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골 71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집을 떠나 무지개를 따라 나섰지. 어느 날 무지개는 사라지고, 나는 저녁 빈 들판에 홀로 남게 되었네. 사람들의 마을은 멀고, 빈 들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네. 그러나 먼 땅 위로 외로운 별 하나 떠오르고, 어두운 길에서는 낯 선친구를 만날지도 모르리. 무지개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

시읽는기쁨 2006.01.13

철수

밭의 비닐을 걷어내서 정리하고, 모아두었던 콩대를 불태우고, 추위에 약한 나무 줄기에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보일러와 수도 배관에 있던 물을 모두 빼냈습니다. 이것으로 올 한 해 터에서의 생활이 마감되었습니다. 특히 보일러와 수도관의 물을 빼내는 작업은 콤프레셔를 사용해서 인부 두 명이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일해야 할 정도로 만만치 않았습니다. 내년 봄에 다시 물을 채워주는 것까지 해서26만 원이 들었습니다. 지난 두 해는 내려가 있지 않더라도 보일러을 겨울 내내 가동시키며 동파를 방지했지만 마당에 노출되어 있는 수도 폄프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보온을 해도 두 번 다 얼어터져서 봄에는 고생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아예 물을 모두 빼버린 것입니다. 이번 겨울은 완전히 터에서 철수를 하려..

참살이의꿈 2005.11.27

가을걷이가 끝나다

고추, 피망, 꽈리고추, 토마토, 방울토마토, 아욱, 근대, 목화, 상추, 케일, 콩, 강낭콩, 서리태, 큰콩, 완두콩, 오이, 호박, 감자, 자주감자, 고구마, 옥수수, 머위, 취, 배추, 무우, 열무, 들깨, 더덕, 쑥갓, 가지, 파, 쪽파, 딸기.... 이것들은 올해 텃밭에 심었던 작물들입니다. 그 종류가 서른 가지가 넘습니다. 정말 농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종류로는 많이 심었습니다. 뭘 심어 놓고는 그렇게 열심히 다니느냐고 누가 묻길래 모든 것을 다 심어놓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이나 이름을 대 보라고 했더니 정말 그 친구가 말하는 작물은 전부 제 밭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들을 가꾸느라고 아내와 저는 주말이면 여기에 붙잡혀서 지냈습니다. 옆의 사람들이 너무 일만 ..

참살이의꿈 2005.10.16

예초기로 잔디를 깎으며

지난달에 예초기를 샀습니다. 잔디를 깎기 위해서입니다. 집 주변에 심어놓은 잔디가 넓지도 않은데 낫으로 깎자면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립니다. 지난 초여름에는 일주일이 걸려도 다 깎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작업이 서툰 탓입니다. 그래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힘들지만 그럭저럭 견뎌냈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예초기로 마당의 잔디를 깎는 것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낫으로 깎는 것에 비하면 순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쉽고 빨리 일이 끝났습니다. 그분은 미련하게 살지 말라며 예초기를 사서 쓸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부탄가스로 작동되는 신형 예초기를 산 것입니다. 저는 기계치(機械痴)라고 할 정도로 기계나 도구를 만지는데 서투릅니다. 어쩌다 기계를 다루게 되면 꼭 무슨 ..

참살이의꿈 2005.09.27

새들은 모이를 외면한다

마당과 밭에는 가끔씩 새들이 찾아옵니다. 특히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자주 볼 수 있는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에서 들리는 맑은 새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해줍니다. 찾아오는 새는 대개 딱새와 박새, 산비둘기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클 때는 참새가 제일 많았는데 요사이는 참새를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새들은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부리로 무언가를 쪼아 먹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는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즐겁게 놀기도 합니다. 오래된 쌀이 한 되 정도 남은게 있었는데 쌀벌레가 생기고 바게미(?)라고 부르는 날벌레들도 자꾸 생겨서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새들의 모이로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마당 가운데 있는 나무토막 위에다 쌀을 뿌려놓아 봤습니다. 이놈들이 떼로 몰려와 기꺼이 모이를 먹는..

참살이의꿈 2005.09.03

배추와 호박

열흘 전에 감자를 캐낸 자리에 읍에서 사온 배추 모종 100 포기를 심었습니다. 그것이 이만큼 예쁘게 자랐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배추가 잘 자랐다고 한 마디씩 칭찬을 해 줍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던 도시 사람이 하는 노릇 치고는 그래도 봐줄 만 하다고 하는 뜻임을 압니다. 그래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어설프게 심었던 작년에도 그런대로 배추는 잘 되었습니다. 이웃에서는 약을 쳐도 벌레가 먹는다는데, 우리는 약 한 번 치지 않았으면서 별로 흠집 없는 배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서 와서 보고 이 집은 물도 안 주고, 약도 안 치는데 어떻게 배추가 이렇게 잘 자랐느냐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아마도 새로 들여온산흙에서 키워서 병충해의 침입..

참살이의꿈 2005.08.28

지금 이대로가 좋아라

지금 이대로가 좋아라. 그냥 이대로 살고 싶어라.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리에 드는 지금이 좋아라. TV도 컴퓨터도 없지만 대신에 자동차 소리나 문명의 소음도 없는 여기가 좋아라. 저녁이면 촛불을 켜놓고 거실에 누워 남쪽 하늘을 흘러가는 반달을 바라보는 여유와 낭만이 좋아라. 촛불은 따스한 빛이다. 달빛과 촛불은 기막힌 조화를 이루며 내 몸을 어루만진다. 그 빛과 어우러져 나신이 되어 한 판 춤이라도 추고 싶은 밤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하루 종일 혼자 있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아라. 아무런 하는 일이 없어도 결코 심심하지 않아라. 아침, 저녁 두 시간 정도씩 바깥일을 한다. 한낮에는 뜨거워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온 몸 가득 땀을 흘리고 들어와 찬물로 샤워를 할 ..

참살이의꿈 2005.08.18

건축일지

경기도 여주에 땅을 마련한 것이 1999년 7월이었다. 농촌 마을 가운데 있는 대지와 전으로 된 470평의 직사각형 땅인데, 아내나 나나 처음 보는 순간에 반해 버려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사버렸다. 결국 나중에는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제대로 땅을 볼 눈이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 뒤에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주말마다 다니는 생활을 하다가 2002년부터 집 지을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는 직장을 여주로 옮긴 뒤에 집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학교를 옮기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우선 집부터 짓기로 한 것이다. 얼마간 망설임의 시간을 겪었지만 당시만 해도 여주에서의 생활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앞으로의 생활 기반이 되는 집이 필요했다. 그러자니 우선 어떤 ..

참살이의꿈 2005.08.04

감사의 식탁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따와 애호박으로 부침개를 부쳐 막거리를 한 잔 합니다. 비가 오니 이렇게 여유가 있습니다. 날씨가 좋다면 무슨 일거리든 찾아서 땀을 흘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하늘이 말리는 모양입니다. 밖에서 리드미컬하게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와 텁텁한 막걸리 맛이 어우러져 선경이 따로 없습니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이란 책에 보면행복이란작은 집과 텃밭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이대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더 이상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만 하겠지요. 다른 데에 한 눈을 파는 순간 분명 내 처지는 초라해 보일 것이고, 나는 다시 비교와 소유의 갈증에 허덕일 것입니다. 밭에서 금방 따가지고 온 것입니다. 완두콩, 꽈리고추, 고추, 피망, 가지,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참살이의꿈 2005.07.03

밤나무꽃 향기

이곳은 밤나무가 무척 많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산의 중턱까지는 나무의 주종이 밤나무입니다. 그리고 마을 집들 사이에도 오래된 밤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당산나무라 칭할 수 있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고목도 여기는 밤나무입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밤나무골이라 불려야 제격일 것 같습니다. 가을이면 밤을 주으러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듭니다. 잠깐만 산에 올라도 한 베낭 가득 밤을 주어 내려올 수 있습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별로 돌아다니지 않고도 가득 선물을 받습니다. 지금은 마을이 밤나무꽃 향기로 덮여 있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밤나무꽃 향기는 참 특이합니다. 묵직하고 야릇한이 향기가 온 마을을 내리누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밤나무꽃 향기에 취해서 몽롱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

참살이의꿈 2005.06.29

항복

풀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두 손을 들었습니다. 터를 장만하고 작물을 심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농약은 사용하지 말자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제초제는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통제를 최소로 하면서 작물을 가꿔보고도 싶었지만 시골 마을 한가운데서 그렇게 했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일 테니 그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깔끔한 것이 보기에는 좋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시골에서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합니다. 화단만 하더라도 적당히 풀과 어우러져서 꽃들이 피어있는 쪽이 저에게는 훨씬 더 보기에 편합니다. 이것도 풀이 적당히 나 있을 때 얘기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방심하면 풀은 온 터를 점령해 버립니다. ..

참살이의꿈 2005.06.22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터에 심은 감자에 꽃이 피었습니다. 세 고랑에다 주로 흰감자를 심고, 한 쪽에 자주감자를 심었는데 거름기가 별로 없는 땅인데도 잘 자라주더니 예쁘게 꽃이 피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주감자가 익숙치 않은지 크는 모습을 보더니 작약이 아니냐며 묻습니다. 자주감자는 꽃이 자주색깔이고, 줄기도 자주색깔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 보니 줄기가 붉은 것만 아니라 잎도 작약을 닮기는 했습니다. 권태응님의 '감자꽃'이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감자 정말로 자주감자는 꽃도 줄기도 자주색깔입니다. 아직 캐보지는 않았지만 땅 속에서 크고 있는 감자도 자주색깔일 것입니다. 감자를 실제 기르며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그런 단순한..

참살이의꿈 2005.06.17

나무에 약을 치다

분무기를 매고 처음으로 농약을 뿌렸습니다. 약은 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경계수로 심어놓은 회양목이 고사 직전 상태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징그럽게 생긴 벌레는 떼어낼 수가 있다지만 새까맣게 붙어있는 알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수 십 그루가 되는 회양목을 베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회양목이 이렇게 벌레가 많이 끼는 나무인 줄 알았다면 심지 않았을 텐데 하고 지금은 후회를 합니다. 이왕 버린 몸이 되었다고 나머지 나무들에도 농약을 쳤습니다. 나무 중에서는 벚나무가 그 다음으로 벌레에 취약한 것 같습니다. 작년에 벚나무 한 그루에 연초록의 큼직한 벌레들이 달라붙어 나뭇잎을 갉아먹기에 모두 잡아주었더니 그 뒤로는 괜찮았습니다. 나무를 심고 길러보니 나무마다 성향이나 기질이 다 다름을 알 수 있..

참살이의꿈 2005.05.23

작물 심기를 마치다

어제로 텃밭에 작물 심기를 대락 끝냈습니다. 그동안 한 달여에 걸쳐 심은 작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옥수수 300포기 - 수확 시기를 다르게 하기 위하여 두 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심음(4/17, 5/1, 5/.15). 빨간 씨앗 옥수수와 강원도 옥수수 두 종류. 감자 100포기 - 강원도에서구해온 감자씨를 심음(4/17).현재 잘 자라고 있음. 콩 160포기 - 강낭콩, 노란콩, 검정콩, 완두콩, 서리태 등 구할 수 있는 콩은 다 심어 봄4/24-5/15). 덩굴을 타고 올라가는 완두콩에 기대가 큼. 고구마 60포기 - 집에서 낸 고구마 싹을 심었으나(5/1) 절반이 말라 죽음. 이번 주말에 모종을 사서 다시 심을 예정임. 호박 12포기 - 작년에 비해서 수량이 줄어듬. 4/17에 심었는데 이제 떡잎..

참살이의꿈 2005.05.16

새싹

콩, 고구마, 토마토, 그리고 다시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이곳 분들은 고구마를 꽂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감자도 놓는다고 하구요. 보통 우리는 나무고 작물이고 전부 심는다고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종류에 따라 표현이 다른 게 재미있습니다. 사실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 본 사람이라면 '감자를 놓는다' 그리고 '고구마를 꽂는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고맙고도 재미있습니다. 산은 벌써 신록의 색깔을 입기 시작했지만, 밭에는 이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심었던 옥수수는 5 cm 정도 키가 자랐고, 감자싹도 덮여있던 흙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옥수수는 얼마나 잘 자라는지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릅니다. 지금의..

참살이의꿈 2005.05.02

감자를 심다

밭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옥수수는 몇 해째 심어 왔지만 감자는 처음입니다. 동생이 강원도 씨감자를 구해 주었고, 전주에서도 붉은 감자를 줘서 두 종류를네골에 심었습니다. 옥수수도 네 골 심었습니다. 경운기로 골을 만드는 것을 로타리를 친다고 하지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괭이로 골을 만들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보시고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경운기를 몰고 와서 이렇게 훤하게 일을 해 주셨습니다. 기계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하루 종일 할 일을 30분 만에 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하얀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감자 눈을 따내서 그걸 흙에다 심는 작업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흙을 만지는 자체가 즐거운 일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생명을 기르는 의미가 곁..

참살이의꿈 2005.04.18

행복한 나무 심기

나무를 심는 일은 행복합니다. 일년생 작물을 심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과 보람이 거기에는 있습니다. 십 년 앞을 내다보고 세운 계획을 십년지계(十年之計)라고 하는데 이는 곧 나무를 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렇듯 나무심기는 당장의 이익이 아닌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일입니다. 꿈을 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은 멀리를 내다보는 마음이고, 눈 앞의 이(利)를 탐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봄을 맞아 터에다 나무를 심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매년 조금씩 심어나가자고 작정한 대로 올해도 읍내의 나무 시장에 가서 눈에 드는 것들을 사왔습니다. 땅을 파니 오랜만에 맡는 흙의 향기가 좋습니다. 부드러운 촉감도 새롭습니다. 봄비를 맞아가며 이번에 심은 나무는..

참살이의꿈 2005.04.11

사인

오랜만에 터에 다녀왔습니다. 겨울이면 발걸음이 뜸해지는데 올해도 수도관이 어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보온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지난 1월의 추위에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펌프가 마당에 노출되어 있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자위를 합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정이 깊다면 자꾸만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오랜만에 만난다면 반가움 더욱 클 것이고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아무리 정이 깊은 사이라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부딪치며 쌓이는 고운 정 미운 정이야말로 단단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기본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덫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오랜만에 찾아..

참살이의꿈 2005.02.18

가을 들녘

새벽에 무서리가 내리다. 농사를 거두는 손길이 더 바빠진다. 겉으로 보이는 농촌의 가을 들녘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보인다. 자가용을 타고일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눈요기 감으로 좋은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리라. 올해도 양으로는 풍년이건만 그러나 누구의 얼굴에서도 풍년의 함박웃음은 보이지 않는다. '농사 잘 되었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다. 분명 돌아오는 대답은 '풍년이면 뭐하게?'하는 식의 자조적인 반응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의 환한 미소가 있었다. 무엇이 농촌을 이토록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농민에게도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상대적 빈곤감인가? 이 사회 어디에서나 제 것과 제 몫 챙기기에 미쳐버렸는데 농민들도 마찬가지인가? 추수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들..

참살이의꿈 2004.10.03

늙은 호박은 아름답다

올 봄에 앞 밭에다가 호박 10여 포기를 심었다. 호박을 얻는 목적보다는 긴 줄기를 뻗어서 맨 땅을 덮어달라고,그래서 풀이 좀 덜 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심은 것이었다. 거름과 비료를 한두 번 정도 준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대로 잘 자라주었다. 사람들이지나가면서 호박 참 잘 되었다고 하는 칭찬도 들었다. 올해 어떤 집은 호박이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올해 심은 작물 중에서그런대로 만족하는 것이 이 호박이다. 그래서 호박잎도 따서 쪄먹고, 애호박도 눈에 띄는대로 따다가 맛있게 먹고 도시의 이웃에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때가 지나서 못 딴 호박들은 군데 군데 늙은 호박으로 되어 누워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편안하고 평화롭다. 가을의 풍요함이 저 누런 호박을 통해..

참살이의꿈 2004.09.18

200분의 1

올 봄에 목화씨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 한 웅큼 정도 되었는데 까만 씨에는 하얀 솜털이 붙어있었다. 그 보드라운 촉감이 옛날 고향집 뒤의 목화밭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목화를 만날 수 있겠구나 하며 꿈과 기대를 모아 밭에다 씨를 뿌렸다. 이웃 분들도 목화씨를 심었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워했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목화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는 것을 그때 확인했다. 길이가 20m 정도 되는 고랑 세 개에다가 한 구멍에 두세 개씩 심었으니까 땅으로 들어간 씨앗만도 200개는 넘을 것 같다. 그러나 땅이 척박해서였는지 근 한 달이 지나서야 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싹이 나온 목화는 캐내어서 좀더 거름진 땅으로 옮..

참살이의꿈 2004.09.12

배추를 심다

텃밭에 배추를 심었다. 이미 시들해진 오이와 토마토를 캐내고 거름을 약간 더 넣은 다음에 모종을 심었다. 읍내에서 배추 모종 한 판을 샀는데 120여 포기가 들어있고, 또 옆집에서 주는 모종까지 더해졌으니 약 150포기는 되는 것 같다. 우리 한 집 먹을거리로는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잘 되면 도시의 주변 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을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껏 작물을 가꾼 경험으로 볼 때 맛있는 배추로 자라줄 것으로는기대를 하지 않는다. 우선 시간적으로 정성이 모자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가서 물 주고 보살피는 것으로는 식물도 사랑 결핍증에 걸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일을 하는데 불현듯 작년의 일이 떠오른다. 작년에는 비가 오는 속에서 낙담한 가운데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배추를 심었다. 아마도 그날 찾..

참살이의꿈 2004.09.05

어느 날의 일기

두 차례 소나기가 지나갔다. 이불과 옷들을 잔뜩 널어놓고 외출을 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뿔싸, 큰 일 났구나.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누군가가 곱게 개어서 처마 아래에 모아 놓았다. 천둥이 치기 시작하니까이웃 분이 미리 챙겨놓은 것이 틀림없다. 옆집이리라 짐작하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니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구인가?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할텐데..... 저녁에 내린 소나기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퍼붓는지 도랑에는 순간에 불어난 물이 급류를 이루고 마당에는 흙이 패이면서 물고랑이 생겼다. 물길 정리를 하러 우의를 입고 밖에 나갔지만 이내 온 몸이 젖는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물이다. 집 뒤의 공사한 ..

참살이의꿈 2004.08.09

마가리의 밤

산속의 밤은 깊어간다. 드문드문 보이던 농가의 불빛도 밤이 깊어가면서 대부분 꺼지고 인공적인 소리와 빛은 거의 다 사라진다. 다만 띄엄띄엄 있는 동네 보안등만이 여기가 사람 사는 마을임을 지켜내려는 듯 외롭게 빛을 뿜고 있다. 이 시간이 되면 완전한 어둠과 침묵이 동네를 감싼다. 도시의 밤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밤의 모습은 일견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침묵의 밤은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다정했던 친구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때는 촛불이 어울린다. 정교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전등이 필요하지 않다. 여름밤에 촛불 아래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 창문에 어린 흐릿한 그림자는 너무나 정겹다. 창문을 열고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잔잔한 풀벌레..

참살이의꿈 2004.08.03

잔디 깎기

지난 여름과 올 봄 두 번에 걸쳐 잔디를 심었다. 대부분의 작업은 혼자의 힘으로 하지만 잔디를 심을 때는 가족이 도와 주어서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내가 삽으로 잔디를자르면 아이들이 나르고, 아내가 심고하는 식으로 일을 분담하며 한 것이다. 그 여파로 다리가 약한 아내가 잔디를 심은 뒤에 너무 힘주어 밟은 관계로 몇 달간 고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도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너무 힘이 들었다고 지금도 불평을 한다. 작년에 그렇게 공들여 심은 잔디였는데 그 뒤로는 전혀 돌보지 않아서 크는둥 마는둥 하더니 금년에 들어서는 비료도 주고 물도 주기적으로 뿌려 주었더니 쑥쑥 잘 자라 주었다. 길이가 20cm도 넘게 자란 것이다. 그러니 이미 깎아주어야 할 시기가 훨씬 지나 버렸는데 이제야 시간이 나서 며칠 ..

참살이의꿈 2004.07.24

제초제는 싫어요

여름이 되니 풀이 엄청나게 빨리 자란다. 보통 잡초라고 부르는 것인데 터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그다지 많은 종류는 아니고 대략 예닐곱 종류쯤 되는 것 같다. 그 중에서 이름을 아는 것은 질경이와 비름, 두 종류뿐이다. 아마도 예쁜 꽃을 피우는 화초였다면 어떻게든 그 이름을 알아보았을 것인데 아무 쓸모없다고 여기는 잡초 신세라서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으니 그 풀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서부터는 터에 내려가서 하는 주된 일이 풀을 뽑는 것이다. 그것도 집 주변의 풀을 뽑기만도 벅차다. 좀 떨어진 빈터에는 온갖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신나게 자라고 있다. 키가 큰 것은 가끔씩 뽑아주지만 바닥에 기면서 자라는 것들은 손을 댈 엄두도 못 낸다. 저 놈들이 게으른 주인을 만나 이만큼이나 생..

참살이의꿈 2004.07.14

텃밭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있다. 읍내에서 사오거나 또는 이웃에서 준 모종이나 씨를 심은 것인데 조금씩 심다보니 숫자는 많지 않지만 종류는 꽤 된다. 가지, 오이, 고추, 상추, 토마토, 방울토마토, 옥수수, 호박, 머위, 딸기, 쑥갓, 더덕, 열무, 들깨, 미나리 등등.... 그런데 텃밭 가꾸기는 아내의 몫이다. 서로가 할 일을 일부러 나눈 것은 아니고, 나는 주로 집 주변 정리 같은 힘쓰는 일을 맡다보니 작물 재배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관심도 멀어지고 밭에 무엇이 열렸다고 감탄하며 외치는 아내의 소리를 듣고서야 쳐다보게 된다. 아내는 심고 가꾸고, 그래서 채소가 쑥쑥 자라나 열매가 맺히고 하는 걸 신기하다며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 부지런함 덕분에 터에 내려가면 싱싱한 채소를 맛나게 먹는..

참살이의꿈 2004.06.30

밤골 뽕나무

터에 이웃한 밭에는 큰 뽕나무가 있다. 어릴 때 밭에서 가지만 무성하고 높이래야 고작 사람 키의 한두 배정도 되는 뽕나무만 기억에 나는 나로서는고목이 된이 뽕나무가 무척 신기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이걸 뽕나무로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뽕나무라는 걸 알려주면 모두들 놀란다. 뽕나무도 이렇게 클 수 있느냐고 되묻곤 한다. 지금은 누에를 키우는 농가가 없지만 옛날에 뽕나무는 농민들과 가장 가까운 나무였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집집마다 누에를 쳤다. 아마도 누에치기는 농가 수입의 중요한 몫을 담당했었던 것 같다. 어두침침하고 후덥지근한 느낌, 그리고 온 몸이 간질거리는 듯한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나는 누에방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새까만 누에알에서 시작하여 뽕나무를 ..

천년의나무 2004.06.24

배수로 작업

터의 뒤쪽에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성가시게 한다. 시멘트블록 50개를 사다가 한 줄로 쌓았다. 시멘트블록을 나르랴, 줄 맞추어 쌓으랴, 안 그래도 서툰 노동인데 혼자서 하는 작업이라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줄도 삐툴삐툴, 높낮이도 들쭉날쭉, 다른 사람이 본다면 허허 하며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하다. 사람을 사서 할려니 요사이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내 땀의 흔적을 보게 되는 보람일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이 고단하기는 하지만 땀이 정신적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한다. 육체적 노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복잡한 세상사는 잊어버리게 된다. 내 일을 하면서 명상의 효과까지 덤으로 받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러..

참살이의꿈 2004.05.31

목화싹이 나오다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 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목화밭 목화밭..... 그 옛날 목화밭 목화밭........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이 목화씨를 구해 주셔서 세 고랑에 씨를 뿌린 것이 두 주전이었는데 드디어 싹이 돋아났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흙을 뚫고 나온 목화의 싹이다.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목화밭이다. 하사와 병장이 노래한 목화밭을 이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때 우리 집 뒤에는 목화밭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을이면 하얀 솜 가득한 목화밭 풍경이며, 그리고 목화의 열매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따서 먹으면 달콤했던 맛의 느낌도 떠오른다. 또 목화 솜을 수확해서 마당에서 할머니가 흰 실을 뽑아내던 광경도 ..

참살이의꿈 200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