 없나 열심히 살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골목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무엇이든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요사이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고쳐서 쓴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 글자가 이루는..

시읽는기쁨 2017.08.17

굴뚝 / 윤동주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 / 윤동주 동생은 새집을 지으며 군불을 때는 방을 만들었다. 한쪽 벽으로 아궁이와 굴뚝이 있다. 어머니를 위해서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해 놓으신 나뭇더미가 있다. 오래된 나무는 한쪽에서 삭아간다. 이젠 사라진 풍경이 되었지만 취사와 난방을 전부 땔감으로 하던 시절에는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뒷산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어른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민둥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식 주택에서..

시읽는기쁨 2017.06.12

서산 마애불 / 박경임

삼국시대부터 바위 속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부처님 아직도 나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 뒤쪽은 못 나왔는데 그래도 좋은지 웃고 있다 - 서산 마애불 / 박경임 이학도 기질을 못 벗었는지 계산 본능이 살아난다. 서산 부처님이 1,400년 동안 2cm 정도 나오는 정도라면, 인간의 일생이면 1mm 쯤에 해당한다. 인생이 짧다지만 허투루 여길 크기가 아니다. 진력하면 바위를 1mm 밀어낼 수 있는 삶이다. 그만큼이라도 진보하면 생의 의미는 있다. 그런 힘으로 살아야겠다.

시읽는기쁨 2017.05.08

위층 아이들 / 이중현

쿵쿵쿵 저건 형 뛰는 소리 콩콩콩 이건 동생 뛰는 소리 아빠, 위층에 전화해요 천장 무너지겠어요 그냥 둬라 너도 어릴 때 저랬거든 이제 그 빚 갚는 거다 - 위층 아이들 / 이중현 손주 둘이 모이면 통제 불능이 된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 방 저 방으로 쿵쿵 콩콩이다. 며칠 전에는 아래층에서 조용히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하나는 제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까지도 위층 아이들 때문에 여러 차례 인터폰을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훨씬 덜해졌다. 이젠 반대로 내가 받을 차례가 되었다. 사는 게 빚을 갚는 일이다. 부모한테 잘못한 건 자식을 통해 갚는다. 사는 건 빚을 지는 일이다. 지금도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는 빚을 지고 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

시읽는기쁨 2017.04.09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찬지름 들지름 들이 서울 갑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변에 모랫벌에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여름내 김매고 땀 흘려 가꾼 참깨 들깨 들이 찬지름 들지름이 되어 소주병에 담겨 서울 가는 기차를 탑니다 마른 나무 강변말 해바라기 선 집 들지름 발라 김 구워 주면 미어지게 먹던 막내를 생각합니다 날달걀 깨서 찬지름 떨어뜨려 밥 비벼 주면 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해치우던 맏이를 생각합니다 -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가을은 아프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지은 농작물을 갖고 오는 것도 죄스럽다. 가을이 되면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더해진다. "나도 이제 따스한 밥 얻어먹고 싶다." 가을은 불효를 자각하고 속울음을 삼키게 되는 계절이다. 충청도에서는 '찬지름 들지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자식을 향한 모정이 '..

시읽는기쁨 2016.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