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함석헌 읽기(2) - 인간혁명

샌. 2013. 1. 7. 09:34

'혁명'이라는 말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2권은 함석헌 선생의 혁명에 관한 글을 묶었다. 그러나 선생은 힘에 의한 혁명을 주장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인간 혁명'이다. 폭력에 의한 혁명은 또 다른 혁명을 낳을 뿐이다. 인간이 변하는 혁명이라야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나갈 길은 비폭력혁명의 길이다. 이것이 일반 혁명가들과는 다른 선생의 독특한 점이다.

 

선생은 혁명의 근거를 생명의 본성에서 찾는다. 생명은 변화하고 자라는 것이다. 나무는 연륜을 지어야 하고, 뱀은 허물을 벗어야 한다. 끊임없이 탈바꿈함으로써 생명은 진화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의 지배자는 보수주의와 반동주의로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역사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악에 대한 투쟁이 곧 혁명이다. 현대문명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려놓기 위해서도 혁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혁명은 과거와 같은 폭력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비폭력 정신혁명, 나아가 영적 혁명이 되어야 한다. 선생의 혁명론은 인간 정신의 진화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거기에는 올바른 정치를 위한 체제 혁명도 포함된다. 그러나 시스템의 교체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다.

 

 

시대의 말씀은 마치 구름 같은 것이다. 해가 나서 쬐면 땅 속의 물이 뵈지 않는 길을 타 피어올라 김이 되듯, 민중의 가슴이 빛에 비침을 받으면 그 생각이 저도 모르게 피어오른다.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생각은 극히 작은 것이지만, 뵈지 않는 김이 꽉 들어차면 사회는 어딘지 모르게 무더움과 압력을 느끼는 것이요, 그것이 영원한 진리의 찬바람과 부딪칠 때 비로소 형태를 나타내어 수증기가 엉켜서 된 구름같이 막연한 하지만 뚜렷한 모양을 가지고 사회 위에 어떤 그림자를 지게 한다. 그것이 시대의 말씀이란 것이다. (1961)

 

바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그 변할 수 없는 것이 잊어지고 잃어지고 가리워진 것을 도로 찾는 일이다. 그저 들부수고 변경하는 것만이 재주가 아니라 그 도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먼저 밝혀 알아야 한다. 생명은 자기를 실현하자는 것, 자아의 본성 바탈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살림에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은 결국 바탈을 잃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고치자는 노력인 혁명은 바탈 찾음이다. 간디의 말대로 하면 제1원리에 돌아감이다. 그러므로 혁명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종교적 새로남이 있고 믿음의 굳게 선 것이 있어야 한다. 혁명을 못하는 종교처럼 고린내나는 것이 없지만 또 신앙을 가지지 못한 혁명처럼 사납고 무서운 것은 없다. 공산당이 무엇인가? 종교 없는 혁명 아닌가? (1961)

 

사람이 고쳐 된다는 것은 정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반드시 성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새 정신은 새 시대에 있다. 군인이 개인으로는 약하고 악하고 망나니여도 위대한 군대에 속하면 그 전체가 나를 삼켜 나를 무조건 선한 것으로 만들고 그 군대가 이기는 날 나는 무조건 이긴 자가 되는 모양으로 사람을 고쳐 만드는 것은 시대다. 새 시대의 정신에 몸을 던지란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부족했던 사람도 새 시대 새 역사의 일꾼이 된다. 그것이 정말 혁명이다. 그것이 정말 종교다. 참 종교는 참 전쟁이요, 참 싸움은 참 종교다. 개인으로는 여전히 잘못이 많아도 참 싸움, 참 종교에 참여하면 참 사람이다. 내가 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이 나를 살릴 것이다. (1961)

 

문제는 정치에 있다. 먼저 정치가 바로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썩어버린 정치를 바로잡을까? 혁명을 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길이 없을 것이다. 혁명이라니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느 부분, 무슨 방침을 고쳐서 될 것이 아니라 나라의 틀거지, 사회의 얽어짬을 근본적으로 온통 고쳐야 한단 말이다. 쉬운 말로 썩은 살은 잘라버려야 한단 말이다. 썩은 살에 아무리 약을 써도 도로 살아나는 법은 없고 오직 할 수 있는 길은, 아무리 아파도 썩은 것은 남김 없이 긁어버리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만 한다. (1959)

 

피지배자의 할 일은 지배자를 때려부수는 일이다. 바울이 공연히 오해하기 쉬운 말을 해서 어리석은 것들이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아주 옅은 수작이요, 사실은 속 깊이 제가 한 번 권위 있는 자리에 섰으면 하는 잠재의식이 있어 하는 소리다.(1959)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완전이 어디까지인지 말로 할 수 없지만,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혹은 하늘나라라 하지만, 그 뜻을 말하면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다. 영원 무한을 지향하고 자유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 인격이다. (1967)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땅에 내려와도 저항, 물 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1967)

 

항거할 줄 할면 사람이요, 억눌려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냐고 네가 묻느냐?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자아을 가지지 못한 물건이 어떻게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1966)

 

민중의 마음이 바위라면 민중 운동자의 마음은 빗방울이다. 도저히 대가 되지 않는 것 같지만 빗방울같이 작고 겸손한 혼으로 그 바위를 때리고 때리면 깨지고야 만다. 바위를 정말 깨치는 것은 빗방울이다. 쇠메로도 못하는 것도 빗방울은 한다. 빗방울은 깨는 것이 아니라 녹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깨짐이 철저하다. 깨지면 어찌 되나. 나라의 터 되는 옥토가 되지. 호남평야, 중국 대평원, 미국 프레이리, 다 바위가 부서진 것 아닌가. 거기 큰 나라가 서지 않던가. (1961)

 

우리 나갈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비폭력혁명의 길입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가 이 시대의 나갈 길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곧 비폭력의 길입니다. 이날까지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폭력주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오늘에 보는 것 같이 어지럽고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혁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1965)

 

생명은 '노!'다. '아니'함이다. 수전노의 심부름꾼 같은 벼슬아치와 그의 추김꾼이 되는 보수주의 철학자가 뭐라거나, 사나운 임금의 첩 같은 도덕 신자와 그의 왕초가 되는 직업 종교가가 뭐라거나 생명은 맞댐이다. 들이댐이다. 역사에서 반항, 항의, 투쟁, 혁명의 글귀가 없어질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만일 없어진다면 우주는 영원한 어둠의 멎음일 것이다. (1959)

 

내가 내 책임을 다했다 하는 종은 충성된 종이 아니요, 내 믿음이 옳다 하는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 있는 자가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가 구원 얻는다.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있음도 없음도 아니다. 내가 믿음 있다 해도 믿음 아니요, 믿음 없노라 해도 믿음 아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믿음은 이런 믿음인 것이다. (1959)

 

그러고 보면 우리 눈앞의 문제는 씨알 새롭게 함에 있다. 새로운 역사정신, 혹은 사회의식을 일으키는 데 있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세 가지 일이 필요하다. 첫째, 나를 새롭게 함. 둘째, 씨알을 새롭게 함. 셋째, 종교를 새롭게 함이다. 모든 새로워지는 운동은 다 혼을 새롭게 함에서 시작하여 민중을 통해 믿음에 이른다. (1959)

 

복음이 땅끝까지 퍼졌다면 듣기는 좋겠지만, 자본주의로 노동자를 착취해 얻은 돈의 한 부분을 선교사업으로 빛나게 쓰는 재벌 앞에 훌륭한 보고거리는 되겠으나, 이교도 약소민족 원시 토인에겐 조금도 복될 것이 없다. 그 기독교 아니더라도, 유럽 문명 아니더라도, 그들이 오늘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기독교를 땅끝까지 전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팡이도 돈주머니도 가지지 말고 가란 예수가, 전도 가는 데 공사관 대사관 교황사절단 끼고 가라 했을 리가 없다. 오늘의 교회는 한 기업체요, 한 상사회사요, 한 클럽이요, 한 보수진영이요, 한 착취기관이지, '혈과 육' - 정치아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 에게 대하여 씨름하는 진리의 군대가 아니다. (1959)

 

이상합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려 하지 않을까? 시저 죽는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이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 건 그르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1970)

 

나는 이 씨알을 믿습니다. 끝까지 믿으렵니다. 믿어주지 않아 그렇지 믿어만 주면 틀림없이 제 할 것을 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처 모르고 꼬임에 들어서 그랬지 본바탕은 착하다 믿습니다. 까닭은 간단합니다. 씨알이라니 다른 것 아니고 필요 이상의 지나친 소유도 권력도 지위도 없는 맨사람입니다. 나라의 대다수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이, 남을 간섭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로도 여러 가지고 형식도 여러 가지지만 그런 사람이 결국 정치계 사업계로 나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어서 양심도 다 있고 이성도 다 있지만,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도덕적으로 약해집니다. 대다수의 민중은 특별히 잘 나서가 아니라, 그러한 기회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난 대로의 인간성이 살아 있습니다. 그 점이 내가 민중을 믿는 점입니다. (1970)

 

세상에 무슨 소리가 그렇게 많습니까?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라디오 소리, 장사꾼의 목 찢어진 소리, 식모의 얼굴 시든 소리, 군인의 개새끼 소리, 학생의 뒤집은 소리, 대통령의 꾸며낸 담화 소리, 벼슬아치의 엉터리 보고 소리, 여당의 어거지 소리, 야당의 시시한 소리, 목사 스님의 저도 못 가보고 하는 천당 지옥 소리, 신문 잡지의 알고도 모른 척하는 맥빠진 논설 소리, 심지어는 애기 하나 가지고 이놈의 아들이랬다 저놈의 아들이랬다 하는 정부 갈보의 지갑 속에 달러 지전 발각발각하는 소리와, 선거때까지 1년은 참아줄 줄 알았는데 여섯 달도 못 가 무너져서 '불도저 시장'이라 흔들거리던 대갱이를 하루아침에 박살을 내버리는 와우아파트 와르르 하는 소리까지 들려서 정신을 잃을 지경인데, 씨알의 소리만은 들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 죽었습니까?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