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의사진 35

한 장의 사진(35)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철없었던 유소년 시절을 제외하고 전체를  조망해 볼 때 의심 없이 딱 짚히는 한 시기가 있다. 바로 1990년대 초반으로 내 나이 40대에 들어선 때였다. 그때는 가정이나 직장, 개인적인 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제일 빛나는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일차 목표가 되는데 마침 그때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나도 그럴듯한 '마이 하우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강 이남의 인기 지역이었다. 그전까지 10평대에 살다가 30평대로 옮기니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었으니 귀엽기만 할 뿐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힘든 결혼 초기를 보낸 아내도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아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당시 60대였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

길위의단상 2024.06.21

한 장의 사진(34)

'洛山寺記念 / 67. 7. 23' 올해가 2022년이니 55년 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낙산해수욕장의 의상대 앞이다. 앞줄 맨 왼쪽의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나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면사무소 직원들과 이장분들이 피서 여행을 동해안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나를 동행시켰다. 나는 그때 중3이었고 막 여름방학에 들어간 참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지만 머리를 식힐 겸 바닷바람을 쐬고 오자고 아버지가 권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실소가 일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어떻게 어른들 가는 여행에 낄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 여행에 자식을 데리고 간 아버지도 그렇지만 졸래졸래 따라간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중3이면 가족끼리 여행을 하..

길위의단상 2022.08.24

한 장의 사진(33)

대학생 때 사진이 별로 없다. 앨범에서 스캔해 둔 파일이 열 장이 채 안 된다. 그마저 앨범은 없어지고 해상도 낮은 파일로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대학생 때 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다. 저 때는 1972년, 대학 2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서 있는 친구와는 대학 4년 동안 거의 붙어 있다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둘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 왔다갔다 했지만 친구가 우리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더 높았다. 입은 옷을 봤을 때 늦겨울쯤 될까, 장소는 면목동 우리집이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는 면목동에 단독주택을 하나 마련했다. 주택 사업을 하던 아버지 친구분이 지은 집이었다. 우리 다섯 형제는 저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10년 넘게 살았다. 내 20대와 함께 한..

길위의단상 2022.04.24

한 장의 사진(32)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분기점을 통과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험난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봉우리인지는 넘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지나온 길을 멀리서 조망하게 될 때 삶의 매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능선길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볼 때 지나온 산봉우리들의 모양과 높이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몇 차례 파고가 밀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30대 중반에 경험했던 디스크 수술이었다. 아마 1986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 불릴 만큼 - 그 시절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허리를 절개하고 칼로 디스크를 잘라내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던 때였다.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도..

길위의단상 2022.04.18

한 장의 사진(31)

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박용도 선생님은 면목중학교에서 만났다. 그때 면목중학교는 막 개설된 학교였는데 형님은 개설요원으로 미리 발령받아 새 학교가 문을 여는 준비를 맡았고, 나는 3월의 정규 발령으로 갔다. 개설 학교의 첫 해는 학생이 1학년밖에 없으니 선생이라야 30명 남짓이어서 가족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개설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오래가는 편이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다. 지금은 다들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면목중학교는 첫해에 신입생이 입학했지만 교사(校舍)가 완성되지 않아 청량중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가을이 되어서 장안동의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 면목동에 없는 면목중학교여서 면목이 없다고 우리는 농담을 했다. 형님은 체육을 전공했고 학교 업무에서도 중..

길위의단상 2022.04.06

한 장의 사진(30)

3월은 새 학년이 시작하는 때다. 학생이나 선생 모두 새로운 만남 앞에서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본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 생활을 하면서 일 년 중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시기가 나에게는 3월이었다. 아이들은 봄 방학을 마치고 3월에 개학을 하면 새 반이 편성되고 담임을 배정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누가 담임이 될지 제일 관심사일 것이다. 지금 손주를 봐도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좋겠다고 재잘대는 걸 본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3월 첫날 전체 조회가 열린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이 담임을 발표했다. 이 사진은 40여 년 전인 1979년 - 아니면 1980년일지도 - Y여중에 근무할 때 운동장에 전체 학생이 모인 가운..

길위의단상 2022.03.06

한 장의 사진(29)

돌이켜 보면 내가 예수에 미친(?) 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20대 때, 또 한 번은 50대 때였다. 50대 때는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고 서울 아파트를 처분해서 밤골 빈 터에 집을 짓고 세상과 격리되고자 했다. 그 여파로 예기치 못한 격랑에 휩쓸리면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지금의 나 또한 그 사건의 결과물이다. 20대 때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돌연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일이었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그만큼 강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때였다. 캠퍼스에서도 뜨거운 성령을 강조하는 열정적인 신앙 분위기가 지배했다. 물리 전공인 우리 과 30명 중에서도 목사가 3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나는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

길위의단상 2022.02.21

한 장의 사진(28)

귀향(歸鄕)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고, 귀성(歸省)은 '부모를 뵙기 위하여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이다. 귀성에는 '살필 성(省)'이 들어 있듯이 물리적인 거리 이동만 아니라 부모를 뵙는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을 찾는 행동에는 귀성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이 설날인데 귀성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성인이 된 뒤로 50년이 흘렀는데 설 명절은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추석은 몇 차례 못 내려간 적이 있지만, 설날 당일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는 일은 철칙처럼 지켰다. 그런데 올해부터 달라졌다. 이젠 교통 정체를 견디며 이동하기도 힘들고, 형제가 명절에 모인다 한들 서먹하니 따스한 귀성의 의미가 별로 없다. 얼마 전에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께 ..

길위의단상 2022.02.01

한 장의 사진(27)

40년 전쯤 여름방학 때 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담삼봉으로 캠핑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학교에도 교복 자율화 등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 정권은 교과목 외에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했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G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은 내가 만난 교장 중 가장 특이하고 개성이 있었다. 고시 출신으로 문교부에서 행정 관료로 지내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상관과 의견 충돌로 좌천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고집 세고 자기 소신이 강했다. 학교 점검차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참관도 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사나 귀찮고 긴장이 된다. 맨손 수업..

길위의단상 2021.07.21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한 장의 사진(25)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외손녀는 두 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자고 간다. 이번에 와서는 엄마 옛날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다. 두 딸이 시집을 갔지만 가족 앨범은 우리 집에 있다. 제 엄마와 같이 앨범을 펴놓고 엄마가 설명하는 얘기를 들으며 깔깔댄다. 그러더니 내 방에 와서 앨범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민다. 30년쯤 전에 찍은 것이다. 어린 손주가 보기에 제 엄마와 외할아버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엄마가 꼭 제 나이만 할 때 모습이다. 이때가 1987년이던가, 아니면 1988년이리라. 내 나이는 30대 중반, 품에 안긴 첫째는 예닐곱 되었으리라. 아마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 모습 같다. 그때는 방학이 되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정도 지냈다 왔다. 자가용이 없..

길위의단상 2018.12.06

한 장의 사진(24)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제대할 때는 누구나 한마디씩 한 말이 있었다. "제대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 군대 생활에 대한 혐오감이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군대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데 30년은 걸렸다. 반면에 '군대에 가야 사람 된다'는 말도 있다. 국민정신 교육장으로서 군대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의 말이다. 좋게 말하면 나라와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온몸으로 배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사람 된다'는 말이 권위적 체제와 이념에 대한 온순한 복종의 의미로 들린다. 외국에 나갔을 때 제일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이스라엘인이라는 얘기를 해외여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시끄럽고 안하무인이라는 것이다. 왜 하필 이스라엘인지 의아했는데 의무징병제와..

길위의단상 2017.12.07

한 장의 사진(23)

최근에 어느 육군 대장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있을 때 나도 1년 가까이 공관병 생활을 했다. 공관병이나 당번병은 점잖은 공식 용어이고, 군대에서는 '따까리'라고 불렀다. 자신을 하찮게 정의해 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자조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장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군 관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부인은 도시에 따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관급이 되면 사병이 나가서 뒷바라지를 한다. 우리 사무실은 장교 둘, 하사관 둘, 사병 세 명으로 구성되어 단출했다. 사병 중 한 명이 따까리로 나가면 남은 두 사람에게 업무가 과중..

길위의단상 2017.08.15

한 장의 사진(22)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월로 수학여행을 갔다. 1964년도였다.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바꿔타고는 영월에서 내렸다. 산골 촌놈들이라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차 안에서는 의자 쿠션이 신기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좋아라 했다. 첫날은 화력발전소를 견학하고 허름한 여관에 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인숙 수준도 안 되는 집이었다. 저녁을 먹고는 오락 시간에 단체 춤판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천정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 빼내느라 고생했다. 몇 명이 따라 나와서 도와주었다. 안에서는 유행가가 이어지는데 뒤뜰에서 쳐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 아름다워 눈 아픈 핑계 대며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둘째 날에는 장릉과 단종 유적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사진은 ..

길위의단상 2016.04.22

한 장의 사진(21)

중학생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열다섯 해를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부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만났을 뿐,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철없던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고마움을 몰랐다. 오히려 투정을 많이 부렸다. 내가 그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손주를 돌보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를 안다. 나만이 아니라 동생 넷도 전부 객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컸다.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백수를 하셨으니 장수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백 세를 넘기신 분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서 모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 드..

길위의단상 2015.09.06

한 장의 사진(20)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잊히지 않는 사진 한 장이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 탐사에 나섰던 197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40여 년쯤 전일 것이다. 위치로 볼 때 달 궤도를 도는 우주선에서 찍은 것 같다. 사진의 구도는 단순하다. 달 지평선이 화면을 1/2로 가르고 그 위에 지구가 떠 있다. 달은 회색이고 하늘은 새까만데 지구는 푸른색으로 반짝인다. 흰 구름이 있고, 대륙 모양도 보인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약간 뒤쪽에 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준 충격이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외계로 나가 지구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물론 지구가 어떻게 보일지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 사진을 통해 본 지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주의 보석과 같았다. 우리가 아는 한 이 넓은 우주에서 ..

길위의단상 2015.02.04

한 장의 사진(19)

1974년에 초등학교에서 한 주, 고등학교에서 세 주동안 교생 실습을 했다. 우리는 다른 대학과 달리 초등학교 실습도 나간 게 특이했다. 실제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초등학교 아이들과 같이 지낸 것이었다. 고작 엿새만 있었는데도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굳이 초등학교 경험을 시킨 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인지 느껴보라는 의미 같았다. 사대생 전부가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부속학교로만 실습을 나갔으니 한 학급에 열대여섯 명씩 배정되었다. 그러니 교생 실습이라기보다는 교육 현장 참관이라는 말이 옳았다. 실제 수업도 몇 번 하지 않았다. 담임을 대신하는 조종례도 돌아가며 하다 보니 고작 한두 번이었다. 얼렁뚱땅 보내도 아무 지장 없었다. 솔직히 교생 실습이라기보다는 놀러 다닌 기분이었다. 실습을 하..

길위의단상 2014.10.16

한 장의 사진(18)

인생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은 유년이 아닐까 싶다. 유년은 가족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때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남은 몇 개의 기억이 따스했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삭막한 인생살이에 지친 몸이 쉬어가는 오아시스가 바로 유년의 기억이다.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이었는데 시골 동네에는 잔치가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도 고모 등에 업혀서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시끌벅적했다. 그런..

길위의단상 2014.03.10

한 장의 사진(17)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J가 세상을 떴다. 10년 넘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안식에 들었다.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으나 한 번 찾아가 보지를 못했다. 부고를 접하니 그게 제일 미안하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재작년 어느 결혼식장에서였다. J는 성치 않은 몸으로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지방에서 올라왔었다. 피로연에서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도 부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J는 키가 작지만 당찬 성격이라 동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J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지금도 말한다. 산골 집에서 중학교까지 10km를 3년 내내 걸어 다니면서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과외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집이 가난해서 방학 때는 아이스케키 장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

길위의단상 2012.01.14

한 장의 사진(16)

무슨 팔자인지 법원을 자주 들락거린다. 생소했던 풍경도 익숙해지고 있다. 법원 구내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도 이젠 즐기는 편이다. 사람들의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도 여유 있게 살피게 되었다. 지나는 길에 가정법원이 있는데 심각한 얼굴의 부부들이 들고난다. 어제는 건물 귀퉁이에서 한 부부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빼내려 하고 있었고, 남자는 뺏기지 않으려고 밀고 당기는 중이었다. 옆을 지나가는데 남자의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용없어. 이젠 다 끝났어.” 얼마 전에는 구내에서 지율스님도 만났다. 4대강에 관련된 소송에서 이겼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오신 것 같다. 나에게 법정 경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군대 있을 때 ..

길위의단상 2011.07.13

한 장의 사진(15)

내 교직생활 35년 동안 담임을 한 시기는 7년에 불과했다. 매우 특이한 경우다. 아마 교사들 대부분이 경력의 8할 정도는 담임을 맡으며 보냈을 것이다. 서른을 갓 넘겼을 때 학교에 과학주임이라는 자리가 새로 생겼는데 운 좋게(?)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당시는 한번 주임으로 임명되면 전근 갈 때에도 보직을 유지한 채로 이동했다. 그러니 이른 나이부터 담임을 안 하게 된 것이다. 40대에 들어 고등학교로 올라와서 보직을 벗었지만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담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강남에 있는 소위 명문이라는 K 고등학교에 있었을 때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서로 담임을 하려고 교사들 간에 경쟁이 붙었다. 특히 고3 담임을 하려면 교장한테 특별한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아무리 무능한 ..

길위의단상 2011.03.19

한 장의 사진(14)

추석 차례를 지낸 날 밤, 돌아가신 아버님 꿈을 꾸었다. 휠체어에 앉으신 아버님은 의기소침한 채 기력이 없으셨다. 꿈 내용은 이랬다. 어머니와 내가 집에 새 냉장고를 들여놓았는데 아버지와는 상의를 하지 않았다. 무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마음을 서운하게 한 것 같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에 변화가 없으셨고 알았다, 라고만 하시고 고개를 돌리셨다. 무척 쓸쓸한 표정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꿈에서 늘 처량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지금은꿈이 뜸하지만 여러 해 전에는 아버지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대동소이했다. 비를 흠뻑 맞고 후줄그레한 모습을 보이시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이셨다. 행방불명된 꿈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힘들어하시..

길위의단상 2010.09.25

한 장의 사진(13)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에 찍는 사진이 돌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의례 ‘돐記念’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사진기가 귀했던 그 시절에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읍내에 있는 사진관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이는 행복했다. 입에 풀칠하기에도 빠듯하던 50년대의 시골에서 돌을 기념하며 사진을 박을 수 있는 집은 드물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우리 집에서도 다섯 형제 중 돌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장남인 나와 막내뿐이다. 아버님으로부터 가장 귀여움을 받았던 막내의 돌잔치 때는 사진사가 집으로 초대되었다. 벽에 펼친 이불을 배경으로 동생을 앉혔는데 자꾸 쓰러지는 몸을 세우느라 힘들게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먼저 태어난 형이 죽은 뒤 얻은 자식..

길위의단상 2009.08.19

한 장의 사진(12)

다음 달부터 기여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33 년의 의무 납부기한을 이번 달로 다 채운 것이다. 1975년에 첫 발령을 받고 교직에 들어선 이래 꼭 33 년이 지났는데, 이런 매듭을 만나게 되면 더욱 지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33 년의 의미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있었던 자리가 어디였고 지금의 자리가 어딘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옛 앨범에서 33 년 전의 내 모습을 보았다. 갓 스물세 살로 Y여중에 부임했을 때의 사진이다. 막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일과가 끝나면 운동장 한 편에 있던 테니스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사진을 같이..

길위의단상 2008.11.25

한 장의 사진(11)

내가 클 때는 피서라든가 가족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여름이면 하루를 잡아 가족이 함께 인근의 희방계곡으로 소풍을 나갔다. 희방폭포 아래에 있는 계곡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했다. 부모님과 외할머니, 그리고 다섯 형제들이 하루를 놀다가 돌아왔다. 이런 가족 나들이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마 외지에 나가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아버님이 베풀어주신 특별한 이벤트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시골 마을의 다른 집에서는 이런 가족 나들이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희방폭포 앞에서 동생들과 찍은 것이다. 모습을 볼 때 막내만 아직 입학 전이었고, 나머지 동생들은 초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인 나는..

길위의단상 2008.08.08

한 장의 사진(10)

1960년대에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부터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 체제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읍내에는 중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그 중에서도 Y 중학에 들어가는 목표였다. 산골 초등학교에서 거기에 입학하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도 일부 아이들은 남아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과외를 받았다. 옛날 시골에 학원이 있었을리 만무하니 가르쳐줄 유일한 사람이 담임선생님이었다. 장소는 학교 숙직실이거나 선생님 집이었다. 선생님께 드리는 보수도 없었으니 선생님은 무료 봉사로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치셨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특별 과외를 받았던 친구들은 담임선생님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자신이 담임하던..

길위의단상 2008.04.28

한 장의 사진(9)

한창 때였던 스물에서부터 삼십대 초반까지를 나는 서울 면목동에서 살았다. 당시는 동네가 전부 단독주택이었고, 용마산에는 채석장이 있어 가끔 돌 깨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옆의 중랑천에는 건너편 청량리 지역으로 건너가는 거룻배가 다녔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 정도로 면목동도 많이 변했다. 당시에 면목동 집으로 자주 놀러왔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였으나 대학교에 들어가서 또 다른 친구가 매개가 되어서 셋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성격이 내성적이었던 이 친구는 공부만은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 70년대의 정치상황이 공부에만 매달릴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친구는 그것 아니면 길이 없다는 듯 오직 공부만 파고들었다. 취미..

길위의단상 2007.11.27

한 장의 사진(8)

31년 전 이맘때에 나는 증평훈련소에 입소하여 대한민국 육군 사병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해를 넘긴 뒤의 입대라 다른 사람에 비해 서너 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행동까지 굼떠 고생을 많이 했다. 비인간적인 기합을 받으며 내 일생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던 것도 그때였다. 계급 차이를 이용해 사람을 모욕하고 인격을 파괴하는데 쾌감을 느끼는 무리가 그 안에는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사병 훈련은 인간의 자존감을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절대 복종하는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황당했던 경험은 훈련소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나는 머리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고 구내 이발소에 가게 되었다. 군대 이발소 분위기가 살벌한 것은 당연했지만, ..

길위의단상 2007.08.24

한 장의 사진(7)

지난 해에 첫째가 대학을 졸업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혹독한 통과 의례를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에서 세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다른 모든 가정이 그러하듯 저 미소 뒤에는 많은 고뇌와 인내가있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살인적인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부를 잘 하는 쪽이나 못 하는 쪽이나 다 마찬가지다. 첫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나는 한국 교육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단순히 우리 아이 성적을 어떻게 올리고 좋은 대학에 집어넣느냐는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아이를 제대로 기르고내 처신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였다. 당시의 나에게 한국의 교육은 악의 제..

길위의단상 2007.01.26

한 장의 사진(6)

아버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선 엄하고 무섭다는 것이다. 내 기억창고에는 대부분 이처럼 부정적인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 고맙고 좋았던 일도 많았을 텐데 왜 그런 것들은 지워지고 아픈 이미지들만 남아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자식 사랑이 유별하셨다는데 장남인 나에게는 늘 엄한 아버지로 각인되어 있다. 십 년 아래인 막내는 아버지의 사랑을 귀찮을 정도로 듬뿍 받고 자랐다. 약주라도 드시고 퇴근하신 날이면 막내는 도망가고 아버지는 쫓아다니는 숨바꼭질을 즐기셨다. 그런 것이 우리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기대가 엄청나게 높으셨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 내 책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날 저녁 집 분위기는 냉동고로 변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

길위의단상 2006.08.18