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38

작물 심기를 마치다

어제로 텃밭에 작물 심기를 대락 끝냈습니다. 그동안 한 달여에 걸쳐 심은 작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옥수수 300포기 - 수확 시기를 다르게 하기 위하여 두 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심음(4/17, 5/1, 5/.15). 빨간 씨앗 옥수수와 강원도 옥수수 두 종류. 감자 100포기 - 강원도에서구해온 감자씨를 심음(4/17).현재 잘 자라고 있음. 콩 160포기 - 강낭콩, 노란콩, 검정콩, 완두콩, 서리태 등 구할 수 있는 콩은 다 심어 봄4/24-5/15). 덩굴을 타고 올라가는 완두콩에 기대가 큼. 고구마 60포기 - 집에서 낸 고구마 싹을 심었으나(5/1) 절반이 말라 죽음. 이번 주말에 모종을 사서 다시 심을 예정임. 호박 12포기 - 작년에 비해서 수량이 줄어듬. 4/17에 심었는데 이제 떡잎..

참살이의꿈 2005.05.16

느리고 어수룩한

정화조가 고장난 것이 한 달여 전인데 기사분이 그저께야 찾아왔습니다. 수리 요청한지 6주 만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그동안 똑 같은 말이 저와시공자 사이에 오갔습니다. "이번 토요일에도 사람이 안 나왔어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다음 번에는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한 일이 끝난 것입니다. 저의 집을 지은Y건축회사 사장님은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늘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사업을 하시는 분 같지 않게 느릿느릿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이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단점이라면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화조 수리도 부탁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웃집의 경우는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주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밉지가 않습니다. 웃는 얼굴..

참살이의꿈 2005.05.09

새싹

콩, 고구마, 토마토, 그리고 다시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이곳 분들은 고구마를 꽂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감자도 놓는다고 하구요. 보통 우리는 나무고 작물이고 전부 심는다고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종류에 따라 표현이 다른 게 재미있습니다. 사실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 본 사람이라면 '감자를 놓는다' 그리고 '고구마를 꽂는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고맙고도 재미있습니다. 산은 벌써 신록의 색깔을 입기 시작했지만, 밭에는 이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심었던 옥수수는 5 cm 정도 키가 자랐고, 감자싹도 덮여있던 흙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옥수수는 얼마나 잘 자라는지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릅니다. 지금의..

참살이의꿈 2005.05.02

저 연초록 세상

지금 산야는 온통 연초록세상입니다. 겨울의 황량하던 풍경이 어느새 기적처럼 저렇게 변했습니다. 땅은 초록의 물감을 비밀스레 숨기고 있다가 어느 날 한 순간에 지상으로 쏟아낸 듯 합니다. 아직 신록에 들기 전이지요, 연두빛과 연초록이 뒤섞인저 찬란한 색깔의 향연에 초대받은 나는 행복합니다. 터에 오가는 길에 만나는 봄숲의 자태에 넋을 잃습니다. 저 빛은 병아리의 지저귐이고, 갓 태어난 송아지의 눈망울입니다. 갓난 아기의 해맑은 미소입니다. 누가 절망을 얘기하나요? 저 연초록 세상을 보게 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혁명을 꿈꿀 수가 있습니다. 터에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고개가 있습니다. 나는 잠시 차를 세우고 감사와 외경의 마음으로 저 연초록 세상을 바라봅니다.

참살이의꿈 2005.04.25

감자를 심다

밭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옥수수는 몇 해째 심어 왔지만 감자는 처음입니다. 동생이 강원도 씨감자를 구해 주었고, 전주에서도 붉은 감자를 줘서 두 종류를네골에 심었습니다. 옥수수도 네 골 심었습니다. 경운기로 골을 만드는 것을 로타리를 친다고 하지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괭이로 골을 만들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보시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경운기를 몰고 와서 이렇게 훤하게 일을 해 주셨습니다. 기계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하루 종일 할 일을 30분 만에 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하얀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감자 눈을 따내서 그걸 흙에다 심는 작업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흙을 만지는 자체가 즐거운 일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생명을 기르는 의미가 곁..

참살이의꿈 2005.04.18

행복한 나무 심기

나무를 심는 일은 행복합니다. 일년생 작물을 심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과 보람이 거기에는 있습니다. 십 년 앞을 내다보고 세운 계획을 십년지계(十年之計)라고 하는데 이는 곧 나무를 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렇듯 나무심기는 당장의 이익이 아닌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일입니다. 꿈을 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은 멀리를 내다보는 마음이고, 눈 앞의 이(利)를 탐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봄을 맞아 터에다 나무를 심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매년 조금씩 심어나가자고 작정한 대로 올해도 읍내의 나무 시장에 가서 눈에 드는 것들을 사왔습니다. 땅을 파니 오랜만에 맡는 흙의 향기가 좋습니다. 부드러운 촉감도 새롭습니다. 봄비를 맞아가며 이번에 심은 나무는..

참살이의꿈 2005.04.11

고구마 싹

손이 덜 가면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 무엇일까? 이웃에서 제일 많이 추천하는 것이 고구마였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터에다 고구마를 심을 생각으로 작은 스티로폼 상자를 구해 흙을 깔고 고구마 몇 개를 묻어 두었지요. 일부나마 내 집에서 싹을 낸 고구마를 키워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겨울에 따뜻한 방안에 둔 것 외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싹이 나오더니 하루가 다르게 줄기가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너무 웃자라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입니다. 고구마 싹을 심자면 아직 한 달도 더 지나야 할 것 같은데 저것을 그대로 두고 기다려야 하나, 어쩌나요? 아내는 초록 잎이 좋다고 상자를 통째로 거실로 옮겨놓았습니다. 모종으로 사용하려던 것이 어느새 집안의 장식용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가만히..

참살이의꿈 2005.04.03

맑고 따스한

지난 겨울에 언 수도관이 아직 녹지 않았습니다. 수도 펌프에 전원을 넣으니 해소병 환자의 가래 끓는 소리가 납니다. 중간 어딘가에 관이 막혀 있어 물이 소통되지 못하니 펌프도 힘이 드는가 봅니다. 누런 황토물이 펌프의 이음새 사이로 줄줄 새나옵니다. 이것도 이젠 연례 행사가 되어 그런가 보다 싶습니다. 그러나 내주까지 이 지경이 될까 걱정입니다. 생활하는 것은 둘째치고 내주에는 꽃과 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물이 없으면 일에 지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옆의 동료와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지만 정말 '무자식이 상팔자'입니다. 뭔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터를 통해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료도 지리산 자락에 터가 있는데 이번 겨울에 상수도관이 터져서 그로 인한 누수로 수도비가 20..

참살이의꿈 2005.03.29

백점 인생의 조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100점 인생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먼저 영어 알파벳에 차례로 점수를 부여합니다. A에 1점, B에 2점, C에 3점. D에는 4점, 이런 식으로 해서 Z에 26점까지 붙여주면 됩니다. 그런 다음 영어 단어를 점수로 환산해 봅니다. 돈이 많으면 될까요? MONEY는 72점이군요. 건강은 어떨까요? HEALTH는 54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LOVE도 54점이네요. 세상 사는 것은 사랑 만으로는 되지 않나 봅니다. 행운이면 어떨까요? LUCK은 겨우 47점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KNOWLEDGE는 96점까지 되는군요. 열심히 일하면 될까요? HARD WORK은 98점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그럼 100점짜리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참살이의꿈 2005.03.19

GRUMPS

다시 3월이 찾아왔습니다. 밤부터내리기 시작한 눈이 오전까지 계속되더니 지금은 햇볕이 납니다. 땅에 쌓인 눈은 햇볕을 받더니 벌써 다 녹아 버렸습니다. 봄이 이미 가까이 와 있음을 실감합니다. 저에게 3월은 마치 새해의 시작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보냅니다. 곁들여 좀더 아름답고 멋있게 살자고 작은 다짐도 합니다. 이 지상에서 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향유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 조금은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람살이의 제일은 역시 행복입니다. 이 별에 와서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었다고 마지막 독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GRUMPS라는 말이 있습니다. Green(녹색의), Responsible(책임감 있는), Unassuming(겸손하고 욕심이..

참살이의꿈 2005.03.02

사인

오랜만에 터에 다녀왔습니다. 겨울이면 발걸음이 뜸해지는데 올해도 수도관이 어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보온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지난 1월의 추위에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펌프가 마당에 노출되어 있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자위를 합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정이 깊다면 자꾸만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랜만에 만난다면 반가움 더욱 클 것이고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아무리 정이 깊은 사이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부딪치며 쌓이는 고운 정 미운 정이야말로 단단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기본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덫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오랜만에 찾아..

참살이의꿈 2005.02.18

백색 마녀의 저주

백색 마녀는 천사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보통의 마녀는 검은 옷에 무시무시한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어린아이도 좋아할 정도로 밝은 외모의 마녀입니다. 그녀는 풍요와 행복의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술에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마녀를 따라가는 자신의 발걸음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매 순간 제공되는 달콤한 유혹에 넋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마녀의 무서운 저주가 숨어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들려준 ‘백색 마녀의 저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백색 마녀란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친구가 설명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마녀의 주술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일부는 주술의 효력이 미치지..

참살이의꿈 2005.02.03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2 TV의 ‘인간극장’입니다. 지난 주 인간극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제목으로 산골에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의 얘기를 다루었습니다. 명문대 출신의 30대 초반의 부부가 1년 전에 무주 산골로 내려갔습니다. 도시에서 잘 나가던 그들이 산 속 오지로 들어간 것은 자신들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화려한 도시 생활이 결코 내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과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문명의 혜택이나 욕망을 따르는 삶을 거부하고 그들은 산 속에서 지금 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도시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떨 때는 불안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참살이의꿈 2005.01.12

작고 단순하게

무료할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나는 백지 위에 낙서를 합니다. 특히 지리한 회의가 끝도 모르게 길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종이 위에 낙서를 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회의에 열중하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귀로 몰려드는 소리들을 내쫓으며 하얀 백지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저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말들을 적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종이 위에는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단어만을 계속 적기도 하지요. 언제고 제일 많이 적혀있는 단어는 날 비[飛]자입니다.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뻗어 한껏 멋을 부리며 이 글자를 쉼 없이 쓰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종이 한 면이 이 한 글자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는 ..

참살이의꿈 2005.01.04

빈곤 사회

얼마 전에 두 가지 조사 결과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하나는 직장인들에게 가장 관심 있는 분야를 물었는데, 재테크가 1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가 건강이고, 세 번째가 가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성공의 기준이 돈이고,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의 선택이란 어쩔 수 없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번째 조사 결과였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앞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이었는데, 대상자의 60%가 돈 잘 버는 직업을 고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물신숭배(物神崇拜)에 젖어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젠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돈이 최..

참살이의꿈 2004.12.27

줄이면 얻는다(少則得)

이사를 할 때면 집안에 쌓여있는 물건들에 놀라게 된다. 살면서 무슨 물건을 그렇게 많이 모아 두었는지, 100kg도 안되는 몸뚱어리 하나 살아가는데 꼭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한지 새삼 놀랄 수밖에 없다. 장롱을 열어 보아도 들어있는 옷들이 엄청나게 많다. 사치를 부린 것도 아니고, 무슨 사교클럽에 가입한 것도 아닌데 일상에서 입고 다니는 옷들만 해도 꺼내놓고 보면 장난이 아니다. 곁가지들 다 쳐내 버리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너무 많은 물건들을 보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좀더 간소하고 간단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절로 일어난다. 올해는 그동안 당연시하며 사용해 오던 침대와 소파와 식탁을 없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 없이 불편해서 어떻..

참살이의꿈 2004.12.22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어두운 색조로 하루 일을 마치고 가난한 저녁 식탁에 앉은 한 가족을 그리고 있다. 삶의 신고(辛苦)가 잔뜩 묻어있는 그림이다. 고흐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농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릴려고 했으며, 그래서 겨울 내내 농민의 머리와 손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썼다. 고흐 자신은 이 그림에 굉장히 애착이 갔었는 듯 언젠가는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으로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 그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정직한 생활일 것이다. ......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

참살이의꿈 2004.12.11

내 꿈

겨울비가 내린다. 가늘고 곱게 내린다. 닫힌 창문 사이로 낙숫물 소리가 똑 똑 여리게 들린다. 시골 마을 한가운데서 느끼는 이 계절은 방안의 기온만큼 썰렁하다. 초겨울의 빗소리를 들으며,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의 글을 읽는다. 선생님은 우리 글과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참 교육자였고 시대의 예언자였다. '악마들이 하는 짓을 경고하고, 가엾게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겠다'고 말씀하신 선생님이 가신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 구름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이런 맑은 날에도 하늘은 그 옛날의 하늘빛이 아니다. 흐릿한 잿빛이 좀 섞인 파란빛이다. 산을 보면 여름과 다름없이 흐릿하고, 먼 산은 잿빛으로 가려져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하늘과 땅이 언제나 매연으로 덮여 있고..

참살이의꿈 2004.12.05

익숙한 것과의 결별

IMF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이나 파산을 당했다. 한 순간에 찾아온 낯선 환경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 익숙한 것에서 떠난다는 것은 가슴 쓰라린 일이지만 그런 결별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가 씌어질 수 없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에게 있어 어느 순간 불가항력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에게 있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도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말로 쓰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떻게 변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만약 내가 사회학자라면 조사, 연구해 보고 싶은 바램도 있다. 그런 외적인 충격이 한 개인..

참살이의꿈 2004.11.30

겨울 준비

오늘이 소설(小雪)이다. 어느새 벌써 겨울에 들어섰다. 곧 첫눈 소식도 찾아올 것이다. 가을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간다. 힘들었을 때는 일년이 휙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바랐지만 이제 한 해의 끝자락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오니 아쉬운 맘이 크다. 예전에 겨울 준비로는 김장과 연탄이었다. 70년대에 서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 때 몇 식구가 되지 않았는데도 김장을 한 접씩 담근 기억이 난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당시에는 김치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이맘때가 되면 집집마다 서로 어울려 김장을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집이 어울려 김장을 할 때는 마당이 좁아서 골목길이 작업장이 되곤 했다. 그때의 시끌벅적하던 겨울 준비가 그립기도 하다. 그리고 부엌 한 켠에다 연탄을 가..

참살이의꿈 2004.11.22

저녁

저녁 어스름이 좋다. 이때는 낮과 어둠의 경계선에 있는 짧은 순간이다. 서산으로 해가 저물면서 사물들은 시시각각 어둠 속에 잠긴다. 낮 동안 색깔을 현란하게 뽐내던 존재들이 이제는 자신의 숨결을 거두고 동일한 회색 톤으로 변해간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똑같이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이때는 돌아감의 시간이고 휴식의 시간이다. 세상의 일들로 소란스러웠던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보며 창 앞에 선다. 멀리 앞집에서 아까부터 저녁 연기가 피어오른다. 느릿느릿 흰색 연기가 처음에는 옆으로 퍼져 나가더니 지금은 곧장 위로 올라가며 십자 모양을 만든다. 아마도 김씨가 사랑방에 군불을 넣고 있을 것이다. 처음 터에 자리 잡았을 때 자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는데 지금은 조금 ..

참살이의꿈 2004.11.09

대한민국은 공사중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다. 도시나 농촌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땅을 파고 산을 뚫고 시멘트 구조물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이젠 깊은 산 속 골짜기까지도 굴삭기가 들어가 길을 내고 터를 닦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경치가 좋은 곳이면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공사가 목적이 아니라 마치 건설 장비를 놀리지 않기 위하여 일을 꾸미고 있는 느낌마저 있다. 최근에 읽은 신문에서는 나라의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건설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제일 효과가 있다면서 대규모 공사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설 공사라는 것이 자연을 망치고 아름다움을 깨뜨리게 되니 문제가 있다. 애꿎은 산허리가 잘려나가고 들판이 시멘트로 덮혀진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시골 마을이 자동..

참살이의꿈 2004.11.02

[펌] 저 황금빛 들녘의 비애

경남 밀양의 가을 들녘을 걸으며 눈이 시리다 못해 충혈이 되도록 안부를 묻는다. 청명한 가을 햇살과 찬 서리를 맞아 속살부터 단맛이 차오르는 얼음골 사과의 표정으로, 그리고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사자평 억새꽃의 이름으로 그대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예사롭지 않은 세상, 그대는 정녕 이 가을에 행복하신가. 220일을 넘도록 걷고 걸으며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수상하고 수상할 뿐이다. 황금빛 출렁이는 저 들녘의 풍요는 어느새 풍요가 아니라 처절한 결핍이 되었다. 추수의 '감사'가 아니라 농산물 수입개방 문제 등으로 인해 생존권 사수의 '결사'가 되었다. 이따금 참새들이 날아와 벼이삭을 쪼더라도 화를 내는 척하지만 어느새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허수아비들의 여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의 ..

참살이의꿈 2004.10.26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올 봄에 앞 밭에다가 호박 10여 포기를 심었다. 호박을 얻는 목적보다는 긴 줄기를 뻗어서 맨 땅을 덮어달라고,그래서 풀이 좀 덜 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심은 것이었다. 거름과 비료를 한두 번 정도 준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사람들이지나가면서 호박 참 잘 되었다고 하는 칭찬도 들었다. 올해 어떤 집은 호박이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올해 심은 작물 중에서그런대로 만족하는 것이 이 호박이다. 그래서 호박잎도 따서 쪄먹고, 애호박도 눈에 띄는대로 따다가 맛있게 먹고 도시의 이웃에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때가 지나서 못 딴 호박들은 군데 군데 늙은 호박으로 되어 누워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편안하고 평화롭다. 가을의 풍요함이 저 누런 호박을 통해..

참살이의꿈 2004.09.18

200분의 1

올 봄에 목화씨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 한 웅큼 정도 되었는데 까만 씨에는 하얀 솜털이 붙어있었다. 그 보드라운 촉감이 옛날 고향집 뒤의 목화밭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목화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며 꿈과 기대를 모아 밭에다 씨를 뿌렸다. 이웃 분들도 목화씨를 심었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워했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목화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는 것을 그때 확인했다. 길이가 20m 정도 되는 고랑 세 개에다가 한 구멍에 두세 개씩 심었으니까 땅으로 들어간 씨앗만도 200개는 넘을 것 같다. 그러나 땅이 척박해서였는지 근 한 달이 지나서야 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싹이 나온 목화는 캐내어서 좀더 거름진 땅으로 옮..

참살이의꿈 2004.09.12

배추를 심다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이미 시들해진 오이와 토마토를 캐내고 거름을 약간 더 넣은 다음에 모종을 심었다. 읍내에서 배추 모종 한 판을 샀는데 120여 포기가 들어있고, 또 옆집에서 주는 모종까지 더해졌으니 약 150포기는 되는 것 같다. 우리 한 집 먹을거리로는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잘 되면 도시의 주변 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을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껏 작물을 가꾼 경험으로 볼 때 맛있는 배추로 자라줄 것으로는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선 시간적으로 정성이 모자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서 물 주고 보살피는 것으로는 식물도 사랑 결핍증에 걸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일을 하는데 불현듯 작년의 일이 떠오른다. 작년에는 비가 오는 속에서 낙담한 가운데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배추를 심었다. 아마도 그날 찾..

참살이의꿈 2004.09.05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울지 마라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아프게 흔들리는 일이다 영원히 빛나는 별을 꿈꾸지 마라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들판의 꽃들도 흔들리면서 피어나고 나침반의 바늘도 흔들리면서 제 자리를 찾아간다 별이 반짝이는 것도 흔들리기 때문이며 네가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아프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종소리도 자신을 때리며 온 마을로 퍼져 나간다 나무도 흔들리면서 자라난다

참살이의꿈 2004.08.27

후회하면 안 돼!

서울을 떠나 시골로 거처를 옮긴 후배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는 탈서울한지 벌써 5년이 되니 이젠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집에 가 보아도 모든 것이 틀이 잡혀 있어 부러울 때가 많다. 나무들도 언제 그렇게 컸는지 처음 심었을 때는 보잘 것이 없었는데 이젠 집을 가릴 정도의 탐스런 나무로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진 전원 주택이지만 그만큼 가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들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후배가 자리잡은 곳은 마석에 있는 전원 주택 단지이다. 20필지 정도의 규모로 업자가 개발해 놓은 것인데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지어 입주했다. 대부분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단지에 들어가는 것이 원주민들의 텃세나 생소한 환경..

참살이의꿈 2004.08.22

어느 날의 일기

두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이불과 옷들을 잔뜩 널어놓고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뿔싸, 큰 일 났구나.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가 곱게 개어서 처마 아래에 모아 놓았다. 천둥이 치기 시작하니까이웃 분이 미리 챙겨놓은 것이 틀림없다. 옆집이리라 짐작하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니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구인가?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할텐데..... 저녁에 내린 소나기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퍼붓는지 도랑에는 순간에 불어난 물이 급류를 이루고 마당에는 흙이 패이면서 물고랑이 생겼다. 물길 정리를 하러 우의를 입고 밖에 나갔지만 이내 온 몸이 젖는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물이다. 집 뒤의 공사한 ..

참살이의꿈 2004.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