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36

장마의 끝

장마가 끝났다는데 아직 하늘은 흐리다. 가끔 햇살이 보이다가도 이내 구름으로 덮이고 짧게 비가 뿌리기도 한다. 그래도 장마가 끝났음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이번 장마는 막바지에 폭우를 쏟아붓더니 여러 곳에 비 피해를 주고 물러났다. 이곳에 오는 날은 얼마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지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로는 흙탕물로 흘러넘치고 숨가쁘게 움직이는 브러쉬로도 차창의 빗물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퍼붓더니 언제 그랬냐느듯 순간에 잦아들었다. 다행히 터에 피해는 없었다. 아마 작년같았으면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또 한번 고생했을 것이다. 그동안 땅이 다져지고 풀이 덮혀서 흙쓸림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간에 땅도 몸살을 몹시 한 것 같다. 중장비가 들어와 끊고 파헤치고 했으니 땅..

참살이의꿈 2004.07.19

제초제는 싫어요

여름이 되니 풀이 엄청나게 빨리 자란다. 보통 잡초라고 부르는 것인데 터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그다지 많은 종류는 아니고 대략 예닐곱 종류쯤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이름을 아는 것은 질경이와 비름, 두 종류뿐이다. 아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화초였다면 어떻게든 그 이름을 알아보았을 것인데 아무 쓸모없다고 여기는 잡초 신세라서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으니 그 풀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서부터는 터에 내려가서 하는 주된 일이 풀을 뽑는 것이다. 그것도 집 주변의 풀을 뽑기만도 벅차다. 좀 떨어진 빈터에는 온갖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나게 자라고 있다. 키가 큰 것은 가끔씩 뽑아주지만 바닥에 기면서 자라는 것들은 손을 댈 엄두도 못 낸다. 저 놈들이 게으른 주인을 만나 이만큼이나 생..

참살이의꿈 2004.07.14

텃밭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있다. 읍내에서 사오거나 또는 이웃에서 준 모종이나 씨를 심은 것인데 조금씩 심다보니 숫자는 많지 않지만 종류는 꽤 된다. 가지, 오이, 고추, 상추, 토마토, 방울토마토, 옥수수, 호박, 머위, 딸기, 쑥갓, 더덕, 열무, 들깨, 미나리 등등.... 그런데 텃밭 가꾸기는 아내의 몫이다. 서로가 할 일을 일부러 나눈 것은 아니고, 나는 주로 집 주변 정리 같은 힘쓰는 일을 맡다보니 작물 재배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관심도 멀어지고 밭에 무엇이 열렸다고 감탄하며 외치는 아내의 소리를 듣고서야 쳐다보게 된다. 아내는 심고 가꾸고, 그래서 채소가 쑥쑥 자라나 열매가 맺히고 하는 걸 신기하다며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 부지런함 덕분에 터에 내려가면 싱싱한 채소를 맛나게 먹는..

참살이의꿈 2004.06.30

모든 것이 꿈이었다

옆의 동료가 가평에다 자신의 전원생활을 위한 터를 구했다. 폐농가가 포함된 땅인데 은행나무, 전나무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너무 좋다고, 며칠 전에 등기까지 나왔다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잔뜩 기쁨과 설레임이 들어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수년 전의 내 경험이 떠올랐다. 터와 처음 만났을 때 한 마디로 뿅하고 갔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료와 마찬가지로 머릿 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미래의 꿈으로 가슴이 벅찼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이리라. 처음 만났을 때 쇠가 자석에 끌리듯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나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을 보통 인연이라고 얘기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정말 이 사..

참살이의꿈 2004.06.22

배수로 작업

터의 뒤쪽에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성가시게 한다. 시멘트블록 50개를 사다가 한 줄로 쌓았다. 시멘트블록을 나르랴, 줄 맞추어 쌓으랴, 안 그래도 서툰 노동인데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줄도 삐툴삐툴, 높낮이도 들쭉날쭉, 다른 사람이 본다면 허허 하며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사람을 사서 할려니 요사이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내 땀의 흔적을 보게 되는 보람일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땀이 정신적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 육체적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복잡한 세상사는 잊어버리게 된다. 내 일을 하면서 명상의 효과까지 덤으로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러..

참살이의꿈 2004.05.31

목화싹이 나오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목화밭 목화밭.....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이 목화씨를 구해 주셔서 세 고랑에 씨를 뿌린 것이 두 주전이었는데 드디어 싹이 돋아났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흙을 뚫고 나온 목화의 싹이다.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목화밭이다. 하사와 병장이 노래한 목화밭을 이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때 우리 집 뒤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을이면 하얀 솜 가득한 목화밭 풍경이며, 그리고 목화의 열매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따서 먹으면 달콤했던 맛의 느낌도 떠오른다. 또 목화 솜을 수확해서 마당에서 할머니가 흰 실을 뽑아내던 광경도 ..

참살이의꿈 2004.05.24

반가운 손님

빈 터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작년에 흙을 들여와깔아놓은 터에 봄이 되니 하나 둘씩 풀들이 나기 시작한다. 흙 속에 들어있던 씨들이었는가,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왔는가, 맨 땅이 초록 옷을 입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사실 이름을 모르는 풀들도 많다. 그러나 그 중에는낯 익은 꽃을 피우고 미소짓는 것들도 있다. 대부분은 꽃이 아주 작아 허리를 굽히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저것들이 귀엽고 반갑다.

참살이의꿈 2004.05.16

웰빙 유감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마시는 물이 화제가 되었다. "서울 부자들은 새벽에 뜬 한라산 약수를 비행기로 공수해 와서 아침 식사를 하며 마신다고 해." "몸에 좋다고 바다의 심해수를 사다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러니까 웰빙을 실천하자면 돈이 많아야 한다니까."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웰빙 바람이 식을 줄을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고 보게되는 웰빙이란 무엇인가? 웰빙의 시초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웰빙 바람은 변질되어 뭔가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라지만, 웰빙도 몸과 건강에 대한 환상을 키우며 상품 판매와 소비에 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덩달아 매스컴이 부추기는 얼짱, 몸짱 신드롬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바닥에는 우리 ..

참살이의꿈 2004.05.12

마가리의 선물

마가리에서 만난친구가있다. 만난지는 채 3년이 못되지만 지금은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소중한 친구이다. 만나게 된 계기도 재미있는데 하여튼 이 친구는 마가리가 나에게 준 귀한 선물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메일을 많이도 주고 받았다. 지금은 뜸하지만 그간 오고간 메일이 4백통 가까이 되니 적은 양은 아니다. 그렇게 서로 통하는 얘기가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이 메일이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며 자랑이다. 지금도 클릭해서 읽어보면 옛 생각이 나면서 힘을 얻게 된다. 이 친구는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이다. 나는 내성적이지만 친구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늘 에너지로 넘친다. 그의 곁에 있으면 내면에서 분출하는 기라고 할까 에너지라고 할까 뭔가가 꿈틀거리는 생기로 가득해진다.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

참살이의꿈 2004.05.02

새 식구

터에 새 식구가 많이 늘어났다. 4월 들어서 주말마다 터에 내려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심은 나무는 다음과 같다. 배롱나무 1, 살구나무 1, 라일락 1, 산수유 1, 사철나무 40 모과나무 1, 자작나무 10, 회양목 50 벚나무 1, 단풍나무 2, 오가피 10, 회양목 10, 연산홍 30 그런데 나무를 고르는 데서부터 어설프게 보였는가 보다. 나무를 배달해 온 분이 나무 모양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찬다. 수목전시장에서는 잘 몰랐는데 심어놓고 보니 몇 주는 수형이 마음에 안 든다. 특히 배롱나무가 심하다. 원줄기에서 갈라진 가지가 완전히 불균형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선택했어야 할 나무라는 생각이 드니 우리 마당에서나마 잘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 ..

참살이의꿈 2004.04.20

나무를 심다

산림조합에서 직영하는 나무 전시장에 다시 들러 보았다. 3월 중순에갔을 때보다구경나온 사람들이 훨씬 적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무 심기를 마친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읍내의 길거리에서 임시로 열렸던 나무 시장도 벌써 사라졌다. 오늘이 식목일이건만 실제 나무 심는 시기는더 빨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벌써 대부분의 묘목이나 나무들이 잎과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담당자 말로는 4월 중순까지는 괜찮다고 하지만 늦어질수록 나무의 몸살은 더 커질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당에 심을 나무의 구체적인 밑그림도 없이 갔기에 이 나무 저 나무 구경하다가 눈에 띄는 것으로 몇 그루를 구입했다. 울타리 대용으로 쓸 사철나무 40주. 베롱나무, 살구나무, 라일락, 산수유 각 1주. 울타리로는 쥐똥나무를 예상했었지만 막상 가서..

참살이의꿈 2004.04.05

그래도 노래하고 춤추자

꿈이 사라질 수 있을까? 무엇을 잃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손에 잡고 있던 풍선을 놓치고 어린 아이는 운다. 풍선은 푸른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가버렸다.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빈 손바닥만 남았다. 어린 아이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빈 손을 보고 서러워 운다. 빈 손...... 그것은 나에게겨울 찬바람이었고, 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빛은 사라지고 별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이었다. 절망과 회한과 무기력,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음이었다. ................................. 박이문 님의 글 한 편을 읽는다. 살을 씻는 겨울 찬바람이 몰아쳐 와도, 두 볼에 부서지는 그 한파는 시원하다. 길을 덮어 갈 길을 막아도 산새들처럼 떼지어 날아오는 하얀 함박눈은 아무리 차도 우아..

참살이의꿈 2004.03.30

3년 전

만약 운명이 있다면 그는 무척 짓궂은 장난꾸러기일 것 같다. 神은 밋밋한 인생을 재미없다고 본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하는 식으로 우리 인생길에다 이곳 저곳 지뢰를 묻어 두었다. 춤추며 가던 인생길에서 지뢰를 밟아 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상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롤러 코스터를 탄것 마냥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또끝없는 아찔한 추락을 경험한다. 인생은 시소타기다. 5년마다 순환 근무를 해야 하는 탓에 이번에 직장을 옮겼다. 그런데 새로 옮긴 직장의 여건이 내가 기대한 조건과는 많이 어긋난다. 여유있는 삶, 느릿 느릿 걸어가고 싶은 삶을 추구하면 할 수록 그에 비례하여 내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장난꾸러기의 훼방에 속이 탄다. 세월이 흐..

참살이의꿈 2004.02.29

청빈(淸貧)

내가 존경하는 사람중에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채식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아름다운 일생을 산 용기있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준 분이다. 니어링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제국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혐오했는데 이것에 대한 저항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 일관되게 행동한 분이다. 그것은 결국 부의 포기와 단순 소박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그 분이 부를 보는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부는 타락했다..

참살이의꿈 2004.02.22

무릉도원은 어디에

`소백산의 어느 계곡에서 봄꽃을 구경하다가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끼기 시작해 동서남북의 방향도 헷갈리면서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진동하는 곳에 절벽이 나타났고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동굴이있었다. 그 동굴을 지나가니 시야가 훤하게 트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기름진 논밭이며 아름다운 호수, 뽕나무나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다. 개와 닭소리도 한가로이 들리고 사람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평화롭고 이국적이었다. 장식은 없었지만 깨끗하고 소박한 흰 옷을 입은사람들은 한결같이 즐겁고 만족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며 물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

참살이의꿈 2004.02.09

케세라세라

70년대였던가, `케세라세라`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친구는 말 끝마다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독백처럼 `케세라세라`를 읊곤 했다. 정확한 번역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될대로 되어라` 쯤으로 이해했다. 그 말에서는 냉소적이고 조금은 자포자기적인 냄새도 났다. 지난 설날 추위에 터의 수도가 또 얼어버렸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보온도 넉넉히 하고 수도물도 열어놓고 해서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로는 동장군을 대항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작년겨울에도 수도 펌프를 하나 깨먹어 버렸는데 올 겨울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한 번 얼어버린 수도관을 녹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그저 빨리 봄이 되어 ..

참살이의꿈 2004.01.30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가며

30년 전이다. 동두천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휴일 외출을 나갔다가 서점에 들렀다. 서가를 훑어보던 중 특이한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표지로 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한 교사의 교단 일기였다.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미국의 교육 현실을 고발한 내용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 책 제목이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가며`였다. 책을 사 가지고 귀대하는 버스 안에서 앞으로의 내 삶이 이 책 제목과 같이 전개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주류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 것 같은, 그래서 약간은 삐딱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지금은 가끔씩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참살이의꿈 2004.01.15

춥고 쓸쓸한 마가리

현관문을 여니 싸늘한 냉기가 밀려온다. 집안 공기가 바깥보다 더 차다. 발바닥이 시러워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스위치를 올리니 보일러가 웅웅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도물도 정상으로 나온다. 이번 추위에 바깥 수도펌프가 얼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안에서는 아직도 새 집 냄새가 난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커튼과 창문을 모두 연다. 겨울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유리창을 거친 햇살은 따스하다. 뒷 집 개가 마당까지 쫓아와서는 컹컹대며 짖는다. 여기가 자기네 집인지 아는가 보다. 웃기는 놈이다. 손짓으로 쫓아보지만 꿈쩍도 안한다. 오디오 전원을 넣는다. Secret Garden의 `Awakening`이 흘러 나온다. 애잔한 선율로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두 번째 곡은 `You rais..

참살이의꿈 2003.12.22

전원의 즐거움 / 문일평

옛 글 한 편을 읽는다. 文一平(1888-1939)님의 글이니 아마도 70년쯤 전에 씌어진 글일 것이다. 낯 선 한자 단어들이 자주 나와 읽기에 거북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풍스러운 맛이 느껴져서도리어 새롭다. 그러나 이런 전원 생활을 그리다가 실족한 사람도 많음을 명심하자. 제목; 전원의 낙(樂) 경산조수(耕山釣水)는 전원생활의 일취(逸趣)이다. 도시문명이 발전될수록 도시인은 한편으로 전원의 정취를 그리워하며 원예를 가꾸며 별장을 둔다. 아마도 오늘날 농촌인이 도시의 오락에 끌리는 이상으로 도시인이 전원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류는 본래 자연의 따스한 품 속에 안겨 토향(土香)을 맡으면서 손수 여름지이를 하던 것이니 이것이 신성한 생활이요 또 생활의 대본(大本)일는지 모른다. 이른..

참살이의꿈 2003.12.14

일희일비 않기

`살아보니까 내 인생에 즐거운 날은 몇 날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날들은 그 즐거운 하루를 즐긴데 대한 빚을 갚는 날이었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본 구절인데 무척 공감이 되었다. 다만 즐거운 날이 몇 날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면서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궂은 일도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짧은 인생이지만 우리는 많은 굴곡을 경험한다. 행복과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결코 삶은 뜻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나타나고 평탄한 길이 지나면 가시덤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떨 때는 늪을 통과해야 한다. 거기에는 맹수가 살고 있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

참살이의꿈 2003.12.09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4년 전 농촌 마을 한가운데에 터를 잡을 때 여러 사람들이 걱정했다. 도시 생활을 하다가 시골 마을 가운데에서 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도시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생활에 젖어 있다가 모든 것이 노출되는 시골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를 했다. 가능하면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 덜 간섭받는 장소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도시 아파트 생활의 장점이자 단점이 고립성이다. 대개의 경우 한 가구 한 가구가 서로 고립된 섬이다. 옆 집에 신경 쓸 일도 없고, 옆 집으로부터 간섭받지도 않는다. 이것을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안락함으로받아들일 수도 있고, 이웃과의 단절로 느낄 수도 있다. 당시에는사람들의 걱정을 무시해 버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면 된다고 그쪽 환경에 눈높이를 맞추고 산다면 문..

참살이의꿈 2003.11.29

쓸쓸한 그곳

터에 다녀오다. 늦가을이어선지 더욱 쓸쓸했다. 월동 준비를 한답시고 펌프에도 헌 옷가지를 둘러씌우고 바깥 수도꼭지도 물을 뺀 다음 폐쇄시켰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다만 담안 사람들과 잠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도시의 소외가 싫었는데 지금까지는 시골 마을에서도 아직 이방인이다.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지난 사건의 여파가 나에게는 아직 크다. 첫 눈에 정이 들기는 쉽다. 그러나 한 번 소원해진 뒤에 다시 정을 붙이기는 어렵다. 이건 사람이나 물건이나 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깊은 정이란 것은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그러고도 느끼는 동질감이야말로 세월이 쌓인 깊은 정이라고..

참살이의꿈 2003.11.17

쓸쓸한 건배

일과를 일찍 마치고 동료들은 남한산성으로 단풍 구경을 떠났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그냥 보낼 수 없단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단풍나무 아래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가을 정취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혼자 있고 싶다. 지난 한 달 동안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릴려고 노력했다. 여러 모임에도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만나 술도 마셨다. 그것은 잊기 위해서였다. 나에게는 벅차게 다가온 사건들의 고통, 그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희석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이나술이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어떤 때는 도리어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오늘은일찍 집으로 들어가야지. 그냥 아내와 둘이서 소주 몇 잔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사라져가는 마가리의 꿈을 향하여 쓸쓸한 건배라도 했으면 좋겠다.

참살이의꿈 2003.10.31

한 문이 닫기면 다른 문이 열린다

터에만 다녀오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안 갈 수도 없고, 가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들과 마주쳐야한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상황들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한 때는 새 생활에 대한 꿈으로 부풀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계륵(鷄肋) 신세가 되어 있다. 밀고 나가기도, 발을 빼기에도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럴 때는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내 의지를 떠난 상황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 것! 오늘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생각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거기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여 주인공, 쥬리 앤드류스. 수녀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녀는 원장 수녀님에 의해 밖으로 퇴출(?) 당한다. 가방을 ..

참살이의꿈 2003.10.27

우리 배추

9월 초에 읍내에 나가 배추 모종을 샀다. 거름 한 포와 섞어서 뜰에다 심어 놓았다. 비가 내리던 그 날, 대충 대충 엉성하게 옮겨 놓기만 했다. 그 뒤 일이 생겨서 내려가 보지도 못한 채 한 달여가 지났다. 물을 주지도 김을 매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산흙을 퍼다 만든 마당의 척박한 땅에서 저 혼자 이만큼 자라 주었다. 농민들이 키운 배추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초라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자라준 배추가 고맙기만 하다. 사이 사이 솎아와서 이웃에도 나누어 주다. 그런데 잎이 억세서 냄비에 푹 끓여 먹어야 겠다.

참살이의꿈 2003.10.19

기도

샌, 조금은 바보처럼 살자! 샌, 조금은 모자라게 살자! 샌, 조금은 욕심을 버리자! 샌, 조금은 마음을 비우자! 가앙 가앙..... 가을 하늘은 자꾸만 높아만 간다. 꾸역 꾸역..... 늘어나는 욕심으로 나는 자꾸 무거워진다. 이 좋은 계절 가운데서 나는무너지고 있다. 상대를 모르는 싸움에 지쳐가고 있다. 하느님! 제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을 수 있는넉넉함을 주소서. 세상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는 감히 청하지 않사오나 그러나 당신의 따스한 한 마디가 그립습니다. 그 한 마디면 다 족하겠습니다.

참살이의꿈 2003.10.10

한 달 만에 다녀오다

한 달 만에 내 터에 다녀왔다. 내려갈 때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러할까 싶었다. 그러나 올라올 때는 몇 가지 심각했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내려가던 길에 한 집에 들렀다. 이분들은 벌써 10여년 전에 귀농하신 분들이다. 기반을 닦은 모습이부러운데 자신들도 초창기에는 무척 고생 많이 했다고 과거 얘기 들려주며 힘 내라고 하신다. 안스러워 걱정해 주는 마음이 표정에 서려 있다. 동네에서는 두 쪽 갈등 사이에 끼여 처신하는데 무척 괴롭다. 시시비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나에게 요구하는 사항을 어느 쪽도 받아들여주지 못했다. 잘못하면 이쪽 저쪽에서 동시에 욕을 얻어 먹어야 되는 처지다. 묘하게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잘 되면 부드럽게 ..

참살이의꿈 200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