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29

자전거 / 이원수

달 밝은 저녁에 학교 마당에오빠가 자전거를 배웁니다. 비뚤비뚤 서투른 오빠 자전거뒤를 잡고 밀어주면 곧잘 가지요. 중학교 못 가는 우리 오빠는 어제부터 남의 집 점원이 되어 쏜살같이 심부름 다닌다고달밤에 자전거를 배운답니다. - 자전거 / 이원수  자주 나가는 야탑역 광장 한편에 '이동노동자 간이쉼터'가 있다. 컨테이너로 된 작은 건물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름 그대로 배달 기사나 대리운전기사를 위한 짧은 쉼터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작지만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발표되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1960대 중반에도 우리 반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

시읽는기쁨 2024.12.24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디 아워스, 내 사랑, 케빈에 대하여, 어느 가족 - 뜨거웠던 올여름에 본 영화들이다. 밖은 펄펄 끓는데 거실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1. 디 아워스  192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1950년대와 2000년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그려진다.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지, 여성으로서의 고민과 불안 등 정체성을 묻는 영화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속앓이를 잘 표현했다. 제도적 관습과 틀 안에서 해방을 꿈꾸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일부분이나마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2. 내 사랑  캐나다 화가인 모드 루이스(Maud Lewis, 1903~1970)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모드 루이스를 처음 알게 되었..

읽고본느낌 2024.09.07

세 여자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소설이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세 여자(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남성 중심의 운동사에만 익숙한 우리 눈에 이런 여성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슷한 또래의 세 여자는 20대 초반에 만나 운명적으로 얽힌다. 셋 중에서도 제일 주도적인 인물은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중국 상하이 유학중에 박헌영, 주세죽, 임원근, 김단야 등과 만나 사회주의연구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한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일본, 중국, 미국,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인텔리였다. 또한 임원근을 비롯해 네 번이나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활동하던  20..

읽고본느낌 2024.08.03

바늘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읽은 천운영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작가의 데뷔작인 '바늘'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20여 년 전에 쓰인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은 특이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여성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인물이어서 충격을 받는다. 소설에 나오는 그들은 못 생긴데다 폭력적인 야수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여성은 예쁘고 우아하다는 기존의 사고 틀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가부장제하에서 구축된 모성이나 여성성의 허구를 작가는 깨부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전부 육식을 탐한다. 이런 동물적인 피의 욕구는 외부세계에 대한그들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행복고물상'에 나오는 여자는 남편을 상습적으로 매질한다. "아내는 야생의 초원을 가졌다..

읽고본느낌 2024.07.21

델마와 루이스

1991년에 나왔으니 어느덧 30년이 넘은 영화다. 감독은 리드리 스콧이고 델마 역은 지나 데이비스, 루이스 역은 수잔 서랜드가 맡았다. 브래드 피트가 제이드 역으로 짧게 나오는데 배우로 데뷔한 초창기의 브래드 피트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역이 찌질한데다 연기가 어설퍼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를 이제야 찾아봤다. 역시 라스트의 충격이 큰 영화였다. 권위적인 남편을 둔 델마와 식당 웨이트리스인 루이스는 일상을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해방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강간을 당하는 델마를 구해주려다 루이스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둘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멕시코로 넘어가려던 계획도 틀어지고 둘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최후의 선택을 한다..

읽고본느낌 2024.06.09

밀크맨

힘들게 읽은 책이다. 책 자체가 가독성이 떨어지는 데다 눈병까지 나서 읽는데 애를 먹었다. 눈이 아파서 몇 페이지를 못 넘기고 책을 자주 덮었다. 그래도 2018년 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화제작이라고 해서 속독이긴 하지만 끝까지 읽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애나 번스(Anna Burns)가 쓴 은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가 무대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신구교의 종교 갈등에 반정부 투쟁이 겹쳐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비정상적인 환경에 놓여 있었다. 소설은 18살의 여주인공인 '나'가 이런 관습과 규범의 사슬 속에서 스토킹까지 당하면서 겪는 내면의 고통을 줄곧 일인칭 화법으로 풀어낸다. 소설에는 사람들 이름이나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나'의 남자친구는 '어쩌면-남자친구'이고 '아무개 아들'하는 식이다. 지역 이름..

읽고본느낌 2024.05.07

반에 반의 반

가끔 여자가 되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여자의 속성이 부러워서라기보다 여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다. 여자가 바라보는 남성, 여자가 바라보는 가족, 여자가 바라보는 생명 등은 남자의 관점과는 다를 것 같다. 우리는 이성(異性)과 섞여 살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상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천운영 작가의 소설 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작의 형식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사연들을 담고 있다. 딸조차도 어머니를 오해하는데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남성은 체화한 인습과 관념의 색안경을 끼고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읽고본느낌 2024.04.22

임윤지당 평전

임윤지당(任尹摯堂, 1721~1793)은 조선에서 드문 여성 성리학자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 연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존여비의 유교 가부장사회에서 성리학을 통해 인격 완성을 추구한 임윤지당은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그가 다짐하듯 강조한 말이 있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부여받은 본성은 남녀간에 다름이 없다." 임윤지당은 유복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깨쳤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가족들은 학문을 닦도록 도와주었고, 특히 오빠인 임성주는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다.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며 임성주는 그의 재질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그가 여사(女士)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열정이 있었기..

읽고본느낌 2024.01.09

사임당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우리가 교육받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의 사임당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요로 순종과 희생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세뇌 과정의 일부였다. 가부장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열녀효부(烈女孝婦)'라는 말로 여성성을 억압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있기 마련이다. 당대나 직후에 사임당은 '여성화가 신씨'로 불렸다.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송시열에 의해 '율곡의 어머니'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율곡을 대성현으로 모시게 되니 자연스레 율곡을 기른 어머니의 모성성을 숭앙..

읽고본느낌 2023.12.23

더 홈즈맨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우연히 본 영화였는데 세 편 모두 인상 깊고 여운이 남았다. 이러기는 쉽지 않은데 횡재한 느낌이었다. 그중 한 편이 '더 홈즈맨(The Homesman)'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배경인데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서부영화 장르에 들어갈 테지만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싸움이 소재인 전통적인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 한다. 고통받는 약자를 향하는 감독의 시선이 따스하다. 무대는 서부 개척의 최전선인 네브라스카로 거친 환경과 힘든 노동,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삶은 피폐하다. 그중 세 여자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미혼이었던 커디에 의해 그녀들의 고향인 아이오와로 옮겨지게 된다. 커디는 짐마차에 세 여자를 태우고 400마일의..

읽고본느낌 2022.03.13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傳記)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데 음양으로 헌신했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아니라 도리어 우울하고 음습한 그늘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이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 둘은 1903년에 결혼했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뒤에 고백했다. 실제로 수학 분야에서는 아인슈타인보다 밀레바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밀레바는 훌륭한 품성에다 지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었..

읽고본느낌 2022.01.10

마리 퀴리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그것도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각각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남편인 피에르 퀴리도 노벨상을 받았고, 그녀의 딸인 이렌과 사위들도 노벨상을 받았다. 2대에 걸쳐 무려 다섯 명의, 여섯 개의 메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결과다. '마리 퀴리'(원제는 Radioactive)는 위대한 과학자면서 선구적인 여성이었던 마리 퀴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1934년에 퀴리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퀴리는 남성 중심의 당시 과학계에서 아웃사이더였다. 그녀는 과학 연구만이 아니라 여성을 무시하고 진입을 막는 장벽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읽고본느낌 2021.11.16

로마

담백한 흑백 화면에 클레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배경은 1970년대 초반 멕시코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로마가 아니라 멕시코시티에 있는 어느 지역명이다. 클레오는 원주민으로 멕시코 상류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다. 넓은 집의 살림을 하고 네 아이 치다꺼리 하느라 종일 일에 파묻혀 산다. 이 영화는 두 계급 사이의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을 냉정하면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넓게는 인간의 외로움이나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도 있겠다. 부자와 빈자, 서양인과 원주민, 남과 여 등의 대비를 통해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계급'이라는 단어가 금기어가 된 때가 있었다. 씁쓰레한 에피소드가..

읽고본느낌 2021.01.04

82년생 김지영

재작년에 화제를 모은 책인데 이제야 읽어 본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로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픽션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이 성장하며 겪는 고통과 심리 상태를 남성이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하대, 심하면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태도 같은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여성은 갖고 있는 것 같다. 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과 여론을 환기한 역할이 크다. 내 딸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82년생이다. 딸 둘만 뒀기에 페미니스트라고 할..

읽고본느낌 2019.08.04

젊은 여성에게 주는 충고

노파심이겠지만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에게 충고 한마디 하련다. 청춘 남녀들이 달콤한 연애 감정에 속아 짝을 잘못 선택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신중해도 부족한 것이 짝을 고르는 일이다.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평생의 반려자를 고를 때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첫째, 너무 잘해 주는 남자는 일단 의심하라. 여자를 얻고 싶을 때 가면을 쓰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남자가 있다. 이런 남자는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대부분 권위적으로 돌변한다. 그 뒤부터는 고생과 후회의 시작이다. 대개 순진한 여성이 이 덫에 걸린다. 수컷의 친절..

길위의단상 2019.06.15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열고, 외교관 남편을 만나 세계 일주를 다니며 호화롭게 살다가, 파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에 빠져 이혼당하고 몰락한 여자, 겉으로 보는 나혜석의 삶이다. 나혜석의 삶은 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에서는 나혜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그녀는 3.1 독립운동 시위 관련자로 수감되기도 했고, 음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조선 여성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야학을 설립했고, 가부장 문화에 도전한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에는 소설을 비롯한 나혜석의 작품이 실려 있고, 간단한 해설이 붙어 있다. 나혜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정..

읽고본느낌 2018.10.10

바그다드 카페

황량한 모하비 사막 가운데 문제투성이인 '바그다드 카페'가 있다. 여주인인 브렌다의 삶은 고단하고 거칠다. 자식은 천방지축이고, 게으름뱅이 남편과는 매일 싸우는 게 일이다. 총으로 협박당한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과 여행을 하던 독일 여성 야스민은 말다툼 후 트렁크 하나만 들고 길에 남았다. 여관을 겸하고 있는 바그다드 카페를 찾으며 브렌다와 만난다.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때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야스민은 카페를 청소하며 분위기를 바꿔 나간다. 물과 기름 같던 사람들 사이에 웃음이 되살아난다.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야스민의 따스한 인간애가 카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화시킨다. 마치 떠나간 남편에게 화풀이하듯이(?). 그런 야스민이 남편과는 왜 소통이 안 되었는지 살짝 궁금해진다. ..

읽고본느낌 2018.10.05

Me Too

연말이 되어 올해의 키워드를 뽑는다면 '미투'(Me Too)가 단연 으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올 초에 서지현 검사의 고백으로 시작된 미투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숨어 지내던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작년 10월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사건의 폭로를 계기로 연예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수십 명의 여성 배우들에게 성추행과 성폭력을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세상이 시끄럽긴 하지만 미투 운동은 인류 의식이 한 단계 진보하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성이 아니라 권력이다. 권력을 이용한 갑질이 여성에게 향할 때 성희롱이나 성폭력으로 나타난다. 미투 운동은 4년 ..

길위의단상 2018.03.04

아가씨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를 본다. 내 나잇대에서는 자주 보는 편에 속한다. 아예 영화에 관심이 없는 친구가 많다. 올해 본 영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다. 한국 영화도 이렇게 발전했구나, 라고 가슴 뿌듯했다. 우선 영상미가 세련되고 아름답다. 스토리 전개도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다. 배우의 연기보다는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영화다. 돈과 성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망과 파멸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냈다. 레즈비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인간 해방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가씨는 이모부에게, 하녀는 가짜 백작에게 철저히 구속된 상태였다. 욕망과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남자로 대변되는 기득권 체제의 부속품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둘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읽고본느낌 2016.12.30

금성인의 지극함

첫째 손주는 여자지만, 둘째 손주는 남자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둘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다. 여자와 남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째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길가의 돌멩이와 막대기에 관심을 보였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잡고 던지고 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나뭇가지만 잡으면 칼싸움을 하려고 덤벼든다. 돌멩이도 원시 시대의 무기였다. 수컷의 피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 유전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가 왜 돌멩이와 막대기에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면에 첫째는 이런 데는 아예 흥미가 없다. 성인이 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

길위의단상 2016.12.23

서프러제트

100년 전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인 '모드 와츠'는 남편과 함께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당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여성은 아직 참정권도 얻지 못했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였다. 모드는 우연히 거리에서 서프러제트의 시위 장면을 보고 차별적인 현실에 눈을 뜬다. 서프러제트인 동료 노동자의 권유로 집회에 참석하면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에게 딸이 있다면 그 딸은 어떤 세상을 살까요?"라고 남편에게 하는 질문에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모드는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폭력 시위에 나선다. 감옥에도 가고 단식투쟁도 한다. 그 결과 집에서도 쫓겨..

읽고본느낌 2016.09.10

수박 / 이성복

여름날 오후 뜨거운 언덕바지를 타고 아파트로 가는 길엔 어른이나 아이나 제 머리통보다 큰 수박 하나씩 비닐끈에 묶어들고 땀 흘리며, 땀 닦으며 정신없이 기어오른다 그들이 오르막길에서 허우적거릴 땐 손에 달린 수박이 떼구르르 구를 것도 같고, 굴러내려 쇠뭉치로 만든 공처럼 땅속 깊이 묻혀버릴 것도 같지만 무사히, 무사히 수박은 개구멍 같은 아파트 현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럼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끈에 묶인 수박을 풀고 간단히 씻은 다음, 검은 등에 흰 배의 고등어 같은 부엌칼로 띵띵 부은 수박의 배를 가르면, 끈적거리는 단물을 흘리며 벌겋게 익은 속이 쩍, 갈라 떨어지고 쥐똥 같은 검은 알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저마다 스텐 숟가락을 손에 쥔 아버지와 할머니, 큰아이와 작은놈, 머리를 뒤로 묶은 딸아..

시읽는기쁨 2011.07.16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한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시읽는기쁨 2011.06.07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화사한 라일락처럼 피어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싱싱한 웃음 몇 개를 준비해 두는 일 비가 샌 내 몸을 감쪽같이 도배하는 일 안개에서 빠져 나와 샤워하고 아, 분주해라 곰팡이 슨 그리움 한쪽도 시치미 떼며 감춰 두는 일 그가 묻더라도 내 가슴에 키운 돌미나리 몇 뿌리는 비상금처럼 숨겨두자 그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내 몸이 성냥갑이란 걸 감추고 있는 불이란 것도 절대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그가 내 곁에 포근한 산 그림자처럼 쓰러져 누웠을 때 잊었던 봄! 물푸레나무 푸른 잎사귀로 퍼덕퍼덕 되살아날까? 그런데, 그런데 그가 참았던 봄을 한꺼번에 터트려 오면 어떡하지? 난. -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후생에 다시 산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세상을, 사랑을..

시읽는기쁨 2011.06.01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치마 / 문정희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과 여, 그다사다난함의 배..

시읽는기쁨 2009.07.15

생명의 본능

‘21세기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라는 책은 새로운 여성의 세기가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책 내용 중에 동물세계에서는 암컷의 바람기가 보편적인 현상임을 보여주는 예들이 나온다. 새들 새끼의 유전자를 검사했더니 반 이상이 자신의 짝이 아닌 다른 수컷과의 관계로 태어난 것이 밝혀졌다. 일부일처제를 지킨다고 알려진 원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현상은 진화생물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다양하고 질 좋은 유전자를 확보하는 것이 생명의 목적일진대 평생을 한 파트너와 관계한다는 것이 도리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훨씬 더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할 확률이 높다. 인간세상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바람기가 쉽게 드러나는 것에 비해 여자의 바람기는 은폐되어 있고 또..

읽고본느낌 2009.06.29

안토니아스 라인

좋은 영화를 한 편 보았다. 10여년 만에 재개봉한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이다. 안토니아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연대기로 네델란드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이 영화는 여러 시각에서 볼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여성성에 의한 자유와 해방의선언으로 읽혀졌다. 종교나 지성이나 가정의 틀보다 우선되는 것은 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이다. 그런 점에서는 자연주의를 찬양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성성과 자연주의는 상통하는 바가 많다.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여러 장면들이 있다. 신부가 위선적인 강론을 할 때 당당히 퇴장하는 안토니아, 강의중인 교수를 향해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뛰쳐나가는 테레사의 행동 등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항거라고..

읽고본느낌 2009.05.11

님은 먼 곳에

씨너스 이수에서 영화 '님은 먼 곳에'를 보았다. 경상도 종갓집 며느리인 순이(수애)는 손자를 바라는 시어머니 등살에 매달 군대 간 남편을 면회 간다. 그러나 애인이 따로 있는 남편은 순이를 무시하고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남편은 연락도 없이 베트남으로 떠나고, 순이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 대신 베트남으로 가야하는 처지가 된다. 나중에는 기필코 남편을 찾겠다는 오기가 생겨군 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베트남에 상륙한다. '써니'라는 예명을 가진 가수가 되어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전쟁터 한가운데서 남편을 만나는데...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여성성(女性性)을 읽었다. 영화는 ..

읽고본느낌 2008.07.26

화성인과 금성인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었을 때,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거나 소홀히 하고 지냈던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책의 내용 중에서 지금 기억나는 것은 화성인은 문제나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자신만의 동굴로 숨어든다는 설명이었다. 반면에 금성인은 그런 화성인의 태도를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는 쪽으로 해석해서 자꾸만 동굴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금성인은 수다나 남에게 하소연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가 남녀간에 오해와 갈등의 씨앗이 된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동굴 속으로 숨으려는 화성인의 심리에 대해 정확히 지적한 책 내용에 무척 공감을 했다. 그 당시 동굴로의 도피는 나에게 심..

읽고본느낌 2008.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