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 33

우리 동네를 물들인 가을 색깔

경안천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가 동네 단풍에 홀려서 가야 할 곳을 잊어버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내 곁의 단풍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 가을 색깔에 취해서 아파트 단지를 놀멍쉬멍 돌아보는 데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입주한 지 십 년이 넘었으니 단지 안 나무들도 어느 정도 무성해졌다. 이곳 나무들은 사계절 중에서 이맘때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각자의 색깔로 성장(盛裝)한 청년기의 매력이 넘쳐나는 나무들이다. 감탄사 없이 지나칠 수 없는 이 가을이 어느 누구에게는 가장 슬픈 색깔이 될지 모른다. 희희낙락하는 뒤편 그늘에는 울음조차 사치스러운 아픔이 있다. 세상의 비극은 가없이 깊은데, 가을빛은 눈부시게 반짝인다.

사진속일상 2022.10.31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존경하는 벗인 Y형은 글을 잘 쓴다. 잘 쓴다는 것은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진솔하면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담백한 그런 점이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도 많다. 가까워진 것도 꽃이 매개가 되어서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어,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이 나온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형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이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보내줬다. 감사하고 고마워..

참살이의꿈 2022.10.30

마르코복음[60]

그들은 바리사이와 헤로데파 몇 사람을 보내어 말을 꼬투리 삼아 예수를 책잡으려 했다. 그 사람들이 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알기로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어느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과연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됩니까, 안 됩니까? 바칠까요, 바치지 말까요?" 예수께서 그들의 위선을 알아채고 말씀하셨다. "왜 나를 떠보는 거요?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시오. 어디 봅시다." 그들이 가져오자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오?"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시오." 그들은 예수께 놀라 마지않았다..

삶의나침반 2022.10.29

2022년 남한산성의 가을

가을 속에서 가을을 만나러 남한산성에 갔다. 이번에는 장경사를 기점으로 해서 성곽을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가을이 잘 익은 맑은 날이었다. 남한산성에는 단풍나무가 드물어 산 색깔이 화려하지는 않다. 동문 주변도 갈색 톤으로 물들었다. 사람이 많을 남문과 북문 구간을 피하기 위해 개원사로 내려와서 산성리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향했다. 주 성곽에서 벗어나 남한산 정상까지 다녀왔는데 새롭게 정상 표지석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상부는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표지석은 실제 위치에서 100m 정도 벗어난 곳에 있다. 산하를 물들인 가을 색깔이 은은하며 고왔다. 남한산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1624년(인조 2)부터 쌓기 시작해서 2년 뒤에 완성한 성이다. 축성 작업에는 주로 군인과 승려들이 동원되었..

사진속일상 2022.10.28

인섬니악 시티

책 내용이나 지은이인 빌 헤이스(Bill Hayes)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그러다가 엉뚱한 데서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눈치를 못 채고 그나마 책의 뒷부분에 가서였다. '십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아기처럼 자는 남자하고 살았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러니 지은이를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 남자를 남편이 아닌 '파트너'라고 지칭하는 게 약간 이상하긴 했으나 서양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책의 부제가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다. 파트너였던 스티브가 죽고 뉴욕으로 주거를 옮긴 지은이는 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는 - '불면의 도시'라는 뜻으로 뉴욕을 가리킨다 - 흥미로운 뉴욕 생활과 올리버 색스와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읽고본느낌 2022.10.27

가을이 무르익는 검단산에 오르다

가을이 무르익는 검단산에 올랐다. 기점은 윗배알미다. 윗배알미는 집에서 가까우면서 외진 곳이라 찾는 사람이 적어 좋다. 언제 가도 산길이 한적하다. 산 전체를 전세 낸 듯 혼자 독차지한다. 윗배알미 산길은 계곡을 끼고 있어 청량한 가을 물소리를 옆에 두고 걷는다. 계곡의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계절마다 다르다. 이 계절에는 살을 모두 발라내고 남은 생선뼈 같은 소리를 낸다. 오르는 길은 단풍이 화려했다. 검단산 단풍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가을 향연에 초대받은 횡재를 했다. 검단산 정상은 조망이 좋다. 북쪽 방향으로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남쪽에는 팔당호와 양수리/두물머리가 있다. 내려오는 길도 단풍 구경으로 황홀했다. 갑자기 강원도 정선의 동강 따라 단풍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사진속일상 2022.10.26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어제 친구와 통화하면서 옛 동료의 투병 소식이 화제에 올랐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분인데 지금은 인지 능력이 떨어져 친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신다는 전언이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다. 통계에 의하면 80세까지 생존 확률이 30%라는 것이다. 지금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의 70%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때가 10년도 안 남았다. 물론 내가 포함될 확률도 70%다. 100세 시대라고 떠들면서 오래오래 살 것 같..

시읽는기쁨 2022.10.25

10월 하순의 뒷산

10월 하순의 뒷산은 선방처럼 고요하다. 여름 지나 초가을까지 요란하던 풀벌레 소리도 희한하게 딱 그쳤다. 바람이 스치면 바싹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길에 깔린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멀리 나가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보는 올해 단풍은 칙칙하다. 뒷산에 있는 단풍나무는 붉은 색깔이 드는 듯하다가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강수량이 적어서 많이 건조한 탓일까. 지난 두 주일은 바쁘게 지냈다. 둘째 주는 고향에 나흘간 가 있었고, 셋째 주는 바둑, 당구, 이웃 모임이 있었다. 평소에 비하면 나들이가 잦은 셈이었다. 그래선지 안정이 되지 못하고 뭔가 붕 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혼자의 산길이 고마웠다. 이때에야 비로소 위안을 받으면서 충만해진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무엇인지, 사람..

사진속일상 2022.10.24

정치적 부족주의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만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나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은 자발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부족은 즐거움과 구원의 원천이고 어떤 것은 권력을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증오 선동이 낳은 기괴한 산물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

읽고본느낌 2022.10.23

적성리 황장목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의 작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다. 동로면 소재지 마을과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동로면의 상징이 될 만한 나무다. 이 나무가 유명한 건 뿌리가 거북처럼 생긴 바위를 휘감고 있어서다. 안내문에는 '황장목을 업은 거북바위'라고 적혀 있어 나무보다 거북바위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내가 명명한다면 '거북바위를 감싼 황장목'이라고 할 것 같다. 황장목(黃腸木)은 금강송(金剛松)의 다른 이름이다. 춘양목(春陽木), 적송(赤松),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한다. '황장'과 '춘양'은 지역 명칭이다. 황장목이 유래한 황장산이 바로 인근에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을 약 300년으로 추정한다. 황장목이 있는 언덕 위에 점촌동성당 동로공소가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분위기가 아늑했다. 공소 뜰에 이런..

천년의나무 2022.10.22

대하리 반송(2022)

의도치 않았는데 15년 만에 다시 만난 소나무다. 문경 도로를 지나다가 우연히 안내 표지판을 보고서야 이 나무가 있는 줄 알았다. 그때보다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2000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다. 400년 된 노목으로 내뿜는 기상이 범상치 않다. 둘로 갈라진 줄기가 우산을 편 듯 넓게 펼쳐져 있다. 펼쳐진 지름이 20m나 된다. 한 바퀴를 돌면서 봐도 흠결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에 영각 동제를 지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실 만한 신령한 나무다.

천년의나무 2022.10.21

마르코복음[59]

예수께서 다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가꾸며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주 짜는 확도 파고 망대도 세워서 농부들에게 도지로 내주고 타관에 떠나 있었습니다. 포도철이 되자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어 포도원 소출을 받아오도록 했는데 농부들은 그를 붙잡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도 머리를 때리며 모욕했습니다.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도 여럿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내며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서로 말하기를 '저자는 상속자다. 가서 죽여 버리면 유산은 우리 차지다' 하고는 그를..

삶의나침반 2022.10.21

적성리 소나무

문경시 동로면을 지날 때 도로 옆에 눈에 익은 소나무가 있었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15년 전에 찾아왔던 소나무였다. 조선의 명당인 연주패옥(連珠佩玉)의 전설이 전해지는 말무덤 자리에 있는 소나무다. 나무 모양이 춤추는 사람 같다 하여 '무송(舞松)'이라 불리는 소나무다. 수령은 약 300년 가량 되었다. 나무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제일 균형 잡힌 모습은 도로 쪽에서 볼 때다. 무송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어디서 보더라도 춤추는 형상은 넉넉히 상상해 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리드미컬한 소나무다.

천년의나무 2022.10.20

소년

"어른인 척하는, 늙고 덩치만 큰 어린아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소년을 품은 어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소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년을 잘 간직한 채 성장하여, 어느 한 계절도 빈 곳 없이 속이 탄탄한 나무처럼, 섬세하고 집요한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년의 아름다움과 도도함을 고이 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정신분석가인 이승욱 선생이 쓴 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은 지은이가 자신의 소년 시절을 정신분석가답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해석을 한다. 지은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내 소년 시절이 겹쳐졌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최초의 기억인 원체험(原體驗)이다. 이 기억이 한 사람의 정서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기억으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

읽고본느낌 2022.10.20

당연한 일은 없다

기억할 때마다 낯 부끄러워지는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외할머니가 살림을 맡으시고 동생과 함께 서울에 살 때였다. 부모님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날은 왠지 심사가 삐딱했었던 것 같다. 나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당연한 일 가지고."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다면 저 놈이 내 고마움도 모를 터가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이 말을 부모님한테 전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모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말은 내 금기어가 되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

참살이의꿈 2022.10.19

봉암리 느티나무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이모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방학 때면 며칠씩 묵곤 했다. 이모 동네에는 사촌 형제만 아니라 학교 친구들도 있어서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며 놀았다. 동네 뒤에는 큰 산이 있어서 들어가면 정글 탐험하는 것처럼 모험심을 자극했다. 한 번은 뒷산에서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이모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오가는 길 역시 놀이터였다. 길 중간쯤에 넓은 사과 과수원이 있었는데 조롱조롱 매달린 사과나무의 풍경이 지금도 선명하다. 60년대였던 그 시절에는 사과는 대구 지역에서 많이 났고, 우리 지역에는 귀할 때였다. 지금은 사과가 고향의 주작물이 되었다. 이모네 동네는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경사가 진 데다가 바위가 많았다. 이모 집 마..

천년의나무 2022.10.18

텃밭 고구마를 캐다

아내와 둘이서 텃밭의 고구마를 캤다. 작년에는 손주가 와서 체험을 했는데 올해는 다른 데 갈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겸하여 시들어가는 가지와 고추를 뽑고 밭 정리를 했다. 고구마는 18kg이 나왔다. 기대를 안 했는데 역시 수확량은 빈약했다. 올 텃밭 농사는 옥수수, 상추, 고구마, 감자는 흉작이고 호박, 토마토, 가지, 고추 등은 풍성했다. 일 하기는 귀찮았지만, 그래도 텃밭 덕분에 우리 식탁은 풍요로웠다. 오전에 텃밭에 나갔다가 오후에는 첫째네 집에 들렀다. 잠시 짬이 난 틈에 한 시간 정도 집 주변을 산책했다. 골목길 뒤로 123층의 롯데월드타워가 자주 보였다. 송파동에는 빌라가 많아선지 깔끔한 서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골목길의 전신주와 이리저리 뒤엉킨..

사진속일상 2022.10.18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글쓰기 테스트

지난 15일 오후에 판교 데이터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해 카카오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제일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카톡은 다음날 일부 기능이 돌아왔지만, 티스토리는 50여 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온전치 못하다. 블로그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스킨은 원래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PC 화면에서 모바일 버전으로만 보이고 있는 상태다. 지하층의 기계실 화재로 전체 서버가 먹통이 되고 복구조차 지지부진한 것은 거대 IT 기업 답지 않다. 사고에 대비해 데이터를 여러 곳에 분산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별 쓸모가 없었다. 사고 이후의 고객에 대한 조치도 실망이다. 티스토리의 경우 원상복구하는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된다는 안내 멘트 하나 없다. 티스토리 홈 화면은 이럴 때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니 돈벌이에만 급..

길위의단상 2022.10.17

토성 느티나무(2022)

고향에 내려가서 마을 둘레를 산책하다 보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이 나무로 향했다. 멀리서만 봐도 어린 시절이 왈칵 밀려오는 나무였다. 60년이 흘러도 여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나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서 풍기장에 갈 때면 꼭 이 나무 밑에서 쉬어가곤 했다. 장에 가는 어머니나 할머니는 머리에 늘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곡식을 가지고 가서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 왔다. 장으로 가는 길에서 이 나무에 오면 발품을 쉬어야 했다. 집에서 장터까지는 4km 정도 되었는데, 풍기에 가까운 이 나무는 목적지에 다 왔다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토성'이 공식 행정명칭은 아니지만 어릴 때 우리는 이 나무를 토성 느티나무라 불렀다. 이번에 어머니와 이..

천년의나무 2022.10.15

고향에서 나흘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나흘간 함께 있었다. 어머니의 가을걷이를 도와줄 목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들깨를 베는 일이 첫째였다. 들깨 모종 심고, 베고, 털고 하는 작업은 형제들이 나누어 내려와서 맡고 있다. 올해 내 일은 그나마 제일 쉬운 들깨를 베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들깨 작업을 마치고 산에 올라가 밤을 주웠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심은 나무들이라는데 밤나무 고목이 산의 능선을 덮고 있었다. 이젠 마을 사람들한테도 잊혀서 오로지 어머니의 전용 밤밭이었다. 나는 10분여 줍다가 포기했는데 어머니는 30분 넘게 산을 타고 다니셨다. 아흔이 넘은 연세인데 모두가 놀라는 체력이다. 비슷한 또래의 동네 할머니들은 대부분 바깥출입하기도 벅차다. 자식 입장에서는 그러다가 다치실까 봐..

사진속일상 2022.10.15

지적 행복론

"소득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돈이 많으면 정말 더 행복해지는지 알아보고자 데이터를 연구했고, 이 데이터는 행복과 소득의 역설을 보여줬다. 이스털린은 행복통계학을 연구한 최초의 경제학자다. 이 책 은 97세의 이스털린이 쓴 행복에 관한 보고서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 내용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수준이다. 다만 그의 이론은 과학적 조사에 의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하기 때문에 바탕이 탄탄하다.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우리가 행복에 접근하는데 유리한 건 사실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인간 행복의 조건은 소득, 건강, 가정생활의 세..

읽고본느낌 2022.10.11

사물들

프랑스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장편소설이다. 1960년대 프랑스 파리가 배경으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잘 들어 있다. 대신에 파리의 생소한 골목과 가게 등 다양한 지명이 나와서 파리 사람이 아니라면 어딘지 몰라 좀 혼란스럽다. 은 제롬과 실비라는 두 젊은이가 주인공으로, 오직 물질적으로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이 작품의 의도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부평초 같은 삶을 그리려는 것 같다. 제롬과 실비, 그리고 친구들은 상품들의 유혹과 현란한 광고의 공세에 덧없이 휩쓸려가는 군상들이다. 이 소설은 건조한 문체와 특이한 시제가 흥미롭다. 마치 사회과학자가 사회 현상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글 같다. 60년 전의 소설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해당하는 경고로 읽힌다. 그저 주어진 일상에 매몰될 때, 아무런 철학과..

읽고본느낌 2022.10.10

청량리역 / 서경온

중1 담임교사였을 때 가출한 학생을 청량리역에서 찾았다 자그마한 어깨에 아버지의 긴 낚싯대를 메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바다 가서 고기를 잡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버스 안내양의 다급한 외침이 "차라리 죽는 게 나요"라고 들린다던 60년대 어느 날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희미한 제천역 대합실 불빛을 떠나 비 내리는 밤 청량리역에 내렸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스카극장의 휘황한 네온사인이 처음 보는 바닷속 찬란한 물고기들 같았다 - 청량리역 / 서경온 나 역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시절 서울로 오는 유일한 방법은 중앙선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완행과 급행이 있었는데 감히 급행을 탈 엄두는 못 내고 역마다 모두 서는 완행만 탈 줄 알았다. 자리가 안 나면 ..

시읽는기쁨 2022.10.09

남한산성에서 만나다

처제네와 남한산성에서 만나 함께 가을 낮을 즐겼다. 비 지나가고 쌀쌀해져서 "가을이구나!"라며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된 날이었다. 산성마을에서 점심으로 보리비빔밥을 먹고 행궁을 둘러봤다. 행궁 맨 위에 이위정(以威亭)이 있다. 순조 17년(1817)에 광주부 유수였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행궁이라 해도 궁궐 안 제일 높은 곳에 유수의 활 쏘는 정자를 만들어도 되는지 의아했다. 유수(留守)란 직책은 조선 시대에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의 외관 벼슬이다. 개성, 강화, 광주, 수원, 춘천 등지에 두었다. '이위(以威)'란 '천하를 위압한다'는 뜻이겠다. 산성리가 조선 시대 30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광주의 중심지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남한..

사진속일상 2022.10.08

할아버지는 왜 화를 내요?

"할아버지는 왜 자꾸 화를 내요?" 어느 날 손주한테서 느닷없이 받은 질문이다. 뜨끔했다. 아내에게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손주는 달랐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 손주가 반문했다. "답답해서 그래요?" 맞았다. 조금 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 참을 수 없나요?" 나는 겨우 답했다. "열에 아홉은 참고 한 번 화를 내는 거야." 옆에 있던 아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과 동시에 손주가 말했다. "내가 볼 때 열이면 두 번만 참고 여덟 번은 화내는 것 같아요." 옆에서 아내는 손뼉을 쳤다. 손주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창피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

길위의단상 2022.10.07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임사 체험 후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인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는 인도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결혼한 후에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4년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에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고 임사 체험 상태에 들어갔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고 병도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감각에 눈을 떠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각한다는 임사 체험은 많이 알려져 있으며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다. 아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안과 행복에 잠..

읽고본느낌 2022.10.06

시청까지 걸어서 왕복하다

시청에 볼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한 번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 집에서 시청까지는 직선거리로 3km지만 시끄러운 차도를 따라 걸을 수는 없고 우회를 해야 하므로 실제 걷는 거리는 4km가량 되었다. 오가는 길에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이미 한참 전에 공식적인 노인이 되었지만 '노인 복지관' 시설을 이용해 보지는 않았다. 취미 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은 지원해도 자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들어가 보았더니 내부는 깔끔했고 방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둑 대국실도 환경이 괜찮았다. 심심할 때 여기 와서 바둑 한 판 두어볼까? 송정동은 도시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10만 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한쪽에서는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고, 이곳 빈 터에는 단..

사진속일상 2022.10.05

마르코복음[58]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께서 성전 안을 거니실 때 대제관과 율사와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일을 할 권한을 주었습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시오.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 주지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비롯했습니까, 사람들에게서 비롯했습니까? 대답해 보시오." 그들은 서로 궁리하며 말했다. "'하늘에서'라고 하면 '그럼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터인데, 그렇다고 '사람들에게서'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소?" 그들은 군중이 무서웠으니 , 모두가 요한을 참으로 예언자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

삶의나침반 202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